5월 19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둔스타노, 아우구스티노 노벨로, 알퀴노, 이보 헬로리, 첼레스티노 5세, 치릴로, 칼로체로, 크리스피노, 테오필로, 파르테니오, 푸덴스, 필로테로, 하둘포, 총 13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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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1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3가지
5월 19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둔스타노
- 가톨릭 성인 이름
Dunst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대주교, 수도승 - 활동 연도와 지역
909년경-988년 캔터베리
둔스타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던스탄, 던스턴, 둔스타누스.
둔스타노 자료
성 둔스타누스(Dunstanus, 또는 둔스타노)는 909년경 영국 잉글랜드 글래스턴베리(Glastonbury)의 발튼스보로(Baltonsborough)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폐허가 된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을 재건하던 아일랜드계 수도자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 중병 또는 사고로 죽을 위험을 처했으나 기적적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예술, 수공예 등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청년이 되어 애설스탠(Athelstan, 924~939년 재위) 왕의 부름을 받고 궁정에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의 인정을 받았는데, 동시에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그는 동료들의 모함으로 궁정을 떠나야 했고, 그 과정에서 적대자들에게 심한 물리적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는 윈체스터(Winchester)로 가서 그곳의 주교이자 삼촌인 성 알페기우스(Alphegius, 3월 12일)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성 알페기우스 주교는 조카가 수도승이 되기를 바랐지만, 성 둔스타누스는 독신 생활에 대한 확신이 아직 없었다. 그러던 중 온몸의 피부가 부어오르는 심각한 병에 걸렸는데, 아마도 궁정에서 떠나올 때 반대자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오염된 구덩이에 빠지면서 감염된 결과로 생각되었다.
다행히도 병에서 치유된 후 그는 수도승이 되려는 마음을 굳히게 되었고, 934년경 베네딕토회에 들어가 수도승이 되었다. 그리고 939년에 성 알페기우스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은수자로 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성 둔스타누스는 어린 시절 다녔던 오래된 성모 마리아 성당 맞은편에 작은 은둔소를 짓고 은수 생활을 시작하며 학문과 예술 연구에도 힘썼다.
애설스탠 왕이 죽은 후 그의 동생 에드먼드 1세(Edmund I)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는 성 둔스타누스를 체다(Cheddar)에 있는 자신의 궁정으로 불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왕의 호의를 시기한 신하들의 음모에 말려 궁정을 떠나야 했다. 국왕은 943년에 그를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면서 수도원 재건과 개혁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원장이 된 성 둔스타누스는 즉시 베네딕토회의 정신에 기초해 수도원 개혁 작업에 착수했고, 수도원 재건과 함께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을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일련의 이러한 작업은 다른 많은 수도원을 활성화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946년 에드먼드 1세 국왕이 뜻밖에 살해되자 성 둔스타누스는 왕의 동생인 에드레드(Edred)가 왕좌로 나아가는데 자문관이 되었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모든 수도원을 대상으로 원대한 개혁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또한 세속적인 정치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면서 색슨족의 부도덕성을 들추어냄으로써 색슨 귀족들의 미움을 받기도 했고, 데인인(Danes)과의 평화 정착에도 이바지하였다.
그런데 955년 국왕 에드레드가 사망한 후 그의 조카이자 에드먼드 1세 왕의 장남인 에드위그(Eadwig)가 국왕직을 계승하면서부터 에드위그 왕은 성 둔스타누스의 가장 큰 적이 되었다. 새 국왕은 성 둔스타누스의 모든 재산을 압류하고 그를 왕국에서 추방하였다.
그래서 잉글랜드를 떠난 성 둔스타누스는 플랑드르(Flandre) 지방의 겐트(Gent)로 피신해 아르눌프 1세 백작의 도움으로 그곳의 수도원에서 지냈다.
957년에 국왕의 동생인 에드가(Edgar)에 의해 에드위그 왕이 축출되면서 성 둔스타누스는 잉글랜드로 되돌아왔고, 곧이어 우스터(Worcester)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그는 런던(London)의 주교가 되었고, 960년에 로마로 가서 교황 요한 12세(Joannes XII)에게 팔리움을 받고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그는 새 국왕인 에드가의 자문관으로서 국가와 교회의 개혁을 시작했다. 그는 성 에텔볼두스(Ethelwoldus, 8월 1일)와 성 오스왈두스(Oswaldus, 2월 28일)와 함께 교회 규율을 쇄신하기 시작했고, 이전에 덴마크 사람들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많은 수도원을 재건하는 데 힘썼다.
성 둔스타누스는 국왕 에드가의 자문관으로 16년 동안 있으면서 그의 잘못을 발견하는 즉시 꾸짖고 진언을 올렸다. 그 후 그는 정계에서 은퇴하여 캔터베리로 돌아왔고 대성당 학교에서 교육에 임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다가 그곳에서 선종해 캔터베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영국 수도원의 재건자였던 성 둔스타누스는 선종 이후 오래지 않아 영국인들에게 성인으로 공경을 받았고, 1029년에 공식적으로 시성되었다. 그는 또한 유명한 음악가로서 하프를 연주하거나 찬미가를 작곡하기도 했고 숙련된 금속 공예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갑옷 제조자, 금세공인, 은세공인, 자물쇠 제조자 및 보석 공예가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교회 미술에서 그는 보통 주교 복장을 하고 금속 공예를 위한 도구들과 함께 표현된다. 또한 성직자가 되기 전 대장간에서 일하던 때에 발에 편자를 박아달라는 악마를 알아보고 그를 물리친 전설적 이야기로 그려지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아우구스티노 노벨로
- 가톨릭 성인 이름
Augustine Novello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총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309년
아우구스티노 노벨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노 노벨로 자료
이탈리아 시칠리아(Sicilia) 섬의 타오르미나(Taormina)에서 태어난 마태오(Matthaeus)는 볼로냐(Bologna)에서 수학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법률을 가르치는 등 화려한 경력의 소지자였다. 그는 시칠리아의 국왕 만프레드(Manfred)의 수상이 되었으나 베네벤토(Benevento)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이때 한 수도자가 만일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봉헌한다면 완쾌되리라는 약속을 했는데, 이것이 사실로 나타나자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평수사로 입회하여 아우구스티누스 노벨로(Augustinus Novello, 또는 아우구스티노 노벨로)라는 수도명을 택했다.
후일 교황 니콜라우스 4세(Nicolaus IV)는 그를 교황청의 고해신부로 임명했고,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는 그를 시에나(Siena)의 교황대사로 임명하였다.
1298년 아우구스티누스 노벨로는 수도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지만 2년 뒤에 은퇴하고 자신이 세운 산 레오나르도(San Leonardo) 은둔소에 숨어 여생을 마쳤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59년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승인되었다. 교회미술에서 그는 책을 들고 있고 천사로부터 귓속말을 듣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승으로 표현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알퀴노
- 가톨릭 성인 이름
Alcui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735-804년 요크
알퀴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뀌노, 알뀌누스, 알퀴누스, 알퀸, 앨퀸.
알퀴노 자료
영국의 요크에서 출생한 알퀴누스(Alcuinus, 또는 알퀴노)는 고향의 주교좌성당 학교에서 에드베르투스(Edbertus)의 지도하에 수학하고 부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767년경에 주교좌성당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의 지도하에 이 학교는 학문의 전당으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는 로마(Roma)를 방문한 후 파르마(Parma)에서 샤를대제(Charlemagne)를 만났고, 그의 초청을 받아 781년에 독일 아헨(Aachen)의 궁중에 학교를 세우고 왕의 스승이자 고문이 되었다.
796년에 그는 샤를대제에 의해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그 이후 페리에르, 트루아(Troyes), 코메리(Cormery)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카롤링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를 주도하는 힘이자 정신이었고, 프랑크 왕국의 왕실을 유럽 문화와 학문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는 제국을 통하여 문맹을 퇴치하였고, 초급 교육제도를 신설했으며, 7과목을 배우는 고등 교육제도, 삼학(문법, 수사, 논리)과 사학(산술, 음악, 기하, 천문학)을 근거로 한 교육제도를 만들어 중세 유럽 교육제도의 기반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고문(古文) 사용을 장려했던 알퀴누스는 뛰어난 신학자로서 794년 프랑크푸르트(Frankfurt) 교회회의에서 단죄된 그리스도 양자론(adoptianismus) 이단을 반박하였다. 그는 성경 주해서도 저술하였고 지금도 수사학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요약"(Compendia)의 저자로서 놀라운 언어구사와 함께 수많은 편지들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크게 발전시킨 학교 가운데 하나인 투르의 성 마르티누스에서 사망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이 공식적으로 승인된 바는 없으나 흔히 복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이보 헬로리
- 가톨릭 성인 이름
Ivo Helor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증거자, 법률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253-1303년 케르마르탱
이보 헬로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르완, 이브.
이보 헬로리 자료
성 이보는 1253년 10월 17일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 지방의 케르마르탱에서 그곳의 영주인 아버지 헬로리(Helory)와 귀족 출신의 어머니 아조(Azo)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신심 깊은 부모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그는 1267년에 파리(Paris)로 가서 민법을 공부하고, 이어 1277년에 교회법을 공부하기 위해 오를레앙(Orleans)으로 갔다. 유학 생활 중에 성 이보 헬로리는 늘 ‘성인이 되라’고 가르치셨던 어머니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절제하는 생활을 하며 면학과 기도 생활에 전념했다. 그리고 쉬는 날이면 자주 병원을 방문해 병자들을 돌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브르타뉴로 돌아온 그는 렌(Rennes)과 트레기에(Treguier)의 교회법원과 사회법원의 판사로 임명되었다. 늘 공정한 판결을 내리고자 애썼던 성 이보 헬로리는 특별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보호하고 그들에게 공평한 판결과 기회를 주고자 힘썼다.
그는 관행처럼 주어지던 선물과 뇌물을 거부하고, 가난한 이들이 부탁한 사건은 무료로 처리할 뿐 아니라 필요한 비용까지도 스스로 부담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이들의 보호자요 변호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신학과 성경과 공부한 성 이보 헬로리는 1284년에 사제품을 받고 트레기에 주교의 비서로 불림을 받아 열정적으로 주어진 일들을 처리하며 왕의 부당한 세금 부과에 항의하며 국가로부터 교회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힘썼다. 이즈음에 그가 작은 형제회의 제3회에 입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듬해에 그는 트레드레즈(Tredrez)의 작은 본당으로 발령받아 8년 동안 사목한 후 다시 루아넥(Louannec)의 본당으로 가서 선종할 때까지 사목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본당 사목을 하면서도 자신의 전공을 살려 가난한 이들의 권익을 돕는데 힘썼고, 루아넥에는 구호소를 세워 병든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설교 능력 또한 비범했던 성 이보 헬로리는 일생 엄격하고 청빈한 삶을 살다가 1303년 5월 19일 주님 승천 대축일 전야 미사 강론을 마친 후 선종하였다. 그는 1347년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법률가와 가난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이보 헬로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은 돈을 상징하는 지갑이나 그들의 탄원이 적힌 두루마리나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또한 성직자의 옷보다는 주로 학자나 판사의 모자를 쓴 모습으로 주로 등장하고, 가난한 사람과 부자 사이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도 자주 등장한다. 그는 이브(Yves) 또는 이보(Yvo)로도 불리는데, 브르타뉴에서는 에르완 헬로리(Erwan Helouri)라고도 부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첼레스티노 5세
- 가톨릭 성인 이름
Celestine V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09/10-1296년경
첼레스티노 5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셀레스틴, 첼레스띠노, 첼레스띠누스, 첼레스티누스, 켈레스티노, 켈레스티누스, 코일레스티노, 코일레스티누스.
첼레스티노 5세 자료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5세(Coelestinus V, 또는 첼레스티노 5세)는 이탈리아 중부 몰리세(Molise)의 산탄젤로 리모사노(Sant’Angelo Limosano)라는 마을에서 소작농인 안젤로 안젤레리오(Angelo Angelerio)와 마리아 레오네(Maria Leone)의 아들로 태어나 피에트로(Pietro)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그는 어린 나이에 이미 들에 나가 일했지만, 그의 영성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 어머니는 그가 단지 농부나 양치기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17살 때 몬타가노(Montagano) 인근 파이폴리(Faifoli)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입회해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더욱 고적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동경해 1231년경 아브루치(Abruzzi) 광야에서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제가 되기 위해 자신의 움막을 떠나 1234년경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몇 년 동안 술모나(Sulmona)의 모로네(Morrone) 산에 있는 한 동굴에 머물면서 피에트로 다 모로네(Pietro da Morrone)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은수 생활을 원하는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그들을 지도하다가, 몰려드는 군중들을 피해 1245년경 제자들과 함께 접근이 더 어려운 마이엘라(Maiella) 산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생활했다. 하지만 그는 제자들이 계속 늘어남에 따라 처음에 만들었던 모로네 산의 공동체, 이미 당시에 수도원을 발전한 곳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그는 매우 엄격한 규칙을 적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설립하고 훗날 그의 이름을 따서 첼레스티누스회로 불리게 된 은수자 공동체는 1264년 교황 우르바누스 4세(Urbanus IV)에 의해 인가되었고, 교황 복자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 1월 10일) 때 성 베네딕투스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교황 니콜라우스 4세(Nicolaus IV, 1288~1292년 재위)의 선종 후 정치적 알력 때문에 2년간의 교황직 공백 기간이 발생했을 때, 이미 80에 가까운 고령의 은수자인 그는 교황 선출을 위해 페루자(Perugia)에 모인 추기경들에게 위협적인 언사로 새 교황을 즉각 선출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추기경들은 당시 고령에다 병든 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더 오래 교황직을 공석으로 둘 수 없어서 그는 선거 결과를 받아들였고, 주교품을 받고 이틀 후인 1294년 8월 29일 아브루초(Abruzzo) 지방 아퀼라(Aquila)의 산타 마리아 디 콜레마지오(Santa Maria di Collemaggio) 성당에서 코일레스티누스 5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올라 혼란하던 교회의 방향을 바로 잡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행정 실무 경험이 전혀 없던 성 코일레스티누스 5세는 주어진 직무를 수행하기에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무능함과 건강상의 이유로 그는 더는 교황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베네데토 카에타니(Benedetto Caetani) 추기경과 상의한 후 교황에게 스스로 물러날 권리가 있다는 마지막 교령을 발표하고 재임 5개월여만인 1294년 12월 13일 교황직을 사임했다. 그는 스스로 교황직을 사임하고 자신의 수도원을 되돌아간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베네데토 카에타니 추기경은 성 코일레스티누스 5세를 승계하여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올랐다. 그런데 선임자의 높은 인기가 수많은 지지자를 만들어 그를 복위시키려는 운동이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자 후임 교황은 성 코일레스티누스 5세를 아나니(Anagni) 근교의 푸모네(Fumone) 성(城)에 감금했다.
예전의 은수 생활로 돌아가고자 했던 성 코일레스티누스 5세는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푸모네 성에서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채 첼레스티누스회의 두 수사와 함께 생활하다가 1296년 5월 19일 종기로 인한 감염으로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우선 페렌티노(Ferentino)에 묻혔다가, 1317년에 그가 교황으로 즉위했던 산타 마리아 디 콜레마지오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그는 1313년 5월 5일 교황 클레멘스 5세(Clemens V)에 의해 증거자로서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치릴로
- 가톨릭 성인 이름
Cyri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세기 트리어
치릴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치릴로 자료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 주교의 유해는 독일 트리어에 있는 성 마티아(Matthias) 수도원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칼로체로
- 가톨릭 성인 이름
Caloce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궁중시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칼로체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갈로체로, 갈로체루스, 칼로체루스, 칼로케로, 칼로케루스.
칼로체로 자료
교회가 같은 날에 합당한 공경을 드리고 있는 성 칼로케루스(또는 칼로체로)와 성 파르테니우스(Parthenius)는 형제지간이다. 그들은 데키우스 황제의 아내인 트리포니아(Tryphonia)의 궁에서 침실 경호 책임자 및 시종으로 있다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해야할 궁지에 몰리자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 당시에 신자를 가려내는 방법으로 사용되던 것은 신전에 희생 제물을 바치게 하고 이를 거절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되어 즉시 처형하였다.
그들은 원래 아르메니아인들로서 아이밀리아누스(Aemilianus)라는 영사와 함께 이곳으로 왔다가 그들의 후원자가 죽게 되어 궁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들은 불 속에 던져졌으나 타지 않았기 때문에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목을 베었다고 전해온다. 그들의 시신은 아나톨리아(Anatolia)에 의해 성 칼리스투스(Callistus) 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크리스피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rispi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668-1750년 비테르보
크리스피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크리스삐노, 크리스삐누스, 크리스피누스, 크리스핀.
크리스피노 자료
이탈리아 라치오(Lazio) 지방의 비테르보 태생인 피에트로 피오레티(Pietro Fioretti)는 어려서부터 성모님을 특별히 공경하였다. 그는 삼촌의 지도하에 견습 제화공으로 있던 중 수도생활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꼈다.
그는 25세 때까지 구두 수선하는 일을 하다가 1693년 오르비에토(Orvieto)에서 카푸친회에 입회하여 크리스피누스(Crispinus, 또는 크리스피노)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성 크리스피누스는 수도원의 천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비테르보에서는 정원사, 톨파(Tolfa)에서는 주방 요리사로서 봉사했다. 톨파와 브라치아노(Bracciano)에서 유행병이 돌 때에는 그의 주위에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는 요르비토에서 재무를 담당하였는데, 사실 이런 일보다는 그의 기적과 예언 그리고 지혜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는 1750년 5월 19일 병든 몸으로 휴양 중이던 로마(Roma)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1806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2년 6월 2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재임 기간 중 처음으로 시성식을 집전하면서 교황은 그에 대해 “단순하게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지상 순례의 참된 가치를 이해한 아무 경력도 없는 겸손한 형제”라고 칭송하였다. 그의 축일은 지역에 따라 5월 21일 또는 23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테오필로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phi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740년 코르테
테오필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떼오필로, 떼오필루스, 테오필루스.
테오필로 자료
성 테오필루스(또는 테오필로)는 이탈리아 서쪽 프랑스 남부에 있는 코르시카(Corsica) 섬의 작은 마을인 코르테에서 태어났고 본래의 이름은 비아지오 아리기(Biagio Arrighi)였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깊은 신심을 길렀는데, 주일이면 성당에서 들은 강론을 집에서 되풀이 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15세의 나이로 카푸친회에 입회 신청을 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다가 2년 뒤인 1693년에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면서 테오필루스(하느님의 벗이라는 뜻)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로마(Roma)와 나폴리(Napoli)에서 사제 수업을 마치고 1700년에 사제가 되었다. 1705년 그는 선교 사제로 임명되면서부터 놀라운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는 참으로 설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작은 형제회 내부의 개혁과 쇄신을 위해서도 열성을 갖고 활동하였다. 그는 푸체치오(Fucecchio)에서 선종하였고,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파르테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arthen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궁중시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파르테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파르떼니오, 파르떼니우스, 파르테니우스.
파르테니오 자료
교회가 같은 날에 합당한 공경을 드리고 있는 성 칼로케루스(Calocerus)와 성 파르테니우스(또는 파르테니오)는 형제지간이다.
그들은 데키우스 황제의 아내인 트리포니아(Tryphonia)의 궁에서 침실 경호 책임자 및 시종으로 있다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해야할 궁지에 몰리자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 당시에 신자를 가려내는 방법으로 사용되던 것은 신전에 희생 제물을 바치게 하고 이를 거절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되어 즉시 처형하였다.
그들은 원래 아르메니아인들로서 아이밀리아누스(Aemilianus)라는 영사와 함께 이곳으로 왔다가 그들의 후원자가 죽게 되어 궁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들은 불 속에 던져졌으나 타지 않았기 때문에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목을 베었다고 전해온다. 그들의 시신은 아나톨리아(Anatolia)에 의해 성 칼리스투스(Callistus) 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푸덴스
- 가톨릭 성인 이름
Puden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원로원 의원, 사도들의 제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로마
푸덴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뿌덴스.
푸덴스 자료
성녀 프락세데스(Praxedes, 7월 21일)는 로마 사람으로 원로원 의원인 성 푸덴스의 딸이며 성녀 푸덴티아나(Pudentiana, 5월 19일)와는 자매간이다. 그들은 모두 사도 성 베드로(Petrus, 6월 29일)에 의해 개종한 것으로 전해진다.
성 푸덴스는 티모테오 2서 4장 21절에 언급된 푸덴스와 같은 인물로 믿어지며,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의 성사록에 그의 축일이 언급되어 있다.
황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그리스도인들을 사냥할 때 성녀 푸덴티아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돈이나 다른 방법으로 구출했는데, 마침 성녀 프락세데스도 그녀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성녀 푸덴티아나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하자고 권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성녀 프락세데스와 그녀의 아버지 성 푸덴스(Pudens) 그리고 성녀 푸덴티아나는 순교하여 살라리아(Salaria) 가도의 프리스킬라(Priscilla)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 성녀 푸덴시아나는 포텐시아나(Potentiana)라고도 알려져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필로테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hilote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니코메디아
필로테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필로떼로, 필로떼루스, 필로테루스.
필로테로 자료
니코메디아의 귀족인 성 필로테루스(또는 필로테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니코메디아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행전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다지 신뢰할만한 것은 아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하둘포
- 가톨릭 성인 이름
Hadulp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728년경 아라스
하둘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하둘뽀, 하둘뿌스, 하둘푸스.
하둘포 자료
성 하둘푸스(Hadulphus, 또는 하둘포)는 프랑스의 베네딕토회 생 바스트(Saint-Vaast) 수도원의 원장직과 아라스-캉브레(Arras-Cambrai) 교구의 주교직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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