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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오 남자세례명 17인 목록

피어나네 2023. 5. 2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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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세례명 니콜라오는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니콜라오 17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니콜라오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니콜라오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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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오
천주교 남자세례명
17인 목록

 

 

 

 

니콜라오 남자세례명 목록

 

  1. 니콜라오 스투디테스 (2월 4일)

  2. 니콜라오 팔레아 (2월 14일)

  3. 니콜라오 데 플뤼에 (3월 21일)

  4. 니콜라오 오언 (3월 22일)

  5. 니콜라오 알베르가토 (5월 9일)

  6. 니콜라오 (5월 15일)

  7. 니콜라오 (6월 2일)

  8. 니콜라오 얀센 포펠 (7월 9일)

  9. 니콜라오 피크 (7월 9일)

  10. 니콜라오 (7월 24일)

  11. 니콜라오 (9월 10일)

  12. 니콜라오 (10월 1일)

  13. 니콜라오 (10월 10일)

  14. 니콜라오 1세 (11월 13일)

  15. 니콜라오 타벨릭 (11월 14일)

  16. 니콜라오 (12월 6일)

  17. 니콜라오 팍토르 (12월 23일)

 

니콜라오 천주교 남자세례명 17인 목록

 

 

1. 니콜라오 스투디테스

 

  • 세례명 축일
    2월 4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Studites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793-863년

 

 

니콜라오 스투디테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니콜라오 스투디테스 이야기

크레타(Creta) 섬의 시도니아(Sydonia) 출신인 성 니콜라우스 스투디테스(Nicolaus Studites, 또는 니콜라오 스투디테스)는 열 살 때부터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스투디우스(Studius) 수도원에서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11월 11일)의 제자로서 교육을 받았고, 18세에 그곳의 수도자가 되었다.

황제 테오필루스가 성상공경 문제로 박해를 일으켰을 때에는 잠시 유배생활을 하였으나, 842년에 그 황제가 사망하자 귀향하여 원장이 되었다.

또 858년에 황제 미카엘 3세가 성 이냐시오(Ignatius, 10월 23일) 주교를 유배시키고 포티우스(Photius)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임명하자, 그는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하여 자발적으로 유배의 길을 떠났던 인물이다. 몇 년 후 수도원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즉시 투옥되었다가 스투디우스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니콜라오 팔레아

 

  • 세례명 축일
    2월 14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Palea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255년

 

 

니콜라오 팔레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니콜라오 팔레아 이야기

이탈리아 바리(Bari) 인근 지오비나조(Giovinazzo)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니콜라우스 팔레아(Nicolaus Palea, 또는 니콜라오 팔레아)는 볼로냐(Bologna)에서 공부를 하던 중에 우연히 성 도미니코(Dominicus, 8월 8일)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그는 성인의 강론을 너무도 감명 깊게 들었기 때문에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기를 간청하였다.

귀족 출신으로 고향에 영지까지 갖고 있던 그는 자신의 유산으로 페루자(Perugia)에 도미니코회 수도원을 지었고, 트라니(Trani)에도 또 다른 수도원을 세웠다. 한때 그는 로마(Roma) 관구의 관구장까지 역임하였다.

제라르 드 프라셋은 그를 일컬어 ‘거룩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였다. 페루자에서 선종한 그에 대한 공경은 1828년 교황 레오 12세(Leo XII)에 의해 승인되었다. 교회미술에서 그는 자작나무와 책을 들고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자로 표현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니콜라오 데 플뤼에

 

  • 세례명 축일
    3월 2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de Flue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17-1487년

 

 

니콜라오 데 플뤼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니콜라오 데 플뤼에 이야기

스위스의 옵발덴 칸톤 삭셀른 교외의 비옥한 평야에 위치한 플뤼얼리 태생인 성 니콜라우스 데 플뤼에(Nicolaus von Flue, 또는 니콜라오)는 도로테아 비스와 결혼하여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고, 5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1439년의 취리히 전쟁에서 주민들과 합세하여 싸웠고, 1453년의 전쟁에서는 대장으로 싸웠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공직자가 되는 것을 꺼렸다.

1467년 그의 나이 50세에 때에, 그는 아내와 자녀들의 동의를 얻어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고향 근교인 란프트 움막에서 9년 동안을 지냈다. 이때부터 그는 성덕과 지혜로 명성이 드높았고, 주민들과 지도자들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481년의 스위스 연방을 확립할 때 프리부르와 솔레르의 합병에도 큰 공을 세웠고, 부르고뉴(Bourgogne)의 찰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도 한 몫을 하였다. 그는 스위스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수도자의 상을 정립하였고, ‘클라우스 수도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1487년 3월 21일 자신의 움막이 있던 란프트에서 선종하였고, 1947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시성되었다. 그는 스위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고, 스위스와 독일에서는 그의 축일을 9월 25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니콜라오 오언

 

  • 세례명 축일
    3월 2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Owen

  • 신분과 직업
    수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0?/62?-1606년 영국

 

 

니콜라오 오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오웬.

 

 

니콜라오 오언 이야기

성 니콜라우스 오언(Nicolaus Owen, 또는 니콜라오 오언)은 1550년경 또는 1562년경 영국 잉글랜드 옥스퍼드(Oxford)의 열심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영국 정부는 가톨릭의 모든 종교의식을 불법화하고 가톨릭 신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페널 법’(Penal Laws)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형제 중 두 명은 사제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비밀리에 가톨릭 관련 인쇄물을 출판하는 인쇄공으로 일했다. 그의 아버지 월터 오웬(Walter Owen)은 목수였는데, 그래서 성 니콜라우스 오언은 아버지를 도와 목수와 석공으로 일하며 나중에 은신처(Priest Hole)를 짓는데 필요한 기술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었다.

그는 1580년에서 1581년 사이에 성 에드문두스 캠피언(Edmundus Campion, 12월 1일)의 조수로 일하면서 예수회와 인연을 맺은 것 같다. 그는 성 에드문두스 캠피언이 순교한 후 그의 결백을 주장하다가 1582년에 잠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587년경 당시 영국 예수회의 책임자였던 헨리 가넷(Henry Garnet) 신부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출판물을 인쇄하기 위해 비밀리에 출판사를 설립하면서 성 니콜라우스 오언을 소개받았다.

그는 헨리 가넷 신부의 조수로 일하면서 사제와 평신도들을 위한 은신처를 고안하고 만드는 일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는 낮에는 평범한 목수로 일하다가 밤이 되면 집안에 은신처를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보안을 위해 늘 혼자 일했기 때문에 그가 만든 은신처의 위치나 수는 집주인과 그 외에는 알지 못했다.

그는 헨리 가넷 신부와 오랫동안 일하면서 예수회의 평수사로 입회한 듯하다. 공식적인 수련기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헨리 가젯 신부에게 개인적으로 수련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1594년 4월 23일 예수회의 요한 제라드(Joannes Gerard) 신부를 돕다가 함께 체포되어 런던의 포울트리(Poultry)에 있는 작은 감옥에 갇혀 고문과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아무런 혐의도 찾아내지 못하고 몇몇 사제들과 단순히 아는 정도로 여겨져 부유한 가톨릭 신자가 대신 벌금을 내줘 석방될 수 있었다.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1605년 ‘화약 음모 사건’(Gunpowder Plot)이 발생했다. 일단의 가톨릭 신자들이 11월 5일 의회 개원일에 맞춰 의사당 지하실에 화약을 묻어 놓아 국왕 제임스 1세(James I)를 암살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로 그치고 모두 처형당한 사건이었다.

그로 인해 가톨릭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강화되었고, 특별히 예수회를 증오했던 정부는 예수회의 연루 가능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성 니콜라우스 오언은 자신이 만든 은신처에 자신이 숨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1605년 11월 24일, 그는 헨리 가넷 신부와 함께 복자 에드워드 올드콘(Edward Oldcorne, 4월 7일) 신부가 있는 잉글랜드 서부 우스터셔(Worcestershire)로 은신처를 옮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606년 1월 20일 한 배신자의 밀고로 군인들이 들이닥쳤고, 23일 은신처에서 나온 그와 다른 한 명은 두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이 사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군인 중에 가톨릭 사제를 구분할 수 있는 자가 있어 수색을 계속해 27일 두 신부 역시 체포되었다.

성 니콜라우스 오언은 우스터를 거쳐 악명 높은 런던의 마셜시(Marshalsea) 감옥에 갇혔다가 런던탑으로 이송되었다. 잉글랜드 정부는 그동안 성 니콜라우스 오언이 했던 일을 알고는 영국 내에 그가 만든 은신처의 위치와 개수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잔인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러나 그는 신부들의 존재나 은신처의 위치 등 그 어떤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단단한 렉(Topcliffe rack)에 매달려 사지가 뒤틀리는 고문을 받아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등 극심한 고통을 겪은 후 숨을 거두었다.

고문 집행관은 자신의 잔혹함을 덮기 위해 그가 자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그가 감옥에 고문 끝에 순교한 날은 1606년 3월 1일 또는 2일(일부 자료는 11월 12일로 기록하고 있다.)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의 축일은 3월 22일에 기념해 왔다.

성 니콜라우스 오언은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으로 3월 22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니콜라오 알베르가토

 

  • 세례명 축일
    5월 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Albergatus

  • 신분과 직업
    추기경

  • 활동 연도와 지역
    +1443년

 

 

니콜라오 알베르가토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알베르가투스, 알베르가티.

 

 

니콜라오 알베르가토 이야기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의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난 성 니콜라우스 알베르가투스(Nicolaus Albergatus, 또는 니콜라오 알베르가토)는 법률을 공부하던 중 20세의 나이로 카르투지오회에 입회하였다. 탁월한 그의 능력이 너무나 돋보였으므로 그는 여러 수도원의 장상을 역임하였으나 항상 단순한 집에서 살았고, 또 그의 수도원은 가난한 사람의 거처와 다름없이 꾸몄다고 한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는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외교 사명을 맡긴 일이 있다. 1426년 그는 마침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그는 흔히 ‘평화의 천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것은 그의 외교 수완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페라라(Ferrara) 공의회와 피렌체(Firenze) 공의회의 개회를 맡았고, 그리스와의 화해를 모색한 공로 역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보호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회를 방문하던 중에 시에나(Siena)에서 서거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44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니콜라오

 

  • 세례명 축일
    5월 15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925년 콘스탄티노플

 

 

니콜라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니콜라오 이야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는 동방교회에서 법으로 금한 네 번째 혼인을 하려는 레오 6세 황제의 결혼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아 황제에 의해 해임된 후 추방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니콜라오

 

  • 세례명 축일
    6월 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 신분과 직업
    순례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94년

 

 

니콜라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페레그리노, 페레그리누스, 펠레그리노, 펠레그리누스.

 

 

니콜라오 이야기

성 니콜라우스 페레그리누스(Nicolaus Peregrinus, 또는 니콜라오 페레그리노)의 생애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열심하고 단순한 마음을 지닌 그리스 사람이며, 이탈리아에서 이방인처럼 방랑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얼마 동안은 이탈리아 남동부 오트란토(Otranto)에 정착했지만, 곧 아폴리아 전역을 방랑하다가 병이 들어 트라니(Trani)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키리에 엘레이손’(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을 외치며 다녔다. 그는 가끔 사과나 혹은 어린이들이 좋아할 물건들을 들고 다니면서 아이들이 모이면 함께 찬미가를 노래했다. 또 가끔은 미친 사람으로 몰려 곤욕을 치루기도 했으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그의 높은 덕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치유의 기적으로 지금도 순례자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성 니콜라우스 순례자 또는 성 니콜라우스 펠레그리누스(Nicolaus Pellegrinus, 또는 니콜라오 펠레그리노)로도 불리는 그는 1098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니콜라오 얀센 포펠

 

  • 세례명 축일
    7월 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Janssen Poppel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32-1572년 고르쿰

 

 

니콜라오 얀센 포펠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얀선, 얀젠.

 

 

니콜라오 얀센 포펠 이야기

1527년 네덜란드 남부 스헤르토헨보스(s-Hertogenbosch)에서 태어난 성 레오나르두스 베첼(Leonardus van Vechel)은 루뱅(Louvain)에서 수학하고 교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1556년부터 고르쿰의 본당 사제로 사목했다. 그는 1572년 칼뱅파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고르쿰을 점령했을 때 폭도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때 1532년에 태어난 작은 형제회의 신학자로서 고르쿰에서 성 레오나르두스 베첼의 보좌로 활동하던 성 니콜라우스 얀센 포펠(Nicolaus Janssen Poppel, 또는 니콜라오 얀센 포펠) 신부도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덴 브리엘(Den Briel)로 이송되어 이미 폐허가 된 루겐(Ruggen) 수도원에서 다른 17명의 사제, 수도자, 교우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들은 1675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86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와 함께 ‘고르쿰의 순교자’로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니콜라오 피크

 

  • 세례명 축일
    7월 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Pieck

  • 신분과 직업
    신부, 수도원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34-1572년 고르쿰

 

 

니콜라오 피크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니콜라오 피크 이야기

성 니콜라우스 피크(Nicolaus Pieck, 또는 니콜라오 피크)는 1534년 네덜란드의 고르쿰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헤르토헨보스(s-Hertogenbosch)의 대학에서 공부한 후 고향 마을에 있는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1558년 사제품을 받고 주어진 사도직에 최선을 다하던 그는 고르쿰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칼뱅파에 대항하여 설교하며 그들의 개종을 위해 다른 4명의 사제와 함께 힘을 모아 활동했다. 1572년 칼뱅파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 고르쿰 수도원에 있던 수도자들 모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들은 성체 교리와 교황의 수위권을 거부하면 살려준다는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고수했다.

그 결과 성 니콜라우스 피크와 다른 18명의 사제와 수도자가 덴 브리엘(Den Briel)로 이송되어 이미 폐허가 된 루겐(Ruggen) 수도원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성 니콜라우스 피크와 18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675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86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고르쿰의 순교자’로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니콜라오

 

  • 세례명 축일
    7월 24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331-1391년 링쾌핑

 

 

니콜라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니콜라오 이야기

성 니콜라우스 헤르만손(Nicolaus Hermansson, 또는 니콜라오)은 파리(Paris)와 오를레앙(Orleans)에서 대학을 마친 후 사제가 되었고, 그의 첫 부임지는 궁중의 젊은 왕자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그 후 그는 링쾌핑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니콜라우스는 즉시 개혁을 주도하면서 자신의 엄격한 생활을 보여주었다.

비록 스웨덴에서는 어려웠으나 그는 거의 강제적으로 사제의 독신제를 강요했다. 그는 시를 쓰기도 했는데, 전례에 사용할 수 있는 아름다운 찬미가를 만들거나 작곡하여 중세 교회에서 대중적으로 이용된 곡들이 많았다. 성녀 브리지다의 서거 때, 그는 “로사 로란스 보니타템”이란 유명한 시를 쓰기도 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니콜라오

 

  • 세례명 축일
    9월 1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 신분과 직업
    사제, 은수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45-1305년 톨렌티노

 

 

니콜라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니콜라오 이야기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는 이탈리아 안코나(Ancona) 지방의 산탈젤로(Sant'Angelo)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신심 깊은 신앙인이었으나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성 니콜라우스에게 전구를 청하며 이탈리아 남부 바리(Bari)에 있는 성인의 무덤을 순례한 후 아이를 낳자 그 이름을 니콜라우스라고 정했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하기를 즐기며 성소의 꿈을 키우던 그는, 어느 날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신부님으로부터 “이 세상은 지나가는 곳입니다.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하느님만이 참 행복을 주십니다.”라는 설교를 듣고 크게 감동해 수도자가 될 결심을 했다.

그는 열여덟 살 무렵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하여 1271년 사제품을 받았다. 수도회의 엄격한 규율을 충실히 지키며 살던 그는 사제품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꿈을 꿨는데, 세상을 떠난 수도회의 한 신부님이 나타나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신과 다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다음 날 수도원장과 꿈 이야기를 나눈 후 연옥 영혼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할 허락을 받았다. 그 후로도 그는 늘 연옥 영혼을 위한 미사와 기도를 잊지 않았고, 이런 이유로 이탈리아 신자들은 위령 성월이 되면 연옥 영혼을 위해 그에게 전구를 청하게 되었다.

1975년 그는 고향에서 멀지 않은 톨렌티노 지역으로 파견되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당시 톨렌티노 지역은 정치적 분쟁이 심해 대다수 주민이 신앙생활보다는 당파싸움에 더 열을 올렸다. 그는 텅 빈 성당에서 기다리기보다는 거리로 나가 설교하며 정열적인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빈민촌, 교도소, 보육원, 병원 등을 찾아다니며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사랑을 베풀었다. 성인이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면 병이 낫는 기적도 일어났다. 많은 이들이 그를 통해 냉담을 풀고 교회로 돌아왔다.

말년에 병으로 고생하던 그는 1305년 9월 10일 톨렌티노에서 선종하며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도 바오로(Paulus)의 말씀을 남겼다.

"나는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1446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니콜라오

 

  • 세례명 축일
    10월 1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 신분과 직업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49년 포르카 팔레나

 

 

니콜라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니콜라오 이야기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는 고향인 이탈리아 중부 아브르초(Abruzzo)에서 교구사제로 봉사하다가 로마(Roma)를 여행했는데, 이때 그는 수도생활에 대한 강한 성소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성 히에로니무스회에 관련되는 회칙으로 은수자회를 설립했는데,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는 피렌체(Firenze)에 있던 폐허화된 어느 수도원을 하사하였다.

그 후 로마로 돌아온 그는 야니쿨룸에 또 다른 공동체를 세웠다. 하느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함이 그의 행업에서 드러났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니콜라오

 

  • 세례명 축일
    10월 1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27년 모로코

 

 

니콜라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니콜라오 이야기

1219년에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에 의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성 베라르두스(Berardus, 1월 16일)와 동료들이 이듬해 모로코에서 순교하는 일이 생겼다. 그들은 작은 형제회의 첫 순교자들이었고, 그들의 순교는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선교 열정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227년, 성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다음 해에 토스카나(Toscana)에서 여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교를 자원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사무엘(Samuel), 성 안젤루스(Angelus), 성 레오(Leo), 성 돔누스(Domnus),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 성 후골리누스(Hugolinus)였다. 그들은 먼저 에스파냐로 가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칼라브리아(Calabria)의 관구장인 성 다니엘(Daniel) 신부를 만났다.

성 다니엘이 이끄는 선교단은 아프리카 북서부의 모로코에 도착해 유럽 상인들이 거주하던 세우타(Ceuta) 근교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그들은 서로 고해성사를 받고 서로의 발을 씻겨주면서 기도로써 밤을 지새우고, 주일 아침에 세우타 시내로 들어가 길거리에 서서 복음을 전하며 무함마드(Muhammad)의 잘못을 지적하는 설교를 시작했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도시에서 그들의 설교는 곧 큰 소란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결국 체포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술탄은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의 남루한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고는 모두 미쳤다고 판단해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무어인들은 감옥에 갇힌 선교사들을 마음대로 놀리고 학대하였다.

한 주일이 지난 다음 주일, 술탄 앞에 선 그들은 자기들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 선교사라고 항변했다. 그러자 무어인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무함마드를 믿으라고 강요하면서 갖은 고문은 자행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 없음을 깨닫고 그들을 세우타 성 밖으로 끌고 가서 참수형으로 처형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상인들에 의해 세우타 교외에 묻혔고, 나중에 에스파냐로 옮겨 모셨다. 성 다니엘과 여섯 동료는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3일에 그들의 축일을 기념했는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로 옮겨 그들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니콜라오 1세

 

  • 세례명 축일
    11월 1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I

  • 신분과 직업
    교황

  • 활동 연도와 지역
    +867년

 

 

니콜라오 1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니콜라오 1세 이야기

로마(Roma)의 귀족 가문 출신인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는 로마의 사제로서 교황 세르기우스 2세(Sergius II)를 도와 교황청에서 일했고, 교황 성 레오 4세(Leo IV, 7월 17일)의 차부제, 교황 베네딕투스 3세(Benedictus III)의 고문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858년 4월 17일 전임 교황 베네딕투스 3세가 선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으로 선출되어 즉시 교황좌에 앉았다. 그는 늘 문제시되어 왔던 결혼의 거룩함과 불가해소성을 역설하였고,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리우스 2세(Lotharius II)의 이혼과 재혼을 불법이라 규탄함으로써 수많은 정치 문제에 말려들게 되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와의 오랜 분쟁, 라벤나(Ravenna)의 요한 대주교와의 대립, 랭스(Reims)의 대주교 힝크마르(Hincmar)의 야심 등으로 인해 그의 재임기간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는 매우 관대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므로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의 정의감은 높은 존경을 받게 하였다. 성 니콜라우스는 ‘대’ 교황이란 칭호를 받는 3명의 교황 중 한 명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니콜라오 타벨릭

 

  • 세례명 축일
    11월 14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Tavelic

  • 신분과 직업
    수사, 선교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91년 예루살렘

 

 

니콜라오 타벨릭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니콜라오 타벨릭 이야기

성 니콜라우스 타벨릭(Nicholaus Tavelic, 또는 니콜라오 타벨릭)은 크로아티아(Croatia) 남서부 달마티아(Dalmatia)의 귀족 가정에서 1340년경에 태어나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그는 보스니아(Bosnia) 부근, 특별히 파테린(Paterine) 이단자들 속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384년 예루살렘 성지 선교에 자원해 동료들과 함께 성지와 순례자들을 돌보는 일을 수행하였다.

1391년 성 니콜라우스 타벨릭은 동료인 성 데오다투스(Deodatus)와 나르본(Narbonne)의 성 베드로(Petrus) 그리고 쿠네오(Cuneo)의 성 스테파누스(Stephanus)와 함께 이슬람교도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같은 해 11월 11일 동료 형제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오마르(Omar) 모스크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였고, 그로 인해 체포되어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고 감금된 뒤 14일에 형장에서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그들은 1970년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지에서 순교한 작은 형제회 회원 중에서 시성된 유일한 경우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니콜라오

 

  • 세례명 축일
    12월 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270?-341년경 미라

 

 

니콜라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니콜라오 이야기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는 오늘날 지중해 연안 터키 남서부 지역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리키아(Lycia) 지방의 항구 도시인 파타라(Patara)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뛰어난 행적으로 인한 전설과 비공식 전기 등을 통해 오래전부터 교회 안팎에서 큰 사랑을 받아왔다.

그는 파타라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막대한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성 니콜라우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활동에 헌신했다. 가난한 이들을 더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 사제가 될 마음을 가질 정도로 그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성 니콜라우스가 사제품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미라(Myra, 오늘날 터키의 뎀레 Demre)의 주교가 선종했다. 후임자를 찾기 위해 주교들이 열심히 기도하자 어느 날 밤,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아침 성당에 맨 먼저 들어오는 ‘니콜라우스’라는 자를 뽑아라.”

다음 날 아침 성당에 기도하러 왔던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주교로 축성되었다. 얼마 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성 니콜라우스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면서 10여 년의 옥고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교회 재건과 이교도들의 개종을 위해 노력했고, 당시 성행하던 아리우스(Arius) 이단에 대항해 제1차 니케아(Nicaea) 공의회(325년)에도 참석했다고 한다. 그는 미라의 주교로서 뛰어난 성덕을 바탕으로 교구 내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 활동에 전념하면서, 동시에 놀라운 기적을 통해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을 구해주었다.

성 니콜라우스의 선행과 기적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로는 어떤 아버지가 가난 때문에 세 딸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해 출가시키지 못하고 사랑하는 딸들을 매춘부로 넘겨야 할 곤경에 처했을 때의 일이다. 이를 안 성 니콜라우스는 그때마다 몰래 창문으로 금이 든 자루를 넣어 주어, 마침내 세 자매가 모두 정당하게 혼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 기근이 든 어느 해에 고약한 푸주한이 아이 셋을 살해한 후 소금에 절여 먹거리로 팔려고 할 때, 성 니콜라우스가 이들 세 어린이를 구해 소생시킨 일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기근으로 굶주리고 있던 어느 해에 식량을 가득 실은 여러 척의 배가 폭풍우에 밀려 미라 해안으로 떠밀려왔다.

이때 성 니콜라우스는 각 배의 선장에게 얼마간의 식량을 기증해 달라고 간청해서 굶주리는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출항 후에 식량을 살펴본 선원들은 그 양이 이전과 비교해서 전혀 줄지 않았음을 발견하고 놀라워했다.

그 외에도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사형에 처한 세 명의 청년을 구해주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에 나타나서 모함을 받아 위기에 처한 고관들을 구해준 일도 있었다. 그리고 물에 빠진 선원들을 여러 번 기적적으로 구해주기도 했다.

이렇듯 성 니콜라우스 주교는 생전에 소외되고 불행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그래서 341년경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명성은 더 멀리 전 서방으로 퍼져나갔고, 그의 전구로 많은 기적도 일어났다.

그의 유해는 원래 그가 주교로 있던 미라에 있었는데, 이 도시가 아랍의 침략을 받자 1087년 5월 9일 이탈리아 상인들이 미라의 주교좌성당에서 이탈리아의 바리(Bari)로 옮겨와 경당을 세우고 그곳에 모셨다. 그러자 많은 이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찾아와 점차 유럽 최대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래서 유해가 이장된 해에 바로 대성당 건축에 들어가 110년간의 건축 기간을 거쳐 1197년 성 니콜라우스 대성당을 완성해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가 축성식을 거행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보통 ‘바리의 성 니콜라우스’로 불리게 되었다. 성 니콜라우스 주교는 그의 행적과 여러 기적으로 인해 어린이와 누명 쓴 죄수, 폭풍우에 갇힌 뱃사람, 항해사, 어부, 여행자 등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성탄절 때 어린이들에게 성 니콜라우스의 자선과 사랑을 기리는 뜻에서 그의 이름으로 선물을 주는 관습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성 니콜라우스는 네덜란드에서는 ‘신터 클레스’(Sinter Claes), 영어권에서는 ‘산타 클로스’(Santa Claus)로 불렸다. 중세 후기 유럽 전역에서 성 니콜라우스의 축일 행사가 성대히 거행되면서, 독일에서 처음으로 성 니콜라우스가 산타클로스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산타클로스의 붉은색 옷도 사실은 주교가 입는 빨간색 복장에서 유래했다. 현대에 와서 성 니콜라우스는 산타클로스로서 대중적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이는 네덜란드계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미국에 정착하면서, 성 니콜라우스 축일에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관습을 소개하고 이를 성탄 전야 행사와 함께하면서부터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성 니콜라우스는 어린이와 가난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 시칠리아, 풀리아(Puglia), 로렌(Lorraine), 러시아 등 여러 지방과 나라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도 성 니콜라우스는 그의 행적이나 기적과 관련해서 보통 주교 지팡이를 들고 주교관을 쓴 채 한 손에 세 개의 황금 구슬이 놓인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세 아이를 소생시키거나 무죄한 세 사람을 구하는 장면, 그리고 기적적으로 선원들을 구하는 모습 또한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주제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니콜라오 팍토르

 

  • 세례명 축일
    12월 2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Factor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520-1583년

 

 

니콜라오 팍토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팍토르.

 

 

니콜라오 팍토르 이야기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의 부친은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살고 결혼하였지만, 사실은 시칠리아(Sicilia) 태생의 양복 기술자였다.

그의 아들 베드로 니콜라우스는 신심이 깊고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으나, 15세 되던 해에 그의 부친은 아들 역시 양복 일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니콜라우스는 수도생활의 성소를 인식했기 때문에 부친의 동의를 얻어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수도원 안에서 급성장하였고, 수차례에 걸쳐 해외 선교를 요청하였으나, 그에게는 무어인의 개종 업무만 주어졌다. 만년에 그는 카푸친회로 이적했지만 불과 몇 달 뒤에 되돌아왔다. 이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참으로 거룩한 이 사람들을 떠날 수 없어…”

그는 미사를 봉헌하기 전에 꼭 보속을 한번 하였고, 설교 전에는 세 번씩 육체적인 고행을 하였다. 탈혼, 기적 그리고 환시는 그에게 흔한 일이라 할 정도로 많았다.

성 루도비쿠스 베르트란두스(Ludovicus Bertrandus, 10월 9일)는 그를 '지상과 천국에서 동시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또 그는 에스파냐 국왕인 필립 2세의 극진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는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와 성 도미니코(Dominicus)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며, 신적 사랑이 너무나 뜨거워서 찬물도 곧 더운 물로 변화시킬 정도였다고 흔히들 말을 한다. 그러나 사탄이 사자, 곰, 뱀 같은 행태로 그에게 공격한 사례들도 있다는 것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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