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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28인 천주교 남자세례명

피어나네 2022. 12. 24.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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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세례명 그레고리오는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같은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그레고리오 28인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그레고리오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세례명 그레고리오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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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28인
천주교 남자세례명

 

 

 

 

그레고리오 남자세례명 목록

 

  1. 그레고리오 (1월 1일)

  2. 그레고리오 (1월 2일)

  3. 그레고리오 (1월 4일)

  4. 그레고리오 10세 (1월 10일)

  5. 그레고리오 2세 (2월 11일)

  6. 그레고리오 (2월 27일)

  7. 그레고리오 (3월 9일)

  8. 그레고리오 마카르 (3월 16일)

  9. 그레고리오 (4월 24일)

  10. 그레고리오 (4월 26일)

  11. 그레고리오 첼리 (5월 4일)

  12. 그레고리오 (5월 9일)

  13. 그레고리오 7세 (5월 25일)

  14. 그레고리오 (6월 18일)

  15. 그레고리오 바르바리고 (6월 18일)

  16. 그레고리오 로페즈 (7월 20일)

  17. 그레고리오 (8월 25일)

  18. 그레고리오 1세(대) (9월 3일)

  19. 그레고리오 (09월 30일)

  20. 그레고리오 팔라마스 (11월 14일)

  21. 그레고리오 (11월 17일)

  22. 그레고리오 (11월 17일)

  23. 그레고리오 (11월 20일)

  24. 그레고리오 (11월 23일)

  25. 그레고리오 (11월 27일)

  26. 그레고리오 3세 (12월 10일)

  27. 그레고리오 (12월 19일)

  28. 그레고리오 (12월 24일)

 

 

 

 

1.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1월 1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주교

  • 활동 연도 지역
    374년 나지안주스(Nazianzus)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1월 1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그의 생애 중 처음 50여년간을 이교도로서 보냈고, 성년의 대부분은 정부의 관리로서 지냈다. 그는 성녀 논나(Nonna, 8월 5일)와 결혼하였고, 그녀는 325년에 그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성 그레고리우스(1월 2일)와 성 카이사리우스(Caesarius, 2월 25일) 그리고 성녀 고르고니아(Gorgonia, 12월 9일)의 아버지인 그는 328년에 나지안주스의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된 후 그는 이단적인 그리스도교의 분파에 빠져들었으나 361년 그의 아들 성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정통 신앙으로 되돌아왔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2.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1월 2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주교, 교회학자, 교부

  • 활동 연도 지역
    329/330-389/390년 나지안주스(Nazianzus)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1월 2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나지안주스의 주교로 45년간 사목했던 성 그레고리우스(1월 1일)와 성녀 논나(Nonna, 8월 5일)의 아들로 태어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나지안주스 또는 인근의 아리안주스(Arianzus)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기도와 사랑의 실천으로 모범이 된 어머니로부터 신앙의 큰 영향을 받았다. 유년 시절 그는 가정에서 성경 읽기를 배웠고, 그 후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Caesarea)와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 수사학교에 다녔고,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거쳐 아테네(Athenae)에서도 수학했다. 

356년까지 아테네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와 교제했고, 장차 황제가 될 율리아누스 배교자와도 함께 공부했다. 30세 무렵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세례를 받고 소박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위해 성 대 바실리우스와 함께 폰투스(Pontus) 지방의 이리스 강변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부친의 권유로 362년 부활절에 사제품을 받았고, 372년경에는 사시마(Sasima)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사시마 교구는 아리우스파(Arianism)의 영향력이 큰 지역으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주교로 축성은 되었으나 부임하지는 못했다. 374년 봄, 아버지가 선종한 후 그 뒤를 잇도록 나지안주스의 주교로 임명되었지만 1년 후에 그는 이사우리아(Isauria) 지방의 셀레우키아(Seleukia)에 있는 수도원으로 떠났다. 

378년 아리우스파인 발렌스 황제가 죽고 정통교회에 대한 박해가 수그러들자 일단의 주교들이 그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초청해 아리우스파 지역에서 정통교회의 활성화를 도모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작은 공동체인 아나스타시아(Anastasia)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해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이때 그는 아리우스파인 막시무스(Maximus)와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고, 380년에는 새로 입교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의 가르침을 정통교리로 인정하고 아리우스파 지도자를 축출하는 칙서를 발표케 해서 정통파 신앙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381년 3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 도시의 주교로 인정받고,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Meletius)가 사망한 후 총대주교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총대주교 임명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안티오키아와 이집트의 교회가 주교좌 이전에 반대하며 격렬히 반대하자 성 그레고리우스는 모든 논쟁을 끝내고 교회의 평화를 위해 주교직에서 물러났다. 

공의회가 끝나기 전에 나지안주스로 돌아온 그는 383년 에울랄리우스(Eulalius)가 후계자로 임명될 때까지 나지안주스의 주교직을 맡았다. 그 후 그는 저술 활동과 수도 생활에 전념하고자 아리안주스로 내려와 생애의 마지막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는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해 정통교회를 수호하는데 큰 공적을 남겼고, 또 니케아(Nicaea) 신앙 고백을 해설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확고히 하는 등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동방교회의 4대 교회학자 중 한 명으로 선포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1월 25일 또는 30일에 기념한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3.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1월 4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주교

  • 활동 연도 지역
    539년 랑그르(Langres)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1월 4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귀족 출신인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거의 40여 년 동안 오툉(Autun) 지역의 백작으로 있으면서 정의를 실천에 옮긴 분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아르멘타리아가 운명하자 세속을 멀리하고 오로지 하느님 섬기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이리하여 랑그르의 성직자와 시민들이 그를 주교로 선출하였는데, 그는 놀라운 믿음과 열성으로 사목자의 의무를 다 하였다. 

특히 음식과 술을 극도로 절제하였고 밤새도록 기도하기가 일수였다. 이처럼 모든 면에서 성덕이 출중하였으므로 그는 부르고뉴(Bourgogne)의 사도인 성 베니뇨(Benignus)를 비롯한 수많은 성인들과 친교를 나누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4. 그레고리오 10세

 

  • 성인 축일
    1월 10일

  • 성인명
    Gregory X

  • 성인 구분
    복자. 그레고리오 10세

  • 성인 신분
    교황

  • 활동 연도 지역
    950?-1003년경 나렉(Narek)

 

 

그레고리오 10세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10세 자료

테오발도 비스콘티(Teobaldo Visconti)는 피아첸차(Piacenza)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파리(Paris)와 리에주(Liege)에서 교회법을 공부한 후 리에주에서 부제가 되었다. 그는 1265년 오토보노(Ottobono) 추기경을 수행하여 영국 선교 길에 오른 적도 있고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기도 하였다. 1271년 9월 1일, 그는 아직 사제품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교황 클레멘스 4세(Clemens IV)의 서거 이후 3년간 계속된 교황좌의 공석 끝에 6명의 추기경 위원회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어 약간의 물의가 일었다. 선출 당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던 그는 비테르보(Viterbo)에 도착해 1272년 3월 19일 사제품을 받고, 3월 27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 또는 그레고리오) 교황으로 축성되었다.

그는 1274년에 제2차 리옹(Lyon) 공의회를 소집해 동방 교회와 로마 간의 화합을 꾀했으나 십자군 출정으로 말미암아 성공하지 못하였다. 공의회에서 다룬 주요 의제 가운데 교황 선거와 관련된 교령이 반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교황의 서거 후 새 교황 선거를 위해 추기경들이 폐쇄된 공간에 들어가 선거가 끝날 때까지 머물러야만 하는 오늘날 교황 선거 방법의 토대를 제도화했다. 공의회가 끝난 후 그는 스위스의 로잔(Lausanne), 이탈리아의 밀라노(Milano), 피렌체(Firenze), 아레초(Arezzo) 등을 방문하다가 열병으로 쓰러져 1276년 1월 10일 아레초에서 선종하여 주교좌성당에 묻혔다. 그는 171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로마 순교록에 이름이 추가되었다.

 

(출처 : 천주교 서울대교구 ⓒ GoodNews)

 

 


 

5. 그레고리오 2세

 

  • 성인 축일
    2월 11일

  • 성인명
    Gregory II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2세

  • 성인 신분
    교황

  • 활동 연도 지역
    335?-395년? 니사(Nyssa)

 

 

그레고리오 2세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2세 자료

669년 로마(Roma)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젊어서부터 교회 일에 종사하며 두각을 나타내 차부제 때 이미 교황청 재정을 관리했다. 성 세르기우스 1세(Sergius I, 9월 8일) 교황 때에는 도서관장직을 맡는 등 주요 직책을 맡아 그의 학덕과 지혜가 널리 알려졌다. 그 후 그는 710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교황을 수행하여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가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게 행한 그의 대답으로 더욱 유명해졌으며, 이때 그는 황제로 하여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715년 5월 19일에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그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성직자들의 규율 정비와 이단 배척이었다. 그는 사라센의 침략을 대비하여 로마 주변에 성곽 복원사업을 시작하였고, 교회와 병원 그리고 몬테카시노(Monte Cassino) 수도원을 포함하여 수많은 수도원의 재건사업을 펼쳤다. 또한 독일 지역에 ‘독일의 사도’로 불리는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를 파견해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를 주교로 서품하고 그의 선교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추천서를 써주기도 했다. 이를 통해 황제가 교회에 간섭하지 않도록 조치하는 등 교황권 확립에도 큰 공을 남겼다. 727년에는 로마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였고, 레오 3세 황제의 지원을 받던 성화상 공경 금지를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6.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2월 27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수도승, 시인, 교회학자

  • 활동 연도 지역
    392년경 엘비라(Elvira)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2월 27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950년경 오늘날의 터키 동쪽 끝에 있는 반(Van) 호수 근처의 나렉이라는 한 작은 아르메니아(Armenia) 마을에서 학구적인 성직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매우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그는 그 지역에 수도원과 학교를 설립한 친척이자 스승인 나렉의 아나니아(Anania)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사제였던 아버지 코스로프(Khosrov)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사제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의 부친은 후에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나니아가 세운 나렉의 수도원에 들어가 철저한 수도 생활과 신학교육을 받고 25세에 사제품을 받았다.

나렉의 수도원에서 수도사제로서 평생을 보내며 수도원 학교에서 가르쳤던 그는 신학과 전례학은 물론 음악, 천문학, 지리학, 수학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는 수많은 강연과 다양한 저술, 많은 서한과 담화, 시와 노래 등 후대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남겼다. 특히 “아가서 주해”(Commentary on the Song of Songs)와 “애가”(Book of Lamentations)는 걸작으로 꼽힌다. 그가 직접 쓴 95개의 기도문으로 구성된 “애가”는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과 그분과의 재결합을 위한 인간의 탐구’를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책은 이미 1673년 프랑스 마르세유(Marseille)에서 출판되어 30개 언어로 번역된 바 있으며, 현재도 아르메니아 교회 전례에서 사용되고 있다.

나렉의 성 그레고리우스는 아르메니아 가톨릭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이미 성인으로서 공경을 받아왔다. 그의 이름은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의 2월 27일 목록에 올라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는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Redemptoris Mater) 제31항에서 그를 뛰어난 아르메니아인들 중의 한 사람으로 언급하며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한 찬미 중에서 강렬한 시적 영감으로 강생 신비의 여러 다른 면들을 고찰하고 있으며 이 다른 면들 하나하나가 그에게 있어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의 특별한 품위와 놀라운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찬양하는 기회가 된다.’라고 하였다. 또한 아르메니아인 세례 1700주년을 기념한 사도적 서한뿐만 아니라 몇 차례의 연설에서도 그를 언급하였다. 그의 이름은 또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2678항에서 성모송이나 성모 찬미가 등의 기도 전통과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첫 번째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받는 그는 동방교회, 특별히 아르메니아 교회 전례와 사상, 문학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수도사제로서 그가 남긴 기도문 대부분은 지금도 아르메니아 정교회 전례에서 사용하고 있다.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은 2015년 2월 21일 재임 중 처음으로 수도사제이자, 시인, 신비주의적 철학자, 신학자, 성인으로서 존경받는 나렉의 성 그레고리우스를 교회학자(교회박사)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가톨릭 교회의 교회학자는 모두 36명이 되었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그의 축일을 10월 중에 이동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2021년 1월 25일 교령을 발표해 2월 27일을 나렉의 성 그레고리우스 기념일로 제정하며 전례력에 추가한다고 밝혔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7.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3월 9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주교, 교부, 신학자

  • 활동 연도 지역
    1300년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3월 9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성 바실리우스(Basilius, 5월 30일)와 성녀 엠밀리아(Emmilia, 5월 30일)의 아들로서,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태어나 그의 형인 성 대 바실리우스(1월 2일)와 누나인 성녀 마크리나(Macrina, 7월 19일)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기에 수사학자가 되어 테오세베이아(Theosebeia)와 결혼하였다. 그는 수사학 교수가 되었으나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1월 2일)의 영향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한 후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아르메니아(Armenia)의 니사 교구의 주교가 되었으나, 아리우스파(Arianism)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폰투스(Pontus)의 집정관으로부터 교회 재산을 남용했다는 무고를 받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도망쳤는데, 그라티아누스(Gratianus) 황제가 그를 다시 복직시켰다. 379년 그는 멜레티우스(Meletius) 이단을 단죄한 안티오키아(Antiochia)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이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팔레스티나(Palestina)와 아라비아의 이단들을 척결하도록 파견되었다. 또한 그는 381년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도 참석하여 아리우스(Arius) 이단을 공격하고, 니케아(Nicaea) 선언문을 재확인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래서 그는 정통교회의 수호자로 칭송을 받았다. 그는 오리게네스(Origenes)와 플라톤(Platon)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신학자로서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680-681년)는 그를 '교부들 중의 교부'로 선포하였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8. 그레고리오 마카르

 

  • 성인 축일
    3월 16일

  • 성인명
    Gregory Makar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마카르

  • 성인 신분
    주교

  • 활동 연도 지역
    1044년 오스티아(Ostia)

 

 

그레고리오 마카르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마카르 자료

아르메니아(Armenia)에서 출생한 성 그레고리우스 마카르(Gregorius Makar, 또는 그레고리오)는 리틀 아르메니아의 니크로폴리스 교외의 한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설교가로서 크게 성공하였고, 그의 선임 주교가 서거할 때 주교로 승품되었다. 독수생활을 늘 갈망하던 그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순회 설교하던 중에 피티비엘에 자리를 잡고 은수자가 되었다. 그는 특히 영적 지혜가 뛰어났고, 대중들을 사로잡는 능력이 비상하였으며 치유의 은사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9.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4월 24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주교

  • 활동 연도 지역
    5세기말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4월 24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에스파냐 남부 엘비라(오늘날의 그라나다 Granada) 교구의 주교였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 대항한 신앙의 승리자들 중 한 명이었다. 또한 그는 시종일관 이단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359년에 열린 리미니(Rimini) 공의회에 참석한 몇 명의 주교들 중 한 명이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0.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4월 26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복자.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선교사, 증거자

  • 활동 연도 지역
    707?-775년경 위트레흐트(Utrecht)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4월 26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와 도미니코(Dominicus)는 도미니코회의 초창기에 살았던 수도자들이다. 그들은 영혼을 구하려는 열망에 불타서 원장의 허락을 받고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바르바스트로(Barbastro) 부근의 무어인들이 사는 산악지대 마을인 소몬타노(Somontano)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피레네 산맥을 따라 가면서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복음 말씀 그대로 돈도 없고 맨발이었다. 작은 마을에서 작은 마을로,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다니며 말씀을 전하고, 대접해 주는 대로 먹고 잠을 잤다. 그러나 산 속의 바위 밑과 자연적인 동굴에서 지낸 때가 더 많았고,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없어 기진맥진한 적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마을 어귀에 닿으면 조그마한 종을 울려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바위 밑에 피신해 있던 중 바위더미가 무너지면서 그 밑에 깔려 죽었다. 그들의 시신은 기적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바르바스트로 교구의 베시안스(Besians)에 안장되었다. 복음적인 선교사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는 그들에 대한 공경은 185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1. 그레고리오 첼리

 

  • 성인 축일
    5월 4일

  • 성인명
    Gregory Celli

  • 성인 구분
    복자. 그레고리오 첼리

  • 성인 신분
    수사

  • 활동 연도 지역
    240-326년 아르메니아(Armenia)

 

 

그레고리오 첼리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첼리 자료

이탈리아 리미니(Rimini) 교구의 베루치오에서 태어난 그레고리우스 첼리(Gregorius Celli, 또는 그레고리오 첼리)는 15세 때에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성녀 모니카(Monica)에게 심취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10여 년 동안 수도원에 살면서 모범적인 생활을 하며 이단으로 기울어지던 많은 이들을 개종시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 수도원을 세운 그레고리우스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에 형제들이 그의 엄격한 생활과 명성을 시기하여 집안의 토지에 지은 수도원에서 그를 쫓아냈다. 그는 다행히 리에티(Rieti) 교외의 몬테 카르네리오(Monte Carnerio)에 있는 작은 형제회에 들어가서 118세의 일기로 선종할 때까지 살았다. 그는 비 오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이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2.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5월 9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주교

  • 활동 연도 지역
    213-270년? 네오카이사레아(Neocaesarea)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투르고, 타우마투르구스.

 

 

5월 9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베네딕토회 수도승이었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이탈리아 오스티아의 주교가 되었고, 후에 에스파냐 지방에 있던 옛 왕국인 나바라(Navarra)와 카스티야(Castilla)의 교황대사로서 활동하였다. 에스파냐의 나바라와 라리오하(La Rioja) 지방에서 널리 공경받고 있는 그는 1044년 로그로뇨(Logrono)에서 선종하였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3. 그레고리오 7세

 

  • 성인 축일
    5월 25일

  • 성인명
    Gregory VII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7세

  • 성인 신분
    교황

  • 활동 연도 지역
    538-594년 투르(Tours)

 

 

그레고리오 7세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7세 자료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소바나(Sovana)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힐데브란트(Hildebrand)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어린 시절 로마(Roma)로 가서 삼촌이 아빠스로 있던 아벤티노(Aventino)의 성 마리아 수도원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라테라노(Laterano) 학교에서 지오반니 그라시아노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였는데, 그의 스승이 후일 그레고리우스 6세 교황(1045-1046년 재임)으로 선출되었을 때 교황 비서로 임명되었다.

그 후 그는 1046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 의해 그레고리우스 6세 교황이 폐위되었을 때 쾰른으로 갔다가 이듬해 교황이 선종한 후 성 오딜로(Odilo, 1월 1일)가 지도하던 클뤼니(Cluny) 수도원에 머물렀다는 말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1049년 툴(Toul)의 주교인 브루노(Bruno)가 성 레오 9세(Leo IX, 4월 19일) 교황으로 등극하자 그는 교황의 불림을 받고 로마로 가서 차부제품을 받고 교회의 재정과 성 바오로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수도회 개혁을 담당하게 되었다. 1054년에 그는 상스(Sens) 교회회의를 주재하여 베렌가리우스(Berengarius)를 단죄하였고, 니콜라우스 2세(Nicolaus II) 교황 때에는 교황 칙서 발간 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1073년 4월 21일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 교황이 선종하자 대중의 환호 속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축일에 그레고리우스 7세로 즉위한 그는 전임 교황들을 도와 자신이 추진해왔던 교회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는 성직매매의 죄를 들어 밀라노(Milano)의 대주교를 면직하면서부터 교회 규율을 바로잡고 성직자의 생활을 쇄신하고자 했다. 1075년에는 전년도에 열린 로마 교회회의의 교령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평신도의 성직 임명을 금지하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는 또한 1075년 3월에 공포한 교황령에서 교회와 교황이 국가와 국왕보다 우선한다고 천명하며 교황만이 온전히 주교 서임권을 갖고 있고, 황제를 폐위할 권한이 있다고 했다. 이는 결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의 대립을 가져왔다. 평신도 성직 서임에 대한 금령은 실제 주교를 임명하던 황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인리히 4세 황제는 이에 저항해 공석인 밀라노 주교를 임명하는 등 제국 내에서 주교와 수도원장 서임권을 행사하며 교황과 충돌했다. 교황의 강력한 경고와 봉신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하인리히 4세는 결국 이탈리아의 카노사(Canossa)로 내려와 참회복을 입고 교황으로부터 파문 해제를 간청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성직 서임권 논쟁에서 승리하며 황제의 권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복잡한 사건들도 많았으나 교회가 크게 부흥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흔히 ‘그레고리우스 개혁’으로 불리는 교회의 개혁 운동을 통해 교회의 자율성을 회복하고 교황권을 크게 확립한 교황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동방 교회와 로마 교회 간의 일치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하인리히 4세 황제와의 대립으로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Salerno)까지 피신했다가 1085년 5월 25일 그곳에서 선종했다.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7세는 158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606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4.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6월 18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 지역
    9세기 데카폴리스(Decapolis)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6월 18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 주교와 성 데메트리우스(Demetrius) 부제 그리고 수도원장이었던 성 칼로게루스(Calogerus)는 아리우스파의 반달족에 의해 그들의 고향으로부터 북아프리카로 쫓겨났다가 시칠리아(Sicilia) 섬 메시나(Messina) 부근 프라갈라타(Fragalata) 주변 지역에 정착하여 복음을 선포하였다. 성 칼로게루스는 원래 그리스의 은수자이자 선교사로 ‘은둔자’로 불렸는데, 교황으로부터 수도원의 관습을 받아들여 시칠리아 섬 지르젠티(Girgenti, 오늘날의 아그리젠토 Agrigento) 근처에서 30여년 이상을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는 또한 레파리(Lepari) 섬의 선교사로서 봉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5. 그레고리오 바르바리고

 

  • 성인 축일
    6월 18일

  • 성인명
    Gregory Barbarigo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바르바리고

  • 성인 신분
    추기경

  • 활동 연도 지역
    638년경 지르젠티(Girgenti)

 

 

그레고리오 바르바리고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바르바리고 자료

성 그레고리우스 바르바리고(Gregorius Barbarigo, 또는 그레고리오)는 162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Venezia)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당시 유럽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들간의 맹렬한 전쟁이 7년간 지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3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베네치아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20대 초반에 베네치아 정부의 대사인 루이지 콘타리니(Luigi Contarini)가 독일의 뮌스터(Munster)로 파견되는 데 동행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1648년 베스트팔렌(Westfalen) 조약이 이루어졌다. 그 회의에서 교황 대리인 파비오 치기(Fabio Chigi)는 예외적으로 젊은이였던 성 그레고리우스를 발견하고 그와 친구가 되었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1655년 사제 서품을 받고, 1657년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대담하게 활동하였다.

파비오 치기가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뮌스터에서 만났던 베네치아 출신의 성 그레고리우스에 대한 인상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성 그레고리우스를 이탈리아 베르가모(Bergamo)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3년 후인 1660년 추기경으로 승품된 성 그레고리우스는 1664년 파도바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33년간 봉직했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탁월한 교회의 사람이었고 정치가였다. 그는 종교개혁 시기에 그리스도교의 재일치를 위해 노력했고, 사제 양성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추진하여 신학생들을 위한 좋은 대학과 신학원을 세웠고, 자체 출판사를 설립했으며, 교부들의 작품에 대한 지식이 있는 이들과 성서를 아는 인물들을 교사로 임명하였다. 그 출판사에서 출판한 몇몇 작품은 이슬람 국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졌다. 그의 자선행위는 실로 엄청나고 지속적이었다.

성 그레고리우스의 사목적 헌신은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11월 4일)의 헌신에 견줄만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타인에게는 친절하여 곤경에 처한 이들을 큰 열정으로 도왔다. 추기경으로서 그는 다섯 번의 교황선거에 참여했고, 유력한 교황 후보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는 선종하여 파도바의 대성전에 묻혔다. 그는 1761년 복자품에 올랐고, 1960년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 6월 3일)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6. 그레고리오 로페즈

 

  • 성인 축일
    7월 20일

  • 성인명
    Gregory Lopez

  • 성인 구분
    복자. 그레고리오 로페즈

  • 성인 신분
    은수자

  • 활동 연도 지역
    1290-1346년 시나이산(Mount Sinai)

 

 

그레고리오 로페즈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로페즈 자료

에스파냐의 마드리드 출신인 그레고리우스 로페즈(Gregorius Lopez, 또는 그레고리오)는 궁중의 사환으로 일하던 중에 에스트레마두라에 있는 과달루페의 성모 경당을 순례하였다. 이때 그는 멕시코에 과달루페의 다른 경당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기 위하여 그곳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그는 베라크루스에서 소유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은수자로 살만한 곳을 찾다가, 어느 한적한 계곡에서 기도와 고행으로 평화스럽게 얼마를 살았다.

그 후 그는 도미니코회의 유명한 선교사의 권유를 받고 멕시코의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으나, 몇몇 공동체에서 생활한 결과 자신은 공동생활보다 은수자가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부터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멕시코의 대주교조차 그를 일컬어 특별한 신심과 덕행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특히 그의 철저한 가난 생활은 지나칠 정도였고, 늘 성서 공부를 하여 성서에 뛰어난 지식을 가졌다. 그는 54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는데 멕시코 전역에서 그를 공경한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7.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8월 25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수도원장, 선교사

  • 활동 연도 지역
    455-540년 오세르(Auxerre)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8월 25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트리어(Trier)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인근의 팔젤(Pfalzel)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722년 독일의 사도인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가 프리슬란트(Friesland)에서 헤센(Hesse)과 튀링겐(Thuringen) 지방으로 갈 때 그 수도원에 머문 적이 있었다. 성 보니파티우스는 식사 자리에서 성 그레고리우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하고 그에 대한 설명과 사도적 생활에 대한 장점 등을 설명해주었다. 이때 성 그레고리우스는 성 보니파티우스의 주목을 받아 그의 제자가 되었고, 후에 그의 협력자가 되어 선교 여행에 동행했다.

750년경 성 그레고리우스는 위트레흐트의 성 마르티누스 수도원 원장의 책임을 맡았다. 그가 담당하게 된 수도원은 일종의 선교 신학교로 프랑크 · 프리슬란트 · 작센(Saxon) · 바이에른(Bayern) · 슈바벤(Schwaben) 등 여러 지역과 국가에서 모인 이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전당이자 선교사들을 교육하는 곳이었다. 영국 잉글랜드(England)에도 훌륭한 학교들이 있었지만 많은 학자가 이곳을 찾아왔다. 754년에 스승인 성 보니파티우스가 순교하자, 그는 20년 가까이 프리슬란트(Friesland) 선교단을 이끌었다. 그가 주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8. 그레고리오 1세(대)

 

  • 성인 축일
    9월 3일

  • 성인명
    Gregory I the Great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1세(대)

  • 성인 신분
    교황, 교회학자

  • 활동 연도 지역
    304년경 스폴레토(Spoleto)

 

 

그레고리오 1세(대)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1세 자료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또는 그레고리오)는 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이미 두 명의 교황, 즉 성 펠릭스 3세(Felix III, 526-530년, 9월 22일)와 성 아가피투스 1세(Agapitus I, 535-536년, 9월 20일)를 배출한 로마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법학 등 고등 교육을 받고 573년 로마 시장이 되었다. 574년경 아버지 고르디아누스(Gordianus)가 세상을 떠나자 성 그레고리우스는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는 부모의 저택을 성 베네딕투스의 규율을 따르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으로 만들고, 그 수도원에 입회하여 오래전부터 꿈꿔 왔던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시칠리아(Sicilia)에 있는 가족 소유 토지에도 5개의 수도원을 더 세웠다. 578년 교황 베네딕투스 1세(Benedictus I)에게 부제품을 받고, 579년 교황 펠라기우스 2세(Pelagius II)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교황 대사로 파견되었다. 586년경 로마로 돌아온 그는 다시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계속하며 교황 펠라기우스 2세를 도와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590년 교황 펠라기우스 2세가 선종하자 그는 수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만장일치로 제64대 교황에 선출되었다. 전염병이 로마를 휩쓸고 있던 시기에 그는 출중한 행정 능력과 깊은 신앙심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그는 교회 법령을 정비하고 무능한 성직자들을 해임하며 사제와 주교들의 영적 쇄신을 강조하고, 막대한 경비를 들여 기아와 전염병으로 시달리는 시민들을 구호하기 위한 자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지혜롭게 교황청 재산을 관리했고, 랑고바르드족(Langobards)으로부터 포로들을 석방시키고, 부당한 박해를 받던 유다인들을 보호하였다. 그는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평가될 만큼 활동적인 교황이었다. 593년 랑고바르드족이 로마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직접 랑고바르드족과 담판을 지어 로마의 평화를 지켜냈다. 이로써 그는 랑고바르드족의 왕과 함께 평화의 수호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이렇듯 그는 위대한 주교이자 유능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또한 그의 학덕은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높았고 실제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중세 주교와 사제가 꼭 읽어야 하는 교과서와도 같은 “사목 지침서”(Liber Regulae Pastoralis), “욥의 윤리”(Moralia in Job) 등 각종 성경 해설집과 설교집, 당시의 신학 · 전례 · 역사 · 사회학의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800여 통의 서한을 모은 “서간집”(Registrum Epistolarum), “그레고리우스 전례서”(Sacramentarium Gregorianum) 등을 집필하였다. 특히 그는 교회의 성가를 재조정하고 그레고리우스 성가도 제정하여 ‘그레고리안 성가’의 편집자로 추앙받고 있다. 또한 성인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자 했던 그는 총 4권의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Dialogi de Vita et Miraculis Patrum Italicorum)을 저술했는데, 제2권에서 누르시아(Nursia)의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의 생애를 다루었다. 이러한 방대한 저서에 담긴 그의 사상은 서방교회의 신학과 전례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유럽의 역사에도 큰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게르만족의 개종뿐만 아니라 영국 앵글로색슨족의 개종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수도원장으로 재임할 때 로마 시내에서 영국에서 온 포로들이 노예로 팔리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 대한 연민과 관심을 품게 되었다. 교황이 된 후 그는 597년에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5월 27일)와 40여 명의 수도자를 영국의 켄트 왕국에 파견했고, 601년에는 영국에 요크(York) 대교구와 캔터베리(Canterbury) 대교구와 12개의 소속 교구를 설정하였다. 그는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립하는 동시에, 교황을 일컫는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함으로써 교황권이 지배의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권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한 베네딕토 수도회를 면속시켜 교황의 권위 아래 두었다.

그는 라틴 교부의 일원이자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있다.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기에 그의 다양한 활동과 영성적 위대함으로 인해 ‘대교황’이란 명칭으로 불린다. 그는 604년 3월 12일 로마에서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사후 즉시 성인품에 올랐다. 축일은 선종한 날인 3월 12일에 지내오다가 1969년 전례 개혁과 함께 라틴 교회에서는 그가 교황으로 착좌한 9월 3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동방교회와 영국 성공회, 루터교 등에서는 여전히 3월 12일에 지내고 있다. 그는 음악가, 가수, 학생, 교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황의 전통적 상징인 예복과 삼중관을 쓰고 있고, 방대한 저서와 그레고리안 성가를 상징하는 책이나 악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비둘기가 주로 그려지는데, 이는 그가 방대한 저작 활동을 할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의 귓전에 머물며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성 그레고리우스의 미사를 주제로 한 작품도 많이 있는데, 이는 그가 미사를 집전하던 중 십자가 위의 고통의 그리스도께서 제대 위에 나타났다는 환시에서 시작되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9.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9월 30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 지역
    1210-1276년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9월 30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계몽주의자로 불리는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르메니아의 코스로프 1세(Khosrov I)를 제거했던 아나크(Anak)의 아들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는 부친과 함께 카이사레아(Caesarea)로 피신하여 살았는데, 그는 여기서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코스로프의 아들 티리다테스(Tiridates)가 즉위하면서 개종하고, 그리스도교가 아르메니아의 국교임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아쉬티샷(Ashtishat)의 주교로 축성되면서부터 아르메니아 교회를 제도화시켰고, 이방인 성직자를 양성하여 복음화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아르메니아의 사도요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20. 그레고리오 팔라마스

 

  • 성인 축일
    11월 14일

  • 성인명
    Gregory Palamas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팔라마스

  • 성인 신분
    주교, 신비가, 신학자

  • 활동 연도 지역
    540?-604년

 

 

그레고리오 팔라마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팔라마스 자료

성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Gregorius Palamas, 또는 그레고리오)는 금욕과 신비 신학의 뛰어난 이론가로서 14세기의 그리스 정교회에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는 1296년 11월 11일 또는 14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황실과 관계된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나 왕립 대학교에서 고전 철학을 배웠다. 하지만 1316년에 그는 쉽게 진출할 수 있는 정계를 포기하고, 두 동생과 함께 그리스 정교회의 영적 중심지인 아토스산(Mount Athos)의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는 존경받는 수도자이자 스승으로서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들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다가 한 영적 스승에게서 관상 방법을 배웠다. 1325년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아토스 산에서 나와 테살로니카와 마케도니아(Macedonia)로 피신한 그는 같은 해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이후 10명의 동료들과 함께 마케도니아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1331년 아토스 산의 성 사바스(Sabas)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는 1335년경 인접한 한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수도생활 지침 때문에 수사들의 반발을 사서 다시 성 사바스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1347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교회의 전통을 유지, 보존하려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테살로니카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주교직을 수행하면서 인문주의 비판자들에게 맞서는 저술을 계속하며 여생을 보냈다. 1354년 그는 투르크인들에 의해 투옥되었지만, 석방금을 내고 테살로니카로 돌아온 후 1359년 11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망한 지 9년 뒤인 1368년 콘스탄티노플 시노드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정교회의 아버지요 박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출처 : 천주교 서울대교구 ⓒ GoodNews)

 

 


 

21.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11월 17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주교, 선교사, 기적자

  • 활동 연도 지역
    731년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11월 17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소아시아 폰투스(Pontus)의 네오카이사레아(Neocaesarea)의 이방인 가문에서 태어난 성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투르구스(Gregorius Thaumaturgus, 또는 기적자 그레고리오)는 훌륭한 집안의 자녀답게 그곳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233년 그는 동생인 성 아테노도루스(Athenodorus, 10월 18일)와 함께 법학을 계속 공부하기 위해 레바논의 베이루트(Beirut)에 갔다. 그 후 누이의 초청으로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 갔을 때 오리게네스(Origenes)를 만나 결국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오리게네스에 의해 세례를 받고 개종하였다. 5년 동안 오리게네스의 문하생으로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뒤, 그는 선교사로서 폰투스로 돌아왔다.

이때 그는 아직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네오카이사레아의 주교로 임명되어 거의 30여 년 동안이나 지역 주민들의 개종사업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교회의 축제일에 세속적인 흥미를 가미시키는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전통을 대중화시킨 인물로서 유명하다. 또한 그는 수많은 신학논문들을 남겼고, 그의 높은 인기 때문에 '타우마투르고' 즉 '놀라운 일을 하는 사람'(기적자)이란 별명을 얻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22.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11월 17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주교, 역사가

  • 활동 연도 지역
    741년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11월 17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성 그레고리우스 플로렌티우스(Gregorius Florent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Auvergne) 지역에 속한 클레르몽(Clermont)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오베르뉴의 원로원 의원이었다. 원래 그의 이름은 게오르기우스 플로렌티우스(Georgius Florentius)였는데, 외가 쪽 친척인 랑그르(Langres)의 성 그레고리우스(1월 4일) 주교를 따라 그레고리우스라는 이름을 택했다. 그의 집안은 친가와 외가 쪽으로 주교와 성인들이 많이 있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는 세 자녀를 데리고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숙부이자 클레르몽의 주교인 성 갈루스(Gallus, 7월 1일)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또한 후에 클레르몽의 주교가 된 성 아비투스(Avitus, 8월 21일) 대부제에게 성경을 배웠다. 563년에 중병에 걸리기도 했지만 투르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의 묘를 순례하고 나서 완쾌되었다. 그 후 잠시 리옹(Lyon)에서 살기도 하고 부제직을 수행하다가 573년 투르의 주교이자 외숙부인 성 에우프로니우스(Euphronius, 8월 4일)가 선종한 후 그의 후계자로 선출되어 주교품을 받았다.

당시 투르는 프랑스 중부의 주요 도시이자 투르의 성 마르티누스의 무덤을 찾는 순례자와 기적을 바라는 환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은 복잡해서 그가 재임하는 20년 동안 투르의 지배자는 몇 차례나 바뀌었고, 이로 인해 유능하고 영향력 있는 성 그레고리우스 주교는 정치적 문제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관대하게 위정자들을 대하고 착한 목자로서 주교직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투르의 대성당을 비롯하여 수많은 교회들을 재건하고, 이단자들의 개종에 힘쓰며, 순례자들을 돌보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그는 정의와 사랑 그리고 신심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유명했다. 특히 그는 성인들의 묘를 순례하고 축일을 성대히 지내며 8권의 “성인전”을 저술해 많은 성인 · 순교자 · 교부들의 이야기와 기적을 상세히 전해주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591년에 완성한 “프랑크족의 역사”(Historia Francorum, 10권)가 있다. 이는 역사서로서 6세기의 역사, 정치, 사회, 전례, 성인 신심 등을 이해하는데 거의 유일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23.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11월 20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증거자

  • 활동 연도 지역
    1022/1025-1085년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11월 20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소아시아 지방 테카폴리스에서 태어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열성적으로 성상파괴주의자들을 반대하였고, 그로 인해 그들에 의해 극심한 고통을 당하였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24.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11월 23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주교

  • 활동 연도 지역
    1596년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11월 23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시칠리아(Sicilia)의 지르젠티(오늘날의 아그리젠토, Agrigento)에서 태어나, 그곳의 주교인 성 포타미온의 보호를 받고 성장한 뒤에, 팔레스티나(Palestina)를 순례하면서 4년 동안 머물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부제품을 받고 안티오키아(Antiochia)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파견되었는데, 니체 포루스 칼리스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당대에서 가장 거룩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 후 그는 로마(Roma)로 갔다가 지르젠티 교구장이 되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25.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11월 27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신비가

  • 활동 연도 지역
    1010년경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11월 27일 그레고리오 자료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셀주크투르크족(Seljuk Turks)의 침략으로 포로가 되어 고향을 떠났으나 이웃 사람들이 대속금을 지불하여 풀려난 후 시나이산의 은수자 공동체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그곳 생활에 불만을 느낀 그는 크레타(Creta) 섬으로 가서 다른 수도승으로부터 묵상기도를 배운 후 아토스산(Mount Athos)으로 가서 수행한 결과 ‘참다운 묵상과 관상’을 아는 사람으로서 높은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해적들이 침략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아토스산를 떠났고, 1325년경에는 흑해 연안 소조폴(Sozopol) 교외의 파로리아산(Mount Paroria)에 수도원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그의 영성의 특징은 묵상기도에서 육체적인 도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예를 들면 호흡법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26. 그레고리오 3세

 

  • 성인 축일
    12월 10일

  • 성인명
    Gregory III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3세

  • 성인 신분
    교황

  • 활동 연도 지역
    1625-1697년 파도바(Padova)

 

 

그레고리오 3세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3세 자료

시리아 사람 요한의 아들인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유능한 로마(Roma)의 사제였다. 그의 학덕과 성덕이 너무나 유명해서 선임 교황인 성 그레고리우스 2세(2월 11일)의 장례식 도중에 환호하는 군중들의 갈채 속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선대 교황의 정책을 고수하면서 두 차례의 교회회의를 통하여 이단을 단죄하고,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를 도와 독일 선교에 힘을 쏟았으며, 성 빌레발두스(Willebaldus, 7월 7일)까지 파견하는 열성을 보였다. 또한 성화상 파괴 운동에 저항하는 의도로 여러 성당을 장식하는 화려한 성상들을 많이 만들었다. 그는 성인들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자신이 세운 구원자와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된 성 베드로 대성전의 소성당에 안장되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27.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12월 19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주교

  • 활동 연도 지역
    1343년 베루치오(Verucchio)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12월 19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프랑스 오세르의 제12대 주교로서 13년간 교구를 돌보았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28. 그레고리오

 

  • 성인 축일
    12월 24일

  • 성인명
    Gregory

  • 성인 구분
    성. 그레고리오

  •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 지역
    1296-1359년 테살로니카(Thessalonica)

 

 

그레고리오와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빨라마스.

 

 

12월 24일 축일 그레고리오 자료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무차별 학살할 때에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신전에 희생 제물 바치기를 거절하였는데, 그들 중에서도 가장 용감했던 사람이 바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 신부였다. 군인들이 그를 법정에 연행하여 심문을 했는데, “너희 하느님은 누구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당신 모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전능하시고 불사불멸하시며, 우리의 행업에 따라 상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 때문에 그는 설독죄로 판정되어 불에 태워 죽이기로 하였으나,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서 그 다음날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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