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115분 자료를 총 여섯 페이지 가나다 순서로 정리했어요. 5월 29일 천주교 세례명 115분 중 20분 다섯 번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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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여자세례명 강경복 수산나, 강완숙 골룸바, 구성열 바르바라, 권천례 데레사, 김연이 율리아나,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문영인 비비안나, 보나, 심아기 바르바라, 심조이 바르바라, 오 마르가리타, 우르술라 레도호프스카, 윤운혜 루치아, 윤점혜 아가타, 이 안나,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이성례 마리아, 이순이 루갈다, 이시임 안나, 이조이 막달레나, 정복혜 칸디다, 정순매 바르바라, 최 비르지타, 최조이 바르바라, 한신애 아가타, 총 26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2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5가지 (5/6)
5월 29일 남자세례명 목록 (5/6)
- 인언민 마르티노
- 장 토마스
- 정광수 바르나바
- 정산필 베드로
-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 정인혁 타대오
- 정찬문 안토니오
- 정철상 가롤로
- 정태봉 바오로
- 조숙 베드로
- 조용삼 베드로
- 주문모 야고보
- 지황 사바
- 최봉한 프란치스코
- 최여겸 마티아
- 최인길 마티아
- 최인철 이냐시오
- 최창주 마르첼리노
- 최창현 요한
- 최필공 토마스
1. 인언민 마르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印彦敏 Marti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37-1800년 한국
인언민 마르티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인 마르티노, 인마르티노.
인언민 마르티노 자료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 알렉시오를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이내 그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때 인 마르티노는 장남 요셉을 주 신부 곁에 남겨 두었으며, 얼마 뒤에는 차남을 유명한 교우의 딸과 혼인시켰다. 그러고 나서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 이때 친척들이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자, 그는 이주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친척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인 마르티노는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한 뒤 옥으로 끌려갔다. 그런 다음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감사의 명에 따라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 관장 앞으로 이송되었다.
인 마르티노는 청주에서 받은 형벌 때문에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청주에서 해미까지 가는 동안, 조정 관리들이 이동할 때 사용하는 말을 타고 가야만 하였다.
해미에 있는 감옥에서 인 마르티노는 젊은 이보현 프란치스코를 동료로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면서, 갖은 형벌과 문초와 유혹 아래서도 변함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어쩔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리들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인 마르티노에게 가져다 준 뒤,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들 가운데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결국 인언민 마르티노는 이러한 형벌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고 한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인언민 마르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장 토마스
- 가톨릭 성인 이름
張 Thoma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5-1866년 한국
장 토마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마, 장토마스, 토머스.
장 토마스 자료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張)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장주기 요셉 성인의 육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장주기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정착하였고, 장 토마스는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당시 배티에는 장 토마스의 인척으로 생각되는 장 시몬 회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장 토마스는 이때부터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면서 하나뿐인 아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이 무렵 가까운 인척과 친구들은, 그의 본심이 순량한 탓에 그에 대해 말할 때면 언제나 ‘착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된 뒤,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내 진천 관아로 압송된 장 토마스는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의 세간을 돌려주어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을 때 다시 영장이 “천주교를 배반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묻자, 여전히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한결같이 대답하였다.
이윽고 장 토마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장 토마스는 자기의 대자가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장 토마스의 나이는 51세였다.
장 토마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정광수 바르나바
- 가톨릭 성인 이름
鄭光受 Barnaba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2년 한국
정광수 바르나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르나바스, 정 바르나바, 정바르나바.
정광수 바르나바 자료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는 경기도 여주 부곡(현,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함으로써, 신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부인이고, 정순매 바르바라는 그의 여동생이다.
정 바르나바는 입교한 뒤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양근에 살던 윤 루치아와 혼인을 하였는데, 이때 천주교 신자가 아닌 그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혼인 문서는 주고받을 수 없었다. 또한 집안에서는 교리의 가르침을 지킬 수도 없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1794년 말 조선에 입국하자, 정 바르나바는 한양으로 올라가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교리도 배웠다. 그리고 신부의 명에 따라 김건순 요사팟에게 편지를 전하였으며, 고향 인근에 교리를 전하면서 비신자를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 바르나바의 부모는 여전히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제사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그는 1799년 아내와 함께 여주를 떠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런 다음 자신의 집 한편에 교회 집회소를 짓고 주 야고보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이곳을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의 여동생 정 바르바라도 그들 부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왔다.
본디 상당한 학식을 지니고 있던 정 바르나바는, 교회 서적을 베껴 신자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한 아내와 함께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이나 묵주 등을 제작하여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 주었고, 가까운 교우들과 자주 만나 함께 교리를 연구하거나 기도 모임을 갖곤 하였다. 그들 부부는 자식에게도 일찍부터 교리를 가르쳐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처형인 윤점혜 아가타가 체포되자, 정 바르나바는 자기 부부도 머지않아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박해 초기에 그는 이미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있었고, 2월에는 그의 집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아내 윤 루치아가 체포되었다.
당시 정 바르나바는 한양과 지방을 오가면서 이리저리 피신해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포졸들이 수사망을 좁혀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이상의 피신을 단념하고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아가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다. 그때가 1801년 음력 5월 초순이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정 바르나바는 여러 차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신자들을 밀고하라는 명령도 거부하였다. 그런 다음,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여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이었다.
정광수 바르나바가 형조에서 마지막으로 진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양반의 후손으로, 나라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졌습니다. 천주교 신자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주문모 신부를 아버지처럼 생각하였습니다. … 또 천주교 성물을 만들어 곳곳에 배포하였고, 교우들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노력하였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정광수 바르나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정산필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鄭山弼 Pet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39-1749)-1799년 한국
정산필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정 베드로, 정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정산필 베드로 자료
충청도 덕산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난 정산필(鄭山弼) 베드로(Petrus)는, 본래 성격이 괄괄하고 힘이 예사롭지 않아 모두가 무서워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로는 아주 겸손하고 온순해졌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정 베드로는 주 신부를 찾아가 직접 그에게 세례를 받는 행복을 누렸다. 또 이후에는 내포 지역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자신이 맡은 직분을 다하였다. 부지런히 기도와 독서를 하였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격려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정 베드로에게는 박 라우렌시오, 원 야고보, 방 프란치스코 등 절친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오가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1797년에 일어난 정사박해 때에 자신들이 살던 마을에서 체포되어 모두 순교하였다.
정 베드로가 체포된 때는 1798년이나 1799년이었다. 그는 덕산 관아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용감하게 천주의 가르침을 증언하였다. 또 옥에서는 함께 갇힌 동료들을 격려하였으며,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도 전혀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사형 집행일이 되자, 정 베드로는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동료들에게 같이 먹자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천주께서 사람을 위하여 창조하신 음식이니,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먹읍시다. 이제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정 베드로는 형장으로 나가 장사형(또는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799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에서 60세 사이였다.
정산필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丁若鍾 Augustin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0-1801년 한국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자료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1760년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 가롤로와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아들과 딸이다.
정 아우구스티노가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뒤인 1786년에 형에게서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이후 천주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된 정 아우구스티노는 세례를 받고 교리 연구와 가족들을 가르치는 데 전심하였다. 그러다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광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부터 조금씩 교회를 멀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교리를 실천하는 데에 정성을 다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 아우구스티노의 열심은 더욱 빛을 발하였다. 인근 지역의 신자들과 자주 교류하였으며, 몇몇 교우들을 자신의 집에 받아들여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였고, 직접 교회 일에도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의 교리 지식은 교우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게 되었다.
1794년 말 중국인 주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정 아우구스티노는 자주 한양으로 올라가 성사를 받았고, 신부와 교우들을 도와 교회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또 오랫동안의 교리 연구를 바탕으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2권을 완성하였는데, 이 책은 주 신부의 승인을 받아 교우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주 신부는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하고 정 아우구스티노를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정 아우구스티노는 1800년에 고향 인근에서 박해가 시작되자, 가족을 데리고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교회 전체가 위험에 빠졌다.
정 아우구스티노는 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체포자 명단에 그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특히 박해 초기에 그의 책 상자가 관청에 압수되자, 조정에서는 곧바로 그를 체포해 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그는 음력 2월 11일에 체포되어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체포 이튿날부터 정 아우구스티노는 엄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이미 순교할 원의를 갖고 있던 그에게는 어떠한 유혹과 형벌도 소용없었다. 그는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오로지 천주교 교리가 올바르다는 것만을 설명하는 데 노력하였다.
“천주를 높이 받들고 섬기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 천주는 천지의 큰 임금이시요 큰 아버지이십니다. 천주를 섬기는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이는 천지의 죄인이며,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박해자들은 정 아우구스티노를 굴복시키려고 갖은 수단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교리는 오히려 박해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결국 조정에서는 의금부의 사형 선고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정 아우구스티노는 체포된 지 15일 만에 형장으로 정해진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사형수가 타는 수레에 올라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의 울음은 진정한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고, 당신들의 즐거운 웃음은 진정한 고통으로 변할 것이오.”
형장에 이르자 곧 참수형이 시작되었다. 이때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정인혁 타대오
- 가톨릭 성인 이름
鄭仁赫 Thaddeu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약재상,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
정인혁 타대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대오, 다두, 정 타대오, 정타대오, 타대우스, 타데오, 타데우스.
정인혁 타대오 자료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운영하며 생활하던 정인혁(鄭仁赫) 타대우스(Thaddaeus, 또는 타대오)는, 1790년 무렵 최필제 베드로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형제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제사도 폐지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정 타대오는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의 형제들과 몇몇 동료들은 엄한 형벌에 굴복하였으나, 정 타대오만은 형벌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자 관리들은 그의 가족이 그를 회유할 수 있도록 3일 동안의 기한을 두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정 타대오가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맏형은 형조로 들어가 ‘우리 집안에서는 앞으로 누구도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하였으며, 형조에서는 이를 믿고 정 타대오를 다시 부르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더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더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이에 가족이 그를 말리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였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는 최필공 토마스 형제들과 김이우 바르나바 등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정 타대오는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고 성사도 받았다. 또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회원이 되어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교우들에게 한글로 번역한 교회 서적들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로 정 타대오는,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있어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어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각각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은 조금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자신의 신앙만을 고백하였다. 그런 다음 최필제 베드로 등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형조에서 정인혁 타대오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너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묵은 악행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매월 7일에는 동료들과 함께 신부를 데려다 미사를 봉헌하고, 천주교 서적을 외웠으며, 여러 사람을 나쁜 길로 인도하고 온 세상을 미혹시켰다.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정인혁 타대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정찬문 안토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鄭燦文 Anthony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2-1867년 한국
정찬문 안토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정 안토니오, 정안토니오.
정찬문 안토니오 자료
경상도 진주 허유고개 중촌(현, 경남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의 양반 집안에서 1822년에 태어난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먼저 세례를 받고 입교한 아내로부터 뒤늦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니, 그의 나이 41세 때인 1863년이었다.
이후 정 안토니오는 3년 이상을 열심히 계명을 지키며 살았다. 그러던 가운데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사방에서 신자들에 체포되기 시작하였고, 그해 가을에 그도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일가친척과 평소에 알던 그 지방의 하급 관리가 와서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끌려가지 않도록 하겠다.” 하며 유혹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주로 끌려간 정 안토니오는, 25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주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 동안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은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의 아내는 밥을 빌어다 옥으로 가져가 그에게 넣어 주곤 하였다.
어느 날 정 안토니오는 다시 옥에서 끌려 나와 무수히 매를 맞았다. 그래도 그는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간 뒤, 그날 밤에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이때가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정찬문 안토니오가 순교한 뒤 그의 시신은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었다. 그의 조카들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고향 인근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몸이 굳지 않았고, 얼굴에 화색이 있어 산 사람 같았다고 한다.
정찬문 안토니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정철상 가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丁哲祥 Charle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
정철상 가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정 가롤로, 정가롤로,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정철상 가롤로 자료
정철상(丁哲祥) 카롤루스(Carolus, 또는 가롤로)는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부친이고, 1839년에 순교한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동생들이다.
정 가롤로는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또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집안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온 힘을 다하여 천주를 공경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천주를 사랑하는 데에만 힘썼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정 가롤로는 부친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서 성사를 받았다. 주 야고보 신부는 이후 경기도 광주에 있는 정 가롤로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 무렵 정 가롤로는 포천의 유명한 신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정 가롤로가 20세가량 되었을 무렵인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하였다. 이때 부친과 숙부들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자, 그는 그들을 따라가 의금부 인근에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하였다. 이를 본 관리들이 그에게 ‘주 신부의 거처를 밀고하여 부친의 목숨을 구하라.’고 하였지만, 그는 결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부친이 순교하던 4월 8일에, 정 가롤로는 의금부의 명에 따라 체포되어 형조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있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대면서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의 마음에는 천주를 위하여 죽겠다는 생각과 부친의 뒤를 따라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형조의 관리들은 문초를 하는 동안 정 가롤로의 생각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이에 그들은 그를 옥으로 데려가도록 하였고, 그는 한 달 이상을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등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이었다.
형조에서 정철상 가롤로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이러하였다.
“너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 집안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요사한 스승(곧 주문모 야고보 신부)을 보호하려고 송곳으로 찔러도 말하지 않았다. …… 주문모를 맞이하여 거처하도록 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불러서 모임을 가졌으며, 개나 돼지처럼 행동하면서 인간의 윤리를 무너뜨린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정철상 가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정태봉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鄭太奉 Paul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6-1839년 한국
정태봉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정 바오로, 정바오로, 파울로, 파울루스, 폴.
정태봉 바오로 자료
1796년 충청도 덕산에서 태어난 정태봉(鄭太奉) 바오로(Paulus)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오촌 당숙의 손에 자라났다. 그는 관명(冠名)이 ‘만보’였으나, ‘태봉’이라는 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1799년경 덕산에서 순교한 정산필 베드로 회장은 그의 사촌이다.
본디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였던 정 바오로는, 고아가 겪어야만 하였던 시련들을 인내와 체념으로 견디어 냈다. 또 자립할 수 있을 나이가 되자 전라도 용담 고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때에 정 바오로는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오고 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데 노력하였으며, 교회 서적을 펴면 끝까지 읽은 다음에야 덮을 정도로 교리를 배우려는 열망이 강하였다. 그러한 사이에 그의 마음에는 점차 순교의 뜻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는 순교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용담에서 거주한 지 3년이 지난 1827년에, 정해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정 바오로는 무모함을 피하고자 몸을 숨겼다. 그러나 그가 자주 집에 들른다는 것을 알고 있던 한 밀고자가 모든 사실을 관아에 일러바쳤고, 이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치게 되었다.
당시 포졸들이 가지고 온 영장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 바오로는 이를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포졸들을 따라 용담 관아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에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주 관아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정 바오로는 교우들을 밀고하거나 배교할 생각을 조금도 갖지 않았고, 이 사실을 깨달은 관장은 그를 투옥하도록 명령하였다. 정 바오로는, 이일언 욥, 김대권 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정 바오로가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게 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은 기뻐하면서 천주께 감사를 드렸다. 이때에 정 바오로는 자신의 마음이 심약한 것이 안심이 되지 않았으므로, 처형 때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옥졸들에게 부탁하기까지 하였다.
그런 다음 정태봉 바오로는 동료들과 함께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사형 판결이 있기 전에 형조에서 임금에게 올린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정태봉은 요사하고 황탄한 말에 빠져 이를 깊이 믿었으며, 제사를 폐지하고 지내지 않았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정태봉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조숙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趙淑 Pet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동정 부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6-1819년 한국
조숙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조 베드로, 조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조숙 베드로 자료
‘명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조숙(趙淑) 베드로(Petrus)는 1786년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숙’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이후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양친과 함께 강원도의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성장해 감에 따라, 조 베드로는 출중한 재능을 보였고, 성품 또한 착하고 친절하였으며, 나이에 비해 아주 점잖았다. 그러나 주변의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점차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7세 때 권천례 데레사를 아내로 맞이하면서이다.
혼인날 밤, 아내 권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조 베드로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뜻을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사람이 되었다.
이후 조 베드로 부부는, 남매처럼 지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그들의 신심은 날로 깊어져 기도와 복음 전파, 고신 극기 행위가 일상이 되었으며, 가난하게 살면서도 남을 위한 애긍에 열중하게 되었다. 이렇게 15년을 생활하는 동안, 조 베드로는 처음의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아내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조 베드로 부부는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성직자를 영입하려고 북경을 오갈 때마다 필요한 뒷바라지는 모두 그들 부부의 몫이었다. 정 바오로 성인은 교회 일을 위해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양에 있는 조 베드로 부부의 집에 머무르면서 모든 준비를 하였다. 당시 고 바르바라(또는 막달레나)라는 과부가 그 집에 살면서 그들 부부를 도와주었다.
그러던 가운데 정 바오로 성인이 다시 한 번 북경에 갔을 때, 포졸들이 수색 과정에서 우연히 조 베드로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이내 포졸들은 그의 집으로 몰려들어 그를 체포하였다. 이때 아내 권 데레사는 자원하여 남편을 따라나섰고, 고 바르바라도 그들 부부와 함께 투옥되었다. 그때가 1817년 3월 말경이었다.
문초가 시작되자, 관장은 조 베드로 부부를 유혹하면서 ‘배교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혹독한 형벌을 꿋꿋하게 참아 내었다. 관장은 몇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가하였지만, 그들 부부의 신앙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고통스러운 옥살이 중에도 조 베드로 부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특히, 아내 권 데레사는 남편 조 베드로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순교를 권면하였다.
조숙 베드로 부부와 고 바르바라는 이렇게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하였고,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격을 얻게 되었으니, 그들 셋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것은 1819년 8월 10일(음력 6월 20일) 이후로, 당시 조 베드로의 나이는 33세였다. 교우들은 한 달이 지나서야 그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조숙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조용삼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조용삼 Pet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독신,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
조용삼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조 베드로, 조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조용삼 베드로 자료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Petrus)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 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비웃기만 하였다. 그는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그 뒤 조 베드로는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조 베드로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스승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모든 사람이 조 베드로를 조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심을 칭찬해 주면서 차츰 신앙의 길로 인도해 나갔다.
조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려고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임에도 조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자 바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자, 박해자들은 화가 나서 더욱 세게 매질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박해자들은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다가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를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조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 마르티노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조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전처럼 그의 마음을 꺾을 수 있으리라 믿고는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무렵 조용삼은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으며, 이후로는 착한 행동과 아름다운 말로 여러 신자들을 감동시켰다.
조 베드로는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지막 형벌 때에 그는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조용삼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주문모 야고보
- 가톨릭 성인 이름
周文謨 Jame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2-1801년 한국
주문모 야고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제임스, 주 야고보, 주야고보.
주문모 야고보 자료
1752년 중국 강남의 소주부 곤산현에서 태어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Jacobus)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진리라고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후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신앙심이 깊은 데다가 조선 사람과 닮은 주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성무 집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주 야고보 신부는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약속된 장소로 가서 조선 교회의 밀사인 지황 사바와 박 요한을 만났다. 그러나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에 요동 일대에서 사목을 하다가 약속된 날짜에 다시 국경 마을로 가서 조선의 밀사들을 만났다. 그런 다음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그해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주 야고보 신부는 계동(현, 서울 종로구 계동 지역)에 있는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의 입국 사실이 탄로 나자, 그는 부랴부랴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반면에 주 야고보 신부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 그리고 집주인 최인길 마티아 등은 그날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모두 순교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주 야고보 신부는 아주 비밀리에, 그러나 열심히 성무를 집행하였다.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었으며,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교리서도 집필하였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가 모든 것을 앗아 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연이어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주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주 야고보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하였다가, ‘나의 양 떼와 운명을 같이하여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하였다.
1801년 4월 24일(음력 3월 12일), 주 야고보 신부는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재판이 열리고 문초가 시작되었으나, 그는 형벌 가운데서도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답하였다.
“제가 월경죄(越境罪, 몰래 국경을 넘나드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황을 따라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학문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 남에게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십계에서 엄금하는 바이므로, 절대로 교회 일을 밀고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박해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말을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 야고보 신부에게 군문효수형(軍門梟首形, 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에 매어 달던 형벌)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신부는 형장으로 정해진 한강 근처의 새남터로 끌려갔다. 그곳에 도착한 뒤, 주 야고보 신부는 자신의 사형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고 나서 조용히 머리를 숙여 칼날을 받으니, 그때가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순교할 당시 다음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늘이 본디 청명하였는데, 홀연히 어두운 구름이 가득 차고 갑자기 광풍이 일어, 돌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곧바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서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지황 사바
- 가톨릭 성인 이름
池璜 Saba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밀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7-1795년 한국
지황 사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사바스, 지 사바, 지사바.
지황 사바 자료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 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 아가타와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윤 바오로는,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스승의 동생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1789년에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이가 바로 윤 바오로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성격이 온순한 데다가 심지가 굳고 학식이 높았으며 교리에도 밝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윤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주교에게 보내는 신자들의 서한을 옷 안에 숨긴 뒤, 1789년 10월 조선을 떠나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북당에 있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남당에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또 윤 바오로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라자로회의 로오(N. J. Raux, 羅) 신부에게 조건부 세례를 받고, 구베아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아울러 구베아 주교에게서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윤 바오로가 1790년 봄에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일 때문에 윤 바오로는 그해에 다시 한 번 북경을 다녀와야만 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다음 해, 조선 신자들과 한 약속에 따라 후안 도스 레메디오스(Juan 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 신부는 조선 밀사들과 만나지 못함으로써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이렇게 1791년에 있었던 첫 번째의 영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바로 그해 말에 일어난 박해로 이러한 노력은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 바오로는 실망하지 않고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를 영입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윤 바오로는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지홍’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지황(池璜) 사바(Sabas)는 1767년에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험이나 궁핍, 고통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1793년에,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지 사바와 박 요한은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고 윤 바오로는 그곳에 남았다.
북경에 도착한 지 사바는 얼마 안 있어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지 사바의 신심에 감명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뒷날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지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을 통해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한 데다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 하였으므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져야만 하였다.
지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났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 바오로와 함께 주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1765년에 태어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 세례자 요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 이냐시오는 그의 동생이다. 최 마티아는 이승훈 베드로가 신앙을 전파하고자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최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윤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서 1795년 초에 주 야고보 신부를 맞이한 최 마티아는,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밀고자에 의해 그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 야고보 신부는 최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나와 여회장인 강완숙 골룸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에 앞서 최 마티아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고자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렸다. 그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이런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장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체포된 지 얼마 안 있어 최 마티아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에 놀란 포졸들은 다시 주 신부의 행방을 쫓으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최 마티아는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고, 그의 입국을 도운 밀사인 윤 바오로와 지 사바도 체포되고 말았다.
윤 바오로와 최 마티아와 지 사바는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들의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굳은 인내와 결심, 그리고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들은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이제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려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최 마티아는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이었다. 당시 윤 바오로의 나이는 35세, 지 사바의 나이는 28세, 최 마티아의 나이는 30세였다. 박해자들은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밀사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윤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 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지황 사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최봉한 프란치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崔奉漢 Franci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5?-1815년 한국
최봉한 프란치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최 프란치스코, 최프란치스코,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최봉한 프란치스코 자료
‘여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충청도 홍주 다래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진강’이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하였다. 1815-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서석봉 안드레아와 구성열 바르바라 부부는 그의 장인과 장모였다.
최 프란치스코는, 공주 무성산으로 이주해 살던 중에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과 누이와 함께 상경하였다. 그의 부친은 이 무렵에 사망하였다.
한양으로 올라간 최 프란치스코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집에 살면서 황사영 알렉시오, 최필공 토마스 등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던 가운데 모친이 사망하자, 그는 누이를 정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그대로 살게 하고, 자신은 시골로 내려갔다. 이때 그는 동정을 지키며 살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친척들의 권유로 마음을 바꾸어 서석봉 안드레아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최 프란치스코는 가족을 데리고 장인 부부와 함께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에 1815년 예수 부활 대축일, 밀고자를 앞세우고 노래산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체포될 당시에 그는 동료들에게 ‘문초를 당하게 되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뒤집어씌우라.’고 하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더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만 하였다.
경주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최 프란치스코는 장모인 구 바르바라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보고는 끊임없이 그녀를 권면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형벌 가운데에서도 항상 겸손하고 꿋꿋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대구로 이송된 최 프란치스코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여러 차례 정신을 잃기도 하였으나, 그의 열심과 용기만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계속되는 형벌을 이겨 내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가 갓 넘었다. 또 그가 순교한 시기는 1815년 음력 5월경이었다.
최봉한 프란치스코가 순교하기 전에 대구 감사가 그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최봉한은 옥에 갇혀 있는 천주교 신자들의 우두머리다.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서적들을 수습해 가지고 경상도 산골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한마을을 이루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르치며 살았으니, 지극히 엄한 법률로 다스려야 한다.”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최여겸 마티아
- 가톨릭 성인 이름
崔汝謙 Matthia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3-1801년 한국
최여겸 마티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띠아, 마지아, 마티아스, 최 마티아, 최마티아.
최여겸 마티아 자료
전라도 무장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최여겸(崔汝謙) 마티아는, 일찍이 윤지충 바오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또 혼인한 뒤에는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를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었다. 당시 그의 처가는 충청도 한산에 있었는데, 그가 이 루도비코 곤자가를 만난 것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후, 무장으로 돌아온 최 마티아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또 자신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이웃에게 전파하는 데 힘써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최 마티아는 일단 한산 처가로 피신하였다. 이때 무장에서는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그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결과, 최 마티아는 4월 13일 한산에서 체포되어 일단 그곳에서 문초를 받고, 감사의 명에 따라 무장으로 이송되었다.
최 마티아가 무장 관아에 이르자, 관장은 곧장 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문초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어떠한 형벌로도 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하도록 하였다. 이곳에서도 최 마티아는,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옥중에서 열렬한 신자인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와 김천애 안드레아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최 마티아와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 마티아는 고향인 무장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곳 개갑 장터(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형조에서 최여겸 마티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최여겸은 처음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이후로는 이존창을 따르면서 교리를 독실히 믿고 익혔다. 또 그 교리로 남들을 속여 미혹시키고, 널리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자신도 망치고 남들도 망치게 하였으니, 만 번 죽여도 아깝지 않다.”
최여겸 마티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최인길 마티아
- 가톨릭 성인 이름
崔仁吉 Matthia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역관, 밀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5-1795년 한국
최인길 마티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띠아, 마지아, 마티아스, 최 마티아, 최마티아.
최인길 마티아 자료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 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 아가타와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윤 바오로는,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스승의 동생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1789년에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이가 바로 윤 바오로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성격이 온순한 데다가 심지가 굳고 학식이 높았으며 교리에도 밝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윤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주교에게 보내는 신자들의 서한을 옷 안에 숨긴 뒤, 1789년 10월 조선을 떠나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북당에 있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남당에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또 윤 바오로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라자로회의 로오(N. J. Raux, 羅) 신부에게 조건부 세례를 받고, 구베아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아울러 구베아 주교에게서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윤 바오로가 1790년 봄에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일 때문에 윤 바오로는 그해에 다시 한 번 북경을 다녀와야만 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다음 해, 조선 신자들과 한 약속에 따라 후안 도스 레메디오스(Juan 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 신부는 조선 밀사들과 만나지 못함으로써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이렇게 1791년에 있었던 첫 번째의 영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바로 그해 말에 일어난 박해로 이러한 노력은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 바오로는 실망하지 않고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를 영입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윤 바오로는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지홍’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지황(池璜) 사바는 1767년에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험이나 궁핍, 고통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1793년에,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지 사바와 박 요한은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고 윤 바오로는 그곳에 남았다.
북경에 도착한 지 사바는 얼마 안 있어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지 사바의 신심에 감명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뒷날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지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을 통해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한 데다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 하였으므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져야만 하였다.
지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났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 바오로와 함께 주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1765년에 태어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 세례자 요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 이냐시오는 그의 동생이다. 최 마티아는 이승훈 베드로가 신앙을 전파하고자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최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윤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서 1795년 초에 주 야고보 신부를 맞이한 최 마티아는,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밀고자에 의해 그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 야고보 신부는 최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나와 여회장인 강완숙 골룸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에 앞서 최 마티아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고자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렸다. 그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이런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장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체포된 지 얼마 안 있어 최 마티아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에 놀란 포졸들은 다시 주 신부의 행방을 쫓으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최 마티아는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고, 그의 입국을 도운 밀사인 윤 바오로와 지 사바도 체포되고 말았다.
윤 바오로와 최 마티아와 지 사바는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들의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굳은 인내와 결심, 그리고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들은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이제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려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최 마티아는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이었다. 당시 윤 바오로의 나이는 35세, 지 사바의 나이는 28세, 최 마티아의 나이는 30세였다. 박해자들은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밀사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윤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 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최인철 이냐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崔仁喆 Ignatiu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
최인철 이냐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최 이냐시오, 최이냐시오.
최인철 이냐시오 자료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철(崔仁喆) 이냐시오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초기에 형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1795년 포도청에서 순교한 최인길 마티아가 그의 형이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최 이냐시오는 형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끌려갔다. 그때 형조에는 이미 여러 동료들이 끌려와 있었다. 이후 최 이냐시오는 동료들과 함께 협박과 회유, 형벌을 번갈아 받아야만 하였다. 그 과정에서 형 최인길과 몇몇 신자들은 이에 굴복하였지만, 최 이냐시오만은 끝까지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그에게 뉘우칠 기회를 주려고 3일 동안 집으로 돌려보냈다.
최 이냐시오가 집으로 돌아오자 늙은 어머니와 형제들은 눈물로 호소하면서 배교를 권하였다. 이에 그는 다시 형조로 들어가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돌려 “비록 매를 맞아 죽는다고 하더라도, 천주교를 사악한 종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임금의 회유를 받아들여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에 석방되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최 이냐시오는 자신의 잘못을 깊게 뉘우쳤다. 그리고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형과 함께 교회 일을 도우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특히 형 최인길은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영입하는 데 힘썼으며, 신부의 거처를 마련하려고 새로 집을 사기도 하였다. 그렇게 주 야고보 신부의 피신을 돕다가 자신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형이 순교한 뒤, 최 이냐시오는 교회 지도층의 일원이 되어 더욱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그는 신주를 불살라 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위험할 때마다, 그의 피신을 돕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최 이냐시오는 외숙모의 집으로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었다. 이어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단언하였다. 오히려 그는 관리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 가면서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역설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죄목을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 1791년에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저버린 죄
- 1795년에 형이 죽은 뒤에도 천주교를 신봉한 죄
- 동료들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널리 전파한 죄
- 체포된 후에도 천주교 교리를 훌륭하다고 설명한 죄
-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그를 섬긴 죄
이에 따라 최인철 이냐시오는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이었다.
최인철 이냐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최창주 마르첼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崔昌周 Marcellinu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49-1801년 한국
최창주 마르첼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최 마르첼리노, 최마르첼리노.
최창주 마르첼리노 자료
‘여종’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40대 초반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온 가족을 입교시키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광주로 압송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는 그의 딸이다.
이후 최 마르첼리노는 자신이 지은 죄를 깊게 뉘우쳤고, 순교의 은총을 입어 죄를 씻어 낼 방도를 구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가족과 이웃 교우들을 힘써 권면하였으며, 두 딸을 모두 교우에게 출가시켰다. 그 가운데 하나는 1801년 여주에서 순교한 원경도 요한의 아내이고, 다른 하나는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의 며느리 최 바르바라이다.
여주 지방에서는 1800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다시 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사위인 원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최 마르첼리노의 아내는 그에게 피신할 것을 간청하였고, 그의 어머니 또한 피신을 종용하였다. 이에 그는 한양으로 피신하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집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순교를 다짐했던 이전의 마음을 되찾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으며, 그날 밤에 체포되어 여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관장은 곧바로 최 마르첼리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알고 있는 천주교 신자를 밀고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에서는 누구에게라도 해를 끼치는 것을 금하고 있으니, 한 사람도 고발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밀고하기를 거부하였다. 이에 그는 다시 옥으로 끌려가 원 요한과 이 마르티노 등과 함께 갇히게 되었다.
이후 최 마르첼리노의 옥중 생활은 6개월이나 계속되었다. 또 10월에는 경기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형벌을 받았지만, 그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1801년에 들어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이때 최 마르첼리노는 신자들을 대표하여 “모든 사람들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신 참 천주를 알고, 그분을 섬기는 행복을 받았으니, 저희는 그분을 배반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제 형벌은 점점 더 가혹해져 갔다. 그럼에도 최 마르첼리노는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를 권면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들을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는 최후 진술을 받아서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최 마르첼리노는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경기 감사가 조정에 보고한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최후 진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최창주는 (천주라는 큰 부모가 있다 하여) 제 아버지를 진정한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아버지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말할 정도로 아주 흉악합니다. 또 모진 형벌을 당하면서도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지 않았고, 끝내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을 고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인륜과 도덕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최창주 마르첼리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최창현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崔昌顯 Joh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회장, 번역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9-1801년 한국
최창현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최 요한, 최요한, 한스, 후안.
최창현 요한 자료
최창현(崔昌顯) 요한(Joannes)은 1759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입정동에서 살았다. 호는 ‘관천’이었으며, 1795년에 순교한 최인길 마티아가 비록 그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집안 아저씨뻘이 된다.
1784년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한 최 요한은 곧바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였다. 글을 잘 알았던 그는 한문으로 된 교회 서적을 조선말로 번역하는 데 열중하였다. 이때 그가 번역한 책들은 한문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평온한 마음과 조심스러운 행동을 지녔으며, 모든 일을 부지런하면서도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지도층 신자들은 최 요한을 총회장 역할을 하도록 추대하였다. 그는 언제나 교우들이 타당하게 교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쳤고, 교회 일을 열심히 도왔다. 특히 그의 교리 설명은 유명하였으며, 덕망도 뛰어나 모든 교우가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믿게 되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 이후, 일부 지도층 신자들이 교회를 멀리하였는데도 최 요한만은 꿋꿋하게 교회를 지켜 나갔다. 그는 동료들과 의논하여 성직자를 영입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이 일을 앞장서서 추진하였다.
1794년 말 주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최 요한은 정식으로 회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주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고 그에게 성사를 받았으며, 언제나 미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정성스럽게 준비하였다. 또 그는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직후, 최 요한은 다른 교우의 집으로 잠시 피신하였다. 그러나 병 때문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사이 밀고자가 데리고 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처음에 그는 포도청으로 끌려갔으나,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있었으므로, 곧바로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의금부에서 처음 문초를 받을 때, 최 요한은 한때 마음이 약해져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일을 밀고하지는 않았다.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았는데, 형벌을 받으면서 용맹한 마음이 되살아 났고, 이내 그는 전날의 약했던 마음을 진실히 뉘우치며,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저로서는 지목하여 말할 교우가 없으니, 죽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제 천주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전날에 천주를 배반하였던 것을 통절히 뉘우치면서 죽고자 할 따름입니다. 지목하여 말할 교우는 없습니다.”
최창현 요한은 끝으로 ‘자신이 천주교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최창현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최필공 토마스
- 가톨릭 성인 이름
崔必恭 Thoma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약재상,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44-1801년 한국
최필공 토마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마, 최 토마스, 최토마스, 토머스.
최필공 토마스 자료
1744년 한양의 의원 집안에서 태어난 최필공(崔必恭) 토마스는 1790년에 사촌 동생인 최필제 베드로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그의 조상들 중에는 조정에서 의관으로 봉직한 이들도 있었지만, 토마스는 관직도 없는 데다가 가난하여 그때까지 결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품만은 솔직하고 너그러웠다.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최 토마스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큰 열성을 보였다. 그는 공공연하게 교리를 전파하고 다녔으며, 이로 말미암아 박해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최 토마스는 몇몇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때 함께 체포된 동료들은 대부분 배교하고 석방되었지만, 그는 교리를 설명하면서 목석처럼 신앙을 고수하였다. 그러자 관리들은 이 사실을 정조 임금에게 보고하였고, 임금은 ‘어떻게 해서든 그가 천주교 신앙을 버리게 하라.’고 명하였다.
박해자들은 온갖 수단을 써서 최 토마스를 배교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하루는 비신자인 그의 숙부와 동생들이 옥으로 찾아와 울면서 그의 마음을 되돌려 보려고 하였으나 소용없었다. 이때 사촌 동생인 최필제 베드로는 거짓으로 최 토마스의 자백서를 써서 박해자들에게 제출하기도 하였다. 또 정조 임금은 관리들에게 명하여 ‘최필공을 옥에 가두되, 특별히 보살펴 주도록 하라.’고까지 하였다. 결국 그는 이러한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
석방된 뒤 최 토마스는 평안도 지방의 심약(조정에 올리는 약재를 검사하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또 임금의 도움으로 혼인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 토마스의 마음에는 여전히 천주 신앙에 대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3년 뒤, 그는 심약 자리를 사임하고는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는, 1794년 말 주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주 신부를 찾아가 성사를 받고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최 토마스는 1799년 8월에 다시 체포되어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1791년에 마음이 약해졌던 사실을 뉘우치면서 ‘그것은 본심이 아니었다.’고 고백하였다. 정조 임금은 다시 한 번 그의 마음을 되돌려 보려고 하였지만, 이번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용감하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관리들이 토마스를 참수형에 처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임금은 이를 거부하고 그를 석방해 주도록 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음력 12월 17일, 형조에서는 최 토마스를 다시 체포하였다. 이틀 뒤에는 사촌 동생인 최필제도 체포하여 같은 옥에 가두었다.
최 토마스는 이후, 이전의 행실 때문에 누구보다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의 신앙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한 믿음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단언하였다.
얼마 안 되어 최 토마스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미 나이가 많은 데다가 형벌과 옥고로 인해 사형장으로 가는 수레에 오를 때에는 거의 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사형장에 이르자 그의 얼굴에는 기쁨의 빛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칼날이 그의 목을 비켜가면서 피가 손으로 흐르자, 최필공 토마스는 이것을 보면서 “보배로운 피!” 하고 외쳤다.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7세였다.
최필공 토마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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