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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여자세례명 강경복 수산나, 강완숙 골룸바, 구성열 바르바라, 권천례 데레사, 김연이 율리아나,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문영인 비비안나, 보나, 심아기 바르바라, 심조이 바르바라, 오 마르가리타, 우르술라 레도호프스카, 윤운혜 루치아, 윤점혜 아가타, 이 안나,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이성례 마리아, 이순이 루갈다, 이시임 안나, 이조이 막달레나, 정복혜 칸디다, 정순매 바르바라, 최 비르지타, 최조이 바르바라, 한신애 아가타, 총 26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2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5가지 (6/6)
5월 29일 남자세례명 목록 (6/6)
- 최필제 베드로
- 최해성 요한
- 치릴로
- 코논
- 한덕운 토마스
-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 허인백 야고보
- 현계흠 플로로
-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홍낙민 루카
- 홍익만 안토니오
- 홍인 레오
- 홍재영 프로타시오
- 홍필주 필립보
- 황일광 시몬
1. 최필제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崔必悌 Pet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약재상,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0-1801년 한국
최필제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최 베드로, 최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최필제 베드로 자료
최필제(崔必悌) 베드로(Petrus)는 1770년 한양의 의원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는 1801년에 순교한 최필공 토마스의 사촌 동생으로, 1790년에 그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본래 진실하고 후덕한 성품을 지녔던 최 베드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질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또 그가 파는 약은 값이 싼 데다가 약재도 좋아 모두가 신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촌인 최 토마스는 어떠한 일을 할 때마다 그에게 의견을 들어 본 다음에 실행에 옮길 정도였다.
최 베드로는 천주교에 입교한 뒤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때 최 토마스의 아우 중에서 신자들을 욕하면서 다니는 이가 있었는데, 그도 ‘최필제만은 본받을 만하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최 베드로도 사촌인 최 토마스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최 토마스만큼 신앙이 굳지는 못하여 일찍 박해자들에게 굴복하고 석방되었다. 또 석방된 뒤에는 거짓으로 최 토마스의 자백서를 써서 관청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후 최 베드로는 다시 교회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교회 일을 돕거나 교리를 전파하는 데 열중하였고, 신입 교우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놓고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자 그를 찾아가 성사를 받았으며, 자주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러다가 음력 1800년 12월 19일 자신의 집에서 신입 교우들과 모임을 갖던 중에 체포되어 형조의 옥에 갇혔다.
최 베드로가 다시 체포되자, 그의 늙은 부친은 놀란 나머지 병이 나서 죽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의 부친은 비신자였는데,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이때 최 베드로는 부친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 달라고 형조에 요청하였다. 이윽고 옥에서 나오게 된 그는 장례를 치른 뒤, 곧바로 형조로 가서 다시 옥에 갇혔다. 그때 형조의 관리들은 그에게 넌지시 도망할 것을 귀띔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옥으로 돌아오기에 앞서 그는 몇몇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순교의 뜻을 밝혔다.
“나는 마귀에게 원수를 갚고, 전에 내가 배교했던 일을 보속하려 하네. 나의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자 내 머리를 바치는 것일세.”
최필제 베드로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차례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최필제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최해성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崔海成 Joh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1-1839년 한국
최해성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최 요한, 최요한, 한스, 후안.
최해성 요한 자료
‘양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최해성(崔海成) 요한(Joannes)은, 1839년에 순교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먼 친척이다. 그의 집안은 본디 충청도 홍주 다락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았는데,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그의 조부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온 가족이 그 지방으로 가서 생활하였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도 이곳이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 성장한 최 요한은 성격이 온순하고 정직하였다. 그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자 가족과 함께 강원도 원주의 서지(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 2리)로 이주하였고, 이곳에 작은 교우촌을 이루었다.
최 요한은 천주교의 모든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뛰어난 열성을 보였으며, 언제나 자신의 영혼을 보살피는 일에 전심하였다. 그는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애긍을 잊지 않았다. 또 자주 교우들을 격려하면서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서지 교우촌에 선교사가 와서 성사를 베풀 때면, 최 요한은 말할 수 없는 열심에 불탔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이러한 덕행 때문에 그는, 그 마을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견진성사를 받은 뒤에는, 성령 칠은의 특은을 충만히 받은 징표가 나타났으며, 이내 그의 마음은 순교의 뜻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 요한은 먼저 부모와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교회 서적을 가져오려고 다시 집으로 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쇠도리깨로 그를 때리면서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의 몸은 이내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눌 수조차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그는 영혼의 눈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원주 관장 앞으로 끌려간 최 요한은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형제들을 고발할 수 없다.’고 용감하게 대답하였다. 관장이 ‘네가 사악한 종교를 믿는다니 정말이냐?’라고 하자, 그는 “저는 사악한 종교를 믿지는 아니합니다. 하늘의 주님을 섬기는 천주교를 믿을 따름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최 요한은 일단 옥에 갇혔다가 며칠 뒤에 다시 끌려 나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여러 가지 말로 유혹하면서 배교를 권유하자, 그는 이를 거부하면서 “원주 고을을 다 주신다고 해도 거짓말을 할 수 없고,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후에도 최 요한은 자주 옥에서 끌려 나가 감사나 영장 앞에서 수없이 많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 와중에도 그는 불평하지 않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도움만을 청하였다. 그는 살이 너덜너덜해지고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매를 맞아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곤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다시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게 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지금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의 목숨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제 영혼은 영원히 죽을 것이므로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임금과 의(義)를 위해 죽겠다고 약속하고 나서 배반하는 백성이 있다면, 그는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의 위대한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맹세한 제가 어찌 형벌을 두려워하여 이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관장은 화가 나서 그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최 요한의 몸은 다시 피투성이가 되었고, 살은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붙은 그의 영혼은 기쁨으로 용약하였다.
옥으로 돌아온 최해성 요한은, 일시적으로 유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 주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림으로써, 인성의 나약함을 억누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기쁨과 평화가 다시 그의 마음에 찾아왔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침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9월 6일(음력 7월 2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최해성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치릴로
- 가톨릭 성인 이름
Cyri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1년? 카이사레아
치릴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치릴로 자료
소년 순교자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외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우상에게 기도하거나 제물을 바치지 않자 그를 집에서 쫓아내었다고 한다.
이 일은 가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에서 일어났는데도, 그 도시의 총독은 그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하였다. 총독이 신앙을 버리면 살려 주겠다고 종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완강히 거부하자, 총독은 칼로 그의 목을 베어 살해하였다고 전해온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코논
- 가톨릭 성인 이름
Con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75년
코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꼬논.
코논 자료
성 코논은 그의 아내가 죽은 후에 은퇴하여 은둔생활에 들어가며 자신의 아들인 성 코논 2세는 교회에서 봉사하도록 하였다. 12살의 어린 코논은 이미 독서자로 봉사했고 나중에 부제로 서품되었다.
얼마 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에 반대하는 칙령을 내렸고, 그의 관리 도미티아누스가 소아시아의 이코니움(Iconium)으로 왔다. 두 명의 성 코논은 처음으로 재판관 앞에 끌려와 불신앙을 강요받았다.
관리는 덕망 있는 노인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 왜 그가 그토록 엄격한 고행의 삶을 사는지 물었다. 성 코논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세상의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은 기쁨과 편안함을 좋아하나, 하느님의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나의 소망이라면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을 끝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통치에 들어가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약한 불로 굽는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후에 나폴리(Napoli) 부근 아체라(Acerra)에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봉헌된 성당으로 옮겨 안치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한덕운 토마스
- 가톨릭 성인 이름
韓德運 Thoma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2-1802년 한국
한덕운 토마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마, 토머스, 한 토마스, 한토마스.
한덕운 토마스 자료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韓德運)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 바오로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바로 그 이듬해 윤 바오로는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한 토마스는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그러던 가운데 한 토마스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성사의 은총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나려고 하였지만, 끝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1800년 10월 한 토마스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럴 때면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이듬해 초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교회와 교우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한 토마스는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 루카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이때 그는 놀라고 비통한 마음으로 그 시신에 애도를 표하였다. 그런 다음, 그의 아들인 홍재영 프로타시오를 보고는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홍 프로타시오는 그 뒤 다시 신앙을 되찾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1839년에 순교하였다.
한 토마스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 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하였다. 사실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한 토마스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고,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을 밀고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한덕운 토마스가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덕운 토마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 가톨릭 성인 이름
韓正欽 Stanislau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선생,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6-1801년 한국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스타니슬라우스, 쓰따니쓸라오, 쓰따니쓸라우스, 한 스타니슬라오, 한스타니슬라오.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자료
한정흠(韓正欽) 스타니슬라우스(또는 스타니슬라오)는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뒷날 전주에 살던 먼 친척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으로 가서, 그 자녀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유항검 덕분이었다.
유 아우구스티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한 스타니슬라오는, 기쁜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여 열심히 실천해 나갔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그리고 훗날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전주를 방문하였을 때 그에게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한 스타니슬라오는 유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그해 3월에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열심인 신자 김천애 안드레아와 최여겸 마티아를 동료로 맞이하게 되었다.
한 스타니슬라오와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지만, 그들의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 한 스타니슬라오는 고향인 김제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곳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6일(음력 7월 1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형조에서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한정흠은 제사를 폐지하였으며, 천당으로 일찍 가지 못한 것을 오히려 한탄하였다. 그는 죽음을 삶처럼 보았고, 그릇된 도리로 많은 이를 유혹하였다. 그러니 죽음을 면할 수 없는데도 ‘예전부터 이단을 배척한다고 형벌을 가하거나 죽이면서까지 금지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방자하게 발악한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한정흠 스타니슬라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허인백 야고보
- 가톨릭 성인 이름
許仁伯 Jame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농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2-1868년 한국
허인백 야고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제임스, 허 야고보, 허야고보.
허인백 야고보 자료
허인백(許仁伯) 야고보(Jacobus)는 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다가 24세 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으며, 아주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여 교우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
허 야고보는 아내 박조예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정결을 지키고자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으며, 고신 극기는 물론, 겸손과 인내의 덕을 쌓는 데에도 노력하였다. 또 애긍에 힘써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1860년에 경신박해가 일어난 뒤, 허 야고보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무수히 매를 맞고, 언양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그리고 옥에 갇혀 50여 일을 지낸 뒤에 경주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도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기에 8개월을 옥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허 야고보는 울산의 죽령(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산속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김종륜 루카를 만나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고, 나무 그릇을 만들어 팔아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처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그는 묵상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자주 순교의 원의를 드러내곤 하였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전국 각지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었을 때도 죽령 교우촌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허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끌려갔다. 이때 그는 가족에게 이르기를 “나를 위해 기도하거라. 그리고 바르바라 성녀의 순교 행적을 기억하도록 하거라.” 하고 당부하였다.
경주 진영에 이르자, 곧 문초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허 야고보는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을 뿐, 천주교 서적이 있는 곳을 대거나 다른 신자를 밀고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관장은 화가 나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내 그의 몸에서는 피가 나고 다리뼈가 드러나게 되었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허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였기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중구 남외동)로 끌려 나가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김종륜 루카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순교 당시에 허인백 야고보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아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허인백 야고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현계흠 플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玄啓欽 Floru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약재상,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3-1801년 한국
현계흠 플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플로루스, 현 플로로, 현플로로.
현계흠 플로로 자료
‘사수’ 혹은 ‘계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현계흠(玄啓欽) 플로루스(또는 플로로*)는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많은 역관을 배출하였으나, 그는 역관의 길을 택하지 않고 약방을 운영하며 살았다. 1846년 순교자 현석문 가롤로 성인이 그의 아들이며, 1839년 순교자 현경련 베네딕타 성녀가 그의 딸이다.
현 플로로는,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살다가, 1791년 신해박해로 체포된 다음에 석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고, 이후로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현 플로로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또 손경윤 제르바시오, 김이우 바르나바, 정인혁 타대오 등과 함께 자주 신앙 집회를 가졌고, 신입 교우들을 인도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주 야고보 신부가 박해로 피신을 해야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집은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6회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하부 조직이며 비밀 집회소였다.
현 플로로는 1797년 9월, 아우가 살고 있는 경상도 남쪽의 동래 지방에 간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마침 그 지역에 나타난 영국 배를 보게 되었는데, 상경한 뒤에 황사영 알렉시오를 만나게 되자 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서 교우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을 때, 현 플로로는 기회를 틈타서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온 일가친척들이 시달림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4월경에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포도청에 자수하였다. 이후, 그는 포도청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교회에 해가 되는 일은 조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현계흠 플로로는 10월 초까지 포도청의 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다가 황사영의 문초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게 되자,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으며, 1801년 12월 10일(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현계흠 플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 현계흠의 세례명은 한자로 ‘불록’이고 여태까지 ‘바오로’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로 이는 갈리아 지방의 주교 플로로(Florus)로 밝혀졌다(방상근, “1801년 순교자 현계흠의 생애와 세례명”, “교회와 역사”, 2009년 3월호, 30-32).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가톨릭 성인 이름
洪敎萬 Francis Xavi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학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38-1801년 한국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사베리오, 사베리우스, 사비에르,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자료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ianciscus Xaverius, 또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한양 출신으로, 훗날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지내고 있었으며, 그도 높은 벼슬을 지낸 맏형과 함께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진사가 되었다. 1801년에 순교한 홍인 레오는 그의 아들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철상 가롤로는 그의 사위이다.
포천으로 이주해 사는 동안,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양근에 사는 고종사촌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을 드나들다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신앙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먼저 천주교에 입교한 아들 홍인에게서 교리에 대해 자세히 들은 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찾던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실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1794년 말 주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런 다음 비신자 친구들과의 교제를 끊고, 자신의 학식을 이용하여 더 깊이 교리를 연구하였다. 또 글을 잘 알지 못하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냉담자를 회두시키거나 교리를 알고자 찾아오는 이들을 권면하는 데 열중하였다. 포천 지역에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그의 이러한 열성 때문이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사돈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자신의 집에 숨겨 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 신자가 이 상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다가 박해자들에게 발각되었고, 이내 그의 이름도 박해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아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오래 피할 수 없음을 알고는 집으로 돌아왔고, 오래지 아니하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2월 14일,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곧장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위협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으며, 박해자들 앞에서 끊임없이 ‘천주교 교리가 진리’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실제로 박해자들이 오히려 그의 용감한 태도에 놀랄 정도였다.
“하느님은 천지의 큰 부모가 되시니, 어찌 큰 부모를 섬기지 않겠습니까? 또 큰 부모를 섬기는 천주교를 감히 사악한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천하의 진리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사악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후에도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끊임없이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홍낙민 루카
- 가톨릭 성인 이름
洪樂敏 Luk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지평,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1-1801년 한국
홍낙민 루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홍 루카, 홍루카.
홍낙민 루카 자료
홍낙민(洪樂敏) 루카(Lucas, 또는 루가)는 1751년에 충청도 예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와 한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리고 1776년에는 양근의 유명한 학자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제자가 되었으며, 4년 뒤에는 진사가 되고, 1788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서게 되었다. 1839년의 순교자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그의 아들이며, 1840년의 순교자 홍병주 베드로 · 홍영주 바오로 형제 성인과 1866년의 순교자 홍봉주 토마스는 그의 손자이다.
그에 앞서 홍 루카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또 한때는 가성직 제도의 신부로서 다른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한 적도 있었다. 이는 당시의 신자들이 성직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교리와 교회법을 잘 알지 못하던 상황에서 행한 잘못이었다. 다행히 이러한 행위는 오래 가지 않았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난 뒤, 홍 루카는 임금의 명에 따라 천주교 신앙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기도 생활을 계속하였고,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재(齋)를 지키기도 하였다.
1794년 말 주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다음 해, 홍 루카는 성사 받을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을묘박해가 일어나 체포되자, 두려운 나머지 천주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여기에서 그는 “천주교의 폐해는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므로 철저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홍 루카는 다시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神主)도 모시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천주교를 멀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홍 루카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두려운 나머지 처음부터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십계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라고 가르친 것은 옳다.”고 대답하였으며, 결코 동료들을 밀고하지 않았다.
혹독한 문초와 형벌이 계속되는 동안 홍 루카는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하여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이전에 보이지 않던 용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재판관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답변하였다.
“저는 천주교 신앙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억지로 사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10년 동안 이를 멀리하였으니 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제는 천주교를 버릴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지도 않겠습니다.”
이처럼 굳게 신앙을 증언한 홍낙민 루카는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홍낙민 루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홍익만 안토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洪翼萬 Anthony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2년 한국
홍익만 안토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홍 안토니오, 홍안토니오.
홍익만 안토니오 자료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하여 한양의 송현으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의 순교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서사촌(庶四寸) 동생이요, 홍필주 필립보와 이현 안토니오의 장인이다.
홍 안토니오는 1785년에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는 김범우 토마스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이승훈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연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다만,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폐지할 생각을 가졌으나, 주변 환경 탓에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1796년 홍 안토니오는 사위인 홍 필립보의 집에서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운 뒤, 자주 신부를 방문하여 성사를 받았다. 또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으며, 때때로 주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요 집회소였던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 안토니오는 안산과 여주로 피신해 다녔다. 그러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문초 과정에서 홍 안토니오는 교우들을 밀고하고 천주교를 배교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체포된 교우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이때 그가 재판관들 앞에서 대답한 내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었다.
“저는 제가 지은 죄가 용서받기 어려운 것임을 스스로 알면서도, 몇 달 동안 도망을 다니다가 비로소 체포되었습니다. ……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죽음밖에는 따로 진술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증언한 홍익만 안토니오는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새남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홍익만 안토니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홍인 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洪鏔 Leo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8-1802년 한국
홍인 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홍 레오, 홍레오.
홍인 레오 자료
홍인(洪鏔) 레오의 집안은 본디 한양의 이름 있는 집안이었으나, 그의 부친이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 한양에서 순교한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바로 그의 부친이다.
홍 레오의 가족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1791년경 그의 부친이 양근 땅에 살던 고종사촌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홍 레오는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는데, 오히려 부친보다 먼저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홍 레오는, 세속의 꿈을 모두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고 교리를 전하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면서 효성을 다하는 길은 부친을 신앙으로 이끄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는 부친의 의심을 풀어 드리고, 입교를 망설이는 부친을 설득하여 마침내 부친을 신앙으로 이끄는 데 성공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홍 레오는 부친과 함께 주 야고보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서오촌(庶五寸) 당숙인 홍익만 안토니오, 황사영 알렉시오 등과 함께 교류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또 부친과 같이 포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도 노력하였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 레오는 부친과 의논하여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받아 집 안에 숨겨 두었다. 그런데 한 신자가 이 상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다가 체포되면서 그들 부자의 이름이 박해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 무렵 홍 레오와 부친은 다른 곳으로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오래 숨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 집으로 돌아왔으며, 바로 그때 포졸들이 쳐들어와 그들 부자를 체포하였다. 이후 부친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한양으로, 홍 레오는 포천으로 각각 압송되었다.
이윽고 홍 레오는 포천에서 첫 번째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밀고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킨 뒤, 경기 감영을 거쳐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에 앞서 홍 레오의 부친은 한양으로 압송된 지 얼마 안 되어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홍 레오도 그 뒤를 이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나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포천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형조에서 홍인 레오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오랫동안 이를 믿어 왔다. 너의 아버지가 교리를 가르치고 너는 이를 배웠으며, 깊이 여기에 빠져 (교리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므로 경기 감영에서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 네가 저지른 죄의 실상을 보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홍인 레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홍재영 프로타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洪梓榮 Protas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0-1840년 한국
홍재영 프로타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쁘로따시오, 쁘로따시우스, 프로타시우스, 홍 프로타시오, 홍프로타시오.
홍재영 프로타시오 자료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우스(Protasius, 또는 프로타시오)는 충청도 예산의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충주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는 그의 부친이요, 1866년에 순교한 홍봉주 토마스는 그의 아들이다.
홍 프로타시오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 교리를 배웠다. 또 장성한 뒤에는 동료들과 함께 교회 활동에 참여하거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교리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로 체포된 뒤에는 부친과 같이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배교한 뒤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홍 프로타시오는 한동안 냉담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은총의 힘으로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이전의 잘못을 보속하려는 생각에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천주의 가르침에 따라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기도와 묵상 생활에도 열중하였다. 어떤 때는 너무나 오랫동안 꿇어앉아 기도를 한 탓에 걷기 어려울 정도가 된 적도 있었다. 또 일주일에 금식재를 세 차례나 지켰고, 어려운 교우들을 위해 열심히 자선을 베풀었다.
1832년 조정에서 유배자들에게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자, 광주 관장은 홍 프로타시오를 불러다 “이제 마음을 고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며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유혹을 물리쳤으며, 이후에도 그대로 광주에서 살았다.
이로부터 7년 뒤인 1839년에 이르러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홍 프로타시오의 마음에는 순교자들의 뒤를 따름으로써, 이전에 잃은 기회를 다시 찾겠다는 욕망이 가득하게 되었다. 또 그는 피신해 다니는 여러 교우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어 주고, 그들을 한 가족처럼 대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그의 집을 찾아와, 함께 있던 천주교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광주 관장은, 홍 프로타시오를 한 번 문초하고 나서, 다른 교우들과 함께 전주로 이송하라고 명하였다. 그때 읍내의 주민들 3-4백 명이 나와 “어떻게 의로운 사람을 이렇게 벌한단 말인가.” 하면서, 어떤 이들은 그를 붙잡고, 어떤 이들은 괴로움으로 울부짖기까지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날부터 홍 프로타시오는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밀고하는 것도, 주님을 배반하는 것도 모두 거부하였다.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형벌을 당하면서도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전주 감사는 홍 프로타시오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뒤,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오자, 감사는 다시 한 번 홍 프로타시오를 불러내 유혹해 보았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홍재영은 근본이 흉악한 종자로서 대대로 천주교를 신봉해 왔으며, 선교사를 청해 올 때에 힘을 기울였고, 천주교 서적을 베낀 것이 110여 권에 이르며, 수십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숨겨 주었다. 이처럼 죄악이 으뜸이 되므로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따라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홍필주 필립보
- 가톨릭 성인 이름
洪弼周 Philip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4-1801년 한국
홍필주 필립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비리버, 필리뽀, 필리뿌스, 필리포, 필리포스, 필리푸스, 필립, 필립부스, 필립뽀, 필립뿌스, 필립포, 필립푸스, 홍 필립보, 홍필립보.
홍필주 필립보 자료
홍필주(洪弼周) 필리푸스(Philippus, 또는 필립보)는 충청도 덕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1790년경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아명은 ‘문갑’(文甲)이다.
홍 필립보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을 아주 싫어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교리를 배워 입교한 계모 강완숙 골룸바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을 실천해 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아들 홍 필립보가 입교한 뒤로는 자신이 이해한 교리를 아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홍 필립보 또한 어머니의 열렬한 덕행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듬해에 신해박해를 겪고 나서, 홍 필립보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여전히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따라서 고향 집에서는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올라온 홍 필립보는 가족과 함께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795년 5월에 어머니 강 골룸바가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자, 이때부터 신부의 복사가 되어 여러 가지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또 홍익만 안토니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
이후, 홍 필립보는 자신의 집이 조선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자, 주 야고보 신부와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 어머니와 함께 이곳 곳으로 집을 옮겨 다녔다. 또 한편으로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회장을 비롯하여,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신심을 쌓아 갔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이름은 어머니 강 골룸바와 함께 점차 교회 안에 드러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홍 필립보의 이름은 일찍부터 박해자들의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고, 곧바로 그와 그의 어머니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을 체포하였다.
포도청으로 끌려간 홍 필립보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행방과 그동안의 행위를 조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혹독한 형벌이 계속되면서 그의 마음은 차츰 약해지게 되었다.
이때 조사를 받으러 가던 어머니 강 골룸바가 그를 보고는 “필립보야, 너는 어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머리 위에 임하시어 비추고 계심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그릇된 길로 가려고 하느냐?” 하고 권면하였다. 이에 그는 곧장 마음을 돌이켜 박해자들을 향해 ‘절대로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먼저 순교하였지만, 홍 필립보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조금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으며, 마침내는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런 다음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홍필주 필립보가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형조에서 말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계모와 한마음으로 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외국 사람(주문모 야고보 신부)을 기이한 재물과 같이 생각하여 아버지처럼 모셨으니, 그 죄가 대단히 큽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녀가 함께 모여 비밀 공동체를 이루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라면 비록 사형을 받을지라도 달게 여기겠습니다.”
홍필주 필립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황일광 시몬
- 가톨릭 성인 이름
黃日光 Simo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천민,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7-1802년 한국
황일광 시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사이먼, 시메온, 시므온, 황 시몬, 황시몬.
황일광 시몬 자료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黃日光) 시몬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아주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그에게 이러한 생활을 보상해 주시고자 놀랄 만한 지능과 열렬한 마음과 매우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을 주셨다.
황 시몬은 1792년 무렵 홍산 땅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에 우연히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접하자마자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다.
교우들은 황 시몬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를 애덕으로 감싸 주었다. 양반집에서도 다른 교우들과 똑같이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그는 농담조로 이렇게 이야기하곤 하였다.
“나의 이러한 신분에도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1800년 2월 황 시몬은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회장의 이웃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황사영 알렉시오, 김한빈 베드로 등 여러 교우들과 자주 교류하였다. 이제 그의 열심은 날로 더해져 모든 이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그 뒤, 정 아우구스티노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하자, 황 시몬도 아우와 함께 한양 정동으로 이주하여 땔나무를 해다 팔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또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교우들과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기쁨도 얻게 되었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황 시몬은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굳건하게 참아 냈을 뿐만 아니라, 재판관의 추상같은 호령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교를 ‘성스러운 종교’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천주교 신앙을 올바른 길로 생각하여 깊이 빠졌습니다. 이제 비록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어찌 배교하여 천주교 신앙을 저버리겠습니까?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그 결과, 황 시몬은 다리 하나가 부러지고 으스러질 정도로 잔인하게 매질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조정에서는 이와 함께 ‘황일광을 고향으로 보내 참수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황일광 시몬은 고향인 홍주로 이송되었다. 이때 그는 걸을 수조차 없어 들것에 실려 가면서도 본래의 명랑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또 아내와 아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그를 도우려고 따라오자, 그들 때문에 어떤 유혹을 당할까 두려워 절대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황일광 시몬은 홍주에 도착하는 곧바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는데,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황일광 시몬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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