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가롤로 르왕가, 갸비라 무소케, 다비노, 디오니시오, 라우렌시노, 루칠리아노, 루카 바아나바킨투, 리파르도, 모란도, 무가가 루보와, 무카사 키리와완부, 바오로, 브루노 세룬쿠우마, 아나톨리오 키리그과조, 아돌포 무카사 루디고, 아킬레오 키와누카, 안드레아 카치올리, 암브로시오 키부우카, 야고보 부자발야보, 요한 그란데, 음바가 투진데, 이사악, 제네시오, 체칠리오, 케빈, 클라우디오, 키지토, 페르젠시노, 히파시오, 총 29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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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6월 3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9가지
6월 3일 남자세례명 목록
- 가롤로 르왕가
- 갸비라 무소케
- 다비노
- 디오니시오
- 라우렌시노
- 루칠리아노
- 루카 바아나바킨투
- 리파르도
- 모란도
- 무가가 루보와
- 무카사 키리와완부
- 바오로
- 브루노 세룬쿠우마
- 아나톨리오 키리그과조
- 아돌포 무카사 루디고
- 아킬레오 키와누카
- 안드레아 카치올리
- 암브로시오 키부우카
- 야고보 부자발야보
- 요한 그란데
- 음바가 투진데
- 이사악
- 제네시오
- 체칠리오
- 케빈
- 클라우디오
- 키지토
- 페르젠시노
- 히파시오
1. 가롤로 르왕가
- 가톨릭 성인 이름
Charles Lwang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0?-1886년 우간다
가롤로 르왕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르완가,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가롤로 르왕가 자료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 또는 가톨로 르왕가)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우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우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푸스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우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우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티아누스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우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Matthias Mulumba)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갸비라 무소케
- 가톨릭 성인 이름
Gyavira Musok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9/70?-1886년 우간다
갸비라 무소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비라, 무소께.
갸비라 무소케 자료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우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 성 아킬레우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푸스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우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우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티아누스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우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Matthias Mulumba)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다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Dav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51년 루카
다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비누스.
다비노 자료
성 다비누스(또는 다비노)는 아르메니아(Armenia) 출신으로 로마(Roma)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향한 순례여정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는 위중한 병에 걸려 이탈리아의 루카에서 여정을 멈추었고 결국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루카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디오니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73년
디오니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자료
성 루킬리아누스(Lucillianus)는 원래 이방신을 믿던 사제였으나 연만한 나이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박해 때에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체포되어 집정관 실바누스에게 끌려갔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배반하기는커녕 돌로써 그의 얼굴에 타박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채찍으로 맞고 목이 달리는 고문을 받은 후 투옥되었다. 여기서 그는 4명의 소년 신자인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히파티우스(Hypatius), 바오로(Paulus),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를 만나 서로를 격려하였다. 결국 그들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라우렌시노
- 가톨릭 성인 이름
Laurent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1년
라우렌시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띠노, 라우렌띠누스, 라우렌시누스, 라우렌씨노, 라우렌씨누스, 라우렌티노, 라우렌티누스.
라우렌시노 자료
데키우스 황제 치하에서 큰 박해가 수차례 일어났을 때 아레초 지방에서는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그들 가운데 성 라우렌티누스(또는 라우렌시노)와 성 페르겐티누스(Pergentinus) 순교자는 형제지간으로서 이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귀족 출신인 이 성인들은 학생 신분으로 체포되어 집정관 티부르시우스 앞으로 끌려갔다. 귀족 자제이고 또 어린 나이를 보아 쉽게 배교시킬 줄 알았던 관리는 그들의 굳은 믿음에 더욱 큰 분노를 느끼고 참수시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루칠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Lucill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73년
루칠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실리아노, 루실리아누스, 루칠리아누스, 루킬리아노, 루킬리아누스.
루칠리아노 자료
성 루킬리아누스(Lucillianus, 또는 루칠리아노)는 원래 이방신을 믿던 사제였으나 연만한 나이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박해 때에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체포되어 집정관 실바누스에게 끌려갔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배반하기는커녕 돌로써 그의 얼굴에 타박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채찍으로 맞고 목이 달리는 고문을 받은 후 투옥되었다. 여기서 그는 4명의 소년 신자인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히파티우스(Hypatius), 바오로(Paulus), 디오니시우스(Dionysius)를 만나 서로를 격려하였다. 결국 그들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루카 바아나바킨투
- 가톨릭 성인 이름
Luke Baanabakintu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52?-1886년 우간다
루카 바아나바킨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바아나바낀뚜, 바아나바킨뚜.
루카 바아나바킨투 자료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우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우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푸스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우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 또는 루가 바아나바킨투)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우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티아누스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우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Matthias Mulumba)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리파르도
- 가톨릭 성인 이름
Liphard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경
리파르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빠르도, 리빠르두스, 리파르두스.
리파르도 자료
그 당시 유명한 변호사이던 성 리파르두스(또는 리파르도)는 40세가 되었을 때에 세상을 등지고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오를레앙(Orleans)에서 그는 처음으로 미씨에 있던 성 메스민 수도원을 찾았다. 그러나 은수생활을 더 꿈꾸던 그는 은둔소를 짓고 철저한 고행자의 삶을 살았다.
이리하여 주위에서 제자들이 몰려들므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오를레앙의 주교는 그를 사제로 서품하고 성당과 수도원을 짓게 하였다. 그는 73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모란도
- 가톨릭 성인 이름
Morand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115년경 클뤼니
모란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모란두스, 모란드, 모랜드.
모란도 자료
독일의 보름스(Worms) 교외에서 어느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성 모란두스(또는 모란도)는 보름스 대성당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로 서품된 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순례하였다. 그 후 그는 성 후고(Hugo)의 지도를 받으며 클뤼니에서 베네딕토 회원이 되었다.
그는 주로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Auvergne)의 클루니악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1100년에 알자스(Alsace) 남부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이 초청은 프레데릭 페르즈 백작의 요청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곧 그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성덕으로 뛰어났으며 신자들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여 뭇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지냈다. 그가 포도 재배업자와 양조업자의 수호성인이 된 것은 그가 사순절을 지낼 때 음식물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나 포도 한 송이는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무가가 루보와
- 가톨릭 성인 이름
Mugagga Lubow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9?-1886년 우간다
무가가 루보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무가까.
무가가 루보와 자료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우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우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푸스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우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 또는 루가 바아나바킨투)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우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티아누스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우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Matthias Mulumba)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무카사 키리와완부
- 가톨릭 성인 이름
Mukasa Kiriwawanvu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9?-1886년 우간다
무카사 키리와완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끼리와완부, 무까사.
무카사 키리와완부 자료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우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우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푸스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우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 또는 루가 바아나바킨투)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우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티아누스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우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Matthias Mulumba)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73년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바오로 자료
성 루킬리아누스(Lucillianus)는 원래 이방신을 믿던 사제였으나 연만한 나이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박해 때에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체포되어 집정관 실바누스에게 끌려갔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배반하기는커녕 돌로써 그의 얼굴에 타박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채찍으로 맞고 목이 달리는 고문을 받은 후 투옥되었다. 여기서 그는 4명의 소년 신자인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히파티우스(Hypatius), 바오로(Paulus), 디오니시우스(Dionysius)를 만나 서로를 격려하였다. 결국 그들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브루노 세룬쿠우마
- 가톨릭 성인 이름
Bruno Sserunkuum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56?-1886년 우간다
브루노 세룬쿠우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룬꾸우마, 쎄룬꾸우마.
브루노 세룬쿠우마 자료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우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우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푸스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우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 또는 루가 바아나바킨투)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우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티아누스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우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Matthias Mulumba)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아나톨리오 키리그과조
- 가톨릭 성인 이름
Anatolius Kiriggwajj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0-1886년 우간다
아나톨리오 키리그과조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끼리그꽈조, 끼리그꽈죠, 아나똘리오, 아나똘리우스, 아나톨리우스.
아나톨리오 키리그과조 자료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우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우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푸스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우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 또는 루가 바아나바킨투)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우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티아누스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우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Matthias Mulumba)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아돌포 무카사 루디고
- 가톨릭 성인 이름
Adolphus Mukasa Ludig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2?-1886년 우간다
아돌포 무카사 루디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무까사, 아돌뽀, 아돌뿌스, 아돌푸스, 아돌프.
아돌포 무카사 루디고 자료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우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우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푸스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우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 또는 루가 바아나바킨투)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우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티아누스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우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Matthias Mulumba)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아킬레오 키와누카
- 가톨릭 성인 이름
Achilleus Kewanuk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9?-1886년 우간다
아킬레오 키와누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끼와누까, 아낄레오, 아낄레우스, 아칠레스, 아칠레오, 아칠레우스, 아킬레스, 아킬레우스.
아킬레오 키와누카 자료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우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우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푸스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우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 또는 루가 바아나바킨투)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우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티아누스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우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Matthias Mulumba)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안드레아 카치올리
- 가톨릭 성인 이름
Andrew Caccioli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254년 스펠로
안드레아 카치올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안드레아 카치올리 자료
안드레아 카치올리(Andreas Caccioli)는 원래 스폴레토(Spoleto) 교구의 사제였으나, 그의 모친과 누이가 죽고 난 뒤인 29세 때에 모든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고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았다.
그는 천사적 사부인 성 프란치스코의 72제자 중 한 분으로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임종 자리를 지켰고, 또 그분의 마지막 축복을 받은 덕스런 형제였다.
1223년에 프란치스코회의 유명한 총회가 개최될 때 그는 에스파냐에 있었는데, 기근으로 고생하는 주민들을 구제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을 순회하며 선교하였고, 성 프란치스코의 엄격한 규칙을 유지하려는 소위 ‘영적인 형제들’ 그룹에 속한 사람이다.
이 때문에 그는 두 차례나 투옥된 바 있으며, 스펠로 클라라회의 지도를 맡기도 하였다. 만년에 그는 아시시 교외 카르체리에서 지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관상에 바쳤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암브로시오 키부우카
- 가톨릭 성인 이름
Ambrose Kibuuk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8?-1886년 우간다
암브로시오 키부우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끼부까, 끼부우까, 암브로시우스, 앰브로스, 키부카.
암브로시오 키부우카 자료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우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우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푸스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우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 또는 루가 바아나바킨투)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우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티아누스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우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Matthias Mulumba)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야고보 부자발야보
- 가톨릭 성인 이름
James Buuzabalyaw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1?-1886년 우간다
야고보 부자발야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부우자발야보,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제임스.
야고보 부자발야보 자료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우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우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푸스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우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 또는 루가 바아나바킨투)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우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티아누스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우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Matthias Mulumba)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요한 그란데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Grand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자선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546-1600년
요한 그란데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랑드,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그란데 자료
성 요한 그란데(Joannes Grande)는 1546년 3월 6일 에스파냐 남부 안달루시아(Andalusia)의 카르모나(Carmona) 소읍에서 태어났다. 15세 되던 해에 부친이 사별하자 세비야(Sevilla)로 가서 포목상을 하는 친척 가게에서 일을 거들며 지냈다. 그는 사업 수완이 뛰어났지만 세상 일이 그의 정신을 빼앗지는 못하였다. 그는 오히려 이런 일들에 조금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22세 때 그는 자신의 소유물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뒤에 마르세나 교외의 은둔소로 잠적해 버렸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불우한 생활을 하였지만 그 자신은 좋은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그늘진 구석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길가에 누워있는 두 사람의 부랑자를 보자마자 연민의 정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움막으로 데려와서 따뜻이 돌보아 주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자 그는 하느님의 뜻이 이런 데에 있음을 알고 은둔소를 떠났다.
그는 세레스(Xeres)로 가서 죄수들을 위해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3년 동안 그는 비참한 환경 속에서 그들을 위해 구걸하고 봉사하다가 병원 일을 맡게 되었다. 이를 보고 감동한 어느 부유한 부부가 병원을 지어주자 그는 젊은이들을 모았다.
또한 그는 가난한 처녀에게는 결혼 지참금을 마련해 주었고, 영국과의 전투에서 상처를 입은 에스파냐 군인들을 치료하는데 헌신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그의 영성생활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죄수들을 위한 그의 헌신 때문에 그는 흔히 요한 죄수(John the Sinner)로도 불린다. 그는 1853년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96년 6월 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1. 음바가 투진데
- 가톨릭 성인 이름
Mbaga Tuzind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9?-1886년 우간다
음바가 투진데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뚜진데.
음바가 투진데 자료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우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우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푸스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우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 또는 루가 바아나바킨투)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우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티아누스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우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Matthias Mulumba)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2. 이사악
- 가톨릭 성인 이름
Isaac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51년 코르도바
이사악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이삭, 아이작, 이사크, 이삭, 이자크.
이사악 자료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성 이사악은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랍어에도 능통해 무어인들이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아 지배하던 후기 우마이야(Umayyads) 왕조의 압드 알 라흐만 2세(Abd ar-Rahman II, 822~852년 재위) 왕의 통치 중에 공증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코르도바 인근 타바노스(Tabanos)에 성 예레미야(Jeremias, 6월 7일)가 설립한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직책을 포기하고 떠났다.
그렇게 수도승으로 지내던 어느 날 그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수도원을 나와 왕궁으로 돌아와 법정 앞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선언했다. 그는 판사와 참된 종교에 대해 논쟁했고, 그로 인해 체포되어 바로 사형선고를 받고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3. 제네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Gene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60년경 클레르몽
제네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네시오, 게네시우스, 제네시우스.
제네시오 자료
성 게네시우스(또는 제네시오)는 클레르몽의 좋은 가문 출신으로 그의 학식과 덕행 특히 그의 자비심이 뛰어났기 때문에 주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이 때문에 그곳의 주교가 서거하자 성직자와 주민들이 그를 주교로 천거하였다.
그러나 5년 후에 그는 스스로 사임하고 로마(Roma)로 순례를 떠났으나 교구 사람들의 강압에 못 이겨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교구를 마치 현명한 아버지처럼 지도하여 위대한 사목자란 이름을 들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4. 체칠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aecil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248년? 카르타고
체칠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체칠리우스, 카이킬리오, 카이킬리우스, 케키리오, 케킬리우스.
체칠리오 자료
로마 순교록에 보면 성 카이킬리우스(Caecilius, 또는 카이킬리오, 체칠리오)는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에게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심어준 카르타고의 사제로서 이 날에 기억한다고 적혀있다.
성 카이킬리우스 당시에는 그리스도교 종교가 대화 형식으로 전파되고 있었는데, 어느 대화 모임에 미누치우스와 옥타비우스 그리고 카이킬리우스가 참석하였고, 여기서 나온 결론은 그리스도교가 참 종교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아마도 이때부터 신자가 된 듯하다. 그러나 어떤 경로를 통하여 사제가 되었으며 활동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는 자존심과 오류들을 극복하여 진리를 얻었고 끝까지 지켜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5. 케빈
- 가톨릭 성인 이름
Kevi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618년 글렌달로그
케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캐빈, 켐제노, 켐제누스, 코엠제노, 코엠제누스, 코임게노, 코임게누스, 코임제노, 코임제누스.
케빈 자료
성 케빈은 아일랜드의 더블린(Dublin) 근교에서 아버지 코엠록(Coemlog)과 어머니 코에멜(Coemell) 사이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출생 연도와 일자는 확실하지 않다. 10-11세기에경에 쓰여진 전기에 의하면 그는 고대 아일랜드 5부족 왕국의 하나인 렌스터(Leinster)의 화이트 파운틴(White Fountain) 성채에서 태어난 왕손이다.
그는 성 크로난(Cronan, 4월 28일)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콘월(Cornwall) 출신의 성 페트록(Petroc, 6월 4일) 아빠스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수도자로서의 삶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그는 블레싱턴(Blessington) 근처의 할리우드(Hollywood) 광야에서 생활하다가, 제자로 받아줄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글렌달로그(두 개의 호수가 만나는 계곡이라는 뜻)의 작은 언덕 위에 골방을 짓고 숨어 지냈다.
그러나 사람들을 요구를 더 이상 물리칠 수 없음을 깨닫고 570년에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로마(Roma)를 순례하였고, 성 키아란(Ciaran, 9월 9일)의 친구였으며, 국왕 콜만(Colman)의 아들을 교육하였다.
그는 618년 6월 3일 글렌달로그의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성당 가까운 곳에 안치되었다가 후에 계곡 상류 쪽 호수 위에 있는 천연 동굴로 옮겨졌다. 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동굴은 19세기까지 유명한 순례지 중 하나였다.
그는 더블린의 수호성인들 중 한 사람으로, 로마 보편 전례력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아일랜드에서는 6월 3일을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케빈은 영어식 이름이며, 라틴어로는 코임게누스(Coemgenus)라고 부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6. 클라우디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laud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73년
클라우디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라우디오, 글라우디우스, 끌라우디오, 끌라우디우스, 클라우디우스.
클라우디오 자료
성 루킬리아누스(Lucillianus)는 원래 이방신을 믿던 사제였으나 연만한 나이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박해 때에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체포되어 집정관 실바누스에게 끌려갔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배반하기는커녕 돌로써 그의 얼굴에 타박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채찍으로 맞고 목이 달리는 고문을 받은 후 투옥되었다. 여기서 그는 4명의 소년 신자인 성 클라우디우스(또는 클라우디오), 히파티우스(Hypatius), 바오로(Paulus), 디오니시우스(Dionysius)를 만나 서로를 격려하였다. 결국 그들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7. 키지토
- 가톨릭 성인 이름
Kizit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72?-1886년 우간다
키지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끼지또, 키지또.
키지토 자료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우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우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푸스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우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 또는 루가 바아나바킨투)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우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티아누스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우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Matthias Mulumba)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8. 페르젠시노
- 가톨릭 성인 이름
Pergent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1년
페르젠시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뻬르젠띠노, 뻬르젠띠누스, 페르겐티노, 페르겐티누스, 페르젠시누스, 페르젠씨노, 페르젠씨누스, 페르젠티노, 페르젠티누스.
페르젠시노 자료
데키우스 황제 치하에서 큰 박해가 수차례 일어났을 때 아레초 지방에서는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그들 가운데 성 라우렌티누스(Laurentinus)와 페르겐티누스(또는 페르젠시노) 순교자는 형제지간으로서 이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귀족 출신인 이 성인들은 학생 신분으로 체포되어 집정관 티부르시우스 앞으로 끌려갔다. 귀족 자제이고 또 어린 나이를 보아 쉽게 배교시킬 줄 알았던 관리는 그들의 굳은 믿음에 더욱 큰 분노를 느끼고 참수시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9. 히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Hypa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73년
히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히파시우스, 히파씨오, 히파씨우스, 히파티오, 히파티우스.
히파시오 자료
성 루킬리아누스(Lucillianus)는 원래 이방신을 믿던 사제였으나 연만한 나이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박해 때에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체포되어 집정관 실바누스에게 끌려갔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배반하기는커녕 돌로써 그의 얼굴에 타박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채찍으로 맞고 목이 달리는 고문을 받은 후 투옥되었다. 여기서 그는 4명의 소년 신자인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히파티우스(또는 히파시오), 바오로(Paulus), 디오니시우스(Dionysius)를 만나 서로를 격려하였다. 결국 그들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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