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다치아노, 루틸로, 메트로파네, 아레시오, 알렉산데르, 옵타토, 퀴리노 (순교자), 퀴리노 (주교), 클라테오, 페트록,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 필리포 스말도네, 총 12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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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여자세례명 사투르니나, 총 1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6월 4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2가지
6월 4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다치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Dac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다치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치아누스, 다키아노, 다키아누스.
다치아노 자료
성 아레티우스(Aretius)와 성 다키아누스(Dacianus, 또는 다치아노)는 로마의 순교자로 아피아(Appia) 가도의 카타콤바에 묻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루틸로
- 가톨릭 성인 이름
Ruti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루틸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띨로, 루띨루스, 루틸루스.
루틸로 자료
성 루틸루스(또는 루틸로)와 동료들은 로마제국의 박해 때 판노니아(Pannonia, 오늘날의 헝가리 지역)의 사바리아(Sabaria)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메트로파네
- 가톨릭 성인 이름
Metrophan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25년경 콘스탄티노플
메트로파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뜨로파네, 메뜨로파네스, 메트로파네스.
메트로파네 자료
성 메트로파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하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초대주교였다. 그는 동방교회 전역에서 위대한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원래 황제 프로부스의 동생인 도메티우스의 아들인데, 그의 부친은 개종한 뒤에 비잔티움에서 살다가 주교 티투스와 가깝게 지냈다.
성 메트로파네는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가 열릴 때 고령이었으므로, 알렉산데르란 성직자를 파견하여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여 공의회가 큰 성공을 거두게 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아레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re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아레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레시우스, 아레씨오, 아레씨우스, 아레티오, 아레티우스.
아레시오 자료
성 아레티우스(또는 아레시오)와 성 다키아누스(Dacianus)는 로마의 순교자로 아피아(Appia) 가도의 카타콤바에 묻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알렉산데르
- 가톨릭 성인 이름
Alexand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8세기 베로나
알렉산데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레산드로, 알렉산더, 알렉산델, 알렉싼데르, 알렉싼델.
알렉산데르 자료
이탈리아 베로나의 주교인 성 알렉산데르에 대해 알려진 다른 것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옵타토
- 가톨릭 성인 이름
Opta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87년경 밀레비스
옵타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옵따또, 옵따뚜스, 옵타투스.
옵타토 자료
이교를 믿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성 옵타투스(또는 옵타토)는 북아프리카 누미디아(Numidia) 밀레비스의 주교까지 되었으며,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로부터 격찬을 받았던 덕 있는 분이었다.
성 풀겐티우스(Fulgentius)에 의하면 그는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버금갈 정도로 당대의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옵타투스는 도나투스(Donatus) 이단을 배격한 지도적인 인물이며, “도나투스 이단자인 파르메니아누스를 반대하며”라는 글은 아주 유명하다. 파르메니아누스는 카르타고(Carthago)의 도나투스파 주교였다.
또한 그의 교황의 수위권과 성사의 유효성 및 유해의 공경에 관한 글들 역시 역사의 한 면을 차지할 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퀴리노 (순교자)
- 가톨릭 성인 이름
Quir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퀴리노 (순교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귀리노, 귀리누스, 뀌리노, 뀌리누스, 퀴리누스.
퀴리노 (순교자) 자료
성 퀴리누스(또는 퀴리노)는 이탈리아 로마 근교 티볼리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퀴리노 (주교)
- 가톨릭 성인 이름
Quir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8년 크로아티아
퀴리노 (주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귀리노, 귀리누스, 뀌리노, 뀌리누스, 퀴리누스.
퀴리노 (주교) 자료
크로아티아 시사크(Sisak)의 주교이던 성 퀴리누스(또는 퀴리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모면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다가 결국은 체포되었다. 그는 그 지방의 관리 막시무스 앞에 끌려가 신들에게 희생물을 봉헌하라는 요구를 끝까지 거절했기 때문에 라압 강물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클라테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late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4년 브레시아
클라테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라테오, 글라테우스, 끌라떼오, 끌라떼우스, 클라테우스.
클라테오 자료
이탈리아 브레시아의 초기 순교자 중의 한 명인 성 클라테우스(또는 클라테오) 주교는 네로 황제 때에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페트록
- 가톨릭 성인 이름
Petroc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경 콘월
페트록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뜨록, 베트로크, 베트록, 페트로크.
페트록 자료
웨일스(Wales) 왕의 아들로 태어난 성 페트록은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아일랜드에서 공부하러 갔다가 수도자로 변신하였다. 그들은 잉글랜드(England) 남서부 콘월로 이주하여 패드스토우(Padstow)에 정착하였다.
30년 후 그들은 로마(Roma) 순례를 하던 중에 인도양의 어느 섬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마지막 은둔소는 보드미르 무어(Bodmir Moor)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
- 가톨릭 성인 이름
Francis Caracciol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63-1608년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카라촐로,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 자료
귀족 집안 출신인 성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Franciscus Caracciolo, 또는 프란체스코)는 1563년 10월 13일 이탈리아 중부 아브르초(Abruzzo)의 발라 산타 마리아(Villa Santa Maria)에서 태어나 아스카니오(Ascanio)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22세 되던 해에 나병으로 여겨지는 중병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하느님께 자신의 생을 바치겠다는 사적인 서원에 하였고,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나폴리(Napoli)에서 공부하고 1587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거룩한 죽음을 준비하도록 사형수들을 돌보는 '정의 백의 사제단'(Bianchi della Giustizia)에 가입하였으며, 1588년에는 요한 아우구스티누스 아도르노(Joannes Augustinus Adorno) 신부와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병원의 환자들과 죄수들을 위하여 일하고 사목하는 '작은 수행 성직자 수도회'(Ordo Clericorum Regularium Minorum)를 설립하였다.
이 회는 규칙은 그 해에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아도르노 신부가 첫 번째 장상으로 선임되었다. 다음 해에 그는 종신서원을 하면서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을 본받는 의미에서 프란치스코라는 수도명을 정했다.
그들은 나폴리에 수도원을 짓고, 그 다음에는 에스파냐로 뻗어나가려 했으나 에스파냐 정부 당국이 수도원 건립 허가를 주지 않아 미뤄지는 사이에 이 수도회는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1591년 아도르노 신부가 사망한 후에 총장직을 승계한 성 프란치스코가 에스파냐를 방문했을 때는 그전보다 훨씬 좋은 여건이었기 때문에 마드리드(Madrid)와 바야돌리드(Valladolid) 그리고 알칼라(Alcala)에 수도원을 세울 수 있었다.
그는 7년 동안을 총장으로 봉사하다가 사임하고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의 원장 겸 수련장이 되었다. 그는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의 주교직 제의를 끝까지 거절하고 수도생활에 전념하다가 1608년 아뇨네(Agnone)에서 병이 들어 그해 성체 성혈 대축일 전날인 6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생은 환시와 예언의 은혜가 충만하였다. 그는 1769년 6월 4일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XIV)에 의해 시복되었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838년에 나폴리의 수호성인이 되었으며, 1925년에는 아브르초에 있는 성체회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나폴리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몬테베르지넬라(Monteberginella) 성당으로 옮겨졌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필리포 스말도네
- 가톨릭 성인 이름
Filippo Smaldon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8–1923년
필리포 스말도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비리버, 스말돈, 필리뽀, 필리뿌스, 필리포스, 필리푸스, 필립, 필립보, 필립부스, 필립뽀, 필립뿌스, 필립포, 필립푸스.
필리포 스말도네 자료
성 필리푸스 스말도네(Philippus Smaldone, 또는 필리포 / 필립보 스말도네)는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정치 · 사회적 혼돈의 시기였던 1848년 7월 27일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에서 태어났다.
그를 둘러싼 사회적 · 정치적 · 종교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 활동에 헌신하며 사제가 될 결심을 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 신학을 배우면서도 나폴리 안에서 아무런 원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많은 소외된 이들과 청각장애인들을 돕는 일에 참여하였다.
공부하는 시간 이상으로 봉사하던 그는 소품을 위한 시험을 통과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는 나폴리 대교구의 신학교에서 학업에 정진하며 청각장애인에 대한 봉사를 계속하였고, 1871년 9월 23일 사제품을 받았다.
스말도네 신부는 저녁 교리반을 운영하고 병원에 입원하거나 집에 있는 병자들을 방문하며 사제다운 사목활동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흑사병이 급속히 확산되던 때에 환자들과의 잦은 접촉으로 인해 감염되었으나 평소 마음속에 특별히 간직하며 일생 동안 헌신한 폼페이(Popmeii)의 성모 마리아께 전구함으로써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
그는 본당 사목에 더하여 청각장애인에 대한 교육 분야에 있어서도 선구자적인 사업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만난 많은 장애들로 인해 낙담하고 그래서 사목 생활의 변화를 위해 해외선교에 관심을 돌리기도 했다.
그때 그의 현명한 고해신부가 그의 참된 사명은 나폴리에서 그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일깨워주었다. 결국 그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사목에 자신을 바쳤고, 이를 자신이 수행할 사명의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았다.
이렇듯 오랜 세월 동안 체험을 통해 단련된 그는 1885년 3월 25일 이탈리아 남부의 레체(Lecce)로 가서 로렌조 아피첼라(Lorenzo Apicella) 신부와 특별히 훈련된 일단의 수녀들과 함께 청각장애인을 위한 협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성심의 살레시오 수녀회의 기초가 되었다.
그가 레체에 설립한 협회는 빠르게 뿌리를 내리며 발전했고, 후에 수녀회의 본원이 되었다. 1897년에 그는 로마(Roma)와 바리(Bari)에도 협회를 설립하였다. 스말도네 신부는 많은 이들의 요구에 의해 협회의 사업을 앞 못 보는 아이들과 고아들 그리고 소외된 이들에게로 확장해 나갔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룩한 그의 위대한 사업은 외적 · 내적으로 많은 시련을 이겨내야만 했다. 외적으로 그는 반교회적인 지방자치 의회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지켜야 했고, 내적으로는 그가 설립한 새로운 협회가 교황청의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첫 번째 장상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이런 혹독한 시련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인 스말도네 신부를 시험하였고, 그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신의 사업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는 아버지다운 애정으로 청각장애 학생들을 교육하며 성심의 살레시오 수녀회의 수녀들에게 완벽한 수도원의 틀을 갖추어 주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또한 사제들과 신학생들 그리고 여러 수도 공동체의 고해신부와 영적 지도자로서도 활동했으며, 성체 흠숭 사제회 · 여성회를 설립하였고,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선교회의 원장이 되기도 했다. 그는 레체 주교좌성당의 참사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시 당국으로부터도 그의 활동에 대한 인정을 받았다.
필리푸스 스말도네 신부는 심장 합병증을 동반한 심각한 당뇨병으로 1923년 6월 4일 75세의 나이로 레체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수녀회의 수녀들과 평생 동안 섬겼던 가난한 이들에 둘러싸여 평화로이 세상을 떠났다.
1996년 5월 1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를 복자품에 올렸고, 2006년 10월 15일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가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다른 세 명의 복자들과 함께 그를 시성하며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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