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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남자세례명 14가지

피어나네 2023. 6.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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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가스파르 베르토니, 나보르, 나자리오, 레오 3세, 바실리데, 베드로, 스테파노 반델리, 에스킬, 오누프리오, 오둘포, 올림피오, 요한, 치리노, 테르난, 총 14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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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여자세례명 안토니나, 총 1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6월 12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4가지

 

 

 

 

6월 12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가스파르 베르토니

  2. 나보르

  3. 나자리오

  4. 레오 3세

  5. 바실리데

  6. 베드로

  7. 스테파노 반델리

  8. 에스킬

  9. 오누프리오

  10. 오둘포

  11. 올림피오

  12. 요한

  13. 치리노

  14. 테르난

 

6월 12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4가지

 

 

1. 가스파르 베르토니

 

  • 가톨릭 성인 이름
    Gaspar Berton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7-1835년

 

 

가스파르 베르토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스발, 가스팔, 베르또니.

 

 

가스파르 베르토니 자료

성 가스파르 베르토니는 1777년 10월 9일 이탈리아 베로나(Verona)에서 부유한 법률가이자 공증인이었던 프란시스(Francis)와 브루노라 라벨리 베르토니(Brunora Ravelli Bertoni)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후 예수회와 베로나에 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학교에 있는 마리아회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11살에 첫영성체를 할 때 사제가 되리라는 환시와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1796년 신학교에 입학한 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북이탈리아가 20년간 점령당했을 때 그는 병원사목을 위한 복음적 형제회에 참여하여 상처 입고 병든 이들, 혁명군의 점령으로 쫓겨나거나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해 봉사했다.

1800년 9월 20일 사제로 서품된 성 가스파르는 성 바오로 본당에서 젊은이들에 대한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는 레지오 마리애의 형태를 빌려 젊은이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그런 모든 단체는 1807년 나폴레옹의 법령에 의해 박해를 받았고 결국 그는 더 나은 시기에 그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고 연기하였다.

그는 또한 카노사(Canossa)의 성녀 막달레나(Magdalena, 4월 10일)가 성 요셉 수도원에 세운 공동체의 영적 지도를 맡았다. 그는 당시 수녀회의 지도신부와 신학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영성 지도자로서 활동하였고 또 잘 알려진 설교가였다.

1810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성 피르무스(Pirmus) 본당으로 이동한 그는 주교로부터 신학생들의 영적 지도를 부탁받은 후 자신의 사제관에서 잦은 모임을 통해 젊은 신학생들을 영적, 신학적으로 굳건하게 양성하였다. 그러나 그의 최종 목표는 무조건적으로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기 위한 사제들의 쇄신이었다.

그는 당시 교황 비오 7세(Pius VII)가 나폴레옹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교황을 위한 기도와 지원을 위한 전 유럽 운동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교황은 언제나 교회의 ‘으뜸이자 움직일 수 없는 반석’이었다. 나폴레옹의 실각과 더불어 교회의 재건은 시작되었다.

그는 양떼를 다시 모아야 할 필요성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이는 교우들에게 행해지는 설교를 통해 신앙의 근본 진리들을 제시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교리교육과 설교에 투신하였다.

1816년 11월 4일 그는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흔의 수도회’(Congregation of the Sacred Stigmata of Our Lord Jesus Christ)를 설립하였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학교를 세워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오상에 대한 신심을 널리 전파하고자 노력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참회의 공동생활을 했고, 주교의 요청에 따라 젊은이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교육하고 사제를 양성하며 선교를 위한 설교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성모 마리아(Maria)와 성 요셉(Josephus)의 보호아래 수도회를 맡겼다.

성 가스파르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20여 년 동안 오른쪽 다리의 발열과 계속되는 감염으로 고통을 받았다. 수많은 수술을 받으면서도 그는 병원 침대에서 지속적으로 상담자요 영성 지도자로서 봉사하였다.

1835년 6월 12일 그가 선종한 후 그가 설립한 수도회는 베로나를 넘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1975년 11월 1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9년 11월 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나보르

 

  • 가톨릭 성인 이름
    Nab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초?

 

 

나보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나볼.

 

 

나보르 자료

성 바실리데(Basilides), 성 키리누스(Cyrinus), 성 나보르, 성 나자리우스(Nazarius)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옛 “로마 순교록”은 6월 12일 목록에서 그들을 로마에서 순교한 거룩한 군인 순교자들로 아우렐리아누스 가도(Via Aurelianus)에 묻혀 있다고 전해주었다.

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데키우스 황제 때로 나오기도 함)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아우렐리우스가 로마의 총독으로 있을 때 체포되어 이교도 신전의 우상에 희생 제물 바치기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굳은 믿음을 고백하고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감옥에서 모진 매를 맞고 끝내는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군인들이 그들의 시신을 들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었으나 짐승이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고,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정성껏 수습해서 묻어주었다고 한다.

사실 이들은 세 명의 로마 순교자 명단에 나중에 성 바실리데가 추가된 것이다. 세 명의 로마 군인 순교자들은 로마 전례서로는 가장 오래된 책인 8세기의 “젤라시우스 전례서”(Sacramentarium Gelasianum)에 이미 언급되었지만, 순교 일자와 경위에 대한 설명은 전해지지 않았다.

로마에서 순교한 네 명의 군인 순교자들은 오랫동안 6월 12일 전례력 안에서 함께 기념했으나, 그들 순교록의 불확실성 등의 이유로 1969년 전례 개혁과 함께 로마 보편 전례력에서 삭제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12일 목록에서 아우렐리아누스 가도에서 12마일 떨어진 로리(Lori)에 묻힌 성 바실리데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나머지 세 명의 순교자들의 이름을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나자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Naz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초?

 

 

나자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나자리우스.

 

 

나자리오 자료

성 바실리데(Basilides), 성 키리누스(Cyrinus), 성 나보르(Nabor), 성 나자리우스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옛 “로마 순교록”은 6월 12일 목록에서 그들을 로마에서 순교한 거룩한 군인 순교자들로 아우렐리아누스 가도(Via Aurelianus)에 묻혀 있다고 전해주었다.

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데키우스 황제 때로 나오기도 함)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아우렐리우스가 로마의 총독으로 있을 때 체포되어 이교도 신전의 우상에 희생 제물 바치기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굳은 믿음을 고백하고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감옥에서 모진 매를 맞고 끝내는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군인들이 그들의 시신을 들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었으나 짐승이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고,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정성껏 수습해서 묻어주었다고 한다.

사실 이들은 세 명의 로마 순교자 명단에 나중에 성 바실리데가 추가된 것이다. 세 명의 로마 군인 순교자들은 로마 전례서로는 가장 오래된 책인 8세기의 “젤라시우스 전례서”(Sacramentarium Gelasianum)에 이미 언급되었지만, 순교 일자와 경위에 대한 설명은 전해지지 않았다.

로마에서 순교한 네 명의 군인 순교자들은 오랫동안 6월 12일 전례력 안에서 함께 기념했으나, 그들 순교록의 불확실성 등의 이유로 1969년 전례 개혁과 함께 로마 보편 전례력에서 삭제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12일 목록에서 아우렐리아누스 가도에서 12마일 떨어진 로리(Lori)에 묻힌 성 바실리데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나머지 세 명의 순교자들의 이름을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레오 3세

 

  • 가톨릭 성인 이름
    Leo II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 활동 연도와 지역
    +816년

 

 

레오 3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레오 3세 자료

남부 이탈리아 출신의 로마인으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성 레오 3세는 어려서부터 교황청에서 일했다. 그는 795년 12월 25일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Hadrianus I)가 선종한 직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선출 당시 산타 수산나(Santa Susanna) 성당의 추기경 사제였던 그는 자신의 교황 선출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로부터 수많은 도전을 받아야만 했다.

성 마르코(Marcus) 축일에는 행렬 도중 반도들에 의해 피납되어 혀가 잘리는 등 거의 산송장이 될 정도로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상처가 급속도로 회복되어 모든 이들이 이를 기적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재임 기간 중에 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마뉴(Charlemagne)를 대관하였다.

이 결과로 그는 교회 재건과 교황청과 국가들 간의 관계 회복을 성공적으로 성취하였다. 교황으로서 20여년 간 재위했던 그는 1673년 로마 순교록의 성인 목록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바실리데

 

  • 가톨릭 성인 이름
    Basilid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초?

 

 

바실리데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실리데스.

 

 

바실리데 자료

성 바실리데, 성 키리누스(Cyrinus), 성 나보르(Nabor), 성 나자리우스(Nazarius)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옛 “로마 순교록”은 6월 12일 목록에서 그들을 로마에서 순교한 거룩한 군인 순교자들로 아우렐리아누스 가도(Via Aurelianus)에 묻혀 있다고 전해주었다.

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데키우스 황제 때로 나오기도 함)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아우렐리우스가 로마의 총독으로 있을 때 체포되어 이교도 신전의 우상에 희생 제물 바치기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굳은 믿음을 고백하고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감옥에서 모진 매를 맞고 끝내는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군인들이 그들의 시신을 들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었으나 짐승이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고,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정성껏 수습해서 묻어주었다고 한다.

사실 이들은 세 명의 로마 순교자 명단에 나중에 성 바실리데가 추가된 것이다. 세 명의 로마 군인 순교자들은 로마 전례서로는 가장 오래된 책인 8세기의 “젤라시우스 전례서”(Sacramentarium Gelasianum)에 이미 언급되었지만, 순교 일자와 경위에 대한 설명은 전해지지 않았다.

로마에서 순교한 네 명의 군인 순교자들은 오랫동안 6월 12일 전례력 안에서 함께 기념했으나, 그들 순교록의 불확실성 등의 이유로 1969년 전례 개혁과 함께 로마 보편 전례력에서 삭제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12일 목록에서 아우렐리아누스 가도에서 12마일 떨어진 로리(Lori)에 묻힌 성 바실리데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나머지 세 명의 순교자들의 이름을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세기경? 아토스산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자료

마케도니아의 아토스산에 수도원들이 세워지기 훨씬 전에 베드로라고 부르는 거룩한 사람이 산 정상에서 은수생활을 하고 있었다. 성 베드로(Petrus)는 이 지역 최초의 그리스도인 은수자로 기록되었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의 유해는 어느 사냥꾼에게 발견되어 성 클레멘스(Clemens)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는데, 성화상 파괴가 자행되는 중에 사라졌다가 이후 포토카미(Fotokami)의 트라키아 사람들 마을로 옮겨져 공경을 받고 있다.

테살로니카(Thessalonica) 대주교인 성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Gregorius Palamas, 11월 14일)에 의하면, 성 베드로는 청년 시절 한때 군인으로서 사라센인들과의 전투 중에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미라의 성 니콜라우스(Nicolaus, 12월 6일)와 성 시메온(Simeon, 10월 8일)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풀려났다.

그 길로 그는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할 결심으로 사도 성 베드로(Petrus)의 무덤이 있는 로마에 가서 교황을 알현하고 직접 수도복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아시아를 향해 가던 중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의 환시를 보게 되었다. 환시 중에 성모님은 그에게 아토스산에서 은수자로 살도록 인도해주었다고 한다.

성 베드로는 아토스산으로 가서 거의 50여 년을 은수자로 지냈다. 성 베드로는 은수생활을 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항상 1년 뒤에 다시 와서 그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으면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은수생활의 어려움을 깊이 체험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스테파노 반델리

 

  • 가톨릭 성인 이름
    Stephen Bandelli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369-1450년

 

 

스테파노 반델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스테파노 반델리 자료

스테파누스 반델리(Stephanus Bandelli, 또는 스테파노)는 북부 이탈리아 출신으로서 피아첸차(Piacenza)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의 신심과 순종은 많은 회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파비아(Pavia) 대학교에서 교회법 박사학위 및 교수직을 임명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특히 빛을 발한 곳은 학생들과 고해소였다. 그는 주로 리구리아(Liguria) 전역을 다니면서 설교했는데, 가는 곳마다 대군중이 몰려들었고 수많은 회개자들이 개과천선하였다.

그는 토리노(Torino) 교구의 살루초(Saluzzo)에서 81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는데, 그의 사후 37년 되던 해 살루초가 외세의 침략으로 전운이 감돌 때 하늘에서 이상한 형체가 출현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시민들은 이 기이한 형상이 곧 성모 마리아와 스테파누스 반델리임을 알고 즉시 경배하여 도시의 파괴를 모면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에스킬

 

  • 가톨릭 성인 이름
    Eski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80년경 스웨덴

 

 

에스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스낄.

 

 

에스킬 자료

잉글랜드(England) 출신 수도승인 성 에스킬은 스웨덴의 사도로 존경받는 성 지그프리드(Sigfrid, 2월 15일)의 스웨덴 선교 때 그를 수행한 세 명의 일행 중 한 명이다.

성 지그프리드에 의해 선교사 주교로서 스웨덴 남동부 쇠데르만란드(Sodermanland) 지방의 멜라렌(Malaren) 호수 주변으로 파견된 그는 스톡홀름(Stockholm) 서쪽에 있는 투나(Tuna)라는 마을에 첫 번째 선교 교구를 설립하고 인근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스트렝네스(Strangnas)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 어떤 우상 숭배 축제를 강력히 반대하다가 흥분한 군중들로부터 돌에 맞아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제자들에 의해 투나의 수도원으로 모셔 안장되었다. 그 후 스트렝네스 사람들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성 에스킬이 투나에 설립한 첫 교구는 오늘날의 스트렝네스 교구로 발전했다.

그래서 성 에스킬은 스트렝네스 교구와 쇠데르만란드 지방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특히 그가 묻힌 투나 마을은 오늘날의 에스킬스투나(Eskilstuna)라는 도시가 되었는데, 이는 성 에스킬로 인해 생긴 도시명이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주교 복장을 하고 세 개의 돌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오누프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Onuph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00년경 이집트

 

 

오누프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오노프리오, 오노프리우스, 오누프리우스.

 

 

오누프리오 자료

이집트 테베(Thebae,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의 은수자들 가운데 가장 거룩한 사람으로 공경 받던 분이 성 오누프리우스(또는 오누프리오)이다.

그의 전기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 없으나 파프누티우스(Paphnutius)란 어느 원장이 그를 만난 증언록이 남아 있다. 그를 만난 날 밤 파프누티우스 원장은 은수자 오누프리우스와 함께 머물렀다. 다음 날 아침 전날의 저녁 음식이 기적적으로 차려졌다. 이때 오누프리우스는 파프누티우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제가 죽으면 장사지내줄 사람을 보내준다고 약속하셨는데,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윽고 오누프리우스가 운명하자 파프누티우스는 산언저리에 그를 묻었는데, 그 자리는 즉시 사라져 없어졌다고 한다. 그는 오노프리우스(Onophri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오둘포

 

  • 가톨릭 성인 이름
    Odulf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855년경 위트레흐트

 

 

오둘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오둘푸스, 오둘프.

 

 

오둘포 자료

성 오둘푸스(Odulphus, 또는 오둘포)는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 북부의 오오르쉬(Oorsch)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제가 된 후에 고향 성당의 본당신부로 잠시 부임했다가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로 갔다.

뛰어난 설교가이자 박식한 사제였던 성 오둘푸스는 위트레흐트의 주교인 성 프레데리쿠스(Fredericus, 7월 18일)의 명을 받고 프리슬란트(Friesland) 지방의 선교사가 되어 엄청난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임종하기 직전까지 선교사로서 활동했고, 그의 유해는 이브즈햄(Evesham)의 수도원에 안장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올림피오

 

  • 가톨릭 성인 이름
    Olymp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43년경 에노스

 

 

올림피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올림삐오, 올림삐우스, 올림피우스.

 

 

올림피오 자료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행정구역의 한 주(州)인 루멜리아(Rumelia)의 에노스의 주교인 성 올림피우스(또는 올림피오)는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와 동시대 사람이다.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 대한 그의 반대로 인해 그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에 의해 면직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419-1479년 사아군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성 요한(Joannes)은 1419년 에스파냐 남부의 사하군(또는 산 파콘도 San Facondo)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고향의 왕립 성 베네딕투스 수도원의 수도승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살라망카(Salamanca) 대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품을 받은 후 그 지방의 교구 사제로 활동하였다.

1463년 그는 중병에서 회복된 후 그곳의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하여 높은 성덕을 쌓아 유명해졌다. 그는 1479년 6월 11일 수도원에서 선종해 그 도시의 옛 주교좌성당에 묻혔다.

한편으로는 그가 부자와 귀족 청년들의 결투로 인한 가문 간의 갈등과 살해 등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 행한 비판적 설교 때문에 많은 적이 생겼고, 그로 인해 미움을 받아 독살되었다는 말도 전해온다.

그는 1601년 6월 19일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690년 10월 16일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성작을 들고 있거나 성령의 빛으로 둘러싸인 모습으로 표현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치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yr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초?

 

 

치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치리누스, 키리노, 키리누스.

 

 

치리노 자료

성 바실리데(Basilides), 성 키리누스(또는 치리노), 성 나보르(Nabor), 성 나자리우스(Nazarius)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옛 “로마 순교록”은 6월 12일 목록에서 그들을 로마에서 순교한 거룩한 군인 순교자들로 아우렐리아누스 가도(Via Aurelianus)에 묻혀 있다고 전해주었다.

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데키우스 황제 때로 나오기도 함)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아우렐리우스가 로마의 총독으로 있을 때 체포되어 이교도 신전의 우상에 희생 제물 바치기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굳은 믿음을 고백하고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감옥에서 모진 매를 맞고 끝내는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군인들이 그들의 시신을 들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었으나 짐승이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고,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정성껏 수습해서 묻어주었다고 한다.

사실 이들은 세 명의 로마 순교자 명단에 나중에 성 바실리데가 추가된 것이다. 세 명의 로마 군인 순교자들은 로마 전례서로는 가장 오래된 책인 8세기의 “젤라시우스 전례서”(Sacramentarium Gelasianum)에 이미 언급되었지만, 순교 일자와 경위에 대한 설명은 전해지지 않았다.

로마에서 순교한 네 명의 군인 순교자들은 오랫동안 6월 12일 전례력 안에서 함께 기념했으나, 그들 순교록의 불확실성 등의 이유로 1969년 전례 개혁과 함께 로마 보편 전례력에서 삭제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12일 목록에서 아우렐리아누스 가도에서 12마일 떨어진 로리(Lori)에 묻힌 성 바실리데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나머지 세 명의 순교자들의 이름을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테르난

 

  • 가톨릭 성인 이름
    Tern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세기경 쿨로스

 

 

테르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떼르난, 태르난.

 

 

테르난 자료

성 테르난은 픽트인의 개종에 큰 활약을 했으며 그들의 초창기 주교가 되었다. 그는 쿨로스 수도원의 수도자로 오랫동안 살았지만 사실 그는 스코틀랜드 사람으로서 성 팔라디우스(Palladius)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된 개종자였다. 그의 유해는 리코니움에 안장되었는데, 후일 이곳의 지명은 반코리 테르난이라고 부른다. 그 외의 사적은 알려진 바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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