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남자 세례명 그레고리오, 마뇨, 미드윈, 바실리오, 베드로, 빈첸시오, 빌리암, 알마치오, 에우젠도, 엘반, 오딜로, 요셉, 우골리노, 유스티노, 지그문트, 콘코르디오, 클라로, 펠릭스, 풀젠시오 총 19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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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월 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9가지
1월 1일 남자세례명 목록
- 그레고리오
- 마뇨
- 미드윈
- 바실리오
- 베드로
-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
- 빌리암
- 알마치오
- 에우젠도
- 엘반
- 오딜로
- 요셉 마리아 토마시
- 우골리노
- 유스티노
- 지그문트 고라즈도프스키
- 콘코르디오
- 클라로
- 펠릭스
- 풀젠시오
1. 그레고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Gregor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74년 나지안주스
그레고리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자료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그의 생애 중 처음 50여년간을 이교도로서 보냈고, 성년의 대부분은 정부의 관리로서 지냈다. 그는 성녀 논나(Nonna, 8월 5일)와 결혼하였고, 그녀는 325년에 그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성 그레고리우스(1월 2일)와 성 카이사리우스(Caesarius, 2월 25일) 그리고 성녀 고르고니아(Gorgonia, 12월 9일)의 아버지인 그는 328년에 나지안주스의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된 후 그는 이단적인 그리스도교의 분파에 빠져들었으나 361년 그의 아들 성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정통 신앙으로 되돌아왔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2. 마뇨
- 가톨릭 성인 이름
Mag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마뇨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그누스, 마누스, 망누스.
마뇨 자료
성 마그누스(또는 마뇨)의 활동연대와 그 외의 모든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로마 순교록에 순교자로서 언급되어 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3. 미드윈
- 가톨릭 성인 이름
Mydwy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평신도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미드윈 세례명과 같은 이름
미드빈.
미드윈 자료
성 엘반(Elvan)과 성 미드윈은 영국의 왕 성 루키우스(Lucius, 12월 3일)의 명에 의해 영국에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청원서를 가지고 교황 성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 5월 26일)에게 파견된 이들이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4. 바실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Basi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21년 엑스
바실리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실리우스.
바실리오 자료
잘 알려진 전설에 의하면 프랑스 아를(Arles)의 사제로 후에 프로방스(Provence) 지방 엑스의 주교가 된 성 바실리우스(Basilius, 또는 바실리오)는 평범하지 않은 그의 성덕과 놀라운 업적 그리고 기적을 행한 사람으로서 칭송을 받고 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5.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773-837년 아트로아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자료
소아시아의 에페수스(Ephesus) 출신인 성 베드로(Petrus)는 18세의 나이로 수도자가 되어 성 바오로(Paulus)라는 수도자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분이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는 7년 후에 사제로 서품되고, 스승과 함께 예루살렘을 순례하려다가 올림푸스 산으로 갔는데, 스승은 이곳에서 성 자카리아(Zacharias) 수도원을 세웠다.
805년에 스승이 운명하자 성 베드로가 그를 승계하여 원장이 되었으나 10년 동안 수도원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 이유는 레오 황제의 성상파괴 박해가 재개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성 베드로에게 현상금까지 붙었기에 그는 에페수스와 크레타(Creta) 등지로 숨어 다니다가 헬레스폰트(Hellespont) 해협 근교의 칼로나로스(Kalonaros)에 정착하였다. 그는 마술을 하며 또 악마를 이용한다는 소문에 시달렸으나, 성 테오도루스 스투디테스(Theodorus Studites, 11월 11일)가 그 소문이 거짓임을 판명해 주었다. 이때부터 그는 다시 아트로아로 돌아가서 성 자카리아(Zacharias) 수도원을 재건하였으나, 또다시 박해가 치열해지자 성 포르피리우스(Porphyrius) 수도원에 은신하다가 다시 원래 자기의 은둔소로 돌아가서 운명하였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6.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
- 가톨릭 성인 이름
Vincent Mary Stramb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745-1824년 마체라타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뱅상, 빈센트,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원선시오.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 자료
성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Vincentius-Maria Strambi)는 이탈리아의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에서 어느 약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주 짓궂게 장난치는 아이였지만, 맨발이거나 혹은 남루한 옷을 입은 부랑아를 보면 자기의 외투와 신발조차 벗어주는 갸륵한 소년이었다.
그는 교구사제가 될 마음으로 공부했으나 서품 직전에 십자가의 성 바오로(Paulus, 10월 19일)의 영향을 받고 예수 고난회원이 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극심하던 부모의 반대를 이기고 마침내 수련을 받게 되었다.
그는 수도원 내의 여러 직책을 맡았고 1781년에 관구장이 되었으며, 또 1801년에는 자신이 극구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체라타와 톨렌티노(Tolentino)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불굴의 노력은 이탈리아 전역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 놀라운 쇄신을 불러일으키는 주교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808년 그는 나폴레옹의 정책에 반대하여 추방되었으나, 1813년 나폴레옹이 실각함으로써 교구로 돌아왔다.
교황 비오 7세(Pius VII) 서거 때에 그도 역시 사임하였으나, 그의 열렬한 친구이던 레오 12세(Leo XII)의 등극과 더불어 그는 교황의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이 모든 직책에서도 그는 수도생활의 정신을 조금도 흐트러트리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복녀 안나 마리아 타이기(Anna Maria Taigi, 6월 9일)가 예언한 12월 31일에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셨고, 1824년 1월 1일 79살의 생일날에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그는 192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50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7. 빌리암
- 가톨릭 성인 이름
William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962-1031년 디종
빌리암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굴리엘모, 굴리엘무스, 빌헬름, 윌리암, 윌리엄.
빌리암 자료
성 베니뇨의 빌리암(William of Saint Benignus)이라고도 불리는 성 빌리암은 볼피아노(Volpiano)의 백작 로베르투스의 아들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노체라(Nocera)와 가까운 오르타(Orta) 호수에 있는 산 주글리오 섬의 가족성에서 태어났다. 17세 때에 로카디오(Locadio)의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들어갔으며, 987년에는 클뤼니(Cluny) 수도원에서 성 마욜루스(Majolus, 5월 11일)를 만났다.
그는 론(Rhone) 지방의 성 세르닌(Sernin) 수도원을 재정비하였으며, 990년에 사제로 서품되면서 디종의 성 베니뇨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이 수도원을 학문과 영성운동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으며, 부르고뉴(Bourgogne), 로렌(Lorraine), 노르망디(Normandie) 그리고 북이탈리아의 40개 수도원의 모원으로 만들었다. 그는 윌리엄 또는 굴리엘무스(Gulielmus)으로도 불린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8. 알마치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lmach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00년경
알마치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마치우스, 알마키오, 알마키우스, 텔레마꼬, 텔레마꾸스, 텔레마코, 텔레마쿠스.
알마치오 자료
동방 교회의 은수자인 성 알마키우스(또는 알마치오)는 투기장에서 검객들의 시합을 중단시키려고 하다가 로마(Roma)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
테오도루스(Theodorus)에 의하면 그의 죽음이 호노리우스 황제로 하여금 검객들의 시합을 중지시키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텔레마쿠스(Telemachus)로도 알려져 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9. 에우젠도
- 가톨릭 성인 이름
Eugend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510년경 콘다트
에우젠도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겐도, 에우겐두스, 에우젠두스, 오이엔도.
에우젠도 자료
성 로마누스(Romanus, 2월 28일)와 그의 제자인 성 루피키누스(Lupicinus, 3월 21일)가 서거한 뒤 이 두 성인이 스위스 제네바(Geneva) 인근에 세운 콘다트 수도원은 일곱 살 때부터 교육을 받아온 성 에우겐두스(또는 에우젠도)가 원장인 미나우시오를 도와서 지도하고 있었다.
성 에우겐두스의 생활은 다른 수도자들의 입에서도 너무 엄격하다고 평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분노하는 행동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무던히 애썼다. 그래서 그의 성격은 항상 온화하였지만 결코 웃는 법이 없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및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그는 실로 학문의 대가였다. 그가 콘다트의 원장으로 재직할 때 불타버린 이 수도원을 돌로 재건하였고, 또 성 베드로(Petrus)와 성 바오로(Paulus) 및 성 안드레아(Andreas)에게 봉헌된 성당도 재건하였다.
그의 기도는 거의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그의 불타는 열성은 임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61세가 되어 운명하자 콘다트 대수도원은 에우겐두스 성인의 이름을 따서 생오이엥(Saint-Oyend)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오이엔도(Oyend)로도 불리기 때문이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0. 엘반
- 가톨릭 성인 이름
Elv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평신도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엘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엘번.
엘반 자료
성 엘반과 성 미드윈(Mydwyn)은 영국의 왕 성 루키우스(Lucius, 12월 3일)의 명에 의해 영국에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청원서를 가지고 교황 성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 5월 26일)에게 파견된 이들이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1. 오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Odil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961/962-1049년 클뤼니
오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오딜로.
오딜로 자료
성 오딜로는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Auvergne)에서 귀족인 메르쾨르(Mercoeur) 가문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브리우드(Brioude)의 성 율리아누스 신학교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991년경에 클뤼니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는 993년 제4대 수도원 원장인 성 마욜루스(Majolus, 5월 11일)의 비서로 일하다가, 994년 5월 11일 제5대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인자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지닌 그는 동시에 뛰어난 조직력과 지도력과 통솔력을 발휘하여 클뤼니 공동체의 수를 크게 확장시키는 동시에 하나로 통합시켜 클뤼니 연합회를 체계적으로 정립시켰다.
1030-1031년에 성 오딜로는 자신의 수도원과 소속 모든 회원들이 함께 기념할 축일로 '모든 성인의 날'(11월 2일, 오늘날의 위령의 날)을 택하였다.
이 기념일은 후에 교회 전례력에 정식으로 수록되었다. 1041년에 성 오딜로는 수도원 내에서 수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일체의 싸움을 중지하도록 '신의 휴전'(Treuga Dei)을 확대시켜 적용하였다.
또 성당에 피신처를 구한 사람을 체포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언제나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1033년에 대기근이 일어나자 수도원 소유의 재물을 팔아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성 오딜로는 이러한 모든 일을 통하여 내외적으로 클뤼니 수도원의 기틀을 마련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새롭고 웅장한 수도원 건물들을 짓는 데 헌신하였으며, 클뤼니 수도회가 에스파냐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또 어려서부터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깊었던 그는 육화에 있어서 동정녀의 역할과 성모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이 지닌 특권을 역설하였다. 그는 1049년 1월 1일 수비니(Souvigny)의 수도원을 방문하였다가 사망하여 그곳에 안치되었다.
그는 1063년에 시성되었는데, 이렇듯 빠른 진행에는 성인의 전기를 저술한 성 베드로 다미아누스(Petrus Damianus, 2월 21일)의 역할이 컸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2. 요셉 마리아 토마시
- 가톨릭 성인 이름
Joseph Mary Tomas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추기경 - 활동 연도와 지역
1649-1713년
요셉 마리아 토마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또마시, 똠마시, 메리, 미르얌, 미리암,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톰마시, 호세.
요셉 마리아 토마시 자료
시칠리아(Sicilia)의 알리카타(Alicata) 태생인 성 요셉 마리아 토마시(Josephus Maria Tomasi)의 부친은 팔레르모(Palermo)의 공작이었고 람페두사(Lampedusa) 섬의 왕자 칭호를 가진 분이었다.
요셉의 네 누이들은 부친이 팔마(Palma)에 세운 베네딕토 수녀원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소년 요셉은 이미 훌륭한 그리스어 학자였다. 또한 교회 음악에도 비상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테아틴(Theatine) 수도회 총장이 그의 재능을 높게 평가할 정도였다.
수도생활에 대한 꿈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때 마침 그의 어머니가 3회원이 되었고, 그의 부친도 비슷한 결정을 함에 따라 그의 앞길을 막던 장애물이 걷혔다.
그는 1665년에 팔레르모에 있는 테아틴 수도회에 입회하여 왕자의 신분을 포기하고 수련기를 거쳐 이듬해 첫 허원을 한 뒤 메시나(Messina)로 가서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그 다음에 로마(Roma)로 가서 페라라(Ferrara)와 모데나(Modena) 대학을 다녔고, 1673년 12월 25일에는 나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거의 기도와 학문 연구에 바친 은수자의 생활이었다. 그는 그리스 철학, 성경 그리고 성무일도를 연구하였다. 그의 재능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히브리어 교사이던 랍비 모세 다 케이브가 유대교에서 개종까지 하였다.
그의 첫 저술은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스페쿨룸"(Speculum)이며, 1680년에는 고대의 전례를 서술한 "코디체스 사크라멘토룸"(Codices Sacramentorum)을 냈고, "시편"(Psalterium)은 주세페 카루스(J. M. Carus)라는 필명으로 냈다.
1697년 그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에게 순종하는 뜻으로 바티칸으로 들어갔고, 1704년에는 수도자성성(Congregation of Discipline of Regulars)의 신학자로 임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단순한 생활을 했고 동료들과 함께 성가를 불렀으며 늘 초라한 음식을 즐겼다. 그는 한 마디로 하느님의 사랑에 푹 빠진 사람이었다.
미사를 드리는 그를 보고 그에게 특은이 내렸음을 누구나 인정하였고, 피조물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은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한다. 1712년 추기경에 오른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는데, 공교롭게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가 12월에 중병에 들자 "교황은 회복되고 내가 곧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1713년 1월 1일 로마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1803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6년 10월 1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요셉 마리아 톰마시(Josephus Maria Tommasi)로도 불린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3. 우골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Hugolinu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260년 괄도
우골리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우골리누스, 후골리노, 후골리누스.
우골리노 자료
이탈리아의 괄도 카타네오(Gualdo Cattaneo)에서 태어난 우골리누스(또는 우골리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들어갔다는 기록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짧은 수도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덕의 향기는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1919년 그에 대한 공경이 승인되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4. 유스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Justi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40년 키에티
유스티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유스띠노, 유스띠누스, 유스티누스, 저스틴.
유스티노 자료
성 유스티누스(Justinus, 또는 유스티노)는 아주 옛날부터 이탈리아 키에티의 성인으로 공경받아 왔다. 어떤 저자들은 그를 키에티의 주교로서 묘사하고 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5. 지그문트 고라즈도프스키
- 가톨릭 성인 이름
Zygmunt Gorazdowsk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5-1920년 리비프
지그문트 고라즈도프스키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시그문드, 시그문트, 시지스문도, 시지스문두스, 지그문드.
지그문트 고라즈도프스키 자료
성 지그문트 고라즈도프스키는 1845년 11월 1일 오늘날의 폴란드(Poland) 남부에 위치한 사노크(Sanok)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철저히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시련과 고통까지 면제되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 지그문트는 폐병으로 고통을 당했다. 하지만 이 또한 그가 다른 사람의 요구를 배려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곳에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프셰미실(Przemysl)에서 고등교육을 마친 후 우크라이나(Ukraine)의 리비프에 있는 법학부에 입학했다. 법학 공부를 시작한 지 2년이 끝나갈 무렵 그는 사제직에로의 성소를 느껴 리비프에 있는 라틴 가톨릭 신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심하였다.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자신의 허약한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2년 동안 집중적인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1871년 7월 21일 리비프 교구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가 되고 첫 6년 동안 지그문트 신부는 여러 도시에서 본당 부주임과 행정 책임자로서 사목활동을 했다. 그는 사제 직무와 애덕 활동 수행에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했다.
한 도시(Wojnilow)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그는 영웅적으로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심지어는 감염의 위험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그는 사제직을 통해 본당 신자들의 영적인 건강을 지키고 성장시키기 위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고, 부모와 교사 그리고 젊은이들을 돕기 위해 교리서와 다른 많은 책들을 저술하고 출판하였다. 또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많은 사도직을 시작하였다.
1877년 초 지그문트 신부는 리비프의 성 니콜라스(Nicholas) 본당에서 놀랄만한 영성적 활동과 자선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40년 동안 사목하며 많은 학교에서 봉사했을 뿐만 아니라 사제들을 위한 착한 목자회도 설립하였다. 그가 행한 다른 모든 활동 중에서도 특별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자선 활동이 제일 빛났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 말기 환자와 요양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보건 센터,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한 기관, 미혼모와 고아들을 위한 집, 성 요셉 폴란드-독일 가톨릭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업들을 지속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1884년 2월 17일 성 요셉의 딸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지그문트 신부는 1920년 1월 1일 리비프에서 선종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요 집 없는 이들의 사제로 불렸던 그는 2001년 6월 26일 사목방문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찾은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리비프 대교구에서 시복되었고, 2005년 10월 2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가 설립한 성 요셉의 딸 수도회는 설립자에 의해 그들에게 맡겨진 카리스마를 오늘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현재 8개국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봉사하며 교육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시지스문두스 고라즈도프스키(Sigismundus Gorazdowski)로도 불린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6. 콘코르디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oncord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년경 스폴레토
콘코르디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꼰꼬르디오, 꼰꼬르디우스, 콘코르디우스.
콘코르디오 자료
로마의 차부제로 성직 생활을 시작한 성 콘코르디우스(또는 콘코르디오)는 세상을 떠나 고적한 곳에서 대부분 시간을 홀로 기도에 전념하며 보냈다. 로마 순교록은 그를 신부 순교자로 기록하고 있는데, 언제 누구에게 사제품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안토니누스 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스폴레토로 끌려와 총독에게 심문을 받았다. 그는 총독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인하고, 주피터 신상 앞에 희생제물을 바치면 자유를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즉시 거부했다.
총독은 첫 심문에서 그를 곤봉으로 마구 때린 후 고문대에 올려놓았는데, 높이 매달린 상태에서 오히려 성 콘코르디우스는 “주 예수님, 찬미 받으소서!”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총독은 그를 오랫동안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천사들의 방문으로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총독은 다시금 그를 불러내 우상숭배를 강요했으나, 오히려 그가 신상 앞에 침을 뱉자 군인들을 시켜 참수형에 처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7. 클라로
- 가톨릭 성인 이름
Cla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660년경
클라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라로, 글라루스, 끌라로, 끌라루스, 클라루스.
클라로 자료
성인이 젊은 시절에 얻은 클라루스(또는 클라로)라는 이름은 ‘빛남, 광명’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그의 인간적인 지식보다는 하느님께 대한 놀라운 지식 때문에 얻었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 남동부에서 이탈리아 국경에 이르는 옛 지방인 도피네(Dauphine)의 비엔(Vienne)에 있는 성 마르첼루스(Marcellus)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훌륭한 덕을 닦았다. 그는 비엔의 대주교인 카데올두스에 의하면 성 페레올(Ferreol) 수도원의 수도자로 출발하여 성 블란디나(Blandina) 수도원의 영적 지도자로 지내면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여러 부인들을 수도생활로 인도하였다. 클라루스에 대한 공경은 1903년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는 재단사와 재봉사의 수호성인이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8. 펠릭스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x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80년경 부르주
펠릭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체.
펠릭스 자료
성 펠릭스는 파리(Paris)의 성 게르마누스(Germanus, 5월 28일)가 그의 주교직을 승인하고 축성한 인물이므로 존재 여부는 확실하나 그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알 수 없다. 그는 573년 파리 회의에 참석하였고 성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Venantius Fortunatus, 12월 14일)가 그에게 헌시를 바친 것이 기록상으로 남아 있다. 그의 무덤은 카스트로(Castro)의 성 아우스트레시실루스(Austregisilus) 성당에 있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19. 풀젠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Fulge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67-533년 루스페
풀젠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풀겐티오, 풀겐티우스, 풀젠시우스, 풀젠티오, 풀젠티우스.
풀젠시오 자료
카르타고(Carthago)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파비우스 클라우디우스 고르디아누스 풀겐티우스(Fabius Claudius Gordianus Fulgentius, 또는 풀젠시오)는 어머니가 과부가 되면서부터 가문의 영지를 관리하였는데, 그의 탁월한 능력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훌륭한 교육을 받았던 그는 카르타고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었으나 2년 후에 사임하면서부터 정통파 주교인 파우스투스(Faustus)가 지도하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507년 그는 루스페(오늘날 튀니지의 쿠디아트 로스파)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에는 아리우스파(Arianism)인 반달족(Vandals)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통파 주교들이 사르데냐(Sardegna) 섬으로 추방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그런대로 교구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는 사르데냐 섬의 칼리아리(Cagliari)에 유배된 동안에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반달족의 왕인 트라시문드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왕은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 아리우스파 성직자와의 토론회를 주선하였으나 풀겐티우스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518년에 사르데냐 섬으로 다시 추방해버렸다.
그 후 왕의 후계자인 힐데릭이 귀향을 허가하여 정상적으로 집무하였는데, 그의 재임 기간 대부분은 유배생활로 보냈다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신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의 이름만 들어도 아리우스파 성직자들은 겁을 내었다.
그는 아리우스(Arius) 이단을 배격하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사목자였다. 그 후 그는 시르시니아(Circinia) 섬에 있는 수도원으로 은거하였다가 루스페로 돌아온 얼마 뒤에 운명하였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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