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7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군둘포, 넥탄, 니칸데르, 라이네리오, 마누엘, 마르치아노, 몬타노, 몰링, 베드로 감바코르타, 베사리온, 보툴포, 사벨, 아둘포, 아비토, 안티디오, 알베르토 슈미엘로프스키, 예레미야, 이사우로, 이스마엘, 인노첸시오, 페레그리노, 펠릭스, 헤르베오, 히메리오, 히파시오, 총 25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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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6월 1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5가지
6월 17일 남자세례명 목록
- 군둘포
- 넥탄
- 니칸데르
- 라이네리오
- 마누엘
- 마르치아노
- 몬타노
- 몰링
- 베드로 감바코르타
- 베사리온
- 보툴포
- 사벨
- 아둘포
- 아비토
- 안티디오
- 알베르토 슈미엘로프스키
- 예레미야
- 이사우로
- 이스마엘
- 인노첸시오
- 페레그리노
- 펠릭스
- 헤르베오
- 히메리오
- 히파시오
1. 군둘포
- 가톨릭 성인 이름
Gundulph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 부르주
군둘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군둘푸스.
군둘포 자료
성 군둘푸스(또는 군둘포)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지방의 주교였고 부르주에서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넥탄
- 가톨릭 성인 이름
Nect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10년경 하틀랜드
넥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넥딴.
넥탄 자료
성 넥탄에 대해 알려진 바는 그리 많지 않지만, 그는 남부 웨일스(Wales)에 있던 브러허이니오(Brycheiniog, 오늘날의 브레콘 Brecon) 왕국 브리찬(Brychan) 왕의 24명의 자녀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이집트의 성 안토니우스(Antonius, 1월 17일) 은수자의 삶에 대해 듣고 큰 영감을 받아 외딴곳에서 고적한 삶을 살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동료들과 함께 웨일스를 떠나 배가 닿는 곳에 정착하려 했는데, 배는 잉글랜드 남서부에 있는 데번(Deveon) 북쪽 해안가에 도착했다.
그들은 숲속에서 몇 년을 지냈다. 그런데 성 넥탄의 가족이 찾아오자 그는 다시 더 깊은 계곡으로 자리를 옮겨 우물을 만들고 고적한 삶을 살았다.
전설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계곡에서 돼지 치는 이가 잃어버린 돼지를 찾는 데 도움을 주어 두 마리의 소를 선물로 받았다. 그런데 강도들에게 소를 도둑맞자 그는 소를 훔친 강도들을 찾아 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한 강도에 의해 목이 잘리고 말았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성 넥탄은 잘린 자기 머리를 들고 우물까지 걸어와 쓰러졌다고 한다. 그의 목을 자른 강도는 놀라 도망쳤고, 다른 한 강도가 그를 묻어주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그의 무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그의 피가 떨어진 곳에서 폭스글러브(foxglove, 디기탈리스의 일종)가 자라났다고 한다.
그에 대한 공경이 퍼지면서 중세부터 그에게 봉헌된 성당들이 여럿 생겨났고, 해적들로부터 그의 유해를 보전하기 위해 데번의 하틀랜드 수도원에 모셨다. 그리고 13세기에 수도원 자리에 성 넥탄에게 봉헌된 성당이 건립되었다. 그는 데번과 하틀랜드의 수호성인으로서 또 순교자로서도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니칸데르
- 가톨릭 성인 이름
Nicand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경
니칸데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깐데르, 니깐드로, 니칸델, 니칸드로.
니칸데르 자료
성 니칸데르와 성 마르키아누스(Marcianus)는 로마군의 군인이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칙령을 내렸을 때 스스로 제대해 버렸다. 그런데 이 사실 자체가 범법 행위로 간주되었고, 그들은 막시무스(Maximus)라는 지방 장관 앞으로 끌려가 이교도의 신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성 니칸데르는 그 명령의 부당성을 역설하며 불멸의 하느님을 저버리고 나무와 돌을 숭배할 수는 없다고 했고, 같은 자리에 있던 그의 아내 다리아(Daria) 역시 남편을 옹호했다. 이때 막시무스는 다리아에게 물었다.
“사악한 여인아, 왜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가?”
그러자 다리아는 “저는 남편의 죽음을 원치 않습니다. 다만 남편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 안에 살고 있으니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고 말한 것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지방 장관은 다리아가 다른 남자와 살기 위해 남편이 죽기를 원한다고 의심했다. 그러자 다리아는 “만약 당신이 그런 의심을 한다면 먼저 나를 죽여라.”라고 말했다. 막시무스는 칙령의 내용이 군대에 하달된 것이라 일반 여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며 다리아를 감옥에 가두었다가 쫓아냈다.
성 니칸데르와 성 마르키아누스의 믿음은 감옥에 갇혀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의 명령을 따르기보다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했다. 재판을 보러 다시 온 다리아는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세요.” 하며 그들을 격려했고, 그들은 마침내 참수형을 받고 영광스러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들이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이탈리아 중부 몰리세(Molise) 지방의 베나프로(Venafro)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 니칸데르와 성 마르키아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 때 로마제국의 속주인 일리리쿰(Illyricum)의 모이시아(Moesia, 오늘날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지역)에 있는 실리스트라(Silistra, 오늘날 불가리아 동북부의 도시)에서 순교한 것으로 변경하여 기록하였다.
한편 베나프로와 인근 지방에서는 다리아 또한 순교 성녀로서 오래전부터 공경해 왔다. 남편의 순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또한 순교했다고 전해지는데, “로마 순교록”은 성녀 다리아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 성 니칸데르는 이탈리아에서 니칸드로(Nicandro)로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라이네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Rayn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례자, 고행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60년경 피사
라이네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니에리, 라이네리우스.
라이네리오 자료
성 라이네리우스(Rainerius, 또는 라이네리오)는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부유한 상인이자 선주인 간둘포 스카체리(Gandulfo Scacceri)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그는 여러 도시를 다니며 연주하는 음악가로서 세상의 즐거움을 쫓았다.
여행 중에 그는 산양 같은 동물 털로 짠 망토를 걸친 알베르토(Alberto)라는 거룩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코르시카 출신의 귀족이었다. 알베르토의 권유로 그는 피사에 있는 성 비투스(Vitus) 수도원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그들을 위해 일하는 수도자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죄에 물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동안의 삶을 뉘우치는 뜻에서 먹기를 거부한 채 3일 동안 눈물을 흘렸는데, 그 후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날마다 주님께 기도한 결과 하느님께서 기적을 베푸시어 영혼과 함께 육신의 눈도 다시 밝혀 주셨다.
1146년에 그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상인으로 변신했다. 그는 사업을 위해 여러 항구를 방문하고 선원들과의 무역을 통해 많은 재물을 얻게 되었다. 그의 여정은 어느덧 성지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부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재물을 포기하고 완전한 가난 속에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성지에서 7년을 마치 거지처럼 지내며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Palestina) 곳곳의 주님의 성지를 방문했다. 그는 타보르산에서 십자가를 그어 맹수를 쫓은 적이 있고, 빵을 많게 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기적도 행했다고 한다.
1153년 성 라이네리우스는 고향인 피사로 돌아와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다시 성 비투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설교가로서 명성도 얻었지만 계속해서 엄격한 생활을 하다가 선종하여 피사의 주교좌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즈음에 이미 사람들로부터 성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기적의 성수로 치유의 은사를 베풀고 악령을 쫓아내 ‘데 아콰’(de Aqua)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에 의해 시성되었고, 피사의 수호성인이자 여행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라니에리(Ranieri)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마누엘
- 가톨릭 성인 이름
Manu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
마누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마누엘 자료
성 마누엘과 성 사벨(Sabel) 그리고 성 이스마엘(Ismael)은 칼케돈(Chalcedon)에서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와 평화를 협상하기 위해 페르시아에서 파견되어 온 특사들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율리아누스 황제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알고는 모두 참수하였다. 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성당을 봉헌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마르치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경
마르치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시안, 마르치아누스, 마르치안, 마르키아노, 마르키아누스.
마르치아노 자료
성 니칸데르(Nicander)와 성 마르키아누스(Marcianus, 또는 마르치아노)는 로마군의 군인이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칙령을 내렸을 때 스스로 제대해 버렸다. 그런데 이 사실 자체가 범법 행위로 간주되었고, 그들은 막시무스(Maximus)라는 지방 장관 앞으로 끌려가 이교도의 신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성 니칸데르는 그 명령의 부당성을 역설하며 불멸의 하느님을 저버리고 나무와 돌을 숭배할 수는 없다고 했고, 같은 자리에 있던 그의 아내 다리아(Daria) 역시 남편을 옹호했다. 이때 막시무스는 다리아에게 물었다.
“사악한 여인아, 왜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가?” 그러자 다리아는 “저는 남편의 죽음을 원치 않습니다. 다만 남편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 안에 살고 있으니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고 말한 것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지방 장관은 다리아가 다른 남자와 살기 위해 남편이 죽기를 원한다고 의심했다.
그러자 다리아는 “만약 당신이 그런 의심을 한다면 먼저 나를 죽여라.”라고 말했다. 막시무스는 칙령의 내용이 군대에 하달된 것이라 일반 여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며 다리아를 감옥에 가두었다가 쫓아냈다.
성 니칸데르와 성 마르키아누스의 믿음은 감옥에 갇혀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의 명령을 따르기보다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했다. 재판을 보러 다시 온 다리아는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세요.” 하며 그들을 격려했고, 그들은 마침내 참수형을 받고 영광스러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들이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이탈리아 중부 몰리세(Molise) 지방의 베나프로(Venafro)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 니칸데르와 성 마르키아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 때 로마제국의 속주인 일리리쿰(Illyricum)의 모이시아(Moesia, 오늘날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지역)에 있는 실리스트라(Silistra, 오늘날 불가리아 동북부의 도시)에서 순교한 것으로 변경하여 기록하였다.
한편 베나프로와 인근 지방에서는 다리아 또한 순교 성녀로서 오래전부터 공경해 왔다. 남편의 순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또한 순교했다고 전해지는데, “로마 순교록”은 성녀 다리아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몬타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ont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0년 가에타
몬타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몬따노, 몬따누스, 몬타누스.
몬타노 자료
군인 신자였던 성 몬타누스(또는 몬타노)는 이탈리아 연안의 폰차(Ponza) 섬으로 이송되어 목 주위에 무거운 돌을 매달고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시신을 발견해서 가에타에 안장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몰링
- 가톨릭 성인 이름
Moling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97년경 페른
몰링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몰린고, 몰린구스.
몰링 자료
영국 웨일스(Wales) 지방의 성직자이자 역사가인 기랄두스 캄브렌시스(Giraldus Cambrensis)는 성 파트리키우스(Patricius, 3월 17일), 이오나의 성 콜룸바(Columba, 6월 9일), 페른의 성 몰링 그리고 성 브로칸을 아일랜드의 4대 예언자로 꼽았다.
성 몰링은 웩스퍼드(Wexford) 지방 태생으로 렌스터(Leinster)의 왕손이었다. 그는 글렌달록(Glendalough)에서 수도자가 된 후 배로(Barrow) 강변의 아카카인니드(Aghacainid)에 수도원을 세우고 원장이 되었다. 여기서 그의 영적 지혜와 표양은 더욱 유명해졌고, 사람들로부터 높은 공경을 받기 시작하였다.
한때 그는 속이 텅 빈 나무 그루터기 속에서 살았는데, 찾아오는 손님이 없을 때에는 거의 매일 단식하며 기도생활만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후 그는 성 아이다누스(Aidanus, 1월 31일)를 계승하여 페른의 주교가 되었으나, 몇 년 후에 스스로 사임하고 자신의 옛 생활로 되돌아갔다. 그는 몰린구스(Moling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베드로 감바코르타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Gambacorta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55-1435년 피사
베드로 감바코르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감바꼬르따,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감바코르타 자료
베드로 감바코르타(Petrus Gambacorta)는 25세 때에 부친이 다스리던 피사 공화국의 궁중을 떠나 우르비노(Urbino) 교구의 몬테벨로(Montebello) 은둔소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주로 인근 마을에서 애긍을 청하면서 회개생활을 시작하였다.
1380년 그는 12명의 강도들을 회개시켜 그들과 함께 12개의 움막을 짓고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를 수호성인으로 모심과 아울러 그의 규칙을 채택한 ‘성 히에로니무스 은수자회’ 혹은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난한 형제회’를 설립하였다. 그의 수도자들은 연중 네 번의 사순절을 지내고,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그리고 금요일마다 단식하였다.
1393년 그의 부친과 두 명의 형제들이 살해당하여 공화국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그를 지도자로 모시려는 신하들 때문에 한동안 유혹에 빠졌으나, 누이동생인 복녀 클라라 감마코르타(Clara Gambacorta, 4월 17일)의 표양을 따라 그 역시 살인자들을 완전히 용서하고 수도생활에 전념하였다.
1421년 그의 수도회는 교황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에 의하여 승인되었다. 그는 80세의 나이로 베네치아(Venezia)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693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 또는 인노첸시오 12세)에 의해 장엄하게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베사리온
- 가톨릭 성인 이름
Bessari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말경 이집트
베사리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싸리온.
베사리온 자료
성 베사리온은 이집트 출신으로 이상한 부르심을 들은 후 사막으로 들어가 성 안토니우스(Antonius)의 제자가 되었다가, 그 후 다시 성 마카리우스(Macarius)의 제자로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는 마치 새들이 지붕 이쪽저쪽으로 날아다니며 살듯이 그렇게 산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철저한 침묵과 단식으로 지냈는데, 한번은 40일간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지내면서, 찔레 밭 속에서 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지독한 가뭄이 계속되자 비를 내리게 한 적이 수차례 있고, 나일 강을 걸어서 건넜으며, 악마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다수의 사막의 교부들처럼 성 베사리온도 수를 누렸는데 모세(Moyses), 여호수아(Iosue), 엘리아(Elias) 그리고 세례자 요한(Joannes Baptistae)에 비길 수 있다고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보툴포
- 가톨릭 성인 이름
Botulf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680년
보툴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보톨포, 보톨푸스, 보톨프, 보툴푸스, 보툴프.
보툴포 자료
성 보툴푸스(Botulphus, 또는 보툴포)는 중세 영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성인이었으나, 그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는 색슨(Saxon) 귀족 가문에서 그리스도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모에 의해 형제지간인 성 아둘푸스(Adulphus)와 함께 수도원 교육을 받기 위해 유럽 본토의 독일 방면으로 갔다. 그곳에서 성 아둘푸스와 함께 수도자가 되었는데, 성 아둘푸스는 그곳에 남아 후에 위트레흐트(Utrecht)의 주교가 된 듯하다. 그러나 성 보툴푸스는 잉글랜드로 돌아와 왕의 후원을 받아 654년 서퍽(Suffolk)의 이칸호(Icanho)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성령에 충만하여 주목할만한 삶을 산 사람으로 전해진다. 사람들은 보통 영국이나 미국의 보스턴(Boston)이란 도시 이름과 그를 결부시켜 생각한다. 보스턴은 본래 보톨프스톤(Botolphston, Botolph’s stone 또는 Botoph’s town에서 유래)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는 보톨푸스(Botolph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사벨
- 가톨릭 성인 이름
Sabe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
사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사벨 자료
성 마누엘(Manuel)과 성 사벨 그리고 성 이스마엘(Ismael)은 칼케돈(Chalcedon)에서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와 평화를 협상하기 위해 페르시아에서 파견되어 온 특사들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율리아누스 황제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알고는 모두 참수하였다. 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성당을 봉헌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아둘포
- 가톨릭 성인 이름
Adulf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 활동 연도와 지역
+680년경
아둘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둘뽀, 아둘뿌스, 아둘푸스, 아둘프.
아둘포 자료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성 아둘푸스(Adulphus, 또는 아둘포)는 성 보툴푸스(Botulphus)와 형제지간으로 색슨(Saxon) 귀족 가문에서 그리스도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모에 의해 성 보툴푸스와 함께 수도원 교육을 받기 위해 유럽 본토의 독일 방면으로 갔다. 그곳에서 함께 수도자가 된 후 성 보툴푸스는 잉글랜드로 돌아갔지만, 그는 남아서 후에 위트레흐트(Utrecht)나 마스트리흐트(Maastricht)의 주교가 된듯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아비토
- 가톨릭 성인 이름
Avi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530년? 미시
아비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비또, 아비뚜스, 아비투스.
아비토 자료
프랑스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에 따르면 성 아비투스(또는 아비토)는 페르슈(Perche) 옛 관구를 설정했던 프랑스의 원장이며, 오를레앙(Orleans)에 안장되어 있고 큰 공경을 받았다고 한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그의 이름으로 봉헌된 성당을 방문했으며, 그분의 기적적인 권능으로 일어난 기적들이 수없이 많았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처음에 성 아비투스는 오를레앙 근교 미시 수도원에 평수사로 입회하였다. 그는 사실 배우지도 못했고 또 너무 단순했기 때문에 성 막시미누스(Maximinus) 외에는 그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성 막시미누스는 그의 높은 성덕을 일찍이 알아보았으며, 그를 지하 보관실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후 수도원을 떠나 은둔소로 돌아갔다.
성 막시미누스가 서거한 후에야 비로소 성 아비투스의 높은 덕을 알게 된 수도자들은 그를 찾아 원장으로 모셨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미시 수도원에 얼마간 머물렀지만 결국은 도망하여 페르슈의 은수자로서 숨은 생활만을 즐겼다.
국왕 클로테르는 성 아비투스와 동료 은수자들을 위하여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지금의 샤토됭(Chateaudun)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안티디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ntid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65년경 브장송
안티디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띠디오, 안띠디우스, 안티디우스.
안티디오 자료
성 안티디우스(또는 안티디오)는 성 프로니누스(Froninus)의 제자로 스승을 계승하여 프랑스 브장송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게르만의 무리나 이방인 침입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알베르토 슈미엘로프스키
- 가톨릭 성인 이름
Albert Chmielowsk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845-1916년 크라쿠프
알베르토 슈미엘로프스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버트, 알베르또, 알베르뚜스, 알베르투스, 앨버트, 흐미엘로프스키, 흐미엘롭스끼.
알베르토 슈미엘로프스키 자료
1845년 8월 20일 폴란드 이고알로미아(Igoalomia)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알베르투스 아담 슈미엘로프스키(Albertus Adam Chmielowski, 또는 알베르토 슈미엘로프스키)는 가족 소유의 부동산 관리를 위해 농업을 공부하였다. 젊어서부터 정치에 관여했고, 17세 때에는 폭도들과 싸우다가 다리를 잃었다.
크라쿠프에서 그는 인기 있고 잘 알려진 형편이 좋은 예술가였다. 정치와 예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인식을 갖게 해주었다. 온화하고 열정적인 영혼의 소유자였던 그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것에 대한 소명을 느꼈다. 그는 몇 년간의 반성을 통해 이 원의가 하느님께서 봉사에로 부르시는 성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작은 형제회 제3회에 들어가 알베르투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예술을 그만둔 그는 크라쿠프에서 극빈자들을 위한 삶을 시작했다.
1887년 그는 설립자의 이름을 따서 알베르토회 또는 그들의 거친 회색 의상으로 인해 회색 형제회로도 알려진 가난한 이들의 종인 작은 형제회 제3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891년에 여자 제3회(회색 자매회)를 설립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과 집이 없는 이들을 위해 음식과 쉼터를 제공하였다.
성 알베르투스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재앙은 불쌍한 형제자매들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가진 이’들이 ‘가지지 못한 이’들을 무시하고 그들로부터 떨어져 지내며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보살피도록 방치했다고 비판하였다.
훗날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된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는 1949년에 성 알베르투스에 관한 유명한 연극의 대본을 썼는데 1997년에 ‘우리 하느님의 형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1916년 12월 25일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선종한 그는 1983년 6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크라쿠프에서 복자품을 받았고, 이어 1989년 11월 12일 같은 교황에 의해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예레미야
- 가톨릭 성인 이름
Jeremia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아테네
예레미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예레미아, 예레미아스, 제레미.
예레미야 자료
성 이사우루스(Isaurus) 부제, 성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 성 펠릭스(Felix), 성 예레미야(Jeremias)와 성 페레그리누스(Peregrinus)는 아테네 사람들로서 박해를 피해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아폴로니아(Apollonia)에 있는 한 동굴에 피신해 있다가 발각되어 모두 참수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이사우로
- 가톨릭 성인 이름
Isau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아테네
이사우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이사우루스.
이사우로 자료
성 이사우루스(또는 이사우로) 부제, 성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 성 펠릭스(Felix), 성 예레미야(Jeremias)와 성 페레그리누스(Peregrinus)는 아테네 사람들로서 박해를 피해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아폴로니아(Apollonia)에 있는 한 동굴에 피신해 있다가 발각되어 모두 참수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이스마엘
- 가톨릭 성인 이름
Ismae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
이스마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이스마엘 자료
성 마누엘(Manuel)과 성 사벨(Sabel) 그리고 성 이스마엘은 칼케돈(Chalcedon)에서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와 평화를 협상하기 위해 페르시아에서 파견되어 온 특사들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율리아누스 황제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알고는 모두 참수하였다. 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성당을 봉헌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인노첸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Innocen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아테네
인노첸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인노첸시우스, 인노켄티오, 인노켄티우스.
인노첸시오 자료
성 이사우루스(Isaurus) 부제, 성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 또는 인노첸시오), 성 펠릭스(Felix), 성 예레미야(Jeremias)와 성 페레그리누스(Peregrinus)는 아테네 사람들로서 박해를 피해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아폴로니아(Apollonia)에 있는 한 동굴에 피신해 있다가 발각되어 모두 참수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1. 페레그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Peregrin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아테네
페레그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뻬레그리노, 뻬레그리누스, 페레그리누스, 페레그린.
페레그리노 자료
성 이사우루스(Isaurus) 부제, 성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 성 펠릭스(Felix), 성 예레미야(Jeremias)와 성 페레그리누스(Peregrinus, 또는 페레그리노)는 아테네 사람들로서 박해를 피해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아폴로니아(Apollonia)에 있는 한 동굴에 피신해 있다가 발각되어 모두 참수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2. 펠릭스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x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아테네
펠릭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체.
펠릭스 자료
성 이사우루스(Isaurus) 부제, 성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 성 펠릭스, 성 예레미야(Jeremias)와 성 페레그리누스(Peregrinus)는 아테네 사람들로서 박해를 피해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아폴로니아(Apollonia)에 있는 한 동굴에 피신해 있다가 발각되어 모두 참수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3. 헤르베오
- 가톨릭 성인 이름
Herve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경 브르타뉴
헤르베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르베, 에르브, 하비, 헤르베우스.
헤르베오 자료
성 헤르베우스(또는 헤르베오)는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전역에서 공경을 받는 유명한 성인 중 한 명이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힐데베르트 1세(Childebert I)의 궁정에서 활동했던 영국 출신 음유시인의 아들로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아들의 이름을 ‘쓰라림’ 또는 ‘비통’을 뜻하는 헤르베우스로 지었다.
그는 젊어서 한 제자와 함께 플루비엔(Plouvien) 근처에서 은수자이자 음유시인으로 살았다. 그에게는 동물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었는데, 자신이 기르던 개를 잡아먹은 늑대 한 마리를 길들여서 늘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은수 생활을 시작한 뒤로 제자들이 모여들자 플루비엔에 수도원을 만들어 함께 생활하다가 선종해 란후아노(Lanhouarneau)에 묻혔다. 그는 어떠한 명예도 원하지 않아 성직에 오르는 것도 사양했다고 한다.
성 헤르베우스 이후 브르타뉴 지방에서 그의 이름은 일반적인 이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하비(Harvey) 또는 에르베(Herve)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4. 히메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Him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60년 크레모나
히메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히메리우스.
히메리오 자료
성 히메리우스(또는 히메리오)는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가 움브리아(Umbria) 지방 아멜리아(Amelia)의 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수도자였다.
그는 먼저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매우 엄격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560년 아멜리아에서 선종하였다. 995년 그의 유해가 크레모나로 이장되어 그곳의 주요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5. 히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Hypa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450년 비티니아
히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히빠씨오, 히빠씨우스, 히파시우스, 히파티오, 히파티우스.
히파시오 자료
성 히파티우스(또는 히파시오)는 소아시아 중서부 지방의 옛 지명인 프리지아(Phrygia)에서 태어나 학자인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공부보다는 은수자 생활을 더 원했기 때문에 19세 때 부친으로부터 모진 매를 맞은 뒤로 집을 나와서 수도자가 되려고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목동 노릇을 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하루는 어느 사제가 시편을 노래하는 그를 보고 전직 군인 출신의 요나(Jonas)라는 은수자와 만나게 해주었다.
그 후 그는 부친과 화해하고 본격적으로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는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 지방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과 칼케돈(Chalcedon)으로 가서 옛 수도원을 부흥시켰고,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이단에 대항하여 정통교리 고수를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학자’라는 별명을 들으면서 활동하였고, 특히 그의 기적과 예언은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80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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