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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시데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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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 목록
데시데리오 남자세례명 목록
- 데시데리오 (1월 20일)
- 데시데리오 (3월 25일)
- 데시데리오 (5월 23일)
- 데시데리오 (비엔) (5월 23일)
- 데시데리오 (랑그르) (9월 7일)
- 데시데리오 (11월 15일)
1. 데시데리오
- 세례명 축일
1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esiderius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194년 테루안
데시데리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시데리우스, 디디에르, 디디엘.
데시데리오 이야기
성 데시데리우스(또는 데시데리오)는 프랑스 테루안의 제33대 주교로서 생오메르(Saint-Omer) 근교에 시토회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1169년 주교로 착좌한 그는 임종을 앞두고 스스로 주교좌에서 물러나 캉브롱(Cambron)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죽음을 준비하였다. 그는 애덕 실천과 기도생활에서 특출하였다고 한다. 그는 디디에르(Didier)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데시데리오
- 세례명 축일
3월 25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esiderius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25년 피스토이아
데시데리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시데리우스.
데시데리오 이야기
성 바론티우스(Barontius)의 세속의 경력은 알려진 것이 없고 다만 675년경에 자기 아들을 부르주(Bourges) 교구의 론레이(Lonrey) 수도원에 맡겼으며 거기서 첫 서원을 하였다고 전해온다. 어느 날 새벽기도 후 갑자기 심한 고통이 엄습하여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자신이 체험한 환시들을 글로 묘사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두 악마가 그의 목을 꽉 붙잡고는 3시경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라파엘 천사가 그를 도우려 와서 겨우 마귀의 팔에서 그를 구하였다. 그런 후 그는 성 베드로(Petrus) 면전으로 끌려갔는데 악마들이 그의 과거를 두고 무고하자 베드로가 그를 옹호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이제 타락한 생활을 청산하였고 또 재산을 탐하고 사기 친 것에 대하여 벌과금을 물었다고 하였다. 그런 후 지옥의 처참한 고통을 잠시 보여 준 뒤에 성 베드로가 그를 다시 수도원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 체험으로 큰 감명을 받은 바론티우스는 로마(Roma)의 성 베드로 사도의 무덤을 순례한 뒤, 피스토이아의 은둔소로 들어가서 성 데시데리우스(또는 데시데리오)라는 은수자와 함께 회개생활을 하였다. 1018년에 두 은수자가 살던 곳에 성당이 세워졌고, 성 바론티우스에게 봉헌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데시데리오
- 세례명 축일
5월 2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esiderius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08년경 비엔
데시데리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시데리우스.
데시데리오 이야기
프랑스 오툉(Autun)에서 태어나 비엔에서 교육을 받고 그곳의 주교가 된 성 데시데리우스(또는 데시데리오)는 캔터베리(Canterbury)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5월 27일)가 로마(Roma)에서 영국으로 갈 때 대교황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9월 3일)가 그를 만나도록 추천했던 주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유스타(Justa)라는 부인의 지나친 흠모로 인하여 중대한 제소가 제기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성 데시데리우스는 몇 년 동안 자신의 교구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몇 년 후에 다시 돌아오자 이번에는 티에리 국왕이 이의를 제기하여 결국 그곳을 떠나다가 왕의 수행원들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주교직을 수행하려고 노력하였고 또 그에 대한 누명은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순교자로서 큰 공경을 받아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데시데리오
- 세례명 축일
5월 2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esiderius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07년 랑그르
데시데리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시데리우스, 디디에르, 디디엘.
데시데리오 이야기
성 데시데리우스(또는 데시데리오)는 이탈리아 제노바(Genova) 출생으로 프랑스 랑그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스승 예수님처럼 자신의 양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흉포한 야만족의 침략 때 성 데시데리우스와 그의 성직자들은 그들의 양떼를 지키기 위해 도시 밖으로 나가 침략자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결국 그들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일부 저자들은 이 일이 크로쿠스(Chrocus)의 침략 때 발생했다고 하고, 다른 이들은 몇 년 뒤 반달족이 그 지방을 노략질할 때 발생했다고 보기도 한다. 성 데시데리우스는 디디에르(Didier)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데시데리오
- 세례명 축일
9월 7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esiderius - 신분과 직업
독서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5년경
데시데리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시데리우스.
데시데리오 이야기
이탈리아 캄파니아(Campania) 지방의 나폴리(Napoli) 출신으로 알려진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지만, 후대의 몇몇 순교록과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시작할 즈음에 베네벤토(Benevento)의 주교로 활동하고 있었다.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야누아리우스는 오랜 친구이자 나폴리 북쪽 해안 도시인 미세노(Miseno)의 부제인 성 소시우스(Sossius)와 나폴리 서쪽 교외에 있는 항구도시 포추올리(Pozzuoli)의 부제인 성 프로쿨루스(Proculus) 그리고 평신도인 성 에우티키우스(Eutychius)와 성 아쿠티우스(Acutius)가 신앙을 증거하고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그들을 만나러 용감하게 감옥으로 달려갔다.
이때 그의 부제인 성 페스투스(Festus)와 독서직(讀書職)을 받은 성 데시데리우스(또는 데시데리오)가 성 야누아리우스 주교를 수행해 함께 갔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구할 방도를 찾던 성 야누아리우스 주교와 그 일행 또한 캄파니아의 총독에게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그들은 당당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총독은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그들을 포추올리의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으로 내던져 주었으나 맹수들이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다. 결국 군중들의 소요를 우려한 총독은 그들을 고대 화산 분화구가 있는 인근의 솔파타라(Solfatara)로 끌고 가서 참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베네벤토의 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야누아리우스가 나폴리 근처 포추올리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했다고 9월 18일 목록에서 간단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베네벤토의 부제인 성 페스투스와 독서자인 성 데시데리우스는 9월 7일 목록에, 미세노의 부제인 성 소시우스는 성 야누아리우스 주교를 구하려다가 함께 죽음을 맞아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고 9월 23일 목록에 따로 기록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도 성 소시우스에 대해서는 9월 23일 목록에서 별도로 기록하였다. 나머지 포추올리의 부제인 성 프로쿨루스와 평신도인 성 에우티키우스와 성 아쿠티우스는 10월 18일 목록에서 포추올리에서 순교자로서 공경받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성 야누아리우스와 동료 순교자들의 유해는 나폴리의 요한(Joannes) 주교에 의해 나폴리의 카포디몬테(Capodimonte) 카타콤바에 모셔졌다. 그 후 머리를 제외한 성 야누아리우스의 유해는 롬바르디아(Lombardia) 왕자였던 베네벤토의 시코네 1세(Sicone I)에 의해 831년 베네벤토로 옮겨졌고, 1154년 베네벤토의 안전이 위태로울 때 몬테비르지네(Montevirgine)의 대수도원으로, 그리고 1497년에 다시 나폴리로 되돌아와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다. 그러면서 성 야누아리우스는 나폴리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게 되었다.
현재 나폴리 대성당 내 아름다운 성 야누아리우스 경당에는 성 야누아리우스의 피로 여겨지는 검은색 물체가 작은 유리병에 담겨 보관되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에우세비아(Eusebia)라는 여인이 순교자들의 피를 모으는 일을 하다가 우연히 성 야누아리우스의 피를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포추올리에서 나폴리의 카타콤바로 성인의 유해를 옮기는 중에 나폴리의 주교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딱딱하게 굳은 피가 1년에 여러 번, 특정한 시기에 액화되어 묽은 피로 변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전시되었고, 이 기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적 시험과 분석을 시도했으나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심 깊은 나폴리 사람들은 이를 기적으로 간주하며 성 야누아리우스의 혈액을 나폴리의 가장 소중한 유산으로 여기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성 젠나로(Gennaro)로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데시데리오
- 세례명 축일
11월 15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esiderius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55년 카오르
데시데리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시데리우스, 디디에르, 디디엘.
데시데리오 이야기
성 데시데리우스(또는 데시데리오)의 양친은 알비(Albi) 지역에 넓은 토지를 갖고 있던 귀족이었는데, 그의 모친은 지극한 신심을 가지고 있어서 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는 집안의 지위 때문에 국왕 클로테르 2세의 궁중에서 고관직에 있었는데, 여기서 그는 메스(Metz)의 성 아르눌푸스(Arnulphus)와 성 엘리기우스(Eligius)를 비롯한 많은 분들과 교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동생 루스티쿠스(Rusticus)는 사제였다가 프랑스 남서부 카오르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곧 살해당하였는데, 그 후임으로 데시데리우스가 주교로 선출되었다. 이때 그는 평신도였다.
그는 참으로 열성적이고도 힘찬 주교로서 교구의 모든 영적인 일과 현실적인 일들을 처리하여 높은 공경을 받았다. 그는 귀족들을 종용하여 신심적인 기반을 단단히 하도록 하였고, 남녀 수도회의 발전을 독려하였다. 또한 자신이 세운 수도원을 직접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성 아만티우스(Amantius)의 수도원을 건립하였고, 세 곳에 큰 성당을 지었다.
데시데리우스의 사목원칙은 항상 신자들의 그리스도교적 생활 향상이었으므로 성직자 교육에 힘썼고, 엄격한 규율을 적용시킨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알비 근교에서 운명하였으나 카오르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에서는 기적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전해온다. 디디에르(Didier)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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