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5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루돌포 아콰비바, 마녜리코, 바오로, 베드로 베르노, 안토니오 프란치스코, 알폰소 파체코, 야고보, 요한 소레트, 쿠쿠파, 크리스토포로, 테오데미로, 펠릭스, 프란치스코 아라나, 플로렌시오, 총 14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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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7월 25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4가지
7월 25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루돌포 아콰비바
- 가톨릭 성인 이름
Rudolph Aquaviva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0-1583년 쿤콜림
루돌포 아콰비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돌포, 루돌푸스, 루돌프.
루돌포 아콰비바 자료
루돌푸스 아콰비바(Rudolphus Aquaviva, 또는 루돌포 아콰비바)는 이탈리아 나폴리(Napoli) 왕국 아트리(Atri)의 공작 아들로 성 알로이시우스 곤자가(Aloysius Gonzaga, 6월 21일)와 친척간이다.
또 그는 예수회의 제5대 총장인 클라우디우스 아콰비바(Claudius Acquaviva)의 조카로서, 1568년 18세의 나이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사제품을 받은 후 그는 동인도 선교를 위해 파견되어 1578년 9월 13일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하였다. 그는 매우 단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서 하느님을 늘 의식하며 지냈다. 1579년 그는 아그라(Agra) 인근의 모굴 아크바르(Mogul Akbar)에 가서 그 지역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살세테(Salsette) 섬 선교단의 원장이 된 루돌푸스 아콰비바와 알폰수스 파체코(Alfonsus Pacheco), 안토니우스 프란치스코(Antonius Franciscus), 프란치스코 아라나(Franciscus Aranha), 베드로 베르노(Petrus Berno), 이 다섯 명의 예수회원들은 당시 힌두교도들의 정면 도전을 받던 쿤콜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선교를 결정하고 진출했는데 무장한 주민들과 정면 대치하는 상황이 생겼다.
이때 포르투갈 출신 평신도인 로드리게스가 발포함으로써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 결과 1583년 7월 25일 루돌푸스 아콰비바와 알폰수스 파체코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다른 이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살해되어 우물 속에 던져졌다.
그들은 모두 1893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쿤콜림의 순교자들로서 복자품에 올랐다. 이들의 축일은 7월 27일에 기념하기도 하고, 고아 대교구에서는 7월 26일, 예수회에서는 2월 4일에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녜리코
- 가톨릭 성인 이름
Magneri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96년 트리어
마녜리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그네리코, 마그네리쿠스, 마네리꼬, 마네리꾸스, 마네리코, 마네리쿠스, 마녜리꼬, 마녜리꾸스, 마녜리쿠스.
마녜리코 자료
성 마녜리쿠스(또는 마녜리코)는 6세기 초에 태어났고,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의 주교 성 니케티우스(Nicetius) 밑에서 자랐으며, 그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다.
성 니케티우스가 클로테르 1세에게 쫓겨날 때 마녜리쿠스 역시 그를 따라 유배지로 갔다. 그 후 6년 뒤에 그는 트리어의 주교가 되자,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에 대한 신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다.
또 그가 투르를 순례하던 중에 그 도시의 주교인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와 친밀한 사이가 되어 서로의 우정을 돈독히 하였다. 그는 또 훌륭한 제자를 많이 키웠는데 그중에서 성 고제릭이 제일 유명하다. 그는 연로하여 운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8년 가자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바오로 자료
성 바오로(Paulus)는 4세기 초 교회에 대한 박해 중에 가자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베드로 베르노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Berno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0-1583년 쿤콜림
베드로 베르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베르노 자료
루돌푸스 아콰비바(Rudolphus Aquaviva)는 이탈리아 나폴리(Napoli) 왕국 아트리(Atri)의 공작 아들로 성 알로이시우스 곤자가(Aloysius Gonzaga, 6월 21일)와 친척간이다. 또 그는 예수회의 제5대 총장인 클라우디우스 아콰비바(Claudius Acquaviva)의 조카로서, 1568년 18세의 나이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사제품을 받은 후 그는 동인도 선교를 위해 파견되어 1578년 9월 13일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하였다. 그는 매우 단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서 하느님을 늘 의식하며 지냈다. 1579년 그는 아그라(Agra) 인근의 모굴 아크바르(Mogul Akbar)에 가서 그 지역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살세테(Salsette) 섬 선교단의 원장이 된 루돌푸스 아콰비바와 알폰수스 파체코(Alfonsus Pacheco), 안토니우스 프란치스코(Antonius Franciscus), 프란치스코 아라나(Franciscus Aranha), 베드로 베르노(Petrus Berno), 이 다섯 명의 예수회원들은 당시 힌두교도들의 정면 도전을 받던 쿤콜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선교를 결정하고 진출했는데 무장한 주민들과 정면 대치하는 상황이 생겼다.
이때 포르투갈 출신 평신도인 로드리게스가 발포함으로써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 결과 1583년 7월 25일 루돌푸스 아콰비바와 알폰수스 파체코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다른 이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살해되어 우물 속에 던져졌다.
그들은 모두 1893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쿤콜림의 순교자들로서 복자품에 올랐다. 이들의 축일은 7월 27일에 기념하기도 하고, 고아 대교구에서는 7월 26일, 예수회에서는 2월 4일에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안토니오 프란치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Anthony Franci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3-1583년 쿤콜림
안토니오 프란치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안토니오 프란치스코 자료
루돌푸스 아콰비바(Rudolphus Aquaviva)는 이탈리아 나폴리(Napoli) 왕국 아트리(Atri)의 공작 아들로 성 알로이시우스 곤자가(Aloysius Gonzaga, 6월 21일)와 친척간이다. 또 그는 예수회의 제5대 총장인 클라우디우스 아콰비바(Claudius Acquaviva)의 조카로서, 1568년 18세의 나이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사제품을 받은 후 그는 동인도 선교를 위해 파견되어 1578년 9월 13일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하였다. 그는 매우 단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서 하느님을 늘 의식하며 지냈다. 1579년 그는 아그라(Agra) 인근의 모굴 아크바르(Mogul Akbar)에 가서 그 지역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살세테(Salsette) 섬 선교단의 원장이 된 루돌푸스 아콰비바와 알폰수스 파체코(Alfonsus Pacheco), 안토니우스 프란치스코(Antonius Franciscus, 또는 안토니오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아라나(Franciscus Aranha), 베드로 베르노(Petrus Berno), 이 다섯 명의 예수회원들은 당시 힌두교도들의 정면 도전을 받던 쿤콜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선교를 결정하고 진출했는데 무장한 주민들과 정면 대치하는 상황이 생겼다.
이때 포르투갈 출신 평신도인 로드리게스가 발포함으로써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 결과 1583년 7월 25일 루돌푸스 아콰비바와 알폰수스 파체코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다른 이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살해되어 우물 속에 던져졌다. 그들은 모두 1893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쿤콜림의 순교자들로서 복자품에 올랐다. 이들의 축일은 7월 27일에 기념하기도 하고, 고아 대교구에서는 7월 26일, 예수회에서는 2월 4일에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알폰소 파체코
- 가톨릭 성인 이름
Alphonsus Pacheco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1-1583년 쿤콜림
알폰소 파체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폰수스, 알퐁소, 알퐁수스.
알폰소 파체코 자료
루돌푸스 아콰비바(Rudolphus Aquaviva)는 이탈리아 나폴리(Napoli) 왕국 아트리(Atri)의 공작 아들로 성 알로이시우스 곤자가(Aloysius Gonzaga, 6월 21일)와 친척간이다. 또 그는 예수회의 제5대 총장인 클라우디우스 아콰비바(Claudius Acquaviva)의 조카로서, 1568년 18세의 나이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사제품을 받은 후 그는 동인도 선교를 위해 파견되어 1578년 9월 13일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하였다. 그는 매우 단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서 하느님을 늘 의식하며 지냈다. 1579년 그는 아그라(Agra) 인근의 모굴 아크바르(Mogul Akbar)에 가서 그 지역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살세테(Salsette) 섬 선교단의 원장이 된 루돌푸스 아콰비바와 알폰수스 파체코(Alfonsus Pacheco, 또는 알폰소 파체코), 안토니우스 프란치스코(Antonius Franciscus), 프란치스코 아라나(Franciscus Aranha), 베드로 베르노(Petrus Berno), 이 다섯 명의 예수회원들은 당시 힌두교도들의 정면 도전을 받던 쿤콜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선교를 결정하고 진출했는데 무장한 주민들과 정면 대치하는 상황이 생겼다.
이때 포르투갈 출신 평신도인 로드리게스가 발포함으로써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 결과 1583년 7월 25일 루돌푸스 아콰비바와 알폰수스 파체코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다른 이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살해되어 우물 속에 던져졌다.
그들은 모두 1893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쿤콜림의 순교자들로서 복자품에 올랐다. 이들의 축일은 7월 27일에 기념하기도 하고, 고아 대교구에서는 7월 26일, 예수회에서는 2월 4일에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야고보
- 가톨릭 성인 이름
Jam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사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4년?
야고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대 야고보, 대야고보,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장 야고보, 장야고보, 제임스.
야고보 자료
성 야고보(Jacobus)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요한(Joannes, 12월 27일)의 형이다. 성 야고보와 성 요한은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였다. 그들은 부친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에 배를 띄워 고기잡이로 살던 사람들이다(마태 4,21-22; 마르 1,19-20; 루카 5,10-11).
그들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나와 예수님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Andreas)의 집에 갔을 때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예수님께서 낫게 해주신 현장에 있었다(마르 1,29-31).
그들은 또한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 하고 청했던 사람들이다.
또 성격이 급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천둥의 아들들’이란 뜻을 지닌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얻었고(마르 3,17),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냉대를 받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라고 말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도 성 베드로(Petrus, 6월 29일)와 그들 형제만 따라오게 하셨으며(마르 5,37),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순간에도 성 베드로와 그들 형제만 함께 자리하게 하셨고(마태 17,1; 마르 9,2; 루카 9,28), 겟세마니(Gethsemane)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그러하셨다(마태 26,37; 마르 14,33).
사도행전에 따르면, 성 야고보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 임금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참수형을 받고 사도로서는 첫 순교자가 되었다(12,1-2). 전승에 의하면 그는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을 때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활동하다가 에스파냐 북서부 갈리시아(Galicia) 지방까지 갔다고 한다.
그러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다. 그가 순교한 곳에는 후에 그를 기념해 성 야고보 성당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성 야고보의 유해를 갈리시아 지방으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그런데 711년 에스파냐와 이베리아반도 전역이 아프리카 북부에 살던 무어족의 침략을 받아 점령당한 뒤 성인의 유해 또한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중 813년에 그 지방에 살던 한 은수자가 별빛에 이끌려 기적적으로 성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하면서 그 위에 성당이 건립되고, ‘별들의 들판’이란 뜻에서 ‘콤포스텔라’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도시는 자연스럽게 성인의 이름을 따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성 야고보의 무덤에서 기적이 많이 일어나고 예루살렘이 사라센 제국에 의해 점령되면서 순례가 어려워지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로마와 함께 유럽인이 즐겨 찾는 3대 순례지로 떠올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전 유럽을 가로질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여러 순례길이 생겨났다.
후대에 ‘카미노’(Camino)로 불리게 된 이 순례길에는 순례자를 위한 많은 성당과 수도원이 건립되어 숙소까지 제공하면서 순례자의 영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안전과 쉼터를 제공하는 데 힘썼다.
중세 전설 중에는 에스파냐 중북부 지역에 이슬람교를 믿는 무어인들이 침략했을 때 성 야고보 사도가 백마를 탄 기사 모습으로 나타나 앞장서 무찔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래서 에스파냐 미술 작품에서 종종 말을 탄 기사의 모습으로 성 야고보가 등장하는데, 그를 보통 ‘성 야고보 마타모로스’(Santiago Matamoros)라고 부른다. 이런 이유로 성 야고 보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야고보는 순례자의 수호성인답게 보통 순례자의 모습으로 많이 그려진다. 그는 순례자들이 사용하는 지팡이와 물병으로 사용한 호리병을 들고 있고, 뜨거운 태양을 가려줄 모자와 조개껍데기도 자주 등장한다. 조개껍데기는 성 야고보 사도와 관련된 전설에서 유래한다.
그가 순교한 후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빈 배에 태워 띄우자 이베리아반도 해안까지 갔는데 성인의 유해가 조개껍데기에 싸여 손상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어느 기사가 말을 타고 가다가 물에 빠졌는데, 성인으로 도움으로 조개껍데기에 둘러싸여 무사히 살아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조개(조가비)껍데기는 성 야고보를 상징하게 되었고, 오늘날 그 문양은 카미노 순례길에서 산티아노 데 콤포스텔라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에도 사용되고 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는 두 명이 야고보가 있다. 전통적으로 단순히 혼동을 피하고자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사도 성 요한의 형인 야고보는 대(大) 또는 장(長) 야고보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5월 3일)는 소(小) 또는 차(次) 야고보로 부르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요한 소레트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Soreth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총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394-1471년
요한 소레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소레스, 소렛트,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소레트 자료
요한 소레트(Joannes Soreth)는 1394년에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Normandie) 지방의 주요 도시인 캉(Caen)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살 무렵 캉에 있는 카르멜회 수도원에 들어가 1417년경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학업과 연구 활동을 이어갔고, 1438년경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440년에 카르멜회의 프랑스 관구장이 되었고, 1451년에는 아비뇽(Avignon) 총회에서 카르멜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당시 가톨릭교회는 서구 대이교 시대의 후유증과 14세기 중엽 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영향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고, 이로 인한 인구 감소로 인해 수도회 또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수도 규칙에 대한 완화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로 인해 느슨해진 수도 생활에 대한 개혁 필요성이 요청되었다. 요한 소레트는 총장으로서 카르멜회와 수도회의 개혁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였다.
그런 점에서 요한 소레트는 카르멜회 개혁에 앞장섰던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5일)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개혁자가 그러하듯 요한 소레트 역시 주변의 극심한 반대에 직면했다.
그는 카르멜회의 초기 규칙에 충실하도록 회칙과 회헌을 개정하고, 잘 준수하고 있지는 수시로 수도원을 방문하며 엄격하게 지도하였다.
그는 또한 카르멜회 여성 수도원의 설립에도 큰 책임을 떠맡아 활발히 활동했다. 그리고 1452년에 수도 생활을 원하는 경건한 동정녀와 과부 등을 대상으로 카르멜 3회 설립을 위한 기초를 놓았고, 1455년에 재속 카르멜 3회를 위한 첫 번째 규칙서를 작성하였다.
이 규칙서는 나중에 맨발의 카르멜 3회 회칙의 근간이 되었다. 요한 소레트 총장 신부는 프랑스 내 여러 지역에 수도원을 설립했고, 1463년에는 브르타뉴(Bretagne) 공국의 공작부인인 복녀 프란치스카 당부아즈(Francisca d’Amboise, 11월 4일)와 함께 반(Vannes)에 카르멜회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그의 개혁 의지와 성덕과 뛰어난 능력은 교황 칼리스투스 3세(Callistus III)를 감복시켜 그를 주교와 추기경으로 축성하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를 사양하고 자신의 임무만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1471년 7월 25일 앙제(Angers)에서 병으로 선종할 때까지 총장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교황 비오 9세(Pius IX)는 1866년에 그를 시복함으로써 그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25일 목록에 그를 추가하였다. 한편 카르멜회에서는 그의 기념일이 사도 성 대 야고보(Jacobus)의 축일과 겹치는 관계로 하루 전인 7월 24일 전례에서 그를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쿠쿠파
- 가톨릭 성인 이름
Cucuph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쿠쿠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구구파스, 꾸꾸파스, 쿠쿠파스.
쿠쿠파 자료
성 쿠쿠파는 아프리카의 스칠리스(Scillis)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에스파냐로 가는 길에 바르셀로나(Barcelona) 부근에서 순교하였다. 프루덴티우스(Prudentius)는 그를 기념해서 시를 지었고, 그가 순교한 자리에는 그를 기념하여 성 베네딕토 수도원이 세워졌다. 그는 또한 유해의 일부가 모셔진 프랑스 파리(Paris)에서도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크리스토포로
- 가톨릭 성인 이름
Christoph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경
크리스토포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크리스또뽈, 크리스터퍼, 크리스토퍼, 크리스토포루스, 크리스토폴.
크리스토포로 자료
성 크리스토포루스(Christophorus, 또는 크리스토포로)의 생애나 죽음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그는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 리키아(Lycia)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쇠몽둥이로 매를 맞고 화형까지 당했으나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죽지 않았고, 몇 차례의 화살을 맞고도 여전히 살아 있자 결국 참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그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들에 따르면, 그는 가나안 또는 아랍의 왕비가 성모 마리아께 기도해 얻은 아들로 이교도인 왕인 아버지가 오페루스(Offerus)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아폴로 신에게 봉헌했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센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고 용감한 사람을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왕과 악마에게 의탁했는데, 왕은 악마를 보기만 해도 겁을 내고, 악마는 길거리에 있는 십자가를 두려워했다. 그러던 중 한 은수자를 만나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라는 권고를 듣고 세례를 받으면서 크리스토포루스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성 크리스토포루스는 신체적 장점을 살려 사람들이 물살이 사나운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주인으로 알고 섬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악마도 십자가를 겁내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이 최고로 힘센 장사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강을 건너는데 그 아이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더니 결국 온 세상을 어깨에 짊어진 것만 같아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인데” 하며 혼자 중얼거리는데 그 아이가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지금 전 세계를 옮기고 있다. 나는 네가 찾던 세상의 창조주이며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 성 크리스토포루스에게 강을 건널 때 사용하던 막대기를 땅에 꽂아 보라고 했다. 다음날 그 막대기는 커다란 종려나무로 자랐고 많은 열매가 달려 있었다. 이 기적으로 많은 사람이 회개하자 리키아의 왕은 그에게 온갖 고문을 가한 후 참수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를 참수할 때 튄 피 한 방울로 자신의 병이 낫자 왕 역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전해진 이 전설은 6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9세기 중반 무렵에는 프랑스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대중적인 공경과 함께 많은 이야기가 덧붙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크리스토포로스’(Christophoros)는 원래 그리스어로서, ‘그리스도를 어깨에 업고 간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의 원래 뜻은 신체적으로 그리스도를 업는다기보다는 영성적으로 ‘그리스도를 가슴에 간직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알아듣고 있다.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전설적이기는 하지만 그가 실존 인물이었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이미 450년에 에울라리우스(Eulalius) 주교가 소아시아의 칼케돈(Chalcedon)에 성 크리스토포루스를 기념하는 성당을 세웠고, 그 후로도 여러 수도원과 성당이 그의 이름으로 봉헌되었다.
그는 여행자와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성인으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성인 중 한 사람이다. 많은 이들이 번개가 칠 때나 폭풍이 불 때, 또는 전염병이 돌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청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테오데미로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demi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51년 코르도바
테오데미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떼오데미로, 떼오데미루스, 테오데미루스, 테오데미르.
테오데미로 자료
수도승이었던 성 테오데미루스(또는 테오데미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로 무어인들의 왕 압드 알 라흐만 2세(Abd ar-Rahman II) 치하의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에서 순교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펠릭스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x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35년
펠릭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체.
펠릭스 자료
성 플로렌티우스(Florentius)와 성 펠릭스 시폰티누스(Felix Sipontinus)는 로마 황제 군에 소속된 군인으로서 같은 날 기념하는 83명의 군인 순교자들의 일원이다. 그들은 남부 이탈리아 푸르코나(Furcona)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프란치스코 아라나
- 가톨릭 성인 이름
Francis Aranha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1?-1583년 쿤콜림
프란치스코 아라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프란치스코 아라나 자료
루돌푸스 아콰비바(Rudolphus Aquaviva)는 이탈리아 나폴리(Napoli) 왕국 아트리(Atri)의 공작 아들로 성 알로이시우스 곤자가(Aloysius Gonzaga, 6월 21일)와 친척간이다. 또 그는 예수회의 제5대 총장인 클라우디우스 아콰비바(Claudius Acquaviva)의 조카로서, 1568년 18세의 나이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사제품을 받은 후 그는 동인도 선교를 위해 파견되어 1578년 9월 13일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하였다. 그는 매우 단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서 하느님을 늘 의식하며 지냈다.
1579년 그는 아그라(Agra) 인근의 모굴 아크바르(Mogul Akbar)에 가서 그 지역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살세테(Salsette) 섬 선교단의 원장이 된 루돌푸스 아콰비바와 알폰수스 파체코(Alfonsus Pacheco), 안토니우스 프란치스코(Antonius Franciscus), 프란치스코 아라나(Franciscus Aranha), 베드로 베르노(Petrus Berno), 이 다섯 명의 예수회원들은 당시 힌두교도들의 정면 도전을 받던 쿤콜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선교를 결정하고 진출했는데 무장한 주민들과 정면 대치하는 상황이 생겼다.
이때 포르투갈 출신 평신도인 로드리게스가 발포함으로써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 결과 1583년 7월 25일 루돌푸스 아콰비바와 알폰수스 파체코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다른 이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살해되어 우물 속에 던져졌다.
그들은 모두 1893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쿤콜림의 순교자들로서 복자품에 올랐다. 이들의 축일은 7월 27일에 기념하기도 하고, 고아 대교구에서는 7월 26일, 예수회에서는 2월 4일에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플로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Flore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35년
플로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플로렌시우스, 플로렌씨오, 플로렌씨우스, 플로렌티오, 플로렌티우스.
플로렌시오 자료
성 플로렌티우스(또는 플로렌시오)와 성 펠릭스 시폰티누스(Felix Sipontinus)는 로마 황제 군에 소속된 군인으로서 같은 날 기념하는 83명의 군인 순교자들의 일원이다. 그들은 남부 이탈리아 푸르코나(Furcona)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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