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9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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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8월 9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8월 9일 여자세례명 목록
1. 데레사 베네딕타 (십자가의)
- 가톨릭 성인 이름
Teresa Benedicta of the Cross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수녀, 철학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91-1942년
데레사 베네딕타 (십자가의)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네딕다, 베네딕따, 분다, 에디트 슈타인, 에디트슈타인, 테레사, 테레시아.
데레사 베네딕타 (십자가의) 자료
성녀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은 1891년 10월 12일 독일 동북부 지역의 브레슬라우(Breslau, 오늘날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Wroclaw)의 전통 유대인 가정에서 11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녀는 두 살 때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 지그프리트(Siegfried Stein)를 일사병으로 여의고, 독실한 유대교 신자인 어머니 아우구스트(Auguste Stein Courant)에 의해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거행되는 유대교 전통 예식을 보고 자라며 유달리 고집스럽고 사색과 독서를 좋아하는 학구적 성격을 지녔던 그녀는 11살 때 숙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경험하면서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해, 그리고 유다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족과 친지들의 행하는 형식적인 유대교 의식과 기도에 실망해 더는 참석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14살 때에는 학교 교육만으로 자기 가치관과 세계관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해서 갑자기 학업을 중단하고 함부르크(Hamburg)에 있는 큰언니 집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 뒤에 고등학교에 진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녀는 1911년까지는 브레슬라우에서, 1913년부터는 괴팅겐(Gottingen) 대학으로 옮겨 심리학, 철학, 역사학, 독일어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녀는 ‘괴팅겐 학파’에 가입하기 위해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조교인 라이나흐(A. Reinach)의 도움을 청했고, 그의 권유로 현상학(現象學)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괴팅겐 철학회에서 가톨릭적 이념으로 가득한 셀러(M. Scheler)의 강의를 경청하면서 그의 정신세계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곧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모라비아(Moravia)의 백색 교회 병원에서 6개월 정도 간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녀는 1916년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에드문트 후설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그의 개인 조교가 되었다.
그 후 독자적인 연구 활동을 하며 교수 취임 논문을 제출하고 후설이 직접 추천서까지 작성해 주었으나, 당시 독일 학계에서 여성이 교수로 재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개인적으로 큰 실패를 경험하고 브레슬라우로 돌아온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계속해서 철학 연구 논문들을 집필하던 중 1921년 여름 같은 괴팅겐 학파의 친구인 콘라트 마르티우스(H. Conrad-Martius)와 그녀의 남편이 경영하던 농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친구 부부가 외출한 어느 날 서재에서 우연히 손에 잡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생애”를 읽고,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실존적으로 회의하고 있었던 신(神)이 그녀를 사랑해 왔고, 그녀가 전 인격으로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기다려 왔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 후 그녀는 평화를 얻었고, 이듬해 1월 1일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또는 데레사 베네딕타)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할 의지를 확고히 했으나, 어머니의 반대와 지도신부의 만류로 이를 연기하였다. 그 대신 지도신부의 제안으로 1931년까지 슈파이어(Speyer)에 있는 성녀 막달레나 수도원 교사 양성 학교와 도미니코 수녀회의 여학교에서 독일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그리고 점차 후설의 관념론적인 철학 노선을 떠나 그리스도교 철학의 실재론적인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계속 왕성한 교육 및 학문 활동을 하던 그녀는 발처(R. Walzer) 아빠스로부터 카르멜 수도원 입회를 허락받고 어머니와 힘겨운 이별을 나눈 뒤 1933년 10월 14일 쾰른(Koln)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기 동족과 하느님의 백성이 처한 운명으로 받아들인 그녀는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소명을 실천하고자 자기 수도명을 ‘십자가의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a Cruce)로 정하였다. 그녀는 입회 후에도 수도원 원장의 적극적인 학문 지원에 힘입어 지속적인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1936년 9월 14일 첫 서원을 했는데, 바로 그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어머니가 지녀왔던 유대교 신앙을 존중해 주었다. 그리고 1938년 4월 21일 종신서원을 하였다. 그러나 나치의 유다인에 대한 위협은 날로 심해져 갔고,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이를 피하고자 수도원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그녀의 언니 로사(Rosa)와 함께 네덜란드의 에히트(Echt) 카르멜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녀는 십자가의 성 요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저서 “십자가의 학문”(Kreuzeswissenschaft)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그 무렵에 네덜란드의 주교들이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에 화가 난 히틀러(A. Hitler)는 모든 비(非)아리안계 가톨릭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유다인이자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1942년 8월 2일 언니 로사와 함께 나치의 게슈타포(Gestapo)에게 체포되었다.
그녀는 많은 유다인 출신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아메르스포르트(Amersfoort) 수용소를 거쳐 베스터보르크(Westerbork)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해 8월 7일 이들 중 987명이 폴란드 남부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는데, 두 자매는 이틀 후인 8월 9일 가스실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가 사망한 지 20년 만인 1962년 1월 4일 쾰른의 대주교인 요제프 프링스(Josef Frings) 추기경은 그녀의 시복을 위한 소송을 제기했고, 1980년에는 독일 주교회의를 거쳐 로마에서 시복 절차를 위한 공식적 청원이 이루어졌다.
그녀의 죽음이 비록 유다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고 피할 수도 없었지만, 그녀는 유다인과 하느님 백성을 위한 연대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유대교를 떠났으나 유다인으로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동족과 다시 결합한 그녀를 가톨릭교회는 ‘아우슈비츠의 순교자’로 공경하게 되었다.
그 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독일을 방문한 1987년 5월 1일 쾰른 대성당에서 순교자로서 시복되었고, 1998년 10월 1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시성식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를 “이스라엘의 탁월한 딸이자 전 세계를 위한 성인으로서 교회의 충실한 딸”이라고 칭송했고, 이듬해 10월 1일 자의 교서를 통해 누르시아(Nursia)의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 성 메토디우스(Methodius, 2월 14일)와 성 키릴루스(Cyrillus, 2월 14일) 형제,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4월 29일),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Birgitta, 7월 23일)와 함께 그녀를 유럽 대륙의 여섯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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