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4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데메트리오, 마르첼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안토니오 프리말디, 에베르하르도, 에우세비오, 우르시치오, 파카난 총 8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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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8월 14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8가지
8월 14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데메트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emet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아프리카
데메트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메뜨리오, 데메뜨리우스, 데메트리우스.
데메트리오 자료
성 데메트리우스(또는 데메트리오)는 기록이 현존하지 않는 많은 순교자들 중 한 명이다. 로마 순교록은 단순히 그가 오늘 날짜에 아프리카에서 순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르첼로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89년 아파메아
마르첼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로, 마르셀루스, 마르첼루스, 마르켈로, 마르켈루스.
마르첼로 자료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화를 시도하고, 380년에 그의 모든 신하들이 로마(Roma)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주교들에게 신앙을 고백토록 하는 칙서를 발표하였다.
또 8년 후에는 관리들을 각 지방으로 파견하여 이방인 신전을 파괴케 하니, 한편으로는 원성도 많았다.
황제의 관리가 시리아의 아파메아에 도착하여 주교의 도움을 받아 그곳의 제우스 신전을 파괴했는데, 이곳의 주교는 성 마르첼루스(또는 마르첼로)였다.
마르첼루스는 또 다른 신전을 파괴하려고 조사하던 길에 이방인들의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 가톨릭 성인 이름
Maximilian Mary Kolb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94-1941년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꼴베, 막시밀리아누스, 막시밀리안, 막씨밀리아노, 막씨밀리아누스, 맥시밀리안, 맥시밀리언.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자료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Zdunska Wola)에서 태어난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콜베(Maximilianus-Maria Kolbe, 또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는 라이문두스(Raimund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신심 깊은 부모의 신앙교육 덕분에 강한 성모 신심을 갖고 성장한 그는 1907년 10월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레오폴리의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3년 뒤인 1910년 9월 4일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면서 막시밀리아누스라는 수도명을 택했다.
이곳에서는 그는 중등 교육과 수련을 받고 1911년 9월 5일 첫서원을 하고 1912년 12월 로마로 가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로마의 프란치스코회 국제 신학원에 머물면서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23세였던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콜베는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신학원장 신부의 허락하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Militia Immaculatae)라는 모임을 결성했다(1917년 10월 16일). 이 모임은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을 철저히 봉헌하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 활동하는 일종의 신심 단체이다.
1914년 11월 1일 종신서원을 하고, 1918년 4월 28일 사제품을 받은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는 1919년에 고국인 폴란드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 크라쿠프(Krakow)의 프란치스코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동료 수사들은 물론 대학생들과 군종신부들 안에서 기사회 조직을 만들었다.
그러나 귀국할 때부터 폐결핵을 앓고 있던 그는 1년 6개월을 요양소에서 생활했고, 1921년부터는 한쪽 폐로만 살아야 했다. 1922년부터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Rycerz Niepokalanje)라는 잡지를 발행하면서 매스 미디어를 통한 사도직을 시작했다.
이 잡지는 초기에 그로드노(Grodno)에서 발행되다가, 1927년에는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Miepokalanow)이라는 수도 생활 공동체에서 발행하였다. 이 마을은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콜베 신부가 바르샤바(Warszawa)에서 40km 떨어진 방대한 지역에 설립한 공동체이다.
그리고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나가사키 근처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뜰’이라는 작은 수도 마을을 세우고,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일본어로 번역해 발행했다. 6년 동안 일본 선교를 위해 노력한 그는 중국 · 한국 · 인도에도 공동체를 세우려고 했으나 외부적인 이유로 실현하지 못했다.
1936년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 총책임자로 임명된 그는 전 세계에 분원을 세우는데 큰 공을 들였다. 1938년 무렵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 분원이 전 세계에 762개나 되었다.
폴란드 내에서 유명해진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콜베 신부는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나치에게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다.
이후 그는 가난한 이들과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에 거주토록 하면서, 이들을 보호하고 돕기 위해 노력했다.
1941년 그가 “자유”라는 기고문을 발표하자, 나치는 유대인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2월 17일 그를 체포하여 바르샤바의 파비악 형무소에 감금했다가 2월 28일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아우슈비츠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저명한 가톨릭 신부라는 이유로 더욱 혹독한 매질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동료 수감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말경, 한 수감자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치는 한 명이 탈출하면 그 벌로 열 명을 처형했다. 나치에 의해 지목된 열 명의 처형 대상자 중 한 폴란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짖자 이를 본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콜베 신부는 자원해서 대신 죽겠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치의 허락을 받고 다른 아홉 명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갇힌 그는 아사형에 처해졌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굶어 죽을 때까지 2주 이상을 물과 음식 없이 생존한 그에게 나치는 결국 독극물을 주사했고, 그는 1941년 8월 14일 성모 승천 대축일 전날 아우슈비츠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 그의 시신은 아우슈비츠의 시신 소각장에서 불태워지고 말았다.
오늘날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콜베 신부가 죽음을 맞이한 감옥은 수많은 순례자가 찾는 장소가 되었다. 1948년 그에 대한 시복 절차가 파도바(Padova)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1971년 10월 17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나치 희생자들 가운데 처음으로 복자품에 올랐다.
1982년 10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에게 ‘자비의 순교자’(Martyr of Charity)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시성식을 거행했다.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콜베 신부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으며, 성모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바친 성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수감자들의 주보성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안토니오 프리말디
- 가톨릭 성인 이름
Anthony Primald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80년 오트란토
안토니오 프리말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토니오 프리말디 자료
1480년 모하메드 2세 치하의 터키는 남부 이탈리아의 오트란토를 점령하고 수많은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이들 중에는 성 안토니우스 프리말디(Antonius Primaldi, 또는 안토니오)를 중심으로 8백 명의 그리스도인 순교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때 노인으로 예술가였고 그 도시에서는 저명인사였다. 그는 포로로 잡힌 사람들의 대표자로서 터키 당국자와 평화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고 마호메트 신앙을 고백하기를 요구하였다. 이 때문에 회담은 결렬되었고 그는 돌아와서 주민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는 이 도시와 우리 자신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또 우리는 우리 영혼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 죽으면 살 것입니다."
이리하여 성 안토니우스는 오트란토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이어서 대학살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순교자들의 계곡'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에베르하르도
- 가톨릭 성인 이름
Eberhard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958년 아인지델른
에베르하르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베르하르두스, 에벨하르도, 에벨하르두스.
에베르하르도 자료
독일 남서부 슈바벤(Schwaben)의 백작 가문에서 태어난 에베르하르두스(Eberhardus, 또는 에베르하르도)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대성당의 주임사제가 되었으나, 934년에 이를 사임하고 스위스 에첼 산에 있던 성 벤노(Benno)의 은둔소로 갔다.
여기서 그는 베네딕토회의 수도원을 하나 세웠는데 이곳이 바로 유명한 ‘은수자들의 모후’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아인지델른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대대로 유명하다. 그는 이곳의 초대 원장을 역임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에우세비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seb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경 로마
에우세비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세비오스, 에우세비우스.
에우세비오 자료
4세기 후반부에 로마에서 살았던 성 에우세비우스(또는 에우세비오)의 생애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 황제이던 콘스탄티우스를 반박했던 사제였고, 교황 펠릭스 2세(Felix II)를 공적으로 지지하였으며, 교회의 공식 집회가 금지된 후부터는 자기 집에서 미사를 집전했던 용감한 사제였다.
이 때문에 그는 자기 집에서 체포되어 7개월 후에 운명하였다. 그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칼리스투스(Callistus)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묘비명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의 사람인 에우세비우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우르시치오
- 가톨릭 성인 이름
Ursic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코메디아
우르시치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우르시치우스, 우르시키오, 우르시키우스.
우르시치오 자료
성 우르시키우스(또는 우르시치오)는 오늘날의 알바니아 지방 출신으로 로마 황제 군의 호민관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니코메디아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파카난
- 가톨릭 성인 이름
Fachan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경 로스
파카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까난, 빠차난, 파차난.
파카난 자료
아일랜드의 툴락틴(Tulachteann)에서 출생한 성 파카난은 성 이타(Ita)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아일랜드 남부 욜(Youghal) 근방 블랙워터(Blackwater) 강의 어느 섬에 몰라나(Molana)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곳이 후일 코크(Cork)의 로스 수도원 학교가 되어 아일랜드 수도원의 중심지 중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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