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7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가브리엘 마리아, 나르노, 다윗 루이스, 도미니코 바르베리, 루포 (순교자), 루포 (주교), 리체리오, 마르첼리노, 베드로, 사비니아노, 세라피온, 시아그리오, 아론시오, 아마데오, 안젤로, 요한 (주교), 요한 (순교자), 체사리오, 카르포포로, 포르투나토, 포이멘, 호노라토, 후고, 총 23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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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7일 여자세례명 마르가리타 (맨발의), 만네아, 모니카, 안투사, 에우탈리아, 총 5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8월 2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3가지
8월 27일 남자세례명 목록
- 가브리엘 마리아
- 나르노
- 다윗 루이스
- 도미니코 바르베리
- 루포 (주교)
- 루포 (순교자)
- 리체리오
- 마르첼리노
- 베드로
- 사비니아노
- 세라피온
- 시아그리오
- 아론시오
- 아마데오
- 안젤로
- 요한 (주교)
- 요한 (순교자)
- 체사리오
- 카르포포로
- 포르투나토
- 포이멘
- 호노라토
- 후고
1. 가브리엘 마리아
- 가톨릭 성인 이름
Gabriel Mary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463-1532년
가브리엘 마리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별.
가브리엘 마리아 자료
가브리엘 마리아(Gabriel Maria)는 프랑스의 클레르몽(Clermont) 부근에서 길베르투스 니콜라우스(Gilbertus Nicolaus)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16세 때에 작은 형제회를 지원하였으나 몸이 허약해 보인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 후 재차 입회를 청하여 라로셀(La Rochelle)에서 입회하였는데, 원장은 그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허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수련장은 그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모범적인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과연 그는 뛰어난 철학자임과 동시에 신학자가 되었으며, 프랑스의 작은 형제회 회원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후일 발루아(Valois)의 성녀 요안나(Joanna, 2월 4일)의 고해신부로도 활약하였고, 작은 형제회의 총시찰자가 되었으며, 성모 영보의 신비에 대한 그의 높은 신심으로 교황 레오 10세(Leo X)를 감동시켰다. 그래서 교황은 그에게 가브리엘 마리아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그는 작은 형제회의 회칙을 개정하였고,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수도원을 여섯 곳이나 세웠다. 그의 마리아 신심은 놀라울 정도였으며, 임종하는 순간에도 마니피캇(Magnificat)을 노래하였다고 전해온다. 1647년에 그에 대한 공경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나르노
- 가톨릭 성인 이름
Nar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4세기? 베르가모
나르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나르누스.
나르노 자료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나르누스(또는 나르노)는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에게 세례를 받고 베르가모의 초대 주교로 축성되었다. 하지만 성 나르누스는 그보다 훨씬 후대 인물로 보인다.
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들은 13세기부터 나오는데, 그에 따르면 성 나르누스는 4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재임 시기에 베르가모의 주교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베르가모의 성 알렉산데르(Alexander, 8월 26일)에게 봉헌한 베르가모의 한 성당에 모셔졌다. 1561년에 그 성당이 무너진 후 그의 유해는 오늘날의 베르가모 주교좌성당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모셔져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27일 목록에서 성 나르누스에 대해 이탈리아 베르가모의 초대 주교로 여겨진다며 4세기를 그의 선종 시기로 보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다윗 루이스
- 가톨릭 성인 이름
David Lewi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16-1679년 영국
다윗 루이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비드, 데이비드, 베이커, 찰스.
다윗 루이스 자료
성 다윗 루이스는 1616년 영국 웨일스 몬머스셔(Monmouthshire)의 에버게이브니(Abergavenny)에서 성공회 신부로 중등학교 교장인 아버지 모건 루이스(Morgan Lewis)와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 마가렛 프리차드(Margaret Pritchard)의 아홉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나 그곳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공회 신자로 성장했다.
그는 16세 때에 프랑스 파리(Paris)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로마의 영국 대학에서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밀고자를 조심하기 위해 당시 많은 가톨릭 사제들이 실천했던 대로 가명을 사용하면서 찰스 베이커(Charles Baker)로 불리게 되었다.
1642년 7월 20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3년 뒤에 예수회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마치고 영국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1년 동안 활동하다가 로마의 영국 신학교의 영적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로마에서 소임을 마친 그는 다시 몬머스셔로 돌아와 30년 동안 선교사로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며 사도직을 실천했다.
그가 평생 활동하던 웨일스 지방에서 가톨릭을 반대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그는 잠시 몸을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1678년 11월 17일 몬머스셔의 성 미카엘 성당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679년 3월에 몬머스(Monmouth)에서 가톨릭 사제로서 미사를 봉헌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성 요한 켐블(Joannes Kemble, 8월 22일)처럼 1678년 발생한 티투스 오츠(Titus Oates)의 ‘가톨릭 음모 사건’(Popish Plot)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는 찰스 2세(Charles II) 왕을 암살하고 웨일스 지방에 가톨릭을 부활하려 했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물론 오츠의 가톨릭 음모 사건은 1678년 9월 찰스 2세 왕이 직접 오츠를 심문해 모든 것이 거짓임이 밝혀졌으나 그 파장을 오래 지속되었다. 결국 그는 미사를 봉헌하고 다른 성사를 집전하는 것을 보았다는 증인들의 증언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런던의 뉴게이트(Newgate) 감옥에 있던 그는 처형을 위해 몬머스셔로 돌아왔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다고 한다.
“나는 양심과 신앙을 위하여 죽는다. 인간의 나약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외면은 죽일 수 있으나 내면은 결코 죽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몸과 피가 화형에 당할 준비를 마쳤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피에는 피, 목숨에는 목숨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안 된다. 오로지 거룩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그대들을 용서한다. 나는 내가 복음의 아들임을 고백하며, 내가 순종하는 것은 복음이다. … 친구들이여,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그대들의 왕에게 영광을 드려라. … 나는 끝까지 여러분의 믿음이 올바르게 되도록 기도하겠다.”
성난 군중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다. 마침내 그는 어스크(Usk) 강변의 처형장으로 끌려가 1679년 8월 27일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다윗 루이스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8월 27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한편 웨일스 지방에서는 5월 4일 외에도 기존의 10월 25일을 ‘웨일스의 6위 순교성인’을 기념하는 별도의 축일로 유지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도미니코 바르베리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Barberi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792-1849년
도미니코 바르베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바베리.
도미니코 바르베리 자료
1792년 6월 22일 이탈리아의 비테르보(Viterbo) 근교에서 태어난 도미니코 바르베리(Dominicus Barberi)는 1814년에 예수 고난회에 입회하여 천주의 모친의 도미니코란 수도명을 받았고, 1818년에 서품되었다.
그는 10여 년 동안을 가르쳤고, 수도회의 여러 직책을 거쳤으며 관구장이 되었다. 그는 1840년 벨기에에 예수 고난회 최초의 피정의 집을 세웠으며, 1842년에는 영국 잉글랜드(England) 스태퍼드셔(Staffordshire)의 애스턴 홀(Aston Hall)에 예수 고난회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는 그의 수덕생활과 학문으로 널리 알려졌고, 강론집과 신학 및 신비신학 저서를 발간하였으며, 잉글랜드에 두 개의 수도원을 더 짓고, 또 옥스퍼드 운동의 여러 회원들을 교회로 이끌었는데 그들 중에는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이 가장 유명하다.
도미니코 바르베리는 1849년 8월 27일 심장병이 발작하여 숨을 거두었고, 1963년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루포 (주교)
- 가톨릭 성인 이름
Ruf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95년 카푸아
루포 (주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뽀, 루뿌스, 루퍼스, 루포스, 루푸스, 루피노, 루피누스.
루포 (주교)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27일 목록에서 이탈리아의 카푸아에서 기념하는 두 명의 성 루푸스(또는 루포)에 대해 전해주었다. 한 명은 성 카르포포루스(Carpophorus)와 함께 304년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카푸아에서 순교했고, 그의 신분에 대한 다른 기록은 없다.
다른 한 명은 카푸아의 주교이자 순교자로서 사도 성 베드로(Petrus, 6월 29일)의 제자인 라벤나(Ravenna)의 성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7월 20일)에 의해 가족 모두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일부 순교록에서 그의 이름은 루피누스(Rufinus)로로 나오고, 신분 또한 부제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런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카푸아의 순교자 성 루푸스에 대해서만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루포 (순교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uf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카푸아
루포 (순교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뽀, 루뿌스, 루퍼스, 루포스, 루푸스.
루포 (순교자) 자료
성 루푸스(또는 루포)와 성 카르포포루스(Carpophorus)는 304년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이탈리아의 카푸아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27일 목록에서 두 순교자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고통을 받고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카푸아에서 성 루푸스 순교자를 기념한다고 짧게 언급했으나 성 카르포포루스에 대해서는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성 카르포포루스는 일부 행전에서 카르포니우스(Carponi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리체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ic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48년 쿤세르앙
리체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지에르, 리지엘, 리체리우스, 리케리오, 리케리우스.
리체리오 자료
에스파냐의 레리다(Lerida)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성 리케리우스(또는 리체리오)는 프랑스로 이주하였고, 506년에 쿤세르앙의 주교가 되어 44년간 사목하였다. 그런데 로마 순교록은 실수로 인해 그를 레리다의 주교로 기록하였다. 그는 리지에르(Lizier)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마르첼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호민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토미
마르첼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마르첼리노 자료
이집트인 테바이드 앞에 그리스도교 신자 17명이 끌려왔는데, 그들은 모두 황제의 칙령을 어기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이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호민관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로)와 그의 아내 성녀 만네아(Mannea) 그리고 그들의 세 아들인 성 요한(Joannes), 세라피온(Serapion), 베드로(Petrus)가 있었으며, 그 외에도 한 명의 주교와 3명의 성직자 그리고 8명의 다른 평신도들이 있었다.
그때 관리는 이렇게 힐문하였다.
“기록을 보니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또는 본시오 빌라도)의 명에 따라 죽고 묻힌 사람을 예배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그러나 신자들은 그의 어떠한 술책에도 말려들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였기 때문에 모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런데 마르첼리누스 일행은 흑해 근방의 토미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토미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자료
이집트인 테바이드 앞에 그리스도교 신자 17명이 끌려왔는데, 그들은 모두 황제의 칙령을 어기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이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호민관 성 마르첼리누스(Marcellinus)와 그의 아내 성녀 만네아(Mannea) 그리고 그들의 세 아들인 성 요한(Joannes), 세라피온(Serapion), 베드로(Petrus)가 있었으며, 그 외에도 한 명의 주교와 3명의 성직자 그리고 8명의 다른 평신도들이 있었다.
그때 관리는 이렇게 힐문하였다.
“기록을 보니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또는 본시오 빌라도)의 명에 따라 죽고 묻힌 사람을 예배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그러나 신자들은 그의 어떠한 술책에도 말려들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였기 때문에 모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런데 마르첼리누스 일행은 흑해 근방의 토미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사비니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abin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사비니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사비니아누스, 싸비니아노, 싸비니아누스.
사비니아노 자료
성 호노라투스(Honoratus)와 아론티우스(Arontius), 포르투나투스(Fortunatus), 사비니아누스(Sabinianus, 또는 사비니아노), 펠릭스(Felix),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셉티미누스(Septiminus), 레포시투스(Repositus), 사토르(Sator), 비탈리스(Vitalis), 도나투스(Donatus) 그리고 또 다른 펠릭스(Felix)는 아프리카의 하드럼멘툼 출신인데, 비록 형제지간은 아닐지라도 ‘12명의 거룩한 형제들’로 알려졌다.
그들은 모두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카르타고(Carthago)에서 고문을 받고 이탈리아로 호송되었다.
처음 네 사람은 8월 27일에 포텐차(Potenza)에서, 펠릭스와 야누아리우스 그리고 셉티무스는 베노사(Venossa)에서 그리고 다른 이들은 센티아나(Sentiana)에서 각각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세라피온
- 가톨릭 성인 이름
Serapi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토미
세라피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라피언, 쎄라피온.
세라피온 자료
이집트인 테바이드 앞에 그리스도교 신자 17명이 끌려왔는데, 그들은 모두 황제의 칙령을 어기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이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호민관 성 마르첼리누스(Marcellinus)와 그의 아내 성녀 만네아(Mannea) 그리고 그들의 세 아들인 성 요한(Joannes), 세라피온, 베드로(Petrus)가 있었으며, 그 외에도 한 명의 주교와 3명의 성직자 그리고 8명의 다른 평신도들이 있었다.
그때 관리는 이렇게 힐문하였다.
“기록을 보니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또는 본시오 빌라도)의 명에 따라 죽고 묻힌 사람을 예배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그러나 신자들은 그의 어떠한 술책에도 말려들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였기 때문에 모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런데 마르첼리누스 일행은 흑해 근방의 토미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시아그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Syag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00년 오툉
시아그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시아그리우스, 씨아그리오, 씨아그리우스.
시아그리오 자료
프랑스계 로마 사람인 듯한 성 시아그리우스(또는 시아그리오)는 560년경에 오툉의 주교좌에 올랐다. 그는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로부터 ‘덕과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고, 브룬힐다 여왕 앞에서 주교의 팔리움을 받은 유일한 주교였다. 그는 곤트란 왕을 수행하고 가서 클로테르 2세의 세례를 집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아론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ro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아론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론시우스, 아론씨오, 아론씨우스, 아론티오, 아론티우스.
아론시오 자료
성 호노라투스(Honoratus)와 아론티우스(또는 아론시오), 포르투나투스(Fortunatus), 사비니아누스(Sabinianus), 펠릭스(Felix),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셉티미누스(Septiminus), 레포시투스(Repositus), 사토르(Sator), 비탈리스(Vitalis), 도나투스(Donatus) 그리고 또 다른 펠릭스(Felix)는 아프리카의 하드럼멘툼 출신인데, 비록 형제지간은 아닐지라도 ‘12명의 거룩한 형제들’로 알려졌다.
그들은 모두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카르타고(Carthago)에서 고문을 받고 이탈리아로 호송되었다.
처음 네 사람은 8월 27일에 포텐차(Potenza)에서, 펠릭스와 야누아리우스 그리고 셉티무스는 베노사(Venossa)에서 그리고 다른 이들은 센티아나(Sentiana)에서 각각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아마데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made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110?-1159년 로잔
아마데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마데우스.
아마데오 자료
성 아마데우스(또는 아마데오)는 1110년경 오늘날 프랑스 남동부 그르노블(Grenoble) 서쪽에 있는 샤트(Chatte) 성(城)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마데우스 1세는 클레르몽(Clermont)의 백작이자 오트리브(Hauterives)의 백작으로 프랑코니아(Franconia) 왕실의 일원이었다.
그는 1119년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16명의 신하와 함께 세속을 떠나 보네보(Bonnevaux)의 시토회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와 함께 수도원에 들어간 성 아마데우스는 시토회 수도원에서 잠시 교육받다가 부친과 함께 클뤼니(Cluny)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귀족에게 맞는 교육을 받기 위해 하인리히 5세 황제의 궁정으로 들어갔으나 수도원 생활에 더 큰 매력을 느껴 1125년 클레르보(Clairvaux)의 시토회 수도원으로 들어가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8월 20일)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부친인 성 아마데우스 1세는 그 뒤로 네 곳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나서 보네보 수도원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1150년경 선종하였다.
클레르보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한 성 아마데우스는 1139년에 얼마 전 시토회와 하나가 된 프랑스 남동부 사부아(Savoie)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인 오트콩브(Hautecombe)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200여 명의 수도승을 이끌며 수도원을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크게 성장시켰다. 그리고 1144년 그는 교황 루키우스 2세(Lucius II)에 의하여 스위스 로잔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원하지 않은 자리였지만 순명하고 교구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그는 특히 젊은이들의 교육과 경건하고 순수한 성직자를 양성하는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에 대한 설교와 저서로도 유명하였다.
그는 1159년 8월 27일 선종해 로잔 주교좌 대성당의 십자가 제단 앞에 묻혔다. 그에 대한 공적인 공경은 이미 18세기 초에 시작되어 일부 지역에서 교황의 승인을 받았고, 1903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확인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27일 목록에 로잔의 주교인 성 아마데우스를 추가하며 그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안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Angelu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226-1312년 폴리뇨
안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겔로, 안겔루스, 안젤루스, 앤젤러스, 엔젤러스.
안젤로 자료
토레와 비뇰레의 백작인 베르나르두스(Bernardus)의 아들로 태어난 안젤루스(또는 안젤로)는 20세 때에 이탈리아 체세나 교외 보트리올로에서 아우구스티누스 회원이 되었다.
1248년 그는 고향 땅으로 파견되어 그곳에 수도원을 세웠고, 그 후 20여 년 동안은 폴리뇨 수도원에서 은둔자처럼 생활하여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또 톨렌티노(Tolentino)의 성 니콜라우스(Nicolaus)와 절친한 친구였고, 그의 사후부터 즉시 공경을 받은 덕 있는 수도자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요한 (주교)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813년 파비아
요한 (주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주교) 자료
성 요한(Joannes)은 801년부터 813년까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파비아의 주교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요한 (순교자)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토미
요한 (순교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순교자) 자료
이집트인 테바이드 앞에 그리스도교 신자 17명이 끌려왔는데, 그들은 모두 황제의 칙령을 어기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이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호민관 성 마르첼리누스(Marcellinus)와 그의 아내 성녀 만네아(Mannea) 그리고 그들의 세 아들인 성 요한(Joannes), 세라피온(Serapion), 베드로(Petrus)가 있었으며, 그 외에도 한 명의 주교와 3명의 성직자 그리고 8명의 다른 평신도들이 있었다.
그때 관리는 이렇게 힐문하였다.
“기록을 보니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또는 본시오 빌라도)의 명에 따라 죽고 묻힌 사람을 예배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그러나 신자들은 그의 어떠한 술책에도 말려들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였기 때문에 모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런데 마르첼리누스 일행은 흑해 근방의 토미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체사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aes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대주교, 교부 - 활동 연도와 지역
469/470-542년 아를
체사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체사리우스, 카에사리오, 카에사리우스, 카이사리오, 카이사리우스.
체사리오 자료
성 카이사리우스(또는 체사리오)는 470년경 부르군트(Burgund) 왕국에 속한 샬롱쉬르손(Chalon-sur-Saone, 오늘날 프랑스 동부에 있는 도시)에서 로마 시민이며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에 샬롱의 주교인 실베스테르(Silvester)로부터 삭발례를 받고 몇 년 동안 그에게 교육받았다. 그리고 489년 레랭(Lerins) 섬의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에 적응하는 데 최선을 다했고, 포도주 창고관리 소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다른 수도자들의 생활이 느슨한 데 대해 실망하면서, 스스로 더 엄격하게 규율을 지키고 단식을 실천하면서 건강을 많이 해쳤다. 그래서 장상의 명으로 아를로 가서 문법학자이자 수사학자인 포메리우스(Julianus Pomerius)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주교인 에오니우스(Eonius/Aeonius)로부터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았고, 도시 밖에 있는 한 수도원의 지도를 부탁받아 498년 또는 499년에 수도원장이 된 후 수도자들을 위한 규칙서를 작성했다.
수도원장으로 3년 정도 생활하던 그는 에오니우스 주교가 사망하고 몇 달 뒤인 502년 12월에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주교로 선출되어 542년까지 아를의 대주교로서 갈리아 남부 지역의 교회 운영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았다.
이때부터 성 카이사리우스는 수많은 개혁운동을 전개하여 실효를 거두었고, 아리우스(Arius) 이단과 싸웠으며, 아를의 성당에서는 매일 성무일도를 노래로 기도할 것을 명하였다. 그는 여동생인 성녀 카이사리아(Caesaria, 1월 12일)와 함께 수도원을 세우고 수녀들을 위한 규칙서를 썼고, 국제적인 몇 차례의 교회 회의를 주재하였다.
그는 507년까지는 서고트족(Visigoths)의 영향 아래, 508~537년까지는 동고트족(Ostrogoths)의 통치 아래, 그리고 이후에는 프랑크족의 통치 아래에서 정치적 · 종교적으로 아를의 주교좌에 도전을 받았으나 이를 확고히 지켜냈다.
그럼으로써 아를 주교좌가 갈리아 지역 내에서 수석의 위치를 갖게 하였다. 513년에 그는 정치적 모함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라벤나(Ravenna)까지 긴 여행을 떠나 왕에게 무죄를 확인받기도 했다.
그 후 성 카이사리우스는 동고트족의 왕인 테오도리쿠스와 함께 로마(Roma)로 교황 성 심마쿠스(Symmachus, 7월 19일)를 만나 그동안의 헌신에 대한 인정을 받고, 프랑스 지방의 교황사절로 임명받으며 팔리움까지 받았다. 이 팔리움 수여는 서방 유럽 주교에게 허용된 첫 번째 경우라고 한다.
537년 프랑크족이 아를을 점령한 후에 성 카이사리우스는 성 요한 수도원에서 거의 모든 생활을 하다가 8월 27일 선종하였다. 그는 선종할 때까지 아를 교구를 40년간 사목했고,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주교였으며, 그의 성덕과 사랑 그리고 능력은 당대를 초월할 정도로 탁월했다.
그는 529년 오랑주(Orange)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 하느님의 은총보다 인간 의지의 자유를 강조하던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를 단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고, 로마법을 응용하여 테오도시아누스 법전(Codex Theodosianus)의 주요 골격이 되는 “브레비아리움 알라리치”(Breviarium Alarici)를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프랑스 시민법이 되었다고 한다.
라틴 교부의 한 명으로서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에 비교될 만큼 유명한 대중 설교가로서 많은 강론을 남겼고, 사제들의 강론을 돕기 위한 강론 모음집도 펴냈다. 그 외에도 남녀 수도자들을 위한 규칙서를 작성하고 많은 신학 서적들을 저술하였다.
그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족이 유럽을 점령한 시기에 갈리아 지역에서 교회의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카르포포로
- 가톨릭 성인 이름
Carpopho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95년 카푸아
카르포포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르포니오, 까르포니우스, 까르포포로, 까르포포루스, 카르포니오, 카르포니우스, 카르포포루스.
카르포포로 자료
성 루푸스(Rufus)와 성 카르포포루스(또는 카르포포로)는 304년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이탈리아의 카푸아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27일 목록에서 두 순교자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고통을 받고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카푸아에서 성 루푸스 순교자를 기념한다고 짧게 언급했으나 성 카르포포루스에 대해서는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성 카르포포루스는 일부 행전에서 카르포니우스(Carponi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포르투나토
- 가톨릭 성인 이름
Fortuna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포르투나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포르투나또, 포르투나뚜스, 포르투나투스.
포르투나토 자료
성 호노라투스(Honoratus)와 아론티우스(Arontius), 포르투나투스(또는 포르투나토), 사비니아누스(Sabinianus), 펠릭스(Felix),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셉티미누스(Septiminus), 레포시투스(Repositus), 사토르(Sator), 비탈리스(Vitalis), 도나투스(Donatus) 그리고 또 다른 펠릭스(Felix)는 아프리카의 하드럼멘툼 출신인데, 비록 형제지간은 아닐지라도 ‘12명의 거룩한 형제들’로 알려졌다.
그들은 모두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카르타고(Carthago)에서 고문을 받고 이탈리아로 호송되었다.
처음 네 사람은 8월 27일에 포텐차(Potenza)에서, 펠릭스와 야누아리우스 그리고 셉티무스는 베노사(Venossa)에서 그리고 다른 이들은 센티아나(Sentiana)에서 각각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1. 포이멘
- 가톨릭 성인 이름
Poeme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세기경 스케티스
포이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뽀에멘, 뽀이멘, 포에멘, 포이몬, 푀멘.
포이멘 자료
성 포이멘은 세상을 등지고 이집트의 스케티스 사막으로 들어갔다. 이때 그는 여러 명의 동료들을 이끌고 공동생활을 꿈꾸었다. 408년 그들의 첫 정착지가 베르베르족(Berbers)의 침략으로 파괴되자 테레누티스(Terenuthis)로 피신하였다.
밤 열두 시가 되면 4명은 일하고, 4명은 성무일도를 노래하였으며 또 다른 4명은 잠을 잤다. 그들은 낮 12시까지 그렇게 지냈다. 성 포이멘은 가끔 거의 한 주간씩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지냈다.
“우리는 육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기 위하여 단식한다.”
“회개의 정신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피어오르면 모든 악은 사라진다.”
이런 정신을 그는 자신의 은수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우주의 빛, 수도자의 귀감’이란 칭호로 수도자들에게 기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2. 호노라토
- 가톨릭 성인 이름
Honora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호노라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호노라또, 호노라뚜스, 호노라투스.
호노라토 자료
성 호노라투스(또는 호노라토)와 아론티우스(Arontius), 포르투나투스(Fortunatus), 사비니아누스(Sabinianus), 펠릭스(Felix),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셉티미누스(Septiminus), 레포시투스(Repositus), 사토르(Sator), 비탈리스(Vitalis), 도나투스(Donatus) 그리고 또 다른 펠릭스(Felix)는 아프리카의 하드럼멘툼 출신인데, 비록 형제지간은 아닐지라도 ‘12명의 거룩한 형제들’로 알려졌다.
그들은 모두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카르타고(Carthago)에서 고문을 받고 이탈리아로 호송되었다.
처음 네 사람은 8월 27일에 포텐차(Potenza)에서, 펠릭스와 야누아리우스 그리고 셉티무스는 베노사(Venossa)에서 그리고 다른 이들은 센티아나(Sentiana)에서 각각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3. 후고
- 가톨릭 성인 이름
Hug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55년 링컨
후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위고, 후꼬, 휴스.
후고 자료
중세의 비극 중의 하나인 영국 잉글랜드(England) 중동부 링컨 출신 성 후고(Hugo)의 죽음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는 불과 9살의 어린 나이로 코핀(Koppin)이라는 유대인의 집으로 끌려가 매를 맞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 후 그의 시체는 우물에 던져졌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분노한 시민들은 코핀과 92명의 다른 유대인을 체포하여 심문한 결과, 코핀은 모든 죄를 자백하면서 유대인은 매년 그리스도교 어린이를 십자가형에 처하여 죽이는 관습이 있다고 태연하게 진술했다고 한다.
그 후 후고가 유기되었던 우물에서는 신기한 기적이 많이 일어나 수많은 신자들의 기도소가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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