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세례명 가타리나는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가타리나 15인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가타리나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가타리나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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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리나 여자세례명
15인 목록
가타리나 여자세례명 목록
- 가타리나 (2월 2일)
- 가타리나 마리아 드렉셀 (3월 3일)
- 가타리나 (3월 9일)
- 가타리나 (3월 24일)
- 가타리나 토마스 (4월 5일)
- 가타리나 (4월 6일)
- 카테리 테카크위타 (4월 17일)
- 가타리나 (4월 29일)
- 가타리나 (5월 4일)
- 가타리나 (9월 4일)
- 가타리나 (9월 15일)
- 이 가타리나 (9월 20일)
- 정철염 가타리나 (9월 20일)
- 가타리나 (11월 25일)
- 가타리나 라부레 (11월 28일)
1. 가타리나
- 세례명 축일
2월 2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Catherine - 신분과 직업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522-1590년 리치
가타리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가타리나 이야기
리치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de Ricci, 또는 가타리나)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피렌체(Firenze)에서 태어나 알레산드라(Alessandr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그녀는 아버지에 의해 숙모가 수녀로 있는 집 근처의 베네딕토회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성녀 카타리나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집안일뿐만 아니라 수녀원에서 배운 대로 신앙생활을 충실히 실천해나갔다.
특히 그녀의 생애를 관통하게 될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신심을 키워나갔다. 부자 청년과 결혼을 권하는 아버지를 설득해 결국 토스카나 지방 프라토(Prato)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수녀원에 입회하여 엄격한 수련을 받은 그녀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이름을 따서 카타리나라는 수도명을 선택했다. 그녀는 입회 초기에 큰 병을 앓았는데 그 고통마저도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한 은총의 시련으로 받아들였다.
완덕을 향한 모범적 생활로 존경을 받은 그녀는 젊어서부터 수녀원의 수련장과 원장직을 맡아 훌륭히 수행하였다. 장상의 직분을 사임한 후에도 성녀 카타리나는 놀라운 신앙 체험을 한 인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예를 들어 매 주일 같은 시간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탈혼 상태에 들어가곤 했는데, 이때 그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흠뻑 취하곤 했다. 이러한 현상은 12년 동안이나 정기적으로 일어났다.
성녀 카타리나의 영향력은 수녀원의 벽 안에서만 인정된 것이 아니었다. 교회 지도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녀의 의견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늘 겸손함을 간직하고자 노력했던 성녀 카타리나는 교회의 개혁 운동에도 최선을 다해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와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11월 4일) 그리고 교황 성 비오 5세(Pius V, 4월 30일)와 함께 현대 교회의 개혁자로서 높은 칭송을 받게 되었다.
성녀 카타리나는 오랜 투병 생활 끝에 1590년 2월 2일 수녀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녀는 1732년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46년 6월 29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병자들의 수호자인 리치의 성녀 카타리나의 축일은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선종일이 아닌 2월 13일에 기념해왔는데, 1971년 전례력을 개혁하면서 선종일인 2월 2일로 변경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2월 2일 목록에서 성녀 카타리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도미니코회에서는 그날이 주님 봉헌 축일과 겹치는 관계로 2월 4일로 옮겨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가타리나 마리아 드렉셀
- 세례명 축일
3월 3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Catherine Mary Drexel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858-1955년 미국
가타리나 마리아 드렉셀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드레셀, 드레쎌, 드렉쎌, 카타리나, 캐서린.
가타리나 마리아 드렉셀 이야기
성녀 카타리나 마리아 드렉셀(Catharina Maria Drexel, 또는 가타리나 마리아 드렉셀)은 1858년 11월 2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의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유복한 가족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자라면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녀는 흑인과 토착 미국인인 인디언들의 물질적, 영성적 삶의 질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그들을 위한 기부금을 모으기 시작했으나 이내 정말 필요하고 부족한 것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성녀 카타리나는 인디언과 유색인종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한 복된 성사의 수도회(Sisters of the Blessed Sacrament)를 설립하였다.
자신의 삶을 헌신하며 기금을 마련한 성녀 카타리나 원장은 1894년 뉴멕시코(New Mexico) 산타페(Santa Fe)에 인디언들을 위한 최초의 선교학교 개교식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미시시피(Mississippi) 강 서편의 인디언들을 위한 학교와 미국 남부 지방의 흑인들을 위한 학교들도 개교하였다.
1915년에는 뉴올리언스(New Orleans)에 미국 최초의 흑인들을 위한 대학인 사비에르(Xavier)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녀가 선종할 무렵에는 이미 미국 전역에서 500명이 넘는 수녀들이 63개의 학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성녀 카타리나는 1988년 11월 2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2000년 10월 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가타리나
- 세례명 축일
3월 9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Catherine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413-1463년 볼로냐
가타리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가타리나 이야기
법률가이자 외교관의 딸인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의 어릴 때 이름은 카테리네 데 비그니(Catherine de Vigni)이다. 그녀는 페라라(Ferrara)의 후작인 니콜라우스 3세의 궁중에서 후작 부인을 모시는 시녀로 일하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부친이 사망하자 그녀는 궁중을 떠나 준수도생활을 하려는 일단의 부인들과 함께 베긴회 공동체에 합류했다가 1431년 페라라(Ferrara)에서 프란치스코 규칙서를 따르는 ‘주님의 몸인 클라라회’를 설립해 수련장이 되었다.
성녀 카타리나의 명성이 널려 알려지자 1456년 볼로냐에 새 수도원 설립을 요청받고 페라라를 떠나 볼로냐에서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같은 이름의 수도원을 설립해 사망할 때까지 원장직을 수행했다.
수도생활을 시작한 이후부터 성녀 카타리나는 예수, 마리아, 요셉에 관한 환시를 비롯해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환시를 체험했다.
또한 어느 성탄절에 경험한 자신의 체험을 글로 썼는데, 그것은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은 마리아의 환시였다. 이 환시는 그 후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그녀는 유능한 수련장이자 원장이었다. 그녀는 서도와 회화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고, 뛰어난 성덕으로 인하여 그녀의 수도원은 곧 유명하게 되어 천상 은총으로 충만하였다.
그녀가 손수 장정하고 장식한 성무일도서는 지금도 볼로냐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성녀 카타리나는 1438년에 초판을 작성하고 1450-1456년 증보판을 작성한 저서 「일곱 개의 영적 무기(Le sette armi spirituali)」에서 하느님과 사탄에 대한 자신의 환시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녀는 1712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예술가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가타리나
- 세례명 축일
3월 24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Catherine - 신분과 직업
과부,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331-1381년 스웨덴
가타리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가타리나 이야기
성녀 비르지타(Birgitta, 7월 23일)의 8명의 자녀 가운데 넷째인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는 스웨덴의 울파사(Ulfasa)에서 태어나 14세 때에 에카르트 폰큐르넨과 결혼하였으나, 자신은 정결 서원을 하겠노라는 뜻을 남편에게 확신시켰다고 한다.
1350년 그녀는 상처한 후 하느님의 성소를 받아 로마(Roma)에 머물고 있는 어머니를 방문하여 여러 성지를 순례한 후 귀국하려다가 남편의 부고를 받고 결국 어머니 곁에 머물게 되었다.
그 후 성녀 카타리나는 25년 동안을 어머니의 항구한 동반자로 활동하였다. 1372년 어머니 비르지타가 팔레스티나를 순례하던 도중 병을 얻어 운명하자 그녀는 스웨덴의 바드스테나(Vadstena)로 돌아와서, 어머니가 세운 비르지타회 운영에 전념하였다.
그녀가 바드스테나로 돌아온 후부터 줄곧 건강이 나빠서 늘 고생하다가 1381년 3월 24일에 운명하였다. 148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Innocentius VIII)는 그녀를 성인으로 공경하도록 허락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가타리나 토마스
- 세례명 축일
4월 5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Catherine Thomas - 신분과 직업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574년 팔마
가타리나 토마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가타리나 토마스 이야기
성녀 카타리나 토마스(Catharina Thomas, 또는 가타리나)는 일생동안 에스파냐 발레아레스 제도 마요르카(Mallorca) 섬에서 지냈다.
그녀의 양친은 막내딸인 카타리나가 일곱 살 되던 해에 모두 운명하여 어려서부터 슬픈 나날을 보내며 삼촌 집에서 자랐다. 그런데 그녀는 어려서부터 소량이지만 약물 상용 복용자였다. 이를 극복하라고 주위에서 야단이었지만 그녀는 이를 아예 무시해 버렸다. 그러므로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다.
15세 되던 해에 그녀는 성 안토니우스(Antonius)와 자신의 수호성인인 성녀 카타리나의 환시를 보게 되었는데, 이때 그녀는 수도생활에 대한 열망이 치솟았고, 이 사실을 은수자로 지내던 안토니우스 카스타네다 신부에게 말씀드리고 판단을 기다렸다.
얼마 후에 그녀의 성소를 시험한 안토니우스 신부는 이를 허락하고 수도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팔마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회를 선택하고 입회하였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입회 초부터 그녀의 탁월한 성덕과 겸손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가 돋보이기 시작하여 장상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연간 13-15일 동안은 탈혼 상태에서 지냈으며, 어떤 때는 하루 종일 그런 상태에서 보내기도 하였다.
때때로 간경증 환자처럼 전혀 생기 없는 상태가 되었고, 또 예언의 은사도 받았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수녀원 내에서 맡은 소임을 게을리 한 적은 없다고 한다. 성녀 카타리나 토마스는 자신이 예언한 해(41세)에 운명하였으며, 1792년에 시복되고, 1930년에 시성되었다
.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가타리나
- 세례명 축일
4월 6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Catherine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478년 팔란차
가타리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가타리나 이야기
중세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만연되어 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는 일이 가끔 있었는데, 이탈리아 노바라(Novara) 교구의 팔란차 지방에도 이런 병이 전파되어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라는 어린 소녀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병사한 가정이 있었다.
카타리나는 어떤 사람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밀라네세라는 부인의 양녀로 들어갔다.
그녀가 15살 되던 해에 주님의 수난에 대한 강론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오로지 주님께 자신의 삶을 봉헌하며 살고자 하였다.
그때 마침 그녀의 양모도 세상을 떠났으므로 카타리나는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가 천주의 모친을 기념하여 밀라노(Milano) 근방 바레세(Barese)에 세운 은수처로 들어갔다.
간혹 남자들이 이 계곡으로 와서 은수생활을 하였으나, 젊은 여성이 이런 황야에서 은수생활을 하기는 지극히 위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5년 동안이나 극도로 엄격한 고행을 하며 독수생활을 하였다.
카타리나는 일 년에 아홉 달을 단식하였고 평상시에도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이런 그녀의 생활을 본받으려는 여성들이 몰려와서 그녀의 제자들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 공동체를 세웠는데, 이것이 산타 마리아 디 몬테(Santa Maria di Monte) 수녀원이다.
카타리나는 40세에 운명하였는데, 그녀의 예언의 은사가 유명했다고 전해온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769년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카테리 테카크위타
- 세례명 축일
4월 17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Kateri Tekakwitha - 신분과 직업
과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656-1680년 캐나다
카테리 테카크위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타리나, 까따리나, 까떼리, 데카퀴타, 데카크위사, 카데리, 카타리나, 캐서린.
카테리 테카크위타 이야기
캐나다 이로쿼이(Iroquois) 인디언들에게 체포된 알곤퀸(Algonquian)의 딸인 성녀 카테리 테카크위타는 현재의 뉴욕(New York) 오리스빌(Auriesville) 근처의 모호크(Mohawk)에서 태어나 모호크족의 인디언 추장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1676년에 예수회 선교사인 쟈크 드 랑버빌(Jacques de Lamberville) 신부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으나, 그녀의 신앙을 반대하는 부족과 친척들의 질시와 학대를 이기지 못하여 고향을 떠났다.
밀림 지대를 거쳐 200마일의 거리를 헤맨 끝에 캐나다 몬트리올(Montreal)과 가까운 어느 그리스도교 인디언 마을에 당도하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1677년 성탄절에 첫영성체를 하였고, 1679년에는 동정서원을 발하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봉헌한 후 선행과 사랑의 실천에 몰두하였다.
그녀는 캐나다의 코프나와가(Caughnawaga)에서 선종하였는데, 그녀의 성덕이 뛰어나 만인의 공경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녀는 ‘모호크의 백합’으로 불리며, 1980년 6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아메리카 본토인 가운데 최초로 시복되었다.
2011년 12월 19일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가 기적을 확인하는 시성성의 교령을 승인한 후 그녀에 대한 시성 절차가 진행되어, 2012년 10월 21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녀 카타리나 테카크위타(Catharina Tekakwitha)로도 불리는 그녀의 축일은 캐나다에서는 본래대로 4월 17일에 기념하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부활 대축일과 겹치는 불편 때문에 7월 14일로 이동하여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가타리나
- 세례명 축일
4월 29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Catherine - 신분과 직업
수녀, 교회학자, 신비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347-1380년 시에나
가타리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가타리나 이야기
성녀 카타리나 베닌카사(Catharina Benincasa, 또는 가타리나)는 시에나의 한 염색업자의 25명의 자녀 가운데 23번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생기발랄하고 상냥한 성격을 지녔으며, 아버지가 항상 점잖게 굴라고 하는 말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불과 6살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생애를 미리 보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그녀는 부모가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모든 노력에 반항하고, 오로지 기도와 단식에만 전념하였다.
그녀는 16세 되던 해에 도미니코회 3회원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들에 대한 환시는 더욱 잦아졌고, 동시에 악마적인 환시도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나병환자와 같은 절망적인 병을 앓는 환자들을 간호하는 일을 즐겨하였다.
그녀가 받은 초자연적인 선물들로 인해 열렬한 지지자들이 지나치게 열광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혹시 협잡꾼이 아닌가 하여 고발됨에 따라 도미니코회의 총회 석상에까지 출두한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카푸아(Capua)의 복자 라이문두스(Raymundus, 10월 5일)가 그녀의 고해신부로 임명되었으나 곧 그녀의 영적 친구가 되었고, 후일에는 그녀의 전기 작가가 되었다.
시에나로 돌아온 성녀 카타리나는 페스트로 황량해진 도시에서 주민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고, 선고받은 죄수들을 찾아 돌봤으며, 평화를 전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분쟁을 해결하였다.
그녀는 터키인에 대항하고자 십자군을 모집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 XI)를 적극 지원하였고, 1375년 피사를 방문하는 도중에 오상 성흔을 받았다.
그런데 이 오상은 생전에는 잘 볼 수 없었는데, 임종할 즈음에는 확연히 드러났다고 한다. 그녀는 피렌체(Firenze)와 로마(Roma)의 그레고리우스 교황 간의 불화를 중재하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아비뇽(Avignon)의 교황좌가 1376년에 로마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후로는 자신의 신비적인 체험들을 기록하는 일에 전념하여 “대화”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1378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선종하고 우르바누스 6세(Urbanus VI)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이를 반대하는 일단의 추기경들이 스위스 제네바(Geneva)의 로베르투스(Robertus)를 대립교황(클레멘스 7세)으로 선출하는 사건이 발생해 교회에 큰 분열이 일어났다.
이처럼 혼란한 시기에 성녀 카타리나는 단호히 우르바누스 6세 교황을 지지함으로써 분열을 종식시키고 교황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고행과 희생으로 인해 극도로 쇠약해진 그녀는 결국 1380년 4월 29일 33세의 젊은 나이에 로마에서 숨을 거두었다.
성녀 카타리나는 그리스도교의 신비가 중에서도 대가에 속한다. 그녀는 “대화” 외에도 400여 통의 서한들을 남겼다. 그녀는 1461년 교황 비오 2세(PIus II)에 의해 시성되었고, 1939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1970년 10월 3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1999년 10월 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를 누르시아(Nursia)의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 성 메토디우스(Methodius, 2월 14일)와 성 키릴루스(Cyrillus, 2월 14일) 형제,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Birgitta, 7월 23일),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에디트 슈타인 Edith Stein, 8월 9일)와 함께 유럽의 여섯 수호성인 중 한 명으로 지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가타리나
- 세례명 축일
5월 4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Catherine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3세기경 파르코담
가타리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라헬, 카타리나, 캐서린.
가타리나 이야기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는 유대인의 딸로 오늘날의 벨기에 루뱅(Louvain)에서 살았다. 그녀의 집을 찾는 손님 중에 브라반트(Brabant) 대공의 지도신부가 있었는데, 카타리나는 그와 더불어 종교적인 주제를 놓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그녀가 12세 되던 해였다.
어려서부터 귀여운 라헬(Rachel)이라고도 불리던 그녀는 어느 날 그 사제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때부터 그 사제는 라헬을 가르쳐서 훌륭한 신앙을 갖추게 되었으나, 그녀의 부친이 이를 눈치 채고 그리스도교적인 영향을 받을 수 없도록 그녀를 라인 강 넘어 먼 곳으로 보내기로 결정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라헬은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성모님이 그녀에게 지팡이를 주면서 도망가라고 일러주셨다. 그녀는 즉시 일어나 집을 빠져나왔다.
그 후 사제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린 후에 그 사제의 도움으로 시토회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그곳은 고향에서 불과 2.4km 정도 떨어진 파르코담 수녀원이었다.
여기서 그녀는 세례를 받고 카타리나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의 부친이 루뱅의 주교에게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자 다시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에게 간청하였다.
결국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쾰른(Koln)의 대주교인 엔겔베르투스가 잘 수습하였기 때문에 카타리나는 수도원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훌륭한 수덕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환시와 기적 등으로 유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가타리나
- 세례명 축일
9월 4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Catherine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486-1547년 라코니지
가타리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가타리나 이야기
카타리나 마테이(Catharina Mattei, 또는 가타리나 마테이)는 1486년 어느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카타리나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가 낡아빠진 광에서 태어난 것은 묘하게도 그녀의 일생이 물질적으로 궁핍하며 건강치 못하고 또 이해받지 못한 사람으로 살 것임을 상징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녀는 영적으로는 어느 누구보다도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그녀는 이미 5살 때부터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께 대한 남다른 신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집안에서 힘든 일을 하거나 굶주림으로 눈물을 흘릴 때마다 그녀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서 큰 위로를 받곤 하였다.
1500년의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축일에 그녀는 이 성인에게 기도하였는데, 참으로 기적적으로 성 스테파누스가 발현하여 성령께서 특별히 보살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때 세 줄기의 빛이 그녀를 비추며, “나는 네 안에 내 거처를 정하고, 너의 영혼을 깨끗하고 밝게 할 것이며, 생기를 주리라”고 했다.
그 후 카타리나는 신비적인 신랑과의 동정 서원을 하였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손가락에는 신비스런 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이때부터 그녀는 가시관과 주님의 오상의 아픔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다.
그 후 카타리나에게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또 영적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을 짓누르는 악마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등 오랜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그녀는 62세 때 카르마뇰라에서 운명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810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녀는 라코니지의 카타리나로도 알려져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가타리나
- 세례명 축일
9월 15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Catherine - 신분과 직업
과부, 신비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447-1510년 제노바
가타리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가타리나 이야기
지아코포 피에쉬(Giacopo Fieschi)와 프란체스카 디 네그로(Francesca di Negro)의 딸인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는데, 5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딸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아우구스티노회 수녀였던 언니의 영향으로 수도생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지만, 부모님의 염원으로 16세의 나이에 줄리아노 아도르노(Juliano Adorno)라는 제노바 출신 상류층 젊은이와 결혼을 했다.
그녀의 남편은 신앙도 없고 사나운 성경에 낭비벽이 심했다. 반면 그녀는 민감하고 신중하였으며 거의 유머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매몰스런 여인은 아니었다.
불행했던 그녀의 결혼생활은 10년이 지나면서부터 남편의 방탕으로 인해 극도의 가난에 빠지게 되었고, 성녀 카타리나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병상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1473년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성사를 하던 중에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강하게 느끼는 신비체험을 하고 회개하게 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회개를 경험한 남편과 함께 제노바 병원에서 환자들을 위해 사심 없는 봉사를 시작했다. 남편은 후일 프란치스코회 제3회 회원이 되었다.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부부는 아예 제노바에서 큰 규모인 팜마토네(Pammatone) 병원에서 애덕을 실천하는 일에 자신들을 봉헌하기로 결심했다.
특히 성녀 카타리나는 뛰어난 영성생활로 다른 이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고, 1490년에는 병원장이 되었다. 이 무렵 그녀는 흑사병으로 거의 사경을 헤매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하자 자신의 직책에서 사임했다. 그 후 1년 뒤에 남편도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가 된 카타네오 마라보티(Cattaneo Marabotti) 신부를 만나 자신이 경험한 수많은 신비 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병이 악화돼 극심한 고통을 받았지만 그녀의 신심은 비범했다.
그녀는 세속에 있으면서도 천상적 사물을 관상하는 뛰어난 영성가였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악으로 서서히 물드는 세상의 오염’이었고,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마귀의 간계였다고 한다.
그녀의 가르침을 담은 “영혼과 육신의 대화”, “영혼론”은 신비신학 분야에서 유명한 저서가 되었다. 이 책들이 1934년에 영국에서 간행된 바 있다.
1510년 9월 15일 제노바에서 선종한 성녀 카타리나는 1675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73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이 가타리나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 Catherine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3-1839년 한국
이 가타리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이 카타리나, 이가타리나, 이카타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이 가타리나 이야기
성녀 이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는 교리에 별로 밝지 못한 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나 시골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열네 살 때 외교인 조씨에게 시집가야 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교리를 더 배울 기회도 없었고, 더욱이 계명을 지키지는 못하였으나 마음속에는 항상 하느님을 향하는 열심이 남아 있었다.
그 결과 그녀는 남편을 권면하여 죽을 때에는 그에게 대세를 주어 선종하게 하였다. 그리고 삼남매를 모두 천주님을 사랑하게 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 시댁 식구들은 천주교 믿는 것을 매우 반대하고, 끝내는 엄금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녀들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돌아왔다. 이들 자녀들 중에서 맏딸인 조 막달레나(Magdalena)가 제일 열심하였다.
막달레나는 어머니 곁에서 부지런히 경문을 배우고 교리서를 읽으며 교리 설명을 들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리고 신공을 바쳤다. 그렇게 하기를 하루도 빠진 적이 없을 만큼 대단히 열심하였다고 한다.
이 카타리나는 딸이 장성하자 어떤 교우에게 시집보내려 하였으나. 딸은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킬 원의가 있음을 말하였다.
이 카타리나는 딸을 이해할 만큼 열심하였으나 외교인들이 그것을 이상히 여기고 의심할 것이 두려워 딸로 하여금 서울의 어느 교우 집 하인으로 들어가 살게 하였다.
막달레나는 30세가 넘어 집에 돌아왔으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딸과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여 남의 집에서 살고 있을 때 다시 큰 박해가 일어나 두 모녀는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3개월 동안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그녀는 오로지 순교의 월계관을 받아쓰리라 다짐하다가, 모진 고문과 주리를 당하고 또 모진 옥중 고통으로 열병에 걸려 1839년 9월 하순에 옥사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7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정철염 가타리나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鄭鐵艶 Catherine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4-1846년 한국
정철염 가타리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정 가타리나, 정가타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정철염 가타리나 이야기
성녀 정철염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는 ‘덕이’라고도 불렸다. 그녀가 노비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 영세하였다는 사람도 있고, 16-18세에 이르러 천주교에 입교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느 증언이 정확한 지는 분간하기 어렵다고 한다. 어쨌든 그녀의 성격은 매우 온순하였고 재질은 보통이었으나 마음은 매우 용감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녀의 나이 스무 살 되던 해 동짓날 그녀의 집주인인 김씨가 미신행위의 참여를 강요하자 카타리나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크게 노하여 카타리나의 두 팔을 뒤로 결박하고, 몸에는 큰 맷돌을 매달아 장작더미에 처박아 두었다가 제사가 끝난 다음에 끌어내어 무지하게 매질을 하여 마침내 기절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4, 5주일 뒤에야 회복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 춘분 제삿날이 오자 다시 미신행위에 참여하라는 주인의 명을 어긴 죄로 전보다 더욱 심한 곤욕을 치렀다. 결국 카타리나는 이 두 차례의 형벌로 인하여 일생동안 몸이 붓고 얼굴은 누르스름하였고 힘든 일은 거의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병이 나은 뒤에 카타리나는 주인집을 몰래 빠져나와 서울로 가서 어느 신자 집에 몸담아 살며 안온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1845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댁의 하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 병오박해로 김 신부가 체포되자, 그녀는 현석문 카롤루스(Carolus) 회장이 마련한 새 집에 있다가 7월 10일에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정 카타리나는 우술임 수산나, 김임이 테레사, 이간난 아가타와 같이 옥에서 매를 맞고 순교하였는데, 때는 1846년 9월 20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30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가타리나
- 세례명 축일
11월 25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Catherine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5년경 알렉산드리아
가타리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가타리나 이야기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는 10세기경부터 동방 교회에서 가장 높이 공경해오던 성인 중 한 명이지만 그녀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6세기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가 시나이산 기슭 성녀 카타리나의 무덤 위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 기념 정교회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스계 수도승들이 생활하고 있는 이 수도원을 통해 그녀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전설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성녀 카타리나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상류 계층의 부유한 로마인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라 뛰어난 학식을 지닌 미모의 처녀였다고 한다.
그녀는 어느 날 한 은수자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해 듣고 그것이 세상의 학문을 초월한 참된 진리임을 깨달아 즉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황금 전설”에 따르면, 성녀 카타리나는 공주 신분으로 철학, 수사학, 문법 등을 교육받은 지혜로운 처녀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황제 막센티우스(Maxentius)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황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잔인한 박해를 시작했다. 3년간 계속된 혹독한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가 탄생했다.
미모의 젊은 처녀였던 성녀 카타리나는 우상에게 희생제물 바칠 것을 강요받았지만, 당당히 미신을 버리고 창조주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황제의 명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결국 체포된 성녀 카타리나는 황제 앞으로 끌려가 직접 재판을 받게 되었다.
황제는 그녀의 박식함에 놀라 여러 철학자를 소집해 그녀와 토론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녀의 깊은 학식과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답변과 날카로운 질문에 학자들의 말문이 모두 막혀버렸고, 논쟁 끝에 오히려 50여 명의 이방인 철학자들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인정하고 개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극도로 분노한 황제는 소집된 학자들을 모두 화형에 처해버렸다.
성녀 카타리나가 배교할 의향만 있으면 자신과 결혼시켜 주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해주겠다는 황제의 유혹과 회유마저 단호히 거부하고 심한 매를 맞은 뒤에 투옥되었다. 그 어떤 고문에도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자 황제는 그녀를 감옥에 가두고 음식조차 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녀가 독방에 갇혀 있는 동안 비둘기들이 음식을 날라다 주었고, 성모님과 함께 아기 예수님이 발현하시어 성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고 한다.
다른 도시를 방문하고 돌아온 황제는 성녀 카타리나가 굶어 죽지도 않고 멀쩡한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고 잔인한 사형 도구인 쇠갈퀴가 달린 바퀴를 이용해 죽이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바퀴가 제때 움직이지 않고 천사가 내려와 산산조각 내는 바람에 많은 군인과 구경꾼들이 그 파편에 맞아 죽었고, 성녀 카타리나는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녀의 굳은 신앙과 인내심은 수많은 군인을 놀라게 했고, 그로 인해 2백여 명의 군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곧바로 참수를 당해 순교했다.
결국 그녀는 참수형에 처해 졌는데, 그때 그녀의 목에서 피가 아닌 우유 같은 액체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순교 후 그녀의 시신은 천사에 의해 시나이산 가장 높은 곳으로 옮겨졌고, 6세기에 그곳에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이 세워졌다.
오늘날까지도 이 수도원은 ‘성녀 카타리나 수도원’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고, 많은 순례자가 찾는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는 성녀 잔 다르크(Jeanne d'Arc, 5월 30일)가 들은 신비한 목소리의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철학자, 동정녀, 설교가의 수호성인이다.
교회 미술에서 그녀는 왕족을 상징하는 화려한 옷에 왕관을 쓰고 순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잎이나 칼, 순교 도구였던 쇠갈퀴가 달린 바퀴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주로 등장한다. 그리고 성모자와 함께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혼인을 상징하는 반지를 받는 모습으로도 많이 표현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가타리나 라부레
- 세례명 축일
11월 28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Catherine Laboure - 신분과 직업
수녀, 환시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6-1876년
가타리나 라부레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가타리나 라부레 이야기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Catharina Laboure, 또는 가타리나 라부레)는 1806년 프랑스의 디종(Dijon) 근교 팽-레-무티에(Fain-les-Moutiers)에서 부유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서 조에 라부레(Zoe Labour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9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언니인 루이자(Louisa)가 파리에 있는 애덕의 수녀회에 입회하자 어린 나이에 삼촌의 카페에서 일하며 가사 일을 돌봐야 했다.
그녀는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처지라 읽고 쓰는 것조차 제때 배울 수 없었다. 13살 때 첫영성체를 한 그녀는 매일 새벽 미사에 참례할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그러면서 언니처럼 수도 생활을 동경하던 그녀는 19세 무렵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마을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어떤 노인 신부가 미사를 봉헌한 후 그녀에게 다가와 “아픈 이들을 돌보는 것은 좋은 일이란다. 하느님께서 네가 나에게 오도록 계획하셨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1828년 그녀는 잠시 파리에서 오빠가 운영하는 식당 일을 돕기도 하고, 샤티용쉬르센(Chatillon-sur-Seine)에 있는 기숙사 학교에 잠시 들어가기도 했으나 귀족적인 학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 마을에 있는 수녀원을 방문했다가 응접실에 걸린 한 노인 신부의 초상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꿈속에서 보았던 노인으로 그 사제는 오늘날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The Daughters of Charity of St. Vincent de Paul)로 불리는 애덕의 수녀회를 설립한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ius de Paul, 9월 27일)이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낀 그녀는 아버지의 반대를 극복하고 마침내 언니를 뒤따라 1830년 1월 샤티용쉬르센에 있는 애덕의 수녀회에 입회하여 카타리나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지원기를 마친 그녀는 1830년 4월에 수련을 위해 파리의 뤼 뒤박(Rue du Bac) 수도원으로 갔다. 그리고 그해 7월 18일 잠자리에서 자신을 부르는 어린 천사의 인도로 수도원 성당에서 처음으로 성모님의 발현을 보게 되었고, 11월에 두 번째 환시를 보게 되었다.
첫 발현에서 성모님은 그녀에게 “불행이 프랑스를 덮칠 것이고, 왕좌가 뒤집힐 것이며, 전 세계가 온갖 종류의 불행에 의해 뒤집혀질 것이다. 그러나 이 제대로 걸어 나와 믿음과 열정을 갖고 간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총이 널리 내려질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성모님은 두 번째 발현에서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네가 보고 있는 이 둥근 물체는 나에게 간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내리는 은총의 상징”이라며 “이 모형대로 메달을 새기도록 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녀는 자신이 체험한 성모님의 발현과 메시지를 자신의 고해사제인 알라델(Aladel) 신부에게 알렸고, 알라델 신부는 성모님이 보여주신 메달을 만들어도 좋다는 허가를 파리의 대주교에게 받고, 1832년 6월 30일 처음으로 1,500개를 만들어 아픈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최초로 주조된 메달 전면에는 죄를 상징하는 뱀의 머리를 밟고 있는 상태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조각되어 있고, 그 주위로 발현 연도(1830)와 “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당신께 의탁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Ô Marie, conçue sans péché, priez pour nous qui avons recours à vous!)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십자가가 ‘M’이라는 글자를 들어 올리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M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수난의 신비에 깊이 동참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 그 밑에는 두 개의 심장, 즉 왼쪽의 가시관에 둘러싸인 것은 ‘예수 성심’, 오른쪽의 칼에 찔린 모양을 한 것은 ‘성모 성심’을 의미한다.
그 주위의 12개의 별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즉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사도가 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 메달은 신덕, 망덕, 애덕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것으로 가톨릭 교리의 정수를 담고 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 메달을 통해 은총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기적의 메달’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의 환시는 파리의 대주교가 임명한 특별위원회의 조사를 거쳐 1836년에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그 결과 기적의 메달은 급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는 1831년부터 선종할 때까지 파리의 앙기앵(Enghien) 요양원에서 병자들을 돌보며 수도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체험한 환시를 고해신부에게만 말씀드리고 지속적인 지도를 받으며 생활하였다.
그래서 그녀가 선종할 때까지도 기적의 메달 신심을 세상에 알린 사람이 그녀였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1933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1947년 교황 비오 12세는 시성식에서 그녀를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던 침묵의 성녀’라고 칭송하였다.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가 성모님의 발현을 보았던 파리의 뤼 뒤박 수도원 성당은 현재 ‘기적의 메달 성모 성당’으로 불린다.
성당 제대 위편 벽에는 성모님의 첫 번째 발현 장면이 그려져 있고, 정면에는 메달과 같은 모양의 성모상이 있다.
우측에는 두 번째 발현 모습을 조각한 성모상이 있으며, 그 밑에는 사망 후 57년이 지나 시복을 위한 시신 발굴 당시(1933년) 전혀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그 외에도 성당 안에는 수도회의 공동 설립자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와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Louise de Marillac, 3월 15일)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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