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8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메토디오, 에우메니오, 에우스토르지오 1세, 요셉, 페레올로, 총 5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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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18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5가지
9월 18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메토디오
- 가톨릭 성인 이름
Method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10년경? 올림푸스
메토디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토디우스.
메토디오 자료
성 메토디우스(또는 메토디오)는 리키아(Lycia) 지방 올림푸스의 주교로 그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가 소아시아의 주교이며 순교자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향연 혹은 열 동정녀의 잔치”라는 일종의 플라톤식 대화집이다. 이 주제 밑에 그는 동정의 위대성을 찬미하면서,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찬미가로 끝맺고 있다.
이 책은 1958년에 영국에서 출간되었다. 또 다른 책들은 “육신의 부활”과 “자유 의지”에 관한 것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에우메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men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 고르티나
에우메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메니우스.
에우메니오 자료
성 에우메니우스(또는 에우메니오)는 지중해 동부 크레타(Creta) 섬의 고르티나의 주교로서 유배 중에 사망하였다. 그는 많은 기적을 행하고 신비로운 은사를 받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에우스토르지오 1세
- 가톨릭 성인 이름
Eustorgius 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31년 밀라노
에우스토르지오 1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스또르지오, 에우스또르지우스, 에우스토르기오, 에우스토르기우스, 에우스토르지우스.
에우스토르지오 1세 자료
12세기의 전설에 의하면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교였던 성 에우스토르기우스 1세(또는 에우스토르지오 1세)는 세 명의 동방박사의 유해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밀라노로 이장했다고 전해진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요셉
- 가톨릭 성인 이름
Josep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신비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603-1663년 코페르티노
요셉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요셉 자료
이탈리아의 레체(Lecce) 인근 코페르티노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셉(Josephus)은 젊어서 제화공의 도제로 들어갔다가 몸이 약해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17세 때에 콘벤투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를 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카푸친 프란치스코회의 평수사로 입회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8개월 만에 쫓겨났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 눈치가 없고 배운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그로텔라의 콘벤투알 수도원에서 마부 노릇을 하는 한편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가입해 17년 동안이나 이 수도원에서 살았다. 이윽고 1625년에 그는 수련자로서 허락을 받았고, 너무나 지식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1628년에 사제품을 받는 영광을 입었다.
그는 곧 탈혼, 기적 그리고 초자연적인 은총 등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탈혼 상태에서 여러 번 공중에 뜨는 경험을 했고, 미래를 내다보고 사람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은총을 받았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영적 지도를 받고 병을 치유 받기 위해 모여들었다. 하지만 반대자들의 모함으로 인해 이단의 의혹을 받기도 했다.
수도회 장상의 명으로 아시시(Assisi)에 은둔해 조용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은둔 생활 중에도 그의 명성은 계속해서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점점 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피에트라루비아(Pietrarubbia) 수도원으로, 그다음에는 포솜브로네(Fossombrone) 수도원으로 옮겨 다녔다.
그러던 중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가 직접 성 요셉을 찾아와 그의 성덕과 성실성에 탄복해 그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음을 인정하면서 모든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657년 그는 오시모(Osimo) 수도원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낸 후 1663년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753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67년 7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는 그를 공중 여행자와 비행 조종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페레올로
- 가톨릭 성인 이름
Ferreo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호민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비엔
페레올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페레올루스, 페르레올로, 페르레올루스.
페레올로 자료
성 페레올루스(또는 페레올로)는 프랑스 남동부 비엔 지방에서 순교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지만, “로마 순교록”과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로마군의 호민관으로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이었다.
비엔에서 태어난 브리우드(Brioude) 성 율리아누스(Julianus, 8월 28일)는 그의 부하이자 친구로서 열심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성 율리아누스에게 일단 몸을 숨기도록 권했다.
하지만 그 지방 총독인 크리스피누스(Crispinus)가 보낸 군인들에 의해 성 율리아누스는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의 한 피신처에 있다가 체포되어 즉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율리아누스의 참수된 머리는 군인들에 의해 비엔으로 옮겨졌고, 총독은 성 페레올루스에게 순교자의 머리를 건네고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성 페레올루스는 단호히 이를 거부하고 자기도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분명히 밝혔다. 호민관 신분이었던 성 페레올루스는 총독으로부터 잔인하게 채찍질을 당하고 무거운 사슬에 묶여 지하 감옥으로 던져졌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쇠사슬이 풀리고 감옥 문이 열리면서 탈출에 성공해 론(Rhone) 강을 헤엄쳐 강둑에 도착했으나 그를 추격해온 군인들에게 다시 잡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비엔의 교우들은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순교한 그 자리에 작은 성당을 지어 그를 공경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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