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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일 남자세례명 12가지

피어나네 2023. 10. 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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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닐로, 사바티오, 세콰노, 알폰소 데 오로스코, 야누아리오, 엘리야, 테오도로, 트로피모, 파테르무티오, 펠레오, 펠릭스, 프란치스코, 총 12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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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일 여자세례명 마리아 데 세르벨리온, 수산나, 에밀리아, 콘스탄시아, 폼포사, 총 5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1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2가지

 

 

 

 

9월 19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닐로

  2. 사바티오

  3. 세콰노

  4. 알폰소 데 오로스코

  5. 야누아리오

  6. 엘리야

  7. 테오도로

  8. 트로피모

  9. 파테르무티오

  10. 펠레오

  11. 펠릭스

  12. 프란치스코

 

9월 1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2가지

 

 

1. 닐로

 

  • 가톨릭 성인 이름
    Ni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10년 팔레스티나

 

 

닐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닐루스.

 

 

닐로 자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이 팔레스티나의 채석장에서 일하도록 선고를 받고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19일 목록에서 그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고 돌보도록 파견된 이집트의 주교 성 펠레우스(Peleus)와 성 닐루스(또는 닐로) 그리고 성 엘리야(Elias) 신부와 성 파테르무티우스(Patermutius) 순교자 이름을 전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갈레리우스 황제(305~311년 재위) 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팔레스티나의 총독 피르밀리아누스가 성 펠레우스와 그의 동료들 외에도 많은 성직자와 노동력이 떨어지는 신자들을 체포해 온갖 고문을 가하고 화형에 처했다고 한다.

이집트와 팔레스티나 출신 156명의 그리스도인이 채석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순교했다고 한다. 성 펠레우스와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란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오늘날의 요르단 남부인 페트라(Petra) 인근으로 끌려가 산 채로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그 뒤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팔레스티나뿐만 아니라 키프로스와 레바논의 채석장으로도 끌려갔다고 한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모두에서 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사바티오

 

  • 가톨릭 성인 이름
    Sabba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

 

 

사바티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사바띠오, 사바띠우스, 사바시오, 사바시우스, 사바씨오, 사바씨우스, 사바티우스.

 

 

사바티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19일 목록에서 프로부스(Probus, 276~282년 재위) 황제 때 순교한 성 트로피무스(Trophimus)와 성 사바티우스(또는 사바티오) 그리고 성 도리메돈(Dorymedon/Dorimedon)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성 사바티우스는 아티쿠스 총독의 명령에 따라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 오늘날 튀르키예의 안타키아 Antakya)에서 죽을 때까지 채찍을 맞고 순교하였다.

성 트로피무스는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한 고대 소아시아 중서부 프리지아(Phrygia) 지방 신나다(Synnada)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로마 원로원 의원인 성 도리메돈과 함께 많은 고통을 겪은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성 트로피무스와 성 사바티우스가 안티오키아에 왔다가 이교의 신상 앞에 분향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당당히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했다고 한다.

성 사바티우스는 안티오키아에서 순교했지만, 성 트로피무스는 신나다로 이송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원로원 의원이자 그리스도인인 성 도리메돈이 찾아와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위로해주었다.

신나다의 관리들은 그들에게 이교의 축제 중에 신상 앞에 희생 제사를 올리도록 강요했으나 끝까지 거부하자 그들을 고문하고 맹수에게 던져버렸다. 그러나 맹수들이 그들을 해치지 않자 결국 참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19일 목록에서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한 프리기아 지방 신나다에서 성 트로피무스 순교자를 기념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9월 20일 목록에서 같은 도시에서 성 도리메돈 순교자를 기념하고 있다고 간단히 전해주었다. 그런데 성 사바티우스 순교자에 대해서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세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equ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580년경

 

 

세콰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과노, 세과누스, 세콰누스.

 

 

세콰노 자료

거룩한 수도자 성 세콰누스(또는 세콰노)는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의 머스몽 출신으로 베레이-수-드레에서 한동안 은수자로 살았다. 이때 그는 손수 움막을 짓고 매일 시편 전부를 외웠으며 거의 단식으로 일관하였다.

랑그르(Langres)의 주교가 그에게 사제직을 주었다. 이 수도자는 지방 성직자들의 끊임없는 박해를 받았지만 자신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움막에서 주로 성서공부에 정열을 쏟는 한편 수도자적인 덕행을 실천에 옮기는데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또 그는 센(Seine) 강변의 세제스트르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큰 마을이 생겼는데 이것이 오늘의 생-센(Saint-Seine)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알폰소 데 오로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Alphonsus de Orozc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설교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500-1591년

 

 

알폰소 데 오로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폰수스, 알퐁소, 알퐁수스.

 

 

알폰소 데 오로스코 자료

16세기 에스파냐 교회에서 가장 엄격하면서도 위대한 신심가로 손꼽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회의 수도자인 성 알폰수스 데 오로스코(Alfonsus de Orozco, 또는 알폰소 데 오로스코)는 1500년 10월 17일 톨레도(Toledo) 지방의 오로페사(Oropesa)에서 태어났고, 불과 6세 때에 사제가 되려는 뜻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그는 탈라베라(Talavera)와 톨레도에서 공부하고 그 다음에는 살라망카(Salamanca) 대학교를 다녔다. 이때 빌라노바(Villanova)의 성 토마스(Thomas, 9월 22일)의 유명한 설교를 듣고 수도생활에 큰 매력을 느껴 22세 때 성 아우구스티누스 회의 수도복을 입게 되었다.

서원 후 30년 동안 성 알폰수스 데 오로스코는 교육과 설교 일에만 전념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고해신부로도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는 4차례나 각기 다른 지방의 장상으로 지냈고, 1554년에는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원장으로 취임하였고, 2년 뒤에는 궁중 설교가로 임명받았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즉시 귀족을 상대로 설교하여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세빌라의 원장으로 있을 때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이때 성모님은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 구원을 위한 펜으로 사용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하여 그는 천주의 모친께 대한 사업에 정력을 기울였고, 수많은 신심서적을 저술하였다. 그는 또 장상의 명에 따라 “고백록”을 썼다.

그는 1882년 1월 15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5월 1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야누아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Janu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5년경 베네벤토

 

 

야누아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겐나로, 야누아리우스, 자누아리오, 자누아리우스, 젠나로.

 

 

야누아리오 자료

이탈리아 캄파니아(Campania) 지방의 나폴리(Napoli) 출신으로 알려진 성 야누아리우스(또는 야누아리오)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지만, 후대의 몇몇 순교록과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시작할 즈음에 베네벤토의 주교로 활동하고 있었다.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야누아리우스는 오랜 친구이자 나폴리 북쪽 해안 도시인 미세노(Miseno)의 부제인 성 소시우스(Sossius)와 나폴리 서쪽 교외에 있는 항구도시 포추올리(Pozzuoli)의 부제인 성 프로쿨루스(Proculus) 그리고 평신도인 성 에우티키우스(Eutychius)와 성 아쿠티우스(Acutius)가 신앙을 증거하고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그들을 만나러 용감하게 감옥으로 달려갔다.

이때 그의 부제인 성 페스투스(Festus)와 독서직(讀書職)을 받은 성 데시데리우스(Desiderius)가 성 야누아리우스 주교를 수행해 함께 갔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구할 방도를 찾던 성 야누아리우스 주교와 그 일행 또한 캄파니아의 총독에게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그들은 당당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총독은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그들을 포추올리의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으로 내던져 주었으나 맹수들이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다.

결국 군중들의 소요를 우려한 총독은 그들을 고대 화산 분화구가 있는 인근의 솔파타라(Solfatara)로 끌고 가서 참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베네벤토의 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야누아리우스가 나폴리 근처 포추올리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했다고 9월 18일 목록에서 간단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베네벤토의 부제인 성 페스투스와 독서자인 성 데시데리우스는 9월 7일 목록에, 미세노의 부제인 성 소시우스는 성 야누아리우스 주교를 구하려다가 함께 죽음을 맞아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고 9월 23일 목록에 따로 기록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도 성 소시우스에 대해서는 9월 23일 목록에서 별도로 기록하였다. 나머지 포추올리의 부제인 성 프로쿨루스와 평신도인 성 에우티키우스와 성 아쿠티우스는 10월 18일 목록에서 포추올리에서 순교자로서 공경받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성 야누아리우스와 동료 순교자들의 유해는 나폴리의 요한(Joannes) 주교에 의해 나폴리의 카포디몬테(Capodimonte) 카타콤바에 모셔졌다.

그 후 머리를 제외한 성 야누아리우스의 유해는 롬바르디아(Lombardia) 왕자였던 베네벤토의 시코네 1세(Sicone I)에 의해 831년 베네벤토로 옮겨졌다.

1154년 베네벤토의 안전이 위태로울 때 몬테비르지네(Montevirgine)의 대수도원으로, 그리고 1497년에 다시 나폴리로 되돌아와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다. 그러면서 성 야누아리우스는 나폴리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게 되었다.

현재 나폴리 대성당 내 아름다운 성 야누아리우스 경당에는 성 야누아리우스의 피로 여겨지는 검은색 물체가 작은 유리병에 담겨 보관되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에우세비아(Eusebia)라는 여인이 순교자들의 피를 모으는 일을 하다가 우연히 성 야누아리우스의 피를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포추올리에서 나폴리의 카타콤바로 성인의 유해를 옮기는 중에 나폴리의 주교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딱딱하게 굳은 피가 1년에 여러 번, 특정한 시기에 액화되어 묽은 피로 변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전시되었고, 이 기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적 시험과 분석을 시도했으나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심 깊은 나폴리 사람들은 이를 기적으로 간주하며 성 야누아리우스의 혈액을 나폴리의 가장 소중한 유산으로 여기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성 젠나로(Gennaro)로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엘리야

 

  • 가톨릭 성인 이름
    Eli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10년 팔레스티나

 

 

엘리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앨리아, 엘리아스.

 

 

엘리야 자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이 팔레스티나의 채석장에서 일하도록 선고를 받고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19일 목록에서 그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고 돌보도록 파견된 이집트의 주교 성 펠레우스(Peleus)와 성 닐루스(Nilus) 그리고 성 엘리야 신부와 성 파테르무티우스(Patermutius) 순교자 이름을 전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갈레리우스 황제(305~311년 재위) 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팔레스티나의 총독 피르밀리아누스가 성 펠레우스와 그의 동료들 외에도 많은 성직자와 노동력이 떨어지는 신자들을 체포해 온갖 고문을 가하고 화형에 처했다고 한다.

이집트와 팔레스티나 출신 156명의 그리스도인이 채석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순교했다고 한다. 성 펠레우스와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란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오늘날의 요르단 남부인 페트라(Petra) 인근으로 끌려가 산 채로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그 뒤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팔레스티나뿐만 아니라 키프로스와 레바논의 채석장으로도 끌려갔다고 한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모두에서 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테오도로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dor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02-690년 캔터베리

 

 

테오도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오도로, 데오도루스, 떼오도로, 떼오도루스, 테오도루스.

 

 

테오도로 자료

소아시아 실리시아(Cilicia)의 타르수스(Tarsus) 출신인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테오도로)는 아테네(Athenae)에서 수학한 후 로마(Roma)에서 바실리우스 회원이 되었다. 그는 60세 되던 해에 교황 성 비탈리아누스(Vitalianus, 1월 27일)로부터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어 다음 해에 착좌하였다.

그는 잉글랜드(England)의 모든 교회를 방문하여 규율을 바로 잡았으며, 전례음악을 영국 교회에 도입하였다. 그는 특히 성서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영국 최초의 전국적인 교회회의를 673년에 소집하였고, 여기서 부활절 축일을 로마 관습과 일치시켰을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에 부제 제도를 확립하였다.

또 680년의 하트필드 회의에서는 그리스도 단성설을 단죄하였으며, 679년에는 에그프리드 왕과 에텔레드 왕 사이의 평화 조성자로 활약하여 그들의 전쟁을 종식시켰다.

성 테오도루스는 전 영국의 초대 대주교였다. 따라서 그는 영국 교회를 선교지에서 제도적인 교회로서의 틀을 확정한 인물이었다. 그는 타르수스의 테오도루스라고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트로피모

 

  • 가톨릭 성인 이름
    Trophi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

 

 

트로피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드로피모, 드로피무스, 뜨로피모, 뜨로피무스, 트로피모스, 트로피무스.

 

 

트로피모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19일 목록에서 프로부스(Probus, 276~282년 재위) 황제 때 순교한 성 트로피무스(또는 트로피모)와 성 사바티우스(Sabbatius) 그리고 성 도리메돈(Dorymedon/Dorimedon)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성 사바티우스는 아티쿠스 총독의 명령에 따라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 오늘날 튀르키예의 안타키아 Antakya)에서 죽을 때까지 채찍을 맞고 순교하였다.

성 트로피무스는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한 고대 소아시아 중서부 프리지아(Phrygia) 지방 신나다(Synnada)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로마 원로원 의원인 성 도리메돈과 함께 많은 고통을 겪은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성 트로피무스와 성 사바티우스가 안티오키아에 왔다가 이교의 신상 앞에 분향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당당히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했다고 한다.

성 사바티우스는 안티오키아에서 순교했지만, 성 트로피무스는 신나다로 이송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원로원 의원이자 그리스도인인 성 도리메돈이 찾아와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위로해주었다.

신나다의 관리들은 그들에게 이교의 축제 중에 신상 앞에 희생 제사를 올리도록 강요했으나 끝까지 거부하자 그들을 고문하고 맹수에게 던져버렸다. 그러나 맹수들이 그들을 해치지 않자 결국 참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19일 목록에서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한 프리기아 지방 신나다에서 성 트로피무스 순교자를 기념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9월 20일 목록에서 같은 도시에서 성 도리메돈 순교자를 기념하고 있다고 간단히 전해주었다. 그런데 성 사바티우스 순교자에 대해서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파테르무티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atermu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10년 팔레스티나

 

 

파테르무티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떼르무씨오, 빠떼르무씨우스, 파테르무시오, 파테르무시우스, 파테르무씨오, 파테르무씨우스, 파테르무티우스.

 

 

파테르무티오 자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이 팔레스티나의 채석장에서 일하도록 선고를 받고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19일 목록에서 그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고 돌보도록 파견된 이집트의 주교 성 펠레우스(Peleus)와 성 닐루스(Nilus) 그리고 성 엘리야(Elias) 신부와 성 파테르무티우스(또는 파테르무티오) 순교자 이름을 전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갈레리우스 황제(305~311년 재위) 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팔레스티나의 총독 피르밀리아누스가 성 펠레우스와 그의 동료들 외에도 많은 성직자와 노동력이 떨어지는 신자들을 체포해 온갖 고문을 가하고 화형에 처했다고 한다.

이집트와 팔레스티나 출신 156명의 그리스도인이 채석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순교했다고 한다. 성 펠레우스와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란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오늘날의 요르단 남부인 페트라(Petra) 인근으로 끌려가 산 채로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그 뒤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팔레스티나뿐만 아니라 키프로스와 레바논의 채석장으로도 끌려갔다고 한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모두에서 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펠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ele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10년 팔레스티나

 

 

펠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뻴레오, 뻴레우스, 펠레우스.

 

 

펠레오 자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이 팔레스티나의 채석장에서 일하도록 선고를 받고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19일 목록에서 그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고 돌보도록 파견된 이집트의 주교 성 펠레우스(또는 펠레오)와 성 닐루스(Nilus) 그리고 성 엘리야(Elias) 신부와 성 파테르무티우스(Patermutius) 순교자 이름을 전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갈레리우스 황제(305~311년 재위) 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팔레스티나의 총독 피르밀리아누스가 성 펠레우스와 그의 동료들 외에도 많은 성직자와 노동력이 떨어지는 신자들을 체포해 온갖 고문을 가하고 화형에 처했다고 한다.

이집트와 팔레스티나 출신 156명의 그리스도인이 채석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순교했다고 한다. 성 펠레우스와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란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오늘날의 요르단 남부인 페트라(Petra) 인근으로 끌려가 산 채로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그 뒤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팔레스티나뿐만 아니라 키프로스와 레바논의 채석장으로도 끌려갔다고 한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모두에서 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펠릭스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x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

 

 

펠릭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체.

 

 

펠릭스 자료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펠릭스와 성녀 콘스탄티아(Constantia)는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중에 이탈리아의 노체라(Nocera)에서 순교했다. 그들은 캄파니아(Campania) 지방 노체라 출신의 남매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프란치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Franci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증거자,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804-1866년 캄포로소

 

 

프란치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프란치스코 자료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북부 리구리아(Liguria) 해안의 소도시인 캄포로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에 그는 콘벤투알 수도자 한 분을 우연히 만나 자신의 성소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세스트리 포빈테 수도원에 갔으나 3회원으로 받아 들여졌을 뿐이었다. 더욱 엄격한 생활을 원하던 그는 즉시 이곳을 떠나 카푸친회에 들어갔고, 여기서 프란치스코란 이름으로 서원하였다.

평수사인 그는 주로 병자를 돌보는 일을 하다가 원장의 지시를 받고 탁발을 시작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 고통이 뒤따랐다. 어떤 때에는 빵 대신 돌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10년 동안이나 겸손하게 탁발한 결과 그는 뛰어난 성덕을 닦을 수 있었다.

그는 ‘파드레 상토’(Padre Sancto), 즉 성인 신부로 통할만큼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덕을 흠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866년 제노바(Genova) 지방에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그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다가 자기 자신도 희생자가 되어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는 1929년에 복자품에 올랐고, 1962년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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