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권득인 베드로, 김 헨리코(도리 헨리코), 김성우 안토니오, 김제준 이냐시오, 나 베드로(모방 베드로), 남경문 베드로, 남명혁 다미아노,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남종삼 요한, 도리메돈, 디오니시오, 민 루카(위앵 루카), 민극가 스테파노,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박후재 요한, 백 유스토(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라우렌시오), 빈첸시오 마델가리오, 서 루도비코(볼리외 루도비코), 손선지 베드로, 손자선 토마스, 아가피토, 아가피토 1세, 안 안토니오(다블뤼 안토니오), 에빌라시오, 에우스타키오, 오 베드로(오매트르 베드로), 우세영 알렉시오, 유대철 베드로, 유정률 베드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이광렬 요한,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이명서 베드로, 이문우 요한, 이윤일 요한, 이호영 베드로, 임치백 요셉, 장 시메온(베르뇌 시메온), 장성집 요셉, 장주기 요셉, 전장운 요한, 정 야고보(샤스탕 야고보), 정국보 프로타시오,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정원지 베드로, 정의배 마르코, 정하상 바오로, 정화경 안드레아, 조신철 가롤로, 조윤호 요셉, 조화서 베드로, 최경환 프란치스코, 최창흡 베드로, 최형 베드로, 클리체리오, 테오도로, 테오피스토, 프란치스코 데 포사다스, 프리바토, 한이형 라우렌시오, 한재권 요셉, 허협 바오로, 현석문 가롤로,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 홍병주 베드로, 홍영주 바오로, 황석두 루카, 총 68분 목록이에요.
9월 20일이 영명축일인 남자세례명은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천주교 세례명 상세정보로 이동합니다. 어울리는 세례명을 지금 바로 찾아보세요.
9월 20일 여자세례명 고순이 바르바라, 권진이 아가타, 권희 바르바라, 김 데레사, 김 루치아 (과부), 김 루치아 (동정순교자), 김 바르바라, 김노사 로사, 김성임 마르타, 김아기 아가타, 김업이 막달레나, 김유리대 율리에타, 김임이 데레사, 김장금 안나, 김효임 골룸바, 김효주 아녜스, 박봉손 막달레나, 박아기 안나, 박큰아기 마리아, 박희순 루치아, 손소벽 막달레나, 우술임 수산나, 원귀임 마리아, 유 체칠리아, 이 가타리나, 이 바르바라, 이 아가타, 이간난 아가타, 이경이 아가타, 이매임 데레사, 이연희 마리아, 이영덕 막달레나, 이영희 막달레나, 이인덕 마리아, 이정희 바르바라, 이조이 아가타, 전경협 아가타, 정정혜 엘리사벳, 정철염 가타리나, 조 막달레나, 조증이 바르바라, 최영이 바르바라, 칸디다, 테오피스테, 파우스타, 필립바, 한아기 바르바라, 한영이 막달레나, 허계임 막달레나, 현경련 베네딕타, 홍금주 페르페투아, 총 51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20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68가지
9월 20일 남자세례명 목록
- 권득인 베드로
- 김 헨리코(도리 헨리코)
- 김성우 안토니오
- 김제준 이냐시오
- 나 베드로(모방 베드로)
- 남경문 베드로
- 남명혁 다미아노
-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 남종삼 요한
- 도리메돈
- 디오니시오
- 민 루카(위앵 루카)
- 민극가 스테파노
-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 박후재 요한
- 백 유스토(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라우렌시오)
- 빈첸시오 마델가리오
- 서 루도비코(볼리외 루도비코)
- 손선지 베드로
- 손자선 토마스
- 아가피토
- 아가피토 1세
- 안 안토니오(다블뤼 안토니오)
- 에빌라시오
- 에우스타키오
- 오 베드로(오매트르 베드로)
- 우세영 알렉시오
- 유대철 베드로
- 유정률 베드로
-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 이광렬 요한
-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 이명서 베드로
- 이문우 요한
- 이윤일 요한
- 이호영 베드로
- 임치백 요셉
- 장 시메온(베르뇌 시메온)
- 장성집 요셉
- 장주기 요셉
- 전장운 요한
- 정 야고보(샤스탕 야고보)
- 정국보 프로타시오
-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 정원지 베드로
- 정의배 마르코
- 정하상 바오로
- 정화경 안드레아
- 조신철 가롤로
- 조윤호 요셉
- 조화서 베드로
- 최경환 프란치스코
- 최창흡 베드로
- 최형 베드로
- 클리체리오
- 테오도로
- 테오피스토
- 프란치스코 데 포사다스
- 프리바토
- 한이형 라우렌시오
- 한재권 요셉
- 허협 바오로
- 현석문 가롤로
-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
- 홍병주 베드로
- 홍영주 바오로
- 황석두 루카
1. 권득인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權得仁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상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5-1839년 한국
권득인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권 베드로, 권베드로, 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권득인 베드로 자료
성 권득인 베드로(Petrus)는 서울 문안에서 태어난 신자 집안의 후예이다. 그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잃었지만, 열심하던 어머니의 표양에 따라 착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소규모의 장사를 하여 근근이 끼니를 이어 나갔으나 그의 친절과 신심만은 대단히 높았다.
이윽고 그 후 결혼한 그는 사직골에 살면서 첫 닭 울 녘에 일어나서 등잔불을 켜 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 후 그는 너리골로 이사하여 십자가와 성패를 만들어 팔아 전교에 힘쓰는 한편 이를 생계의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1839년 1월 16일 저녁, 그는 집을 찾아온 처남과 함께 이야기하던 중에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갇혔는데, 부인과 처남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권 베드로는 백절불굴의 용기를 드러냈으며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천주교를 믿느냐?” 하는 포장의 질문에 “천주는 천사와 사람과 만물의 임금이시오, 사람은 이러니 천주님께 감사할 생각을 두지 않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습니까?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다 천주를 공경하고 섬길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포장은 성이 나서 무섭게 매질하라고 명령하고, “네 동교인들을 대라”고 소리를 질렀다. “천주교에서는 남을 죽이거나 해하는 것을 엄금하니 어찌 감히 내 말로써 사람들에게 죽을 위험을 당하게 하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포장은 그를 강제로라도 배교시키기 위하여 못된 죄수들에게 내맡겨 고문하게 하였다. 이 악한 죄수들은 베드로를 어찌나 몹시 매질하였던지 두 번이나 죽은 줄 알고 내버려 두기까지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금요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니,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김 헨리코(도리 헨리코)
- 가톨릭 성인 이름
金 Henry(Dorie Henr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9-1866년 한국
김 헨리코(도리 헨리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헨리코, 김헨리코, 앙리, 헨리꼬, 헨리꾸스, 헨리쿠스.
김 헨리코(도리 헨리코) 자료
성 피에르 앙리 도리(Pierre Henri Dorie)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고, 한국 성은 김(金)이다. 그는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중서부 뤼송(Lucon) 교구 내에 있는 생틸레르드탈몽(Saint-Hilaire-de-Talmont)이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염전과 농사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부부였다. 이 부부는 가난했지만 순박하면서도 신심이 깊었고 또 평화스럽게 가정을 꾸려갔기에 성 도리 헨리코(Dorie Henricus)는 건전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곳 본당의 보좌신부가 그에게 관심을 두어 부모의 승낙을 얻은 뒤 신학교 입학을 추천하였다.
그래서 그는 1852년 10월 소신학교에 들어가 8년간 수학한 후 1860년 뤼송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862년 8월 23일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다시 입학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의 건강 상태를 잘 알고 있던 부모나 본당신부는 극구 말렸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님! 외국 선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진실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8년 동안이나 이 소명에 대하여 제 마음속에서 생각해 왔었습니다. 하느님이 저의 마음속에 말씀하셨으니, 저는 그분께 순명해야 합니다.”라고 말해 겨우 부모의 승낙을 받고, 1864년 5월 21일 동료인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Ranfer de Bretenieres Justus, 白) · 성 볼리외 루도비코(Beaulieu Ludovicus, 徐) 등과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후 즉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성 도리 헨리코 신부는 함께 임명된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 성 볼리외 루도비코 · 성 위앵 루카(Huin Lucas, 閔) 신부 등과 함께 1864년 7월 15일 파리(Paris)를 출발해 마르세유(Marseille)에서 상선을 타고 극동으로 향해 9월 중순 무렵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상해(上海)를 거쳐 11월에 요동(遼東)의 차쿠에 도착해 한문 공부를 하며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인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의 연락을 기다렸다. 이윽고 1865년 4월 17일 차쿠를 출발한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동료들은 백령도 인근에서 주교가 보낸 배로 갈아타고 5월 27일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조선 땅을 밟았다.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경기도 용인(龍仁)의 손골[孫谷里]에서 조선말을 배우면서 그곳 교우들과 함께 지내며 서서히 전교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런데 1866년 초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 뒤인 2월 27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의 하인이었던 이선이(李先伊)의 밀고로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먼저 ‘하우고개’에 있던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를 체포한 후 산등성이 하나 너머에 있던 성 도리 헨리코 신부를 체포해서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렇게 해서 성 도리 헨리코 신부는 의금부 옥에서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동료 선교사인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와 성 볼리외 루도비코를 신부를 만났다.
성 도리 헨리코 신부는 여러 날 문초와 심문을 받았다. 3월 5일 문초에서 관리들이 본국에 송환해 주겠다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말을 배웠으니, 죽었으면 죽었지,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결국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은 성 도리 헨리코 신부는 사형 집행일인 3월 7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동료 신부들과 함께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갔다. 이 광경을 목격했던 한 교우는 “도리 신부는 눈을 내리뜨고 참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순교자로서의 당당함을 보여 주었다”라고 증언하였다.
이날 성 도리 헨리코 신부는 맨 마지막으로 처형되었는데, 두 번째 내리치는 칼날 아래 순교의 영광을 천상 제단에 바쳤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로 조선에 입국한 지 10개월도 되지 않았다.
이날 순교한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주교와 동료 신부들의 시신은 다른 순교자의 시신과 함께 형장에 방치되었다가 2개월 후인 5월 12일 박순지 요한(朴順之, Joannes) 등에 의해 발굴되어 새남터 인근에 잠시 묻혔다가 5월 27일 와서(瓦署, 왜고개,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로 옮겨 안장되었다.
용감한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정성껏 장례 지내고 와서에 모신 것이다. 그 뒤 이들 순교자의 유해는 1899년 10월 30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9월 5일 명동 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가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도리 헨리코 신부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김성우 안토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金星禹 Anthon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5-1841년 한국
김성우 안토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안또니오, 김 안토니오, 김안또니오, 김안토니오,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김성우 안토니오 자료
성 김성우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경기도 광주 고을 구산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부유하였고 또한 정직하고 인심 좋기로 유명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3형제 중 맏이인 안토니우스는 성격이 온화하고 관대하여 외교인들도 그를 흠모하였다고 한다.
그 종손들이 고향에서 존경을 받으며 사는 것은 사람들이 그 증조부의 유덕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3형제 중 두 명이 즉시 입교하였고, 오래지 않아 셋째 뿐 아니라 여러 친척과 친구와 이웃이 그들과 뜻을 같이 하여 이 작은 마을이 열렬한 교우촌이 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가 별세한 뒤 안토니우스는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오자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로 이사하여 느리골(현 효제동)이라는 동네에 집을 사서 있다가 동대문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현 마장동)이라는 동네에서 살았다. 그는 자기 집에 강당까지 마련하여 회장으로서 모방 신부를 한여름 동안 모시기도 하였다.
한편 구산에 살고 있던 두 형제는 박해가 일어나자 곧 잡혀 첫째 동생이었던 김만집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1841년 1월 28일(음력)에 옥사하였고, 둘째 동생 김문집 베드로는 사촌 김주집과 함께 광주 남한산성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안토니우스는 아내를 잃고 다시 열심한 교우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1840년 1월경 배교자가 밀고를 하여 잡힐 위험에 이르자, 그는 지방으로 도망가 숨어 지냈지만 오랫동안 포위망을 피할 수 없어 결국 온 가족과 함께 붙잡혀 포도청을 거쳐 형조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는 포장 앞에 끌려와 거듭되는 심문을 받았고, 30대의 곤장을 맞았으나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을뿐더러 고문을 용감히 참아 나갔다. 안토니우스는 배교하라는 재판관의 독촉에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법정에 출두하여 곤장 60대를 맞았으나 그의 훌륭한 용기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 밤에 당고개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때는 1841년 4월 29일이요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안토니우스의 유해는 고향 구산으로 옮겨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가족묘지 근처에 안장하였다.
1927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하여 유해의 골격을 맞춘 후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치하였다가 후에 절두산 순교성지의 성해실로 옮겨 모셨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김제준 이냐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金濟俊 Igna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6-1839년 한국
김제준 이냐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이냐시오, 김이냐시오,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오, 이냐시우스.
김제준 이냐시오 자료
성 김제준 이냐시오는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 비오(Pius)의 손자이며, 1846년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부친이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의 박해로 시련을 당한 서민의 집에서 태어나 충청도 면천 솔뫼라는 산골에서 살았다. 그 후 내포의 솔뫼로 거처를 옮겨 새살림을 시작하고, 아내 우르술라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1846년에 참수를 당한 최초의 조선인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이다.
신심이 두터웠고 매사에 성실했던 그는 만사를 주님의 섭리에 맡긴다는 자세로 살았기 때문에, 아들이 전교 신부들에게 선택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에도, 온 가족이 당하게 될 무서운 형벌과 환난을 오로지 주님의 안배와 섭리에 맡기고 아들을 보냈다.
아들이 떠난 후 그는 관헌들의 추격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기해년 9월 중순 그의 사위의 인도를 받은 배교자 김여상이 포졸을 이끌고 그의 집으로 몰려왔다. 증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기운이 장사여서 대여섯 사람쯤은 해 치울 수 있었으나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포승을 받았다고 한다.
포도청으로 붙잡혀간 이냐시오는 사학을 신봉한다는 죄와 자기 아들 안드레아를 국법을 거슬러 조선을 떠나 마카오에 가게 하였다는 죄, 즉 국사범이라는 중죄를 가해 혹독한 형벌을 당하였다. 그는 이러한 형벌을 견디지 못하여 결국 배교하였다.
그러자 옥에 있는 신자들이 그의 죄가 대단히 크다는 것과 배교한대도 석방될 수 없다고 이야기해 주며, “석방되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마십시오. 당신은 의심 없이 처형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려 당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재판관 앞에 나가 배교하겠다고 한 말을 취소하고 순교자로 세상을 마치도록 하십시오.” 하고 거듭 권고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형조에 출두하여 배교한 것을 취소하니, 이어 세 차례나 혹형을 당하였지만 다시는 마음을 굽히지 아니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아들 김대건 신부의 장한 모습도 보지 못한 채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니 때는 1839년 9월 26일이요, 나이는 44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나 베드로(모방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羅 Peter(Maubant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3-1839년 한국
나 베드로(모방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나 베드로, 나백다록, 나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에르, 피터.
나 베드로(모방 베드로) 자료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의 한국 성은 나(羅)이고, 이름은 세례명인 베드로(Petrus)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백다록(伯多祿)이라 하였다. 그는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바시(Vassy)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그날 바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그는 “세상 끝까지 가서 우상을 섬기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는 비르(Vire) 고등학교와 바이외(Bayeux)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29년 5월 13일 사제품을 받았다.
보좌신부로 사목하면서 동양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서한을 읽고 선교사가 될 결심을 굳힌 그는 1831년 11월 18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3월 마카오로 출발했고, 마카오에서 중국 사천(四川) 교구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선교지인 사천으로 가는 도중 조선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1833년 3월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성 모방 베드로 신부의 경건함과 열정적인 면을 좋게 보아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복건성(福建省)과 북경(北京) 등을 거쳐 서만자(西灣子) 교우촌에서 1년간 머무르며 한문과 중국 문화를 공부하였다. 1835년 10월 20일,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내몽골에서 선종한 후 그 소식을 들은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즉시 서만자를 떠나 11월 17일쯤 마가자(馬架子) 교우촌에 도착했다.
이미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그는 주교의 장례를 치른 다음 즉시 마가자를 떠나 당시 주교를 영접하기 위해 국경에 와 있던 조선 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조선 입국을 결정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 성문을 비밀리에 통과해 천신만고 끝에 입국에 성공했는데, 이때가 1836년 1월 13일로 그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가 되었다.
무사히 서울에 도착한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us)의 집에 머물며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우선 한문으로 글을 써서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는 서울에서 시작해 다음으로 경기도와 충청도의 교우촌 16~17개를 방문해 세례를 주고 여러 성사를 집전하였다.
1836년 12월까지 어른 2백 13명에게 세례를 주고, 6백 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또한 가는 곳마다 회장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아 공동으로 기도하고 교리문답과 그날의 복음 성경과 성인 전기들을 읽고 배우도록 지도하였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큰 관심을 두어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 최방제 프란치스코 사베리오(崔方濟, Franciscus Xaverius),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s) 등 세 명의 소년을 선택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게 필요한 덕행을 가르치는 한편, 당시 상황에서 조선 내에서의 신학생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1836년 12월 3일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1837년 1월 성 샤스탕 야고보(Chastan Jacobus) 신부가 무사히 조선에 입국하자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그를 맞이한 뒤 곧바로 경기도 양근(楊根) 땅으로 가서 조선말을 배우며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해 부활 대축일을 양근에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와 함께 보낸 그는 남쪽 지방으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북쪽 지방으로 가서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지나친 활동으로 몸이 쇠약해진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1837년 7월 심한 열병에 걸려 서울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는 상태가 심각해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에게 종부(병자)성사까지 받았는데, 그 후 차츰 열이 떨어져 3개월 뒤에 건강을 회복하였다.
1837년 12월 말에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Imbert Laurentius) 주교까지 조선에 입국하면서 조선 교회는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커다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1839년 기해년이 시작되면서 조정은 다시금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배교자의 밀고로 세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기해박해가 본격화하자 신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가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고, 주교의 명으로 충청도 홍주(洪州) 교우촌으로 숨어들었던 성 모방 베드로 신부 또한 자수를 권유하는 주교의 편지를 받고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라도의 한 교우촌으로 피신했다가 자수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까지 서울로 압송되면서 세 선교사는 비로소 포도청 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의연하게 신앙을 고백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 배교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형에 처하도록 판결하였다. 처형 장소는 한강 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1839년 9월 21일,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는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포졸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 쪽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선고문을 읽고 칼을 들어 처형하였다.
성 모방 베드로와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 그리고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마지막까지 태연하게 하늘을 향해 기도할 뿐이었다. 그들의 순교로 조선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모두 잃게 되었다. 이때 성 모방 베드로 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와 두 선교사의 시신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20일 뒤 죽음을 각오한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서강대 뒷산)에 매장되었다가 1843년 삼성산(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57-1)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01년 10월 21일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고, 그해 11월 2일 명동대성당에 안치했다가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남경문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南景文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6-1846년 한국
남경문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남 베드로, 남베드로, 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남경문 베드로 자료
성 남경문 베드로(Petrus)는 서울의 중인 계급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1801년의 신유박해 전부터 천주교인이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그에게 신앙을 전해주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20세 때에 병이 들어 대세를 받고서야 입교하게 되었다.
이때 그를 권고한 사람이 박 베드로였기 때문에 자신도 베드로라고 하였다. 처음에 그는 금위영의 병정 노릇을 하다가 후에 조개젓 장사를 하였으며, 스물두 살 때에 허 바르바라(Barbara)와 혼인하였다.
처음에는 교리를 자세히 몰랐으므로 비싼 이자를 받는 돈놀이를 하였으나,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로부터 그런 일은 교회가 금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대금업을 패하고 신부를 따라 공소 방문을 다녔다. 이러한 열성으로 그는 새로 입국한 선교사들로부터 회장에 임명되었다.
기해박해 때에 베드로는 포졸의 손에 잡힐 번하였으나 외교인 형제들의 도움으로 겨우 난을 면하였다. 그러나 박해가 끝난 후 선교 신부와 신자들이 모두 순교하자 혼자 남아 2, 3년 동안 스스로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스스로 지난날을 뉘우치고 다시 열심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친구들에게 “이런 죄를 범하였으니 천국에 가려면 순교를 해야 하네”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그는 매일 아침 해 돋기 전에 일어나 오랫동안 기도하고, 보속하는 뜻으로 추운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지냈다.
남 베드로가 천주교 신자임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1846년의 병오박해가 일어나자마자 포졸들은 그를 쉽게 체포하였는데 포졸들이 그를 끌고 가려고 할 때, 그의 아내가 팔에 매달려 “당신 없이 어떻게 살란 말이오?” 하며 붙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다 틀렸소. 나는 이 이상 더 살 수 없소” 하고 아내를 물리쳤다.
베드로가 포청 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형제 하나가 그를 만나 보러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 음식과 옷을 들여보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옥 안에서 얻어먹는 음식과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내게는 과하니 다른 것을 더 가져올 필요는 없다”고 이르게 하였다.
한번은 문초 중에 허리춤에서 군사의 패를 떼어 포장에게 바치며 “나는 천주께서 창조하신 물건으로 오늘까지 살아 왔고 또 나라에서 쌀도 많이 받아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는 길밖에 없으니 군사의 패를 도로 바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포장이 “네가 배교만 한다면 살려 줄 뿐만 아니라 네 직업도 잃지 않게 해주마.” 하고 약속하였으나 베드로는 듣지 아니하였다. 이에 포장이 명하여 곤장으로 때리는데 어찌나 혹독하게 쳤던지 어깨 위에서 곤장이 부러져나가기까지 하였다.
관리가 신자들을 고발하라고 재촉하자 그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몇 댈 뿐이었다. 형리들은 양 손목을 잡아매어 공중에 매달고 채찍으로 마구 갈겼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이런 매질을 이기지 못하여 숨을 거두니, 때는 1846년 9월 20일이요 나이는 40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남명혁 다미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南明赫 Dam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2-1839년 한국
남명혁 다미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남 다미아노, 남다미아노, 다미아누스, 다미안, 다미앵, 데미안, 데미언.
남명혁 다미아노 자료
성 남명혁 다미아누스(Damianus, 또는 다미아노)는 나라 안에서도 잘 알려진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젊어서는 무질서한 생활을 했고, 온갖 난봉꾼들과 어울려 지냈으며 노름 외에는 생각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30세 때에 천주교를 알고 신자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다가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에게 영세하고 열심을 배가하여 신자의 본분을 지켰다.
그는 많은 외교인 친구들과 교제를 끊고 교리연구에 몰두하여,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열성을 보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때마다 그는 가족은 물론 냉담자들과 외교인들도 마찬가지로 보살펴 주었으니, 병자들을 찾아가 위문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며, 죽을 위험을 앞둔 외교인 어린이들에게 세를 주도록 주선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변한 그를 보고 하루는 친구 한 사람이 웃으면서 “저 세상에서 자네 이름을 무어라 부를 건가?” 하고 물으니, “천주를 위하여 순교한 성교회의 남 다미아누스라고 불러주면 원이 없겠네.” 하여 순교의 뜻을 밝혔던 것이다. 또한 그는 “천국에 가려면 아무래도 미쳐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1839년이 들어서면서부터 박해의 물결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는데, 다미아누스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회장과 같은 날 1839년 4월 7일 저녁에 서울에서 잡혔다. 이틀 전에 그는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고도 자기 집을 집회 장소로 빌려주어 신자들이 모이게 하였으니, 146명이 앵베르 주교께 고해성사를 받고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앵베르 주교는 자기 제의, 경본, 주교관을 다미아누스 집에 맡겨 두었는데 이것마저 압수되어 서양 선교사가 있음이 드러났고, 그는 더욱 모진 형벌을 받았다.
4월 21일 많은 신자들이 출두하였는데 형관은 그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남 다미아누스를 희생물로 골라잡았다. 형관이 “너는 네 집에서 압수된 제의류와 주교관에 대해서 위증을 했다.
그 물건들은 새것인데 어떻게 거의 40년 전에 참수당한 주문모 신부의 것일 수 있느냐?” 하며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게 하고 팔과 갈빗대, 마지막에는 온 몸을 매질하라고 명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의식을 잃었다.
“외국교를 배반하고 너와 네 처자의 목숨을 구하라.”
“제 종교를 외국교라 하시지만 사실은 만대만국의 종교입니다. 저는 이 종교를 알고 봉행한 지 이미 8년째이며 배반할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너는 교우들을 알 터인즉 그들의 집을 대라.”
“천주의 계명 중에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계명이 있으니 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고문을 받은 후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 다른 감방에 있는 자기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세상은 주막집에 지나지 않고 우리의 참된 고향은 천국이오. 천주를 위하여 죽으시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당신을 만나기를 바라오.”
그리고 남 회장은 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런 농담을 했다고 한다.
“나는 약하니까 내 목을 베는 것은 쉽겠지만 자네 목은 그렇게 굵고 튼튼하니까 자네 목을 맡은 희광이는 고생하겠네.”
마침내 5월 24일 금요일 오후 3시, 남명혁은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 순교하니 이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南履灌 Sebast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0-1839년 한국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남 세바스티아노, 남세바스티아노, 세바스띠아노, 세바스띠아누스, 세바스찬, 세바스챤, 세바스티아노, 세바스티아누스.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자료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또는 세바스티아노)는 양반집에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1800년경에 입교하였다. 어머니는 젊어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남필용은 1801년에 고발되어 옥에 갇혔다가 유배지인 강진에서 별세하였다.
당시 20세가량이던 세바스티아누스는 경상도 단성 땅으로 귀양을 가서 그곳의 어느 처녀와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세례성사도 받지 아니하였고, 천주교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고는 매일 저녁 거르지 않고 외우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자녀를 낳기 위하여 첩까지 얻었으나 그것이 중죄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40세에 이르러 병을 앓던 중 어떤 신자의 이야기를 듣고 첩을 멀리하고 성세를 받은 후로는 신자다운 생활을 하였다. 이처럼 교리를 알고 회개한 그는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허송세월한 것을 회복하려고 애썼다.
그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의주까지 가서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모셔 들여 온 다음, 유 신부의 심부름으로 북경에 편지를 쓰기도 하면서 신부 댁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기해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세바스티아누스는 서울을 떠나 경기도 이천 고을에 몸을 숨겼으나 어떤 신자가 포청과 내통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장은 주리를 클게 하며 세바스티아누스에게 배교하라고 명령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확고부동하였다. 이 이튿날 의금부에 이송되어 문초를 세 번 당하는 동안 다리에 곤장을 수없이 맞았고 참수의 선고를 받았다.
남 세바스티아누스는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에 여자 옥의 옥리를 불러 자기와 같이 붙잡혀 아직 옥에 남아 고생하고 있는 아내에게 “우리는 같은 날 죽기로 언약했는데 천주께서 달리 안배하시니 적어도 둘이 다 같은 일을 위하여 죽도록 하자. 천당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일러 보냈다.
그 후 세바스티아누스는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여 순교하니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남종삼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南鍾三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승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7-1866년 한국
남종삼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남 요한, 남요한,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남종삼 요한 자료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Joannes)은 1817년(순조 17년) 남탄교(南坦敎)의 아들로 충주(忠州)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에 큰아버지인 남상교 아우구스티노(南尙敎, Augustinus)의 양자로 들어갔다. 남상교는 정약용 요한(丁若鏞, Joannes)의 학통을 이은 농학자(農學者)로 충주 목사와 돈녕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그는 일찍부터 서학서(西學書)를 접하면서 진리를 깨달아 입교했는데, 관직이 신앙생활에 방해되자 이를 포기하고 산골 마을인 묘재(山尺, 현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로 거처를 옮겨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성 남종삼 요한은 22살 때인 1838년(헌종 4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 교리(校理), 영해 현감(寧海 顯監) 등을 거쳐 철종 때에 승정원(承政院)의 승지(承旨, 正三品)까지 올랐고, 고종 초에는 학덕을 인정받아 왕실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그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부친의 영향이 컸겠으나 무엇보다도 학자인 그 자신이 서학서를 가까이하며 학문을 통해 신앙을 크게 꽃피웠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그가 지은 천주가사(天主歌詞)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고, 만일 신앙생활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 관직에서 물러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직과 신앙생활을 병행하던 성 남종삼 요한은 나라의 공식 예절이 있을 때마다 조상 숭배행위에 참여해야 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쉽게 관직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가문의 생계를 꾸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속의 관직 때문에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성사까지 막힌 경우가 있었으나, 방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 신부와의 두터운 교분으로 그의 신앙생활은 크게 진보하였다. 그래서 그가 영해 현감으로 있을 때,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는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방의 관리가 향교(鄕校)의 제사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말썽이 생기자 즉시 사표를 낼 정도로 신앙이 깊었다. 관료 생활과 신앙생활을 병행하고자 했던 그는 철종 때에 다시 승지가 되었고, 고종 초에는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1864년(고종 원년) 이후 자주 러시아 선박이 함경도 국경을 넘나들며 통상을 강요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고종의 부친으로 조선의 실질적인 집권자였던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때 조선의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조선에 잠입해 비밀리에 선교 활동 중이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1865년 말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Thomas)와 이유일 안토니오(李惟一, Antonius) 등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건의하였다. 대원군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 성 남종삼은 홍봉주 등과 뜻을 같이하여 다시금 방아책을 건의하였다.
프랑스 주교들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 열강들과 조선이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고, 조선도 문호를 개방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천주교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결국 대원군도 그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에서 활동 중인 프랑스 선교사들과 만나 논의하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성 남종삼과 동료들은 이 소식을 즉시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과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주교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방 순회 중인 주교들의 거처 확인과 연락이 어려워 시간이 지체되었다. 1866년 1월 소식을 전해 들은 성 다블뤼 안토니오와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급하게 상경했을 때는 이미 러시아인들이 물러가면서 러시아의 침략 위험이 저절로 사라진 때라 대원군의 마음도 바뀐 뒤였다.
게다가 반대파 대신들의 정치적 공세와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가 확산하고 있다는 와전된 소식 등이 전해지면서 대원군의 태도가 돌변하였다. 그는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강화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통해 정치적 문제를 풀어가고자 했다. 그래서 1866년 정월(음력)을 기해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사형선고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선포하면서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었다.
박해가 시작되기 전에 대원군으로부터 낙향을 권유받은 성 남종삼 요한은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를 방문한 다음 관직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고자 묘재에 은거해 있던 부친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부친으로부터 “네가 충성스러운 신하의 도리는 다했다만 그 때문에 분명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너더러 네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게 하거든 성교(聖敎)에 대해 욕된 표현은 일체 지우는 것을 잊지 말라.”는 준엄한 가르침과 격려를 받고 순교를 각오한 그는 다시 상경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이웃해 있는 배론(舟論)의 신학당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받고 서울로 향했다. 그 무렵 이미 박해가 시작되었고 그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고양군(高陽郡)에서 피신하려 했으나 3월 1일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바로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당시 의금부에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홍봉주 토마스를 비롯해 여러 선교사와 신자들이 투옥되어 있었다. 성 남종삼 요한이 체포된 이후 함께 국문하라는 지시에 따라 다음날부터 국청(鞫廳)이 개설되었다. 성 남종삼은 조정의 대신들로부터 6회에 걸친 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앙을 지켰을 뿐 아니라 천주교가 정도(正道)라는 호교론을 펴나갔다. 그는 천주교는 하느님을 섬기고 충(忠)과 효(孝)를 다하는 학문이기에 배교란 있을 수 없다며 자신에게 내려진 사학도(邪學徒)의 우두머리요 외세와 내통한 흉악한 계책을 꾸몄다는 죄목에 대해 당당히 자기 뜻을 밝혔다.
결국 그는 모반부도(謀叛不道)의 죄목으로 참수형의 선고를 받고, 1866년 3월 7일(음력 1월 21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동료인 홍봉주 토마스와 함께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순교 후 성 남종삼 요한의 시신은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5월 28일 성 최형(崔炯) 베드로의 유해와 함께 발굴되어 명동 주교관으로 옮겼다가 6월 17일 명동 성당 지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968년 시복식을 계기로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해실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의령(宜寧) 남씨 가족 묘소인 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다. 그가 순교한 후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어 순교하거나 유배형을 당했다. 부친 남상교는 공주로 압송된 후 순교하였고, 장자인 남명희(南明熙)는 전주 진영으로 끌려가 전주천의 초록바위에서 순교하였다.
부인 이조이 필로메나(李召史, Philomena) 또한 유배지인 창녕에서 치명하였고, 함께 경상도 지역 유배지로 간 막내아들 남규희와 두 딸은 노비 생활을 하며 고초를 겪었다. 이렇게 성 남종삼 요한의 가문에서 3대에 걸쳐 4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도리메돈
- 가톨릭 성인 이름
Dorymed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원로원 의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
도리메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도리메돈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19일 목록에서 프로부스(Probus, 276~282년 재위) 황제 때 순교한 성 트로피무스(Trophimus)와 성 사바티우스(Sabbatius) 그리고 성 도리메돈(또는 Dorimedon)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성 사바티우스는 아티쿠스 총독의 명령에 따라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 오늘날 튀르키예의 안타키아 Antakya)에서 죽을 때까지 채찍을 맞고 순교하였다.
성 트로피무스는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한 고대 소아시아 중서부 프리지아(Phrygia) 지방 신나다(Synnada)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로마 원로원 의원인 성 도리메돈과 함께 많은 고통을 겪은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성 트로피무스와 성 사바티우스가 안티오키아에 왔다가 이교의 신상 앞에 분향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당당히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했다고 한다. 성 사바티우스는 안티오키아에서 순교했지만, 성 트로피무스는 신나다로 이송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원로원 의원이자 그리스도인인 성 도리메돈이 찾아와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위로해주었다. 신나다의 관리들은 그들에게 이교의 축제 중에 신상 앞에 희생 제사를 올리도록 강요했으나 끝까지 거부하자 그들을 고문하고 맹수에게 던져버렸다. 그러나 맹수들이 그들을 해치지 않자 결국 참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19일 목록에서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한 프리기아 지방 신나다에서 성 트로피무스 순교자를 기념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9월 20일 목록에서 같은 도시에서 성 도리메돈 순교자를 기념하고 있다고 간단히 전해주었다. 그런데 성 사바티우스 순교자에 대해서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디오니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디오니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자료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와 성 프리바투스(Privatus)는 소아시아 중부 프리지아(Phrygia)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의 순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민 루카(위앵 루카)
- 가톨릭 성인 이름
閔 Luke(Huin Luk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6-1866년 한국
민 루카(위앵 루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민 루카, 민루카.
민 루카(위앵 루카) 자료
성 마르티노 루카 위앵(Martin Luc Huin) 신부의 세례명은 마르티노 루카(Martinus Lucas)이고, 한국 성은 민(閔)이다. 그는 1836년 10월 20일 프랑스 북동부 랑그르(Langres) 교구의 기용벨(Guyonvelle)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포도밭을 경작하던 그의 부모는 늘 자기 가문에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자랑하면서 9남매 모두 훌륭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도록 교육했다.
막내로 태어나 신앙적인 환경에서 자란 성 위앵 루카는 1851년 본당신부의 추천으로 랑그르 소신학교에 입학해 부지런히 공부한 후 1856년 10월에 랑그르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861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아 랑그르 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수품 후 그는 2년 동안 멜레(Melay)와 부아제(Voisey)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활동하면서도 전교 사제의 꿈을 키우다가 1863년 8월 20일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받고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자신의 선교지가 조선임을 알았을 때, 그는 기뻐하며 부모님은 물론 옛 본당신부에게도 편지를 썼다고 한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1864년 7월 15일에 함께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Ranfer de Bretenieres Justus) · 성 도리 헨리코(Dorie Henricus) · 성 볼리외 루도비코(Beaulieu Ludovicus) 신부와 함께 파리(Paris)를 떠나 마르세유(Marseille)에서 상선을 타고 극동으로 향해 9월 중순 무렵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상해(上海)를 거쳐 11월에 요동(遼東)의 차쿠에 도착해 한문 공부를 하며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인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의 연락을 기다렸다. 이윽고 1865년 4월 17일 차쿠를 출발한 성 위앵 루카 신부와 동료들은 백령도 인근에서 주교가 보낸 배로 갈아타고 5월 27일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조선 땅을 밟았다.
마침 내포에 와 있던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주교의 환영을 받은 성 위앵 루카 신부 일행은 주교의 지시를 받아 서울과 경기도로 떠났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6월 18일까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함께 내포 지방에 머물며 조선말을 공부했다.
그러고 나서 당진 합덕 지방의 세거리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초가집에 거처하며 조선의 풍습에 적응하고자 노력하고 한문과 조선말 공부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성 위앵 루카 신부는 1866년 2월에 벌써 교우들의 고해성사를 듣고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수가 있었다.
그는 박해 직전까지 5백여 명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15명에서 20명에게 병자성사를 주었을 뿐 아니라 몇몇 교우의 혼인성사도 집전해 주었다. 1866년 초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자 그는 3월 9일에 거더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로 가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성 오매트르 베드로(Aumaitre Petrus) 신부를 만나 하루를 보내고 세거리로 돌아왔다.
신자들의 권유로 거처를 옮기던 중 3월 11일 거더리에서 체포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편지를 받고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날 주교의 뜻대로 자수하여 거더리로 끌려왔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도 거더리로 와서 자수하였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함께 체포된 주교와 동료 신부와 함께 홍주 관아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갇혔다. 3월 19일 포도청에서 두 차례의 신문을 받은 그는 3월 23일에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지인 충청남도 보령 수영(保寧水營)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국혼(國婚)이 가까운 시기라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 나쁜 징조라 하여 멀리 떨어진 보령 수영으로 처형지를 정했다. 그래서 성 위앵 루카 신부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 ·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Lucas) · 성 장주기 요셉(張周基, Josephus)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
그리고 마침내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처형장인 갈매못(현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내 마음에 아픈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토록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도 아니요, 이곳과 같은 처절한 장소에서 죽게 된 때문만도 아니라, 이 나라 불쌍한 백성들의 구령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게 되니 그것만이 마음 아플 뿐이오.”
성 위앵 루카 신부를 포함해 갈매못에서 순교한 5위의 순교자 중에서 성 황석두 루카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홍산 삽티(현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를 거쳐 고향인 연풍 병방골(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 이장했고, 1982년 연풍 순교성지로 천묘(遷墓)하였다.
나머지 4위 순교자들의 시신은 사흘 뒤에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형장 부근에 묻혔다가 6월 초 몇몇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서짓골(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에 매장하였다.
그 후 1882년 3월 제7대 조선 교구장인 블랑(Blanc, 白)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 대교구의 오우라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2년 만인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민극가 스테파노
- 가톨릭 성인 이름
閔克可 Stephe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7-1840년 한국
민극가 스테파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민 스테파노, 민스테파노,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민극가 스테파노 자료
성 민극가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는 인천의 어느 외교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굳고도 온화한 성격과 바르고도 냉정한 판단력을 소유했던 그는 아주 어릴 때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그 뒤 아버지와 형들과 함께 천주교에 들어와서 계명을 철저히 지켰다.
20세에 이르러 어느 교우 여자와 결혼하였으나 곧 상처하였다. 재혼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부모 형제들의 강요에 못 이겨 재혼하였지만, 딸 하나를 두고 아내가 세상을 떴으며 그 딸 역시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그때부터 스테파누스는 이리저리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격려하거나 가르치는 한편, 비신자들에게 전교하여 많은 사람을 입교시켰다.
또한 그는 종교서적을 베껴주고 받은 돈을 자기 생활비와 남을 돕는 일에 사용하니, 신부들은 그의 열성과 박애심을 높이 평가하여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이 직책을 훌륭히 수행하였으며 또 말과 모범으로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거의 끝날 무렵에 민 회장은 어느 배교자의 밀고에 따라 체포되었다. 포장이 “이 교를 버리겠다고 하면 즉시 놓아주마.” 하자 그는 “만약에 나를 놓아주면 다시 내 종교를 준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교하여 회두시키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포장은 성이 나서 치도곤을 매우 치게 하면서 “이 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니 사정없이 쳐라”고 소리질렀다. 이리하여 그는 치도곤 40대를 맞았다.
옥중에서도 스테파누스는 형벌로 인한 상처를 못 이겨 신음하면서도 배교자를 꾸짖고, 목숨을 아까워하여 가족을 걱정하는 신자들을 격려하며 그 결심이 흔들리지 않게 권면하였는데, 그의 노력이 눈에 띄게 효과를 내어 약한 신자 여러 사람이 배교를 철회하고 통회하였다고 한다.
이 이튿날도 그는 곤장 40대를 맞았지만 처음과 같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민 스테파누스는 옥에 갇힌 지 5, 6일 후인 1840년 1월 30일에 교수형을 받음으로써 순교하니, 이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朴宗源 Augustin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3-1840년 한국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박 아우구스티노, 박아우구스티노, 아오스딩, 아우구스티노,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자료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서울에 살던 중인 계급의 신자 집에서 태어났으며 ‘이선’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친절하였으며, 학문에도 뛰어나고 박학하였으므로 주변의 칭찬을 들으며 자랐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극빈한 가운데서 살았으나 자신의 처지를 불평 없이 참아 받았고, 어머니께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교회의 계명도 충실히 지켜나갔다고 한다.
나이가 들자 그는 순교자의 딸인 고순이 바르바라(Barbara)를 아내로 맞이하여 열심한 신앙생활로 모범 가정을 이루는 한편, 그의 박애심과 교리 지식을 활용하여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데 전심하였다.
그는 가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불쌍한 죄인인 나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죽으셨으니, 나도 그분을 위하여 괴로움을 받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순교하려는 뜻을 마음에 새겼다.
또 그는 신자들 중에서 무슨 악습이나 부당한 일이나 중대한 과실을 발견하면 상냥한 말로 그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감동할 만큼 사랑으로 권고했기 때문에 그의 충고에 거역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그의 온화함이 널리 알려져 신자들은 웃으며 “대관절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을 내는 것을 언제 보게 될까?” 하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덕과 재능을 즉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에게 알려졌다. 따라서 주교는 그를 서울의 회장직에 임명하였고, 그는 이 위험한 직책을 열성적으로 수행하여 그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포청에서는 그를 첫 번째 체포 대상자로 지목했음으로 그는 자기 집을 떠나 친구의 집에 피신하였으나, 회장의 직분을 다하려는 마음에서 밤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찾아보고 그들을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8개월을 지내던 중 마침내 10월 26일에 아내와 함께 체포되었다.
형조판서는 부부를 함께 심문하며 여섯 차례나 계속하여 잔인하게 고문하여 그들의 팔 다리를 못 쓰게 만들었다. 10일 후에 형조로 끌려간 그는 다리에 매를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갔으나 그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의 죄목은 “천당과 지옥을 마치 확실한 사실같이 말하고, 제사는 헛된 예식이라 하여 저버렸으며, 천주를 충심으로 믿고 공경하여 차라리 죽을지언정 마음을 돌리지 않은 죄”였다.
그는 1840년 1월 31일, 서울에 있는 당고개에서 참수를 당하여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박후재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朴厚載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상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9-1839년 한국
박후재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박 요한, 박요한,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박후재 요한 자료
성 박후재 요한(Joannes)은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는데, 1801년에 순교한 박 라우렌티우스(Laurentius)의 아들이다. 친척이 없어 외로웠던 그는 부친이 순교한 이후에는 서울로 올라와서 어머니와 함께 물장사도 하고 또 짚신장사를 해서 생계를 이어 갔다. 비록 가난한 생활을 하였으나 그는 마음은 대단히 곧았을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신자의 모든 본분을 열심히 지킴으로써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는 후일 그에 대하여 감격적인 증언을 하였다.
“그이는 평상시에 대단한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켰고, 매우 부지런히 일을 하였으며, 내 영혼을 구하려면 치명을 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순교에 대한 열망에 차 있었다.”
또한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극기하는 한 방편으로 짚신을 만들 때 쓰는 방망이로 정강이를 쳤으며, 영혼을 구하기 위해 육신의 곤궁을 어떻게 참아야 하는가를 성인 이야기를 통해 아내에게도 권고하였다고 한다.
기해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박 요한은 아내에게 “교우들이 많이 붙잡혔으니 더욱더 조심합시다.” 하고 말하고, 질그릇을 40푼에 팔아 20푼은 아내에게 주어 그날 저녁으로 아내를 아주머니 집으로 먼저 보냈다.
아주머니 집으로 간 부인은 이튿날이 되도록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무슨 일을 당하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에 사촌 오빠에게 청하여 탐문해 보니, 전날 밤 포졸들이 박 요한을 이미 잡아가고 없었다고 한다.
옥중에서 그는 수차례의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임금님이 이 교를 허락하시지 않는데 너는 임금님의 명령을 어기고 있다”라고 재판관이 말하자 그는 “천주는 저의 창조주시고, 당신을 사랑하시기를 명하십니다. 저는 임금님께보다도 천주께 더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저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천주님을 배반하기보다 차라리 저의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공범자를 대라”는 포장의 말에는 “남을 해하는 일은 하지 못 하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았는데, 희광이가 그의 목을 여러 번 내리쳤으나 완전히 베지 못하자 칼을 돌에 대고 오랫동안 가는 동안 그의 몸은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런 후 희광이가 다시 그의 목을 쳐서 땅에 떨어뜨리니 그의 순교 열망은 성취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백 유스토(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 가톨릭 성인 이름
白 Ranfer de Bretenieres Jus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8-1866년 한국
백 유스토(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브르뜨니에르, 유스또, 유스뚜스, 유스투스.
백 유스토(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자료
성 시몽 마리 앙트완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Bretenieres) 신부의 세례명은 유스토이고 한국 성은 백(白)이다. 그는 1838년 2월 28일 프랑스 중동부 디종(Dijon) 교구에 속한 샬롱쉬르손(Chalon-sur-Saone)에서 브르트니에르(Edmond de Bretenieres) 남작과 안나(Anna de Montcoy)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이 이미 8년 반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태어나자마자 장남이 되었다.
그의 집안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의 유명한 법관 가문이었지만, 그는 성장하면서 현세의 명성이나 재산, 가문을 이어받으려는 생각보다는 성직을 통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앞섰다. 그의 부모 또한 매우 신심 깊은 신자였기에 최선을 다해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뒷바라지했다.
그는 21살이 되던 1859년에 파리(Paris) 근교에 있는 성 쉴피스(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면서 점점 외방 선교에 관심을 두게 되어 1861년 7월 25일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로 편입하였다.
그는 3년 뒤인 1864년 5월 21일 동료인 성 볼리외 루도비코(Beaulieu Ludovicus, 徐) · 성 도리 헨리코(Dorie Henricus, 金) 등과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첫 미사를 봉헌하면서 순교의 특은을 기도했던 그는 수품 즉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자 “이 나라가 바로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함께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성 볼리외 루도비코 · 성 도리 헨리코 · 성 위앵 루카(Huin Lucas, 閔) 신부 등과 같이 1864년 7월 15일 파리를 떠나 마르세유(Marseille)에서 상선을 타고 극동으로 향해 9월 중순 무렵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상해(上海)를 거쳐 11월에 요동(遼東)의 차쿠에 도착해 한문 공부를 하며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인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의 연락을 기다렸다.
이윽고 1865년 4월 17일 차쿠를 출발한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와 동료들은 백령도 인근에서 주교가 보낸 배로 갈아타고 5월 27일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조선 땅을 밟았다.
그들은 서울에 있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연락할 방도를 찾던 중, 마침 집에 화재가 발생해 내포 지방에 피신해 있던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安) 주교를 만나 그의 지시를 받고 상경하였다.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는 태평동(太平洞)에 있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댁에 머무르다가 7월에 동료들과 헤어져 남대문 밖에 있는 성 정의배 마르코(丁義培, Marcus) 회장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조선말과 풍속을 배운 그는 다른 동료들보다 조선말 공부가 빨라 1866년 1월과 2월에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의 전교 활동을 도우며 80명의 신자로부터 고해성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1866년 초에 뜻하지 않은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 더는 성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2월 23일에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는 즉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다른 동료들에게 인편을 통해 이 소식을 알리고, 다음날 체포될 각오를 하고 신발을 신은 채 마지막 미사를 올렸다.
마침내 2월 25일 아침에 포졸들이 들이닥쳐 먼저 성 정의배 마르코 회장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26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의 하인이었던 이선이(李先伊)의 고발과 안내로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도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세 차례, 그리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두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는 동료 사제들의 거처나 신자들을 밀고하지 않고 “나는 조선 사람인 여러분의 영혼을 구해주려고 왔으므로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겠소.”라고 고백하였다. 대
원군은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에게 별다른 문초나 심문을 하지 않은 채 그냥 형벌을 가하게 하였다.
3월 5일 문초에서 관리들은 그에게 “차마 죽일 수 없어 본국에 돌려보내 주려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와서 해를 넘겼습니다. 이 나라 풍습에 익어 이곳에서 여생을 즐기려 하는데 어찌 돌아갈 마음이 있겠습니까? 생사에 구애를 받아 변심하지 않으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결국 그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같은 날인 1866년 3월 6일 사형선고를 받고, 이튿날인 3월 7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성 볼리외 루도비코 · 성 도리 헨리코 신부 등과 함께 사형 집행 장소인 새남터로 향했다.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처형장인 새남터에 도착한 그들은 귀에 화살을 꽂고 조리돌리는 등의 형벌을 받으며 사형 절차를 기다렸다.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가 심한 갈증에 물을 청하자 동정심 많은 한 포졸이 물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다른 포졸 하나가 “곧 죽여야 할 죄인에게 물을 주어서 무엇 하겠는가?” 하며 그 물을 땅바닥에 쏟아버렸다.
마지막으로 그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프랑스어로 마지막 대화를 나눈 다음 주교의 참수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 후 자기 차례가 되어 네다섯 번 내리친 칼날에 참수되어 신부가 되면서부터 갈망해오던 순교의 특은을 입었다. 이때가 1866년 3월 7일이고,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와 함께 순교한 주교와 신부들 그리고 3월 11일 같은 장소에서 순교한 성 우세영 알렉시오(禹世英, Alexius) 등의 시신은 형장에 방치되었다가 2개월 후인 5월 12일 박순지 요한(朴順之, Joannes) 등에 의해 발굴되어 새남터 인근에 잠시 묻혔다가 5월 27일 와서(瓦署, 왜고개,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로 옮겨 안장되었다.
용감한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정성껏 장례 지내고 와서에 모신 것이다. 그 뒤 이들 순교자의 유해는 1899년 10월 30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9월 명동 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 그런데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의 유해 일부는 가족들의 요청으로 1911년 프랑스로 옮겨져 그해 11월 9일 가족묘에 안장되었다.
그 뒤 명동에 모셨던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와 순교성인들의 유해는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라우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范 Lawrence(Imbert Lawrenc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6-1839년 한국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라우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범 라우렌시오, 범라우렌시오, 범세형.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라우렌시오) 자료
성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 주교의 세례명은 라우렌시오(Laurentius)이며,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이다. 그는 1796년 3월 23 프랑스 남부 엑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Cabries)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조차 없었는데,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알파벳을 배우고 카브리에 본당 신부의 도움을 받아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공부뿐만 아니라 기도에도 열심이었다. 틈틈이 묵주를 만들어 팔아 생활하며 연로한 아버지의 생활도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었다.
이렇듯 어려운 시절을 꿋꿋하게 견뎌낸 그는 1812년 엑스 교구의 대신학교에 진학해 사제의 길을 준비했다. 대신학교 때부터 그는 선교사가 되어 동방의 선교 지방으로 가려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818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819년 12월 18일에 성품성사를 받고 곧 중국의 사천(四川)으로 파견되었다.
그 후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신부는 10여 년간 사천 대목구에서 선교 사제로 활동했다. 그는 중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며 모든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던 중 1836년 4월 조선의 제1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
실제로 그 이듬해에 임명 소식과 함께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1835년 10월) 소식을 들은 그는 1837년 5월 14일 사천 대목구장 퐁타나 주교에 의해 제2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성성되었다. 그리고 사천을 떠나 10월경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했고, 다시 북경과 산해관을 경유해서 12월에 국경지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조선 사신단의 수행원으로 동행한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us)와 성 조신철 가롤로(趙信喆, Carolus) 등을 만나 그들의 도움을 받아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일행은 1837년 12월 31일 서울에 도착했는데, 이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처음으로 주교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는 조선 교회가 창설된 지 53년 만의 일이었다. 불과 3개월 정도 조선말을 배운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조선말로 고해성사를 줄 수 있었고, 어려운 한자를 잘 모르는 신자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1838년경에는 우리말 기도서를 완성했다.
그는 또한 이미 조선에 와 있던 성 모방 베드로(Manbant Petrus) 신부와 성 샤스탕 야고보(Chastan Jacobus) 신부와 함께 지방을 순회하며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교회는 오랜 환난을 겪은 후 주교를 맞으면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무를 수행해 1년 남짓한 활동 기간 중에 수천 명의 신자가 증가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그는 허약하고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매우 바쁜 사목활동을 전개하며 그 안에서 최고의 행복을 찾았다. 다만 그에게 무한히 괴로운 것은 박해로 말미암아 신입교우들의 신앙이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자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박해가 본격화되기 전에 더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기 위해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그러는 동안 사태는 점점 위태롭게 돌아갔고, 배교자의 밀고로 주교의 거처와 세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배교자 김순성(일명 김여상)은 관헌들과 짜고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를 유인하려 했으나, 그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다른 신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1839년 8월 11일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다른 두 명의 신부들도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즉시 관청에 자수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 선교사는 포도청 옥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여러 번의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당하면서 두 신부와 함께 모든 고초를 이겨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 배교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형에 처하도록 판결하였다. 처형 장소는 한강 변의 새남터로 결정되었다.
1839년 9월 21일,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는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포졸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 쪽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선고문을 읽고 칼을 들어 처형하였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와 두 신부는 마지막까지 태연하게 하늘을 향해 기도할 뿐이었다. 그들의 순교로 조선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모두 잃게 되었다. 이때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의 나이는 43세였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와 두 신부의 시신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20일 뒤 죽음을 각오한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서강대 뒷산)에 매장되었다가 1843년 삼성산(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57-1)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01년 10월 21일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고, 그해 11월 2일 명동대성당에 안치했다가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빈첸시오 마델가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Vincent Madelg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615-687년경
빈첸시오 마델가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뱅상, 빈센트,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원선시오.
빈첸시오 마델가리오 자료
성 빈첸시오 마델가리우스(Vincentius Madelgarius)는 성녀 발데트루디스(Waldetrudis, 4월 9일)의 남편으로서 4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들도 모두 성인 성녀로 공경을 받고 있다.
653년 그의 아내인 성녀 발데트루디스는 수녀원으로 가고, 그 자신은 베네딕토 회원이 되면서 빈첸시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외의 그의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서 루도비코(볼리외 루도비코)
- 가톨릭 성인 이름
徐 Louis(Beaulieu Loui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0-1866년 한국
서 루도비코(볼리외 루도비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서루도비코, 서몰례.
서 루도비코(볼리외 루도비코) 자료
성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Bernard-Louis Beaulieu) 신부의 세례명은 베르나르도(Bernardus)이고, 한국명은 서몰례(徐沒禮)이다. 그는 1840년 10월 8일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Bordeaux) 교구의 랑공(Langon)에서 베르나르와 마리 데지레(Marie-Desiree)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결혼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머니는 유복자인 아들을 낳자마자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신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성장한 성 볼리외 루도비코(Beaulieu Ludovicus)는 여섯 살 되던 해에 공민학교에 들어갔고, 일곱 살에 복사를 시작했고, 아홉 살이 되던 1849년 10월에 고향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에 성 볼리외 루도비코는 중국 사천성(四川省)에서 전교한 경험이 있는 한 선교사 신부로부터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동양 전교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1857년 보르도 대신학교에 입학해서 사제직을 준비하던 중 이듬해에 어머니를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대신학교에서 5년간 수학하여 부제품을 받은 그는 계속해서 동양 전교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었으나 보르도 교구장의 허락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어렵게 허락을 받은 그는 1863년 8월 28일에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이듬해 5월 21일 동료인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Ranfer de Bretenieres Justus, 白) · 성 도리 헨리코(Dorie Henricus, 金) 등과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후 즉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함께 임명된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 성 도리 헨리코 · 성 위앵 루카(Huin Lucas, 閔) 신부 등과 함께 1864년 7월 15일 파리(Paris)를 출발해 마르세유(Marseille)에서 상선을 타고 극동으로 향해 9월 중순 무렵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상해(上海)를 거쳐 11월에 요동(遼東)의 차쿠에 도착해 한문 공부를 하며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인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의 연락을 기다렸다.
이윽고 1865년 4월 17일 차쿠를 출발한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와 동료들은 백령도 인근에서 주교가 보낸 배로 갈아타고 5월 27일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조선 땅을 밟았다. 그들은 마침 내포 지방에 와 있던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安) 주교를 만나 그의 지시를 받고 상경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태평동(太平洞)에 있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 댁에서 잠시 머무른 후 주교의 명에 따라 6월에 뫼논리(현 경기도 성남시 운중동의 山畓里) 교우촌으로 가서 그곳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면서 조선말을 배웠다.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준비하던 그는 입교한 지 얼마 안 된 장제철이라는 교우 집에서 조선말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때 그의 동료인 성 도리 헨리코 신부가 이웃인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蓀谷) 교우촌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주 연락을 취하며 서로 의지하였다.
한편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잘 전교할 수 있는 지방에 오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라고 행복하게 말했으며, 고해성사를 들을 정도로 조선말에도 능숙해졌다.
어느 정도 조선말 공부를 마친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1866년 2월 12일 상경하여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로부터 새 임지로 충청도 지방을 부여받았는데, 출발 직전에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 주교가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박해 소식을 들은 신자들로부터 피신을 권유받은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처음에 머물던 장제철의 집을 나와 이 요셉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미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의 하인으로 있던 배교자 이선이(李先伊)가 그와 성 도리 헨리코 신부의 거처를 밀고한 뒤였다.
결국 2월 27일 아침에 장체철을 앞세우고 찾아온 포졸들은 먼저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를 체포하고, 이어서 손골에 있는 성 도리 헨리코 신부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서울로 압송된 후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관헌들이 원하는 교우들 이름이나 정보는 하나도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은 조선에 천주교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왔으며,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본국으로 송환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순교의 뜻을 강력히 피력하였다.
결국 그는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7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동료 선교사인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와 성 도리 헨리코 신부 등과 함께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이날 순교한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와 주교와 동료 신부들의 시신은 다른 순교자의 시신과 함께 형장에 방치되었다가 2개월 후인 5월 12일 박순지 요한(朴順之, Joannes) 등에 의해 발굴되어 새남터 인근에 잠시 묻혔다가 5월 27일 와서(瓦署, 왜고개,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로 옮겨 안장되었다.
용감한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정성껏 장례 지내고 와서에 모신 것이다. 그 뒤 이들 순교자의 유해는 1899년 10월 30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9월 5일 명동 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가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손선지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孫--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0-1866년 한국
손선지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로, 베드루스, 손 베드로, 손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손선지 베드로 자료
성 손선지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임천 지방의 고인돌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남달리 신앙과 품행이 뛰어났다. 어른이 되자 샤스탕(Chastan, 鄭) 신부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던 그는 인자한 가장으로서 자녀 교육에 힘쓰며 사소한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아 모범적인 신자 가정을 이루었다. 그가 거처하던 집은 마을의 공소였기 때문에 더욱 세심한 주의와 노력으로 언제나 신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았다.
그가 47세가 되던 1866년 추수기에 접어들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좀 완화되는 듯 하다가 얼마 후 더욱 혹심한 박해로 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의 공소 예절에서 그는 신자들을 보고 “곡식이 익으면 바람결에 날리어 땅에 떨어지는 법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가올 박해에 나 같은 사람도 당신 곳간에 가두시려는 모양이군요.” 하며 자기는 순교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무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피신하라고 당부하였다.
그해 12월 3일 저녁 그는 가족과 함께 기도를 하고 있는데 집 밖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자, 즉시 상황을 알아차리고서 재빨리 가족들에게 피하라고 말한 뒤에 자신이 교우임을 자백하여 순순히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그를 구진포리 주막까지 데리고 가 먼저 이곳에 붙잡아 온 다른 신자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하였다. 그 사이 손 베드로의 어머니는 마을 원님을 찾아가 아들을 좀 구해달라고 애걸하였다.
또 손 베드로의 아들이 감영에 수시로 드나들며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아들의 효심에는 감동하였으나 크게 꾸짖고는 “나에게는 큰 유혹이 된다. 내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런 짓을 다시는 하지 말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감영에 오지 말라”고 하면서 일을 중지시켰다.
다음날 그는 전주 감사 앞으로 압송되었다. 그가 전교회장이라는 것을 알고 고문과 주리를 잔인하게 가하다 못해 그의 팔까지 부러뜨렸다. 그가 처형장으로 나설 때 남아서 기다리는 다른 신자에게 자기 옷을 주면서 “나는 이제 죽으러 가오. 이 옷은 더 이상 내게 소용이 없으니 이 옷을 입으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사형장에 도착한 그는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부르고 기도했는데, 희광이가 칼로 그의 어깨를 내려치자 그는 머리를 쳐들고 “장난하지 마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전주 숲정이에서 1866년 12월 13일에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1. 손자선 토마스
- 가톨릭 성인 이름
孫-- Thom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농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6년 한국
손자선 토마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마, 손 토마스, 손토마스, 토마스, 토머스.
손자선 토마스 자료
성 손자선 토마스는 충청도 덕산군 홍주면 신리 마을 거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3대째 천주교를 믿는 열심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과 아버지는 1868년에 순교하였고, 그의 당숙 손 니콜라우스(Nicolaus)도 순교하였다.
본래 부지런하면서도 성품이 침착한 그는 나무랄 데 없이 신심이 두텁고 명성이 높았으며, 자기 부인과 함께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을 만큼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전교했고, 순교 자료를 모아 성직자들에게 전하였으며, 그의 집에서 모든 공소 예절을 하였다.
1866년 드디어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포졸들이 손 토마스가 살고 있는 거더리 마을에 들어와 신자 집을 샅샅이 뒤져 많은 물건을 빼앗아 가면서, “손씨 집안에서 누구든 사람을 보내 몰수된 물건을 찾아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고 용감한 손 토마스가 자진하여 덕산 관가에 나가서 찾아온 사유를 밝혔다. 이 때 원님이 그에게 천주교인인지 묻자, 그는 자기가 천주교 신자임을 밝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관가에서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고, 곤장을 치다 못해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토마스의 입에 여러 가지 쓰레기를 쏟아 부으면서 그때마다 “야, 좋지” 하고 놀려댔다. 손 토마스가 “좋습니다.”라고 응수하자 “그래 무엇이 좋단 말이냐?” 하고 되물었다.
이때 손 토마스는 “나는 오늘까지 며칠을 두고 세수를 못했었는데 여러분들이 내 얼굴을 씻어 주고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를 흘리게 한 죄인에게는 이같이 좋은 일이 없으며, 또한 목이 몹시 탔었는데 쓸개와 식초 대신 이런 것들을 내 입에 넣어주니 나는 마치 내가 범한 죄들을 마셔버리는 듯해서 무척 즐겁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덕산 원님은 손 토마스를 해미로 압송하였고 해미에서는 더 심한 형벌이 가해졌다. 두 무릎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 양쪽에서 틀자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졌다. 이 참혹한 형벌에도 태연히 버티는 그의 모습이 더욱 가증스러워 더 고생을 시키기 위해서 공주로 압송하였다.
공주에서 원님은 특수한 수단을 생각하여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써 이빨로 너의 손 살점을 물어뜯어 보아라.”고 하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 이빨로 손등을 물어뜯어 피가 흐르게 하였다. 관헌은 배교한다는 고백을 받기 위해 세 번씩이나 곤장을 쳤으나 그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성 손자선은 1866년 부활 전날인 3월 31일 공주 감영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2. 아가피토
- 가톨릭 성인 이름
Agapi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8년경
아가피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비도, 아가비또, 아가비뚜스, 아가비토, 아가비투스, 아가피투스.
아가피토 자료
불확실한 전설이긴 하지만 그에 따르면 성 에우스타키우스(Eustachius)는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에서 플라키두스(Placidus)라는 이름을 가진 로마의 장군이었다. 그는 로마 근처 티볼리(Tivoli)에서 사냥을 하던 중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잡으려던 수사슴의 뿔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선명한 십자고상이 달려 있었고, 사슴을 통해 “나는 네가 알지는 못하지만 이미 네가 존경하고 있는 그리스도”라고 말을 들었다.
이때 그는 가족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자신의 이름을 에우스타키우스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개종 이후 그의 신앙은 계속되는 시련을 견뎌내야만 했다. 마치 구약성경의 욥(Job)처럼 순식간에 세속적인 부를 잃고, 집과 나라를 떠나야 했으며, 가족들과도 떨어져 살아야 하는 불행한 일들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다시 군대에 소집되어 전쟁에 나가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승전을 기념하는 축하식에서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지내기를 거부해 그와 그의 가족은 처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성 에우스타키우스는 아내인 성녀 테오피스테(Theopistes) 그리고 두 아들인 성 아가피투스(또는 아가피토)와 성 테오피스투스(Theopistus)와 함께 온가족이 황소 모양의 불타는 청동 가마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이들은 서방교회뿐만 아니라 동방교회에서도 예로부터 공경을 받아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3. 아가피토 1세
- 가톨릭 성인 이름
Agapitus 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 활동 연도와 지역
+536년
아가피토 1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비도, 아가비또, 아가비뚜스, 아가비토, 아가비투스, 아가피투스.
아가피토 1세 자료
성 요한과 바오로 성당의 신부였던 고르디아누스(Gordianus)의 아들이며 로마인이었던 성 아가피투스(또는 아가피토)는 로마 교회의 대부제가 되었으며, 535년 5월 13일에 교황 요한 2세(Joannes II)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교황 재위 11개월째인 536년 4월 22일 병에 걸려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선종하였다. 성 아가피투스는 성공한 인물은 못되지만 그리스도 단성설을 주장하던 안티무스(Anthimus)를 제거하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신뢰한 것이 가장 큰 업적이다.
교황의 사망 후 콘스탄티노플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하였고,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같은 해 9월 20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성 아가피투스 1세의 축일은 그의 유해가 안장된 날에 지내는데, 성인이 선종한 4월 22일을 축일로 기념하기도 한다. 동방 교회에서는 4월 17일을 축일로 지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4. 안 안토니오(다블뤼 안토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安 Anthony(Daveluy Anthon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8-1866년 한국
안 안토니오(다블뤼 안토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 안토니오, 안돈이,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안토니오,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 안토니오(다블뤼 안토니오) 자료
성 마리 니콜라 앙토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주교의 세례명은 안토니오(Antonius)이고,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다. 그는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북부 아미앵(Amiens)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 둘도 성직의 길을 걸을 만큼 신앙적으로도 모범적인 가정이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또한 어려서부터 사제직에 뜻을 두어 소신학교를 졸업한 뒤, 1834년 10월 파리(Paris) 교외의 이시(Issy) 신학교에서 입학하여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다. 이어 1836년 10월 파리의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운 다음 1841년 12월 18일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 수품 후 아미앵 교외에 있는 르와(Roye) 본당의 보좌신부로 20개월 동안 사목하다가 신학생 때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전교 신부로서의 뜻을 펼치기 위해 1843년 10월 4일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844년에 극동 선교사로 임명되어, 2월 20일 브레스트(Brest) 항구를 출발해 8월 24일 파리 외방 전교회의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845년 7월에 마침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한 페레올(Ferreol, 高) 주교를 만났다. 페레올 주교는 제3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으로의 입국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는 그의 간청을 받아들여 조선 선교를 지원하게 되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1845년 8월 초에 상해로 갔고, 8월 17일에 금가항(金家巷) 성당에서 거행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s) 부제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塘)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보좌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자기가 갈 선교지인 조선의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의 감동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러고 나서 8월 31일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등과 함께 ‘라파엘호’로 명명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에서 출발해 풍랑을 만나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는 등 어려운 항해 끝에 10월 12일 저녁 8시경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부근 황산포(黃山浦) 또는 인접한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나바위의 후미진 장소에 상륙하였다.
이때부터 성 다블뤼 안토니오는 1866년 3월 30일 순교할 때까지 21년 동안 당시 조선에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고, 아울러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이튿날 그는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교우촌 공동으로 가서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1846년 1월부터 공동 주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며 전교 활동을 시작했고, 점점 더 먼 곳에 있는 신자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846년 9월 16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피신하며 큰 고초를 겪었다. 이때 여러 곳을 옮겨가며 습기 차고 불결한 방에 숨어 살면서 오른쪽 무릎 인대가 늘어나 평생 걷는 데 불편을 감내해야 했고 건강도 많이 나빠졌다.
수리치골(현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 교우촌에 도착한 뒤에는 몇몇 신자들을 모아 신심 단체인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848년 박해가 좀 잠잠해지자 건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전교 활동을 시작했고, 1850년 1월에는 병이 너무 위중해져 사제품을 받고 갓 입국한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자 페레올 주교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에게 건강을 회복될 때까지 전교 활동을 금하고, 그동안 신학생들을 지도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 그는 1857년 3월 25일 서울에서 제4대 조선 교구장이 된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주교로부터 승계권을 가진 보좌주교로 서품되었다. 한편 그는 신학생들을 지도하면서도 틈틈이 교우들이 손쉽게 볼 수 있는 신심 서적 및 교리서를 번역 저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교 요리 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 성교 예규”(天主聖敎禮規), “천당직로”(天堂直路) 등의 번역서라든가,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등의 저서들은 모두 그의 노력에 의한 것들이다.
1856년부터 그는 조선 교회사와 조선 순교사 사료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고,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 등이 해오던 사전 편찬 작업도 이어받았다. 이 사전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 보완 작업을 거쳐 1891년 홍콩에서 “나선소사전”(羅鮮小辭典)이란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특별히 조선 교회사와 순교사의 정리는 그의 두드러진 업적에 속한다. 그는 조선 교회사 편찬을 위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저술하여 모두 1862년 파리 외방 전교회 교장 신부에게 보냄으로써 후대에 귀중한 사료를 남겼다.
나중에 달레(Dallet) 신부는 이 “다블뤼 비망기”를 바탕으로 해서 1874년 “한국 천주교회사”를 편찬 · 간행하였다. 1863년 내포 지방에 있는 주교 댁이 이웃집 화재로 소실되면서 비망기 관련 모든 자료 또한 불타버렸기 때문에 파리로 보낸 비망기는 더욱 소중한 사료가 되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1861년 6월 15일, 조선의 두 번째 사제로 12년 동안 헌신적으로 전교 활동을 펼치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선종하자 그가 활동하던 경상도 남부 지역을 맡아 사목하게 되었다.
1865년부터는 내포 지방에서 전교 활동을 시작했는데, 1866년 초 시작된 병인박해가 더욱 심해지고 급기야는 2월 23일에 성 베르뇌 시메온 교구장 주교가 붙잡혀 3월 7일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승계권을 가진 보좌주교였던 성 다블뤼 안토니오는 교구장직을 계승하여 제5대 조선 교구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교구장 재임 기간은 겨우 23일에 불과했다.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순교하고 4일 뒤인 3월 11일, 그는 거더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서 체포되었고, 이튿날 당시 조선에서 전교 활동 중이던 성 위앵 루카(Huin Lucas) 신부와 성 오매트르 베드로(Aumaitre Petrus) 신부가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수하여 그들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 의금부에 갇힌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신문과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훌륭한 호교론을 펴기도 했다. 결국 그는 군문효수의 사형선고를 받고 함께 체포된 두 신부와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Lucas)와 성 장주기 요셉(張周基, Josephus)과 함께 처형을 위해 충청남도 보령 수영(保寧水營)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죄수복을 입고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죽음의 행진을 하던 도중, 처형 예정 날짜인 3월 30일(그해의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서 처형일이 다소 연기될 기미가 있음을 알고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성금요일에 죽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결국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소원대로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갈매못(현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처형이 시작되자 맨 먼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칼을 받았다.
이때 희광이들이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목을 칼로 한 번 내리친 다음 그대로 버려둔 채 처형의 품삯을 흥정하기 위해 한참 동안 꾸물거리다가 흥정이 결정되자 다시 두 번째 칼을 내리쳤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를 포함해 갈매못에서 순교한 5위의 순교자 중에서 성 황석두 루카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홍산 삽티(현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를 거쳐 고향인 연풍 병방골(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 이장했고, 1982년 연풍 순교성지로 천묘(遷墓)하였다.
나머지 4위 순교자들의 시신은 사흘 뒤에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형장 부근에 묻혔다가 6월 초 몇몇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서짓골(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에 매장하였다.
그 후 1882년 3월 제7대 조선 교구장인 블랑(Blanc, 白)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 대교구의 오우라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2년 만인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5. 에빌라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vila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11년경
에빌라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빌라시우스.
에빌라시오 자료
성녀 파우스타(Fausta)는 13세의 소녀로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처형되었다. 성 에빌라시우스(또는 에빌라시오)는 그녀의 고문과 처형을 책임진 사람이었는데, 성녀 파우스타의 용맹한 죽음에 감동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성녀와 마찬가지로 폰투스(Pontus)의 키지쿠스[Cyzicus, 오늘날 터키 아나톨리아(Anatolia) 지방 미시아(Mysia)에 있던 고대도시]에서 순교했다. 키지쿠스 사람들은 누구도 자신들의 고유한 종교를 떠나 개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들의 축일을 2월 6일에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6. 에우스타키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stach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8년경
에우스타키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스타치오, 에우스타치우스, 에우스타키우스, 유스터스.
에우스타키오 자료
불확실한 전설이긴 하지만 그에 따르면 성 에우스타키우스(또는 에우스타키오)는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에서 플라키두스(Placidus)라는 이름을 가진 로마의 장군이었다. 그는 로마 근처 티볼리(Tivoli)에서 사냥을 하던 중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잡으려던 수사슴의 뿔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선명한 십자고상이 달려 있었고, 사슴을 통해 “나는 네가 알지는 못하지만 이미 네가 존경하고 있는 그리스도”라고 말을 들었다. 이때 그는 가족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자신의 이름을 에우스타키우스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개종 이후 그의 신앙은 계속되는 시련을 견뎌내야만 했다. 마치 구약성경의 욥(Job)처럼 순식간에 세속적인 부를 잃고, 집과 나라를 떠나야 했으며, 가족들과도 떨어져 살아야 하는 불행한 일들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다시 군대에 소집되어 전쟁에 나가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승전을 기념하는 축하식에서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지내기를 거부해 그와 그의 가족은 처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성 에우스타키우스는 아내인 성녀 테오피스테(Theopistes) 그리고 두 아들인 성 아가피투스(Agapitus)와 성 테오피스투스(Theopistus)와 함께 온가족이 황소 모양의 불타는 청동 가마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이들은 서방교회뿐만 아니라 동방교회에서도 예로부터 공경을 받아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7. 오 베드로(오매트르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吳 Peter(Aumaitre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7-1866년 한국
오 베드로(오매트르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오 베드로, 오매뜨르, 오메뜨르, 오메트르, 오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에르, 피터.
오 베드로(오매트르 베드로) 자료
성 피에르 오매트르(Pierre Aumaitre)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고 한국 성은 오(吳)이다. 그는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서부 앙굴렘(Angouleme) 교구의 뤼페크(Ruffec) 본당에 속한 에제크(Aizecq)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조그만 농지를 경작하며 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갔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는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부지런했지만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첫영성체 교육을 받으면서 사제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리슈몽(Richemont)의 소신학교에 입학하려 했을 때 큰 어려움을 겪었다.
성적 때문에 소신학교 추천을 꺼리던 본당신부도 감탄할 만큼 매일같이 본당신부와 평신도에게 라틴어를 배우러 다녔고, 결국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한 뒤에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등생이 되기까지 하였다.
5년의 소신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1857년 10월에 앙굴렘 대신학교에 진학했고, 1859년 8월 18일에 소품자(小品者)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862년 6월 14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후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자신의 선교지가 조선임을 알게 되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사제가 되기까지 많은 은인의 도움을 받았던 그는 선교 사제가 되기까지도 부모의 강한 반대를 극복해야 했다. 게다가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조선으로의 파견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각오를 담아 부모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그리고 1862년 8월 18일 프랑스를 떠났으나 박해로 인해 조선으로의 입국이 쉽지는 않았다. 거의 1년 가까운 노력 끝에 1863년 6월 말 중국 어선을 타고 연평도 바다를 지나 무사히 조선 땅을 밟게 되었다.
입국 후 서울에서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주교와 함께 지낸 그는 얼마 뒤에 조선말을 익히기 위해 용인의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로 내려갔다. 그런 다음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주교가 전교하던 내포(內浦) 지방에서 활동하다가 1864년 9월부터 경기도의 한 지역을 맡아 사목하였다.
당시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신자들에게 성모 신심을 키워주기 위해 특별한 일을 했는데,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 활동했던 칼레(Calais) 신부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오매트르 신부는 매년 최대한 장엄하게 성모성월 행사를 거행했으며, 교우들에게 이 아름다운 신심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2년 남짓 본격적인 전교 활동을 펼치던 그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소문이 나돌고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마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수원의 샘골[泉谷里]에서 성사를 주고 있었다.
박해에 대한 소문으로 신자들이 동요하자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성사를 중단하고 신자들을 진정시킨 후 미사와 전례 용구를 모두 감추고 3월 9일 거더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있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를 찾아갔다.
여기서 그는 주교와 성 위앵 루카(Huin Lucas) 신부 등과 함께 하루를 보낸 다음 거더리에서 15리(里) 떨어진 ‘소덜’로 피신하였다. 그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으나 역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3월 11일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거더리에서 체포되자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날 거더리로 와서 자수하였다. 성 위앵 루카 신부도 주교의 편지를 받고 자수하여 거더리로 끌려왔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함께 체포된 주교와 동료 신부와 함께 홍주 관아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3월 19일 포도청에서 두 차례의 신문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이 세상의 형벌은 후세의 상”이라며 당당히 신앙을 증거하였다.
결국 3월 23일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처형지인 충청남도 보령 수영(保寧水營)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국혼(國婚)이 가까운 시기라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 나쁜 징조라 하여 멀리 떨어진 보령 수영으로 처형지를 정했다.
그래서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 성 위앵 루카 신부 ·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Lucas) · 성 장주기 요셉(張周基, Josephus)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처형장인 갈매못(현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를 포함해 갈매못에서 순교한 5위의 순교자 중에서 성 황석두 루카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홍산 삽티(현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를 거쳐 고향인 연풍 병방골(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 이장했고, 1982년 연풍 순교성지로 천묘(遷墓)하였다.
나머지 4위 순교자들의 시신은 사흘 뒤에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형장 부근에 묻혔다가 6월 초 몇몇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서짓골(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에 매장하였다.
그 후 1882년 3월 제7대 조선 교구장인 블랑(Blanc, 白)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 대교구의 오우라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2년 만인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8. 우세영 알렉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禹世英 Alexi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번역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5-1866년 한국
우세영 알렉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렉시스, 알렉시우스, 알렉씨오, 알렉씨우스, 우 알렉시오, 우알렉시오.
우세영 알렉시오 자료
성 우세영 알렉시오(禹世英, Alexius)는 세필(世弼)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황해도 서흥(瑞興)의 향교골에서 대대로 선비 생활을 하던 부유한 양반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그는 18세가 되던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그런데 그는 우연히 알게 된 김기호 요한(金起浩, Joannes)이라는 전교회장을 통해 천주교 교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게 되어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아버지와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을 외면한 채 세례를 받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는 몇몇 예비신자와 함께 서울로 상경해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를 찾아갔다. 그와 함께 온 이들은 모두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성 우세영을 만나본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그의 학식과 신앙과 열성은 대견스러우나 아직 나이가 어리고 가족의 반대 등 주위 환경이 너무 어려워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선뜻 세례를 주지 않았다.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그를 성 정의배 마르코(丁義培, Marcus) 회장에게 보내 눈여겨 살펴보도록 했고,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는 그의 진심에 대한 성 정의배 회장의 증언을 듣고 다른 동료들보다 한 주 정도 늦게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1863년).
세례를 받고 즉시 집으로 돌아온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천주교를 반대하는 부모와 가족에게 먼저 전교를 시작했다. 하지만 가족의 반대와 천대가 극심할 뿐 아니라 수개월 동안 계속되는 저주와 악담까지 참아 받아야만 했다.
가족들은 이웃의 구설에 오르는 것이 두렵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그를 감금하기까지 했는데, 그는 이 모든 것을 온유함과 인내로써 잘 이겨냈다. 그 후 그는 “차라리 네가 집에 없으면 죽은 것으로 여겨 위안이 될지 모른다.”라는 부친의 말을 듣고, 집을 떠나 서울에 있는 성 정의배 마르코 회장 집으로 가서 만 1년 동안 머물며 묵상과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는 집안 식구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는 한편 생활비를 벌기 위해 교리서 필사와 번역, 십이단 편찬 등에 전력하였다.
그 후 고향 집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도 아들이 믿는 천주교에 관심을 보이자 차근차근 천주교 진리를 설명하며 전교한 결과 가족과 친척 20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가 있었고, 정부에 고발하겠다는 등의 소동이 일어나자 더는 고향에서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는 수없이 모든 가산을 버리고 평안도 논재(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 답현리 소재)로 이사하여 가족과 함께 열심히 수계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866년 2월 16일 이웃 마을인 고둔리 공소회장 집에서 축일을 지내다가 성 유정률 베드로(劉正律, Petrus) 등 여러 신자와 함께 체포되어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첫 번째 심문은 잘 이겨냈지만 두 번째 심문에서 그만 혹형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한다는 말을 하고 말았다.
석방되자마자 자신의 배교에 대해 깊이 뉘우친 그는 스승인 성 정의배 회장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에게 사죄하고자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갔다. 그러나 이미 성 정의배 회장이 체포되었음을 안 그는 회장 집을 지키던 포졸들에게 자신도 천주교 신자라고 자수하여 체포되었다.
포도청으로 끌려간 그는 과거 배교한 사실을 알고 있는 관장으로부터 여러 차례 배교를 강요당하며 심한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끝까지 열심한 신앙으로 이겨냈고, 옥중에 있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에게 지난날 배교했던 일에 대한 사죄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평온한 마음을 되찾은 그는 용덕(勇德)을 발휘하여 모든 고문을 잘 참아 견디었고, 혹심한 곤장과 많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신앙을 용감하게 고수하여 기다리던 사형선고를 받았다.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1866년 3월 11일 새남터에서 스승인 성 정의배 마르코,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그의 유해는 앞서 3월 7일 순교한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세 명의 신부들과 함께 형장에 방치되었다가 5월 12일 박순지 요한 등에 의해 발굴되어 새남터 인근에 안장되었고, 보름 뒤에 다시 와서(왜고개,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로 옮겨 모셨다.
그 후 1899년 10월 30일 성 우세영 알렉시오를 비롯해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유해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현 용산구 원효로 4가 1)로 옮겨졌다가 이듬해 9월 5일 다시 명동 성당 지하 성당에 안치하였다. 성 우세영 알렉시오의 유해는 1968년 시복식을 계기로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해실로 옮겨 안치하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9. 유대철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劉大喆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6-1839년 한국
유대철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유 베드로, 유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유대철 베드로 자료
성 유대철 베드로(Petrus)는 역관 유진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장남이다. 그런데 이 집안은 이상하게도 부자는 열심히 천주교를 믿는 반면, 모녀는 믿기는커녕 이를 반대하여 가정에 불화가 그칠 날이 없었고 신자들을 욕하기까지 하였다.
어머니가 “어째서 너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일을 고집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 베드로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복종하겠으나 하늘의 임금, 만물의 주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온순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어머니의 눈이 어두움을 한탄하면서도 어머니께 대하여는 언제나 지극한 효성을 보여주었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마음속에는 순교하고자 하는 열렬한 욕망이 일어났다. 당시 옥에 갇혀있던 부친과 여러 신자들의 본보기는 그의 마음에 불을 질러 놓았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체포된 후 하느님께 대한 열광적인 사랑에 끌려 1839년 7월경 관헌들에게 자수하였다.
재판관은 그의 집안 내력을 자세히 물어보고 신자의 자식임을 알게 되자 옥에 가두고, 배교한다는 말을 하게 하려고 어르고 엄포하고 고문하는 등 갖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 그리고 옥사장이 혹형을 대철에게 가하여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사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도 이 용감한 어린이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루는 어떤 포졸이 구리로 된 담뱃대 통으로 그의 허벅지를 들이박아 살점을 한 점 떼어내면서 소리쳤다. “이래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겠느냐?” “그러면요, 이쯤으로 배교할 줄 아세요?” 그러자 포졸들은 벌겋게 달군 숯 덩어리를 집어 들고 입을 벌리라고 하였다.
대철이 “예” 하고 입을 크게 벌리니 포졸들은 놀라서 물러나고 말았다. 다른 교우들이 그에게 “너는 아마 많은 괴로움을 당한 줄로 생각하겠지만 큰 형벌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말했다. 대철은 “저도 잘 알아요. 이건 쌀 한 말에 대해서 한 알 같은 것이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고문을 당한 끝에 까무러친 그를 데려와서 다른 죄수들이 정신이 들게 하려고 허둥지둥할 때 그가 한 첫마디는 “너무 수고를 하지 마세요. 이런 것으로 해서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해 형리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유 베드로는 문초받기를 1회, 고문 14회, 태형 6백대 이상과 치도곤 45대 이상을 맞았지만 항상 기쁜 얼굴로 지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관헌들은 어린 그를 공공연히 죽이면 군중이 반발할까 두려워서 1839년 10월 31일 형리가 옥 안으로 들어가 상처뿐인 이 가련한 작은 몸뚱이를 움켜쥐고 목에 노끈을 잡아매어 죽였다.
이때 베드로의 나이는 겨우 14살이었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0. 유정률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劉正律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7-1866년 한국
유정률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유 베드로, 유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유정률 베드로 자료
성 유정률 베드로(Petrus)는 평안도 윤리면 논재골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어 고아가 되었는데, 호구지책으로 짚신을 삼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또 어쩌다가 돈이 조금 생기면 노름판에 뛰어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는 이덕표라는 친척의 권유로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그 후 교리를 배워 서울에 있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로부터 1864년경에 영세 입교하였다.
그는 순교할 때까지 극히 짧은 신앙생활을 했지만 그 열심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에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발견하였노라” 하며 자신의 기쁨을 큰소리로 표현했다. 그러나 원래 성격이 급했던 그는 자기 아내가 고집을 부리고 대들면 참지 못하여 부부 싸움을 하고 또 다투다가 아내를 때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가 영세한 뒤로는 아내 때리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짚신처럼 생긴 나무토막을 가지고 자기 몸을 사정없이 때리고 때로는 피를 흘려가면서 자문자답하기를 “너 아프지? 제가 아프면 또한 네가 때리는 남도 아플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므로 옆에 있는 부인도 크게 달라진 남편을 보고 감화를 받아 마침내 착하고 상냥한 아내가 되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한 유 베드로의 마음속에 점차 신앙의 열이 더해감에 따라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이끌어 영세 입교시켰다. 1866년 초 그는 친척집을 찾아다니면서 “평안히 계십시오. … 오늘 가면 언제 다시 뵐지 모르겠습니다. …” 하는 밑도 끝도 없는 고별인사를 하여 듣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날 저녁 무렵에 그는 공소가 있는 고둔리라는 마을로 가서 신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새해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 밤에는 유달리 교우들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회장이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하려고 할 때 갑자기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교우들은 당연한 듯 조용히 체포되었으나, 마침 그날이 설날이었으므로 포졸들에게 술을 대접하는 틈을 이용하여 많은 신자가 피신하고 유 베드로와 몇 명의 신자들만 남아 포졸들에게 잡혔다. 포졸들과 먼 길을 가는 동안 유 베드로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 예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도다.” 하며 마냥 즐거워하면서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이윽고 문초가 시작되자 신자들은 한결같이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심한 곤장을 맞고는 4명이 배교하고 유 베드로와 정 회장만이 남았다. 또 그 얼마 후 정 회장도 친구들과 배교자들을 따라 가니 결국 유 베드로 혼자 남게 되었다. 그러자 화가 치민 감사는 배교자들을 불러 들여 곤장을 주면서 유 베드로를 쳐 죽이라고 명을 내리니, 배교자들은 제 목숨을 건지기 위해 유 베드로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유 베드로는 자기를 때리는 동료들에게 “살이 살을 잡아먹는구나.”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후 배교자들은 감사의 명에 따라 그의 시신을 대동강에 버렸는데, 얼마 후 붉은 피가 물 위로 번져 나갔고, 신기하게도 그의 시체는 가라앉지 않고 언제까지나 둥둥 떠 있었으며, 매 맞은 자리는 이상한 광채가 나며 빛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때가 1866년 2월 17일이며,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1.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劉進吉 Augustin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역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1-1839년 한국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오스딩,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유 아우구스티노, 유아우구스티노.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자료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선조 때부터 당상 역관을 지내온 중인 계급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심이던 그는 20세 이전에 이미 유식하다는 평판을 들었지만, 세상의 영광과 쾌락을 제쳐두고 오로지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10년 이상이나 불교와 도교를 통하여 인간과 세상의 기원 및 종말을 깨우치려고 노력하던 중, 당시 훌륭한 양반집의 많은 학자들이 천주교를 믿는다 하여 죽임을 당하니 즐거운 낯으로 죽는다는 말을 듣고는 천주교야말로 참된 종교라고 여겨 천주교에 관한 책을 구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자기 집 장롱에 바른 헌 종이에 영혼, 각혼, 생혼이란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그것을 떼어 앞뒤를 맞추어 보니 그것이 곧 “천주실의”(天主實意)라는 책임을 알았다.
그때 그는 정귀산이란 이가 천주교를 연구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를 찾아가 교리를 물어 보았으나, 정귀산은 대답하기를 피하고 서울에 사는 홍 암브로시우스(Ambrosius)를 소개해 주었다. 유진길은 곧 홍 암브로시우스를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교리서를 얻어 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는 천주교의 모든 계명을 충실히 지켜나가기 시작하였다.
당시 정하상은 동료 교우들을 모아 선교사 영입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지 아니하여 그는 정하상 바오로(Paulus)를 알게 되어 1824년에 정 바오로와 함께 사신의 역관으로 들어가 북경으로 갔다. 그는 구베아(Gouvea) 주교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조선에 선교신부를 보내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자 이듬해인 1825년에는 정하상, 이여진 등과 함께 로마 교황께 청원서를 올려 조선교회의 딱한 사정을 알리고 하루 빨리 신부를 보내주시기를 간청하였다. 이 편지 덕분에 1831년 9월 9일자로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고, 이어서 선교사들도 입국하게 되었다.
1833년에 중국인 유 파치피코(본래 이름은 余恒德) 신부가 입국하고, 뒤를 이어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 그리고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각각 입국하게 되었다.
그래서 복음의 씨앗이 움틀 무렵 새로운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는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으므로 즉시 체포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형제와 친지가 찾아와 배교를 강요했으나 그는 “나 때문에 당신들이 고초를 당할 것을 생각하니 대단히 마음이 괴롭지만, 천주를 안 뒤에 그분을 배반할 수 없으며 육신의 사정보다도 내 영혼의 구원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니 당신들도 나를 본받아 교우가 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포장이 그에게 “신부가 숨어 있는 곳을 대라”고 하자 그는 “서양 선생들이 우리나라에 오신 것은 오직 천주의 영광을 현양하고 사람들에게 십계명을 지키게 해서 영혼을 구제해 주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 도리를 전하여 죽은 후에 지옥의 영원한 괴로움을 면하고 천당에 올라가 끝없는 진복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훌륭한 교를 전하려고 생각하면서 어찌 스스로 나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만약 명예와 돈과 쾌락을 구하려면 무엇 때문에 훌륭하고 돈 많은 고국을 버리고 죽음을 무릅쓰면서 9만 리 먼 곳에 있는 이 나라에 왔겠습니까? 그들을 맞아들인 자는 바로 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그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숨어 있는 곳을 말하지 않은 죄로 주리형과 줄톱질형을 받았다. 이리하여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정하상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때는 1839년 9월 22일이요,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2. 이광렬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李光烈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5-1839년 한국
이광렬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 요한, 이반, 이요한,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이광렬 요한 자료
성 이광렬 요한(Joannes)은 1839년 5월 24일에 순교한 이광헌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아우이다. 그의 집안은 원래 외교인이었기 때문에 장성할 때까지 성교회를 모르고 지내다가 형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는 교리를 열심히 배우고 수계생활을 철저히 하였으며 또한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그는 입교한지 얼마 되지 않아 북경 왕래의 중요한 사명을 맡은 지도자들 중에 들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조신철, 정하상과 더불어 모방 신부를 모셔오고, 또 샤스탕 신부도 입국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북경을 두 차례나 왕래하면서 북경에서 세례성사를 받고 귀국한 후에는 고기를 전혀 먹지 않았으며, 또 아직 미혼이라 세속의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독신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4월 7일 가족과 함께 붙잡혀 형과 같은 심문을 받고 같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영웅적인 성덕을 표현했다. 이광렬 요한은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맞으며 5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다시 법정에 불려나가 각장형과 태형을 당하였다. 이러한 온갖 혹독한 형벌을 당하여도 이 요한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만을 고백할 뿐이었다.
결국 그는 형 이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사학죄인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국법에 형제를 같은 날에 죽이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형이 먼저 순교하고 이 요한은 옥중에 버려져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7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4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3.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李光獻 Augustin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7-1839년 한국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오스딩,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이 아우구스티노, 이아우구스티노.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자료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경기도 광주(廣州) 이씨 집안사람으로 양반대가의 후예이다. 그와 같은 해에 순교한 이광렬 요한은 동생이고, 권희 바르바라(Barbara)는 부인이며, 17세의 나이로 순교한 이 아가타(Agatha)는 딸이다.
그의 성격은 너그러웠고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지만 쾌락을 좋아하고 절제함이 부족하여 젊어서 한때는 유흥장에 드나들며 다소 방탕하게 살았다고 한다.
30세가 채 못 되던 해에야 비로소 천주교에 입문하여 그의 부인 권희와 함께 입교하고, 크게 회개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본받으려는 뜻으로 그 역시 본명을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하였다. 그는 과거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새 생활을 하던 중에 박해로 인하여 여러 차례 도망 다니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얼마 안 되는 가산마저 다 탕진하였다.
그러나 참다운 참회 정신으로 언제나 명랑하고 불평 없이 살며, 냉담자들을 권면하고 외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에 있어 고생과 피로를 개의치 않았다. 그가 거처할 집조차 없게 되었을 때, 교우들은 서소문 밖 고마창골에 집을 마련하여 공소로 사용하면서 집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때 그가 공소회장이 되었다.
그 당시 교회는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주막처럼 꾸미고 신자들이 모였는데, 1839년 4월 7일 사백주일에 어느 예비신자가 밀고하여 포졸들의 습격을 받았다. 긴 심문과 괴로운 고문은 그 이튿날부터 시작되었다. 포장은 갖가지 형벌과 회유책으로 배교를 강요하였다.
“한 마디만 하면 너와 처자와 동생을 모두 놓아 주고 재산도 도로 찾게 해 주마.”
“제가 세상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이 제 종교이니 차라리 모든 것을 잃을지언정 교는 배반치 못하겠습니다.”
“너는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구나, 그러나 아내와 아이들이 불쌍하지 않느냐?”
“저는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마음 약한 표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형리들은 그를 땅에 엎어 놓고 온갖 형구를 다 동원하여 모진 형별을 가하자 구경꾼들조차 얼굴을 돌리며 보기를 꺼려하였다.
형조판서는 “임금님께 순종한다는 말 한마디가 그리 큰 죄는 아닐 것이다. 다른 죄인들은 나보고 살려 달라고 청하지만, 지금은 반대로 내가 너희들에게 살기를 원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형조판서가 고문하는데 지쳐서 좋은 말로 회유하는 정책을 쓰기 시작하자, 이틈을 이용하여 이광헌은 자신의 두 자녀를 자기에게 돌려보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판서는 “네 청을 들어 주마, 그리고 네 아내와 어린 것들은 배교하지 않아도 놓아 주겠다. 다만 네가 배교한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하고 대답하자, 이광헌은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여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사형선고를 받고 서소문 밖에서 네 번째 칼에 목이 떨어져 순교하였다. 이때는 1839년 5월 24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4. 이명서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李--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농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1-1866년 한국
이명서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이 베드로, 이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이명서 베드로 자료
성 이명서 베드로(Petrus)는 충청도의 어느 열심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박해를 피하여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자연 고향을 등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완주군 구이면 고소대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고소대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는 1866년에 다시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온순한 성품과 착한 마음씨를 지녔고 예의범절이 깍듯하며 착하고 어진 사람으로도 널리 알려졌으나 가슴앓이로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성지동 신자들이 다가올 박해를 예상하고 한 자리에 모였을 때 그는 “사세가 그렇게 다급하게 되었다면 빨리 피해야지요, 나는 병 때문에 피하지 못할 처지이고 천주님의 안배에 의지할 따름입니다. 필요하시다면 천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내 병은 영원히 낫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순교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1866년 12월 5일 저녁에 포졸들이 이 베드로의 집을 덮치자 심경이 달라진 그는 생에 대한 미련이 남아 포졸에게 애걸하였으나, 옆에 있던 조화서의 말을 듣고 “내 아까는 무서워서 그랬지만 사실은 나도 신자올시다” 하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그도 전주로 끌려가 감사 앞에서 문초를 받았다. 가슴앓이 환자인 줄 알면서도 감사는 죄수의 손발과 머리를 묶어 고정시켜 놓고 등허리를 난타하였다. 배교하라는 감사의 말에 그는 “수십 번을 죽는다 해도 천주교를 따를 것이오.”라고 하면서 배교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마침내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우리의 소원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기뻐하였고, “오늘 치명하면 곧장 천국에 들어가 진복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 행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전주 숲정이 형장에서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5. 이문우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李文祐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학생,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9-1840년 한국
이문우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 요한, 이반, 이요한,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이문우 요한 자료
성 이문우 요한(Joannes)은 경기도 이천 동산 밑 마을의 양반 교우 집에 태어났으며 경천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5살 때에 고아가 되어 어떤 여신자가 서울로 데려가 양자로 삼았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그 양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비록 그는 독신생활을 소원하였으나 양모의 원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결혼하는데 동의하였고 가장으로서 좋은 모범을 보였다.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세상을 일찍 떠나자, 다시는 혼인하지 않고 수덕생활을 실천하는데 전념하며 신자들을 도와주는 데 헌신할 따름이었다.
요한은 1년 이상 모방(Manbant, 羅) 신부를 따라 지방으로 다니며 복사의 일을 했고, 1839년의 박해로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활동을 하였으며, 또한 주교와 신부들이 숨어 있는 이곳저곳으로 찾아가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여러 차례 알려드렸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순교한 후에는 교우들과 함께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그는 이름이 알려져 있어 체포될 위험이 많았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요한은 7명의 신자와 더불어 위험을 무릅쓰고 성직자들의 시체를 찾아 노고산에 모신 다음에 시골로 피신하기 위하여 친구 집에서 나오다가 붙잡혔다.
처음에는 그 역시 한동안 당황하였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는 “천주께서 나를 부르신다. 천주께서 특별한 은혜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시는 소리에 대답을 아니 할 수 있겠는가?” 하며 오라를 받고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포장의 온갖 회유와 계략적이 말에 대하여 요한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떻게 죽음을 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의 명령에 복종하려면 만물의 조물주이신 대군대부를 배반해야 할 것인데, 죽어야 한다 해도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관장님이 말씀하신 바는 모두 오래 전에 생각한 것이오니, 더 이상 강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얼마 후 술과 음식을 주는 등 또다시 여러 방법으로 설득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으므로 도둑들이 갇혀 있는 감방으로 들여보냈다. 요한은 도둑들의 감방에서 지냈는데 그들 중에는 배교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을 보고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저 불쌍한 사람들이 전에는 어쩌면 나보다 더 착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저렇게 멸망하지 않았는가! 천주여, 제 마음 약함을 도와주소서.”
이윽고 형조로 이송된 요한은 그곳에서도 굳센 마음으로 신앙을 증거했으며, 마침 그곳에 있던 12명의 용감한 형제자매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양부모와 교우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그는 옥중 교우들의 신앙생활,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반성과 주님께 대한 사랑, 교우들이 주님 사랑을 저버리지 않도록 권고하였다. 그는 옥에 들어온 지 거의 3개월이 되던 1840년 2월 1일, 다른 두 동료와 함께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6. 이윤일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李尹一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6-1867년 한국
이윤일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 요한, 이반, 이요한,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이윤일 요한 자료
성 이윤일 요한(Joannes)은 충청도 홍주에서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친 대(代)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가 언제부터 경상도 문경군 새재 여우목으로 와서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박해가 일어났을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는데, 키가 크고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므로 위엄이 있었으며, 신심이 깊고 또 솔직담백하여 주변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의 가정은 친가와 외가 모두 선대부터 내려오는 신앙의 가문이어서 선친들 중에 전교회장과 순교자들도 있었다. 이 요한도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온갖 방법과 노력으로 자기 본분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문경 관아에서는 여우목에 신자들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고 포졸들을 보냈다. 이 요한은 포졸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올 때가 온 것이며 이미 각오한 바 있어 도망하지 않고 태연히 그들을 맞아 들였다.
포졸들이 “이 마을을 대표하는 집 주인이 누구며 천주교를 믿는 자가 누구냐?”고 묻자, 그는 선뜻 나서며 “바로 나요” 하며 점잖게 말하였다. 그들은 마을을 수색하여 이 요한의 가족 8명과 마을의 신자 30명을 체포하여 험준한 산길을 걸어 문경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문경에서 사흘을 지낸 후 상주로 압송되었다. 여기서 세 달을 지냈는데 그가 기거하던 곳은 집이 아니었고, 마구간도 돼지우리도 아닌 겨울에 무나 배추를 저장하기 위해 파 둔 구덩이가 요한의 침실이었다.
그의 목에는 죄수가 쓰는 칼이 두 개나 채워졌고, 발에는 차꼬를 끼워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굽히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기도와 묵상을 하였으며 신자들을 격려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후 상주 목사는 마지막 문초를 마치고 70여 명의 신자를 세 편으로 갈랐다. 첫째 편은 집으로 돌려보낼 자들이고, 둘째 편은 처형될 사람들 그리고 셋째 편은 이 요한과 같은 사교의 두목이었다. 상주 목사는 1867년 1월 4일 대원군의 윤허와 함께 군중에게 교훈이 되게 사형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집행을 위해 대구로 압송하였다.
이 요한은 사형선고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출발하기 전에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성실하게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꼭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이 요한은 포졸들이 주는 마지막 음식을 다 받아먹고 남문 밖 관덕정으로 끌려 나갔다. 천주학장이를 참수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져 형장은 인파로 들끓었다.
집행관이 나와서 선고문을 낭독하자 요한은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어 희광이에게 주며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에게 줄 터이니 받아서 요긴하게 쓰게나. 그 대신 부디 한 칼에 내 목을 베어 주게나.” 하고 말하였다. 요한은 경건하게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꿇어앉았다. 돈을 준 효력이 있었는지 요한의 목은 한 칼에 떨어졌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이 토마스와 그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에 의해 대구 날뫼(비산동)에 매장되었다가, 1901년 경부선 철도가 착공되면서 당시 용인의 먹뱅이에 살고 있던 그의 동생 이시영에 의해 1912년 이동면 묵리 산으로 이장하였다. 1976년 6월 24일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가 성인의 유해임을 밝혀져 1987년 1월 21일 대구 성모당에 안치되었고, 그날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7. 이호영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李--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2-1838년 한국
이호영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이 베드로, 이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이호영 베드로 자료
성 이호영 베드로(Petrus)는 경기도 이천 땅 구월에서 가난한 시골 양반의 자제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윈 후 모친과 누이 아가타(Agatha)와 함께 서울 한강 북쪽 문막이라는 곳에서 살 때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만났다. 신부는 그의 충실성을 보고 아직 젊은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말과 행동에서 절제가 있었고, 여러 교우와 외교인을 항상 권면하여 자기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던 중, 하루는 과거 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왕의 총신과 아는 사이가 되어 급제를 하게 된 꿈을 생각하며 순교를 예감하였다고 한다.
1835년 2월 어느 날, 베드로와 그의 누이 아가타는 붙잡혀 옥에 갇혔다. 그는 수없이 심문과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포기 하지 않았다.
재판관이 “만일 네가 말로 천주를 배반하기 싫거든 커다란 글자 하나를 써 줄 터이니 거기에다 점 하나만 찍든지 침을 뱉든지 하면 배교하는 표로 인정하고 너를 놓아 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는 “만 번 죽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단호히 말하였다.
그래서 이호영 베드로는 사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때 그는 “나는 칼 밑에 치명하기가 원이었다. 그러나 천주의 명령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4년 동안이나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갖은 고문과 병고를 잘 참아냈고, 항상 대재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양순한 표양이 외면에 드러나 옥졸들조차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윽고 그는 옥중에서 병으로 순교하니, 때는 1838년 11월 25일, 그의 나이는 36세 때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8. 임치백 요셉
- 가톨릭 성인 이름
林致百 Josep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포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3-1846년 한국
임치백 요셉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세푸스, 요제프, 임 요셉, 임요셉,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임치백 요셉 자료
성 임치백 요셉(Josephus)은 서울서 멀지 않은 한강변의 어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모친을 잃고 홀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10여년 동안을 글방에 다녔고, 무술과 예도를 배워 향락을 즐기는 친구들과 상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성품은 유순하고 효심이 지극한 까닭에 덕을 거슬린 적은 없었다고 한다.
가정을 이룬 후 1830년경에 아내와 아들을 먼저 입교하여 그에게도 세례받기를 권하였으나 그는 항상 “뒷날에 입교하겠다.”고 말하며 미뤘지만, 신자들을 깊이 신뢰하여 그들을 형제와 같이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무엇보다도 즐겁게 여겨 몸 둘 곳이 없는 신자 4, 5명을 그의 집에서 살게 하였다.
1835년에 박해가 일어나 마을에서 가까운 몇몇 신자가 잡히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하였고, 자진해서 포졸이 됨으로써 더욱 열심히 그들을 도와주었다.
1846년 6월 선주였던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신부를 따라 연평도로 나갔다가 함께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갇힌 해주까지 달려가 아들의 석방을 청하였다. 이때 황해도 감사는 그의 요구를 묵살하고 도리어 그를 옥에 가두었다가 서울로 압송하였다.
서울로 잡혀온 그는 포청의 옥에서 김대건 신부를 만나 불타는 신부의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어느 날 갇힌 신자들에게 “나도 오늘부터는 성교회를 믿겠소. 너무 오랫동안 끌어왔었소.”라고 말하였다.
김 신부는 그날부터 기도문을 가르쳐 요셉이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전에 임 요셉과 친하게 지내던 포졸들은 그의 목숨을 구하려고 배교하기를 권하였으나 그는 “천주는 나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시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을 결심을 하고 있고, 이미 죽은 사람이니 다시는 그러한 말을 하지 말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며칠 후 형리들은 그의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와서 자식들의 처지를 보아서 배교하라고 말했지만, 인정에 끌려 천주를 버릴 수 없다고 하자 형리들은 노하여 그를 거꾸로 매달고 물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형리들에게 “당신들은 죽은 사람을 때리니 헛수고만 하는 것 아니오”라고 태연히 말하였다.
그 후 3개월이 지나 그는 곧 사형선고를 받으리라는 소문이 들리자 즐거운 마음으로 신자들에게 “나는 본래 아무런 공적도 없었는데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여러분보다 앞서서 천국에 가게 되면 반드시 천국에서 내려와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아버지이신 천주의 나라로 안내할 터이니 여러분도 용기를 내시오” 라고 말했다.
그 후 포장 앞에 끌려가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니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옥에 온 뒤로부터 경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외워보아라.” “아직 모두 외우지 못합니다.”
“십계명도 모르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천국에 가려면 여기 있는 이 마티아처럼 유식해야 한다.” 하고 말하자, 요셉은 머리를 흔들며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자녀가 무식하면 효도할 수 없습니까? 아닙니다. 무식한 자녀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모께 대한 책임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저는 배운 것은 없으나 천주께서 저의 아버지이신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포장은 그를 고문하라고 명하여 대꼬챙이로 요셉의 살을 찌르게 하고 세 번이나 주리를 틀게 하였다. 이 때 요셉이 신음소리를 내자 포장은 “만일 네가 그러한 소리를 내면 그것으로써 배교행위라고 보겠다.”라고 소리치자, 요셉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잔악한 고문을 받아 결국 정신을 잃고 밖으로 끌려나왔다.
그 후에도 요셉은 거듭 고문을 받았으나 변함이 없자, 때려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져 정오부터 해질 때까지 물매질을 가하였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를 옥안으로 끌고 가서 목을 졸라 죽였다.
이때가 1846년 9월 20일이요, 그의 나이 4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9. 장 시메온(베르뇌 시메온)
- 가톨릭 성인 이름
張 Simeon(Berneux Sime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4-1866년 한국
장 시메온(베르뇌 시메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시므온, 장경일.
장 시메온(베르뇌 시메온) 자료
성 시메온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장 시메온 또는 베르뇌 시메온) 주교의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그는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르망(Le Mans) 교구의 샤토뒤루아(Chaeau-du-Loir)에서 평범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장간 일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혁명 이후 신앙생활을 멀리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은 부인으로서 모든 사랑을 쏟아 아들을 가르쳤다. 성 베르뇌 시메온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신심이 깊었기 때문에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본당 신부와 몇몇 사람의 후원으로 그 도시의 중학교에서 공부하고 프레시네(Precigne) 소신학교를 거쳐 1831년에 르망 교구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837년 5월 20일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 수품 후 곧바로 대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철학을 가르치던 그는 이방인 선교에 헌신하려는 일념으로 1839년 7월 15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40년 1월 15일 통킹(Tonkin, 현 베트남 북부)의 선교사로 임명된 성 베르뇌 시메온 신부는 그해 2월 마카오를 향해 출발해 9월 21일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통킹으로 갈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조선에서 유학 온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s)와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 신학생에게 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841년 1월 마침내 마카오를 떠나 목적지인 통킹에 도착한 그는 곧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다행히도 프랑스 군함이 들어오면서 1843년 3월 12일 함대 사령관의 도움으로 선교사 5명과 함께 석방되었다. 다른 선교사들은 프랑스로 돌아갔으나 성 베르뇌 시메온 신부는 마카오로 되돌아와 만주 대목구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44년 3월 15일 만주 요동(遼東)에 도착한 성 베르뇌 시메온 신부는 중국어 공부를 하며 열성적으로 선교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만주 대목구장인 베롤(J. Verrolles) 주교의 신임을 얻어 1849년에 대목구장 직무 대행(Provicarius)이 되었고, 1854년 3월 11일에는 계승권을 가진 부주교(Coadjutor)가 되었다.
제3대 조선 대목구장인 페레올(J. Ferreol) 주교는 일찍이(1845년 7월 15일) 성 베르뇌 시메온 신부를 그의 부주교로 지명했으나 성 베르뇌 시메온 신부는 그것을 거절했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미 그를 베롤 주교의 부주교로 발령하였고,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갑사 명의 주교이자 제4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성 베르뇌 시메온 신부를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한 1854년 8월 5일 자 교황 비오 9세(Pius IX)의 소칙서가 12월 24일에 도착하자 베롤 주교는 12월 27일 그의 주교 서품식을 거행하였다. 주교품을 받은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1855년 9월 상해로 갔다.
그곳에서 새로 조선에 부임하는 프티니콜라(M. A. Petitnicolas) 신부와 푸르티에(J. Pourthie) 신부와 합류한 뒤, 그들과 함께 주교 일행을 영입하기 위해 조선에서 건너온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Thomas)의 안내를 받아 이듬해 1월 17일 상해를 떠났다. 그들은 2개월간의 길고도 어려운 항해 끝에 1856년 3월 27일 서울로 몰래 들어오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입국한 후 어느 정도 조선말을 익히자 상복을 입고 경기도 지방의 공소들을 사목 방문하며 교우들을 찾아 나섰다.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1857년 3월 25일 오랜 선교 활동으로 조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성 안(安) 안토니오(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를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로 서품하고, 이튿날부터 3일 동안 조선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를 통해 조선 천주교회 지도서의 기초를 마련하는 동시에 회의 결과를 정리해 1857년 8월 2일에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라는 공식 사목 지침서를 반포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교회가 직면했던 여러 가지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들을 규명하면서 조선교회의 발전을 위한 방안을 심의하였다.
그는 선교 활동을 위해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선교사 파견을 수시로 요청했고, 현지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세웠다. 교회 서적과 출판물을 통한 간접 선교와 신자 교육을 위해 각종 기도서와 교리서를 번역 출판하는 일에도 힘썼다. 그래서 1861년부터 2곳의 교회 목판 인쇄소에서 다량의 교회 서적을 인쇄해 교우들에게 보급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조선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과 자료 수집 및 편찬 작업을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에게 위임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교세는 날로 확장되었고 신자 수도 1857년 15,000명에서 1865년에는 23,000명까지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64년 국경 북쪽에 러시아 상선이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자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좋은 기회라 생각해 1866년 초 대원군에게 방아책(防俄策)의 하나로 교회와의 협조를 건의했다. 대원군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자 북방에서 선교 중이던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1월 29일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 러시아가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자 대원군은 박해자로 돌변해 쇄국정책을 강행하였다. 대원군과의 면담 약속을 기다리던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1866년 2월 23일 배교자 이선이의 밀고로 거처에서 체포되어 서울 우포도청으로 끌려갔다.
서울과 인근에 있던 성 김(金) 헨리코(도리 헨리코) · 서(徐) 루도비코(볼리외 루도비코) · 백(白) 유스토(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도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 천주교회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우포도청에서 문초를 받고, 3월 2일 의금부로 이송되어 세 차례의 추국을 받았다. 그는 앞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자들의 이름이나 선교사의 거처 등에 대해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귀국 권고마저 물리친 그는 1866년 3월 6일 군문효수의 극형을 선고받고, 다음날인 3월 7일 세 명의 선교사 신부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묶인 채 감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향했다. 이때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우리가 조선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하며 기뻐했다고 한다.
얼굴에 희색이 만연한 그들은 사형장인 한강 변 새남터에 도착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군졸들은 선교사들을 둘씩 무릎 꿇린 후 양쪽 귀를 화살로 꿴 다음, 그들 얼굴에 백회를 뿌림으로써 모든 처형 준비를 마쳤다.
사형집행 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여섯 명의 희광이가 날뛰고 소리를 지르며 돌다가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그의 목이 두 번째로 내려친 칼날에 땅에 떨어지니, 한 병졸이 그 머리를 포도대장 앞에 갖다 보인 다음 군문에 매달았다.
이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주교와 세 명의 신부들 그리고 3월 11일 순교한 성 우세영 알렉시오(禹世英, Alexius)의 시신은 형장에 방치되었다가 2개월 후인 5월 12일 박순지 요한 등에 의해 발굴되어 새남터 인근에 안장되었다가 5월 27일 와서(瓦署, 왜고개,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로 옮겨졌다.
용감한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정성껏 장례 지내고 와서에 모신 것이다. 그 뒤 이들 순교자의 유해는 1899년 10월 30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9월 5일 명동 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가 시복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0. 장성집 요셉
- 가톨릭 성인 이름
張-- Josep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6-1839년 한국
장성집 요셉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세푸스, 요제프, 장 요셉, 장요셉,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장성집 요셉 자료
성 장성집 요셉(Josephus)은 서울에서 때어났다. 그는 한때 호조에 속하는 광흥창(廣興倉)의 일을 본 적도 있으며, 두 번이나 결혼하였으나 두 번 다 상처한 뒤로는 어느 약국에서 일을 보며 지냈다.
원래 그의 성품은 온화하였지만 어려운 처지 때문에 속세생활에서 향락만 추구하던 중, 나이 서른에 천주교를 알기 시작하여 한때 열렬한 예비신자로 교리를 배웠다. 그러나 그는 천주강생에 대하여 의심을 갖고 차츰 냉담해지더니 마침내 천주교 연구를 내던지고 돈벌이에 급급하였고,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 가버렸다.
그러다가 어느 친구가 그 의혹을 밝혀주자 그는 자기의 과거 허물을 통회하고, 그전보다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성서를 읽었으며, 세속의 유혹을 더 잘 피하기 위하여 외교인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집에 들어 앉아 문을 닫아걸고 굶주림과 추위에도 상관하지 않고 기도와 공부에만 전심하였다. 이때 주위 사람들이 이전처럼 출입도 하고 몸을 돌본다고 해서 나쁠 것이 뭐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전에 지은 죄는 모두 넉넉한 살림을 해 보겠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같은 모양으로 죄를 짓기보다는 추위로 얼고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괴로움을 잘 참아 받음으로써 저는 죽은 뒤에 하늘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윽고 그는 1838년 4월에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박해가 시작되어 많은 신자들이 고문과 죽음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매우 감탄하며 자기도 순교할 거룩한 원의가 불타올라 자수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5월 18일에 밀고를 당해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열병을 앓고 일어난 다음이라 포졸들이 가마에 태워가려 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걸어서 포졸들을 따라 포청으로 갔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해가 돋을 무렵인데도 요셉은 자기를 부르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서, “죽어야 마땅한 사람을 잡아다 놓고는 아무 형벌도 주지 않고 버려둔단 말이요” 하고 여러 번 항의까지 하였다. 그 후 형리들이 아무리 꾀를 쓰고 포악하게 다루어도 소용이 없었고, 5월 26일에는 치도곤 25대를 맞은 후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5월 26일이요,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1. 장주기 요셉
- 가톨릭 성인 이름
張周基 Josep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3-1866년 한국
장주기 요셉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세푸스, 요제프, 장 요셉, 장요셉,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장주기 요셉 자료
성 장주기 요셉(Josephus)은 경기도 수원 땅의 어느 부유한 외교인 집안에 태어났다. 한문에 유식했던 그는 열심한 자기 형수로부터 천주교 도리를 배워 23세에 영세 입교하게 되었는데, 그때 온 가족이 모두 입교하였다.
그는 학식이 있고 슬기로웠으며 신심이 두터웠기 때문에, 모방(Manbant, 羅)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회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거듭된 박해로 네 번씩이나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살아남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격려해주며 신앙을 굳세게 지켜나갔다.
1845년경에 그는 친척들의 성화와 박해를 이기지 못해 제천 땅 배론 골짜기로 옮겨가 살았다.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게 되자 그는 자기 집을 신학교로 서슴지 않고 제공하였으며, 앞장서서 신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하였고, 신학교 관리직까지 맡아보았다. 장 요셉과 부인은 합심하여 농사를 지어 신학교에 바쳤고, 자신들은 청빈과 봉사로써 11년간이나 신학교 실림을 잘 이끌어 갔다.
1866년 3월 1일 갑자기 포졸들이 배론 골짜기에 들이닥쳐 신부들과 함께 그 역시 체포되었으나, 장 회장의 공을 잘 알고 있는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신부가 관헌하게 돈을 주며 그를 석방시켜 달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는 울면서 배론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 노루골에 사는 한 신자 집에 갔다가 다시 포졸들이 그를 덮쳐서 제천 관장에게로 데려갔다. 제천 관장은 장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품신하였다.
서울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서양인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서울로 올려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배교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답을 보냈다. 관장이 그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서양인 신부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도 않은 채 짚으로 만든 가마를 타고 역적모의를 한 죄수에게 씌우는 홍포를 쓴 채 서울로 향하였는데 지나가는 길목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죽으러 가는 그의 얼굴에 사색이 감돌기는커녕 기쁨이 넘쳐흘러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수군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6년 3월 24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 날을 기다렸다. 그때 나라에서는 왕비가 해산할 달이었으므로 서울에서 죄인의 피를 뿌린다는 것은 불길하다 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하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이에 그는 1866년 3월 30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2. 전장운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全長雲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상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0-1866년 한국
전장운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전 요한, 전요한,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전장운 요한 자료
성 전장운 요한(Joannes)은 서울 애고개라는 곳에서 태어났고,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승연이다. 착한 성격을 지닌 그는 열심한 신자인 어머니로부터 영세를 받았고, 부친을 잃은 후에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짓는 한편 가죽부대와 담뱃대 만드는 일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으나 신앙이 굳지 못하여 감언이설에 빠져 배교하고 풀려 나왔었다. 이때부터 전 요한은 언제나 깊은 참회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전 요한은 실망하지 않고 1845년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신부가 입국하자 즉시 회개의 성사를 받고 자기의 열성과 신심을 되찾아 열심히 살았다. 이 때문에 많은 교우들도 그의 열심에 감복하여 그를 존경하였다. 그 후 전 요한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고 살았다.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는 그의 참된 신앙생활을 보고 그에게 세례를 베풀 권한을 주었으며, 1866년에는 최형 베드로(Petrus)와 함께 교회서적을 출판하는 직무를 맡겼다. 그래서 출판에 종사하던 임 요셉으로부터 집을 샀으나, 아직 목판의 인수인계가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고 박해가 일어났다.
전 요한은 피신도 하지 않고 목판을 사수하였다. 신자들이 그에게 피신을 권유하자 그는 “내가 어디에 간다 하더라도 천주님이 부르시면 나는 체포될 것입니다. 여기서 체포되나 다른 곳에 피했다가 체포되나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교우들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귀중한 물건들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 목판이 교회에 매우 유익하다고 믿기에 어떠한 불행이 닥친다 하더라도 달게 받으며 여기를 지키렵니다.” 하고 말했다.
1866년 3월 1일 포졸들이 와서 집을 지키던 그에게 “이 집은 천주교도의 집인 줄 알고 있는데 당신도 천주교도요?” “그렇게 물을 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틀림없는 천주교도입니다. 나를 체포해서 가겠다는 말씀이신 모양인데 기다리고 있던 참이오. 자, 앞장서십시오. 나 기꺼이 따라 가리다.” 이리하여 그는 순순히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지만 ‘예수 마리아’만을 부르면서 갖은 고통을 다 참아 받았다. 3일간의 고문과 심문이 끝나고 1866년 3월 9일 사형선고가 내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전 요한의 목을 베는 희광이는 전에 신자였고 잘 아는 사이인 고성철이란 사람이었다.
그가 “내 어찌 차마 자네 목을 벨 수 있겠소?” 하며 거절하려 하자 전 요한은 “당신은 임금께 복종하고 나는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뿐인데 무엇을 꺼리는 거요?” 하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의 칼에 목이 땅에 떨어지니, 때는 1866년 3월 10일이요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3. 정 야고보(샤스탕 야고보)
- 가톨릭 성인 이름
鄭 James(Chastan Jam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3-1839년 한국
정 야고보(샤스탕 야고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샤스땅,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쟈크, 정 야고보, 정아각백, 정야고, 제임스.
정 야고보(샤스탕 야고보) 자료
성 자크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 신부의 한국 성은 정(鄭)이고, 이름은 본명인 야고보(Jacobus)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아각백(牙各伯)이라 하였다. 그는 1803년 10월 7일 프랑스 디뉴(Digne) 인근에 있는 마르쿠(Marcoux)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앙과 공부에 열성적이었던 그는 1823년 디뉴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곳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3년 만인 1826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고 해외 선교를 자원하여 이듬해 1월 13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선교사로서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1827년 5월 동양 선교사로 임명되어 동료와 함께 보르도(Bordeaux) 항구에서 프랑스를 떠나 그해 말에 코친차이나(지금의 남부 베트남)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9개월 뒤에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도착했고, 다시 말레이반도의 페낭(Penang) 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마카오에 머물 때 조선 포교지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선 선교를 자원했으나 바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페낭에서 5년 정도 교수로 활동해야 했다.
1832년 7월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조선 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다시 한번 조선 선교를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1833년 5월 페낭을 떠나 마카오에 도착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11월에 복건(福建)에서 얼마 전에 조선 선교를 자원한 성 모방 베드로(Maubant Petrus) 신부를 만난 뒤 요동을 거쳐 만주에 도착해 조선 국경까지 갔으나 조선 교회의 밀사들을 만나지 못해 입국하지 못했다.
그래서 1834년 8월부터 약 2년 동안 산동(山東) 지방에 머물며 중국인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며 지내다가 1836년 초에 조선에 입국한 성 모방 베드로 신부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산동을 떠나 그해 12월 말에 책문(柵門)에서 조선 신학생들을 데리고 온 조선 교회의 밀사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us) · 성 조신철 가롤로(趙信喆, Carolus) · 성 이광렬 요한(李光烈, Joannes) 등을 만나 그들의 안내로 1837년 1월 1일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어렵게 조선에 두 번째로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가 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감격하여 “나는 천주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의 구원과 특히 나의 구원을 위하여 일할 것이므로 어떤 일이라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회가 오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할 힘을 주님께 기대합니다.”라고 벅찬 기쁨을 토로했다.
상복 차림을 하고 15일을 걸어서 서울에 도착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성 정하상 바오로의 집에 머무르다가 성 권득인 베드로(權得仁, Petrus) 회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조선말을 배웠다. 그는 2개월 정도 고해성사를 위한 “성찰규식”(省察規式)을 외워 조선말로 신자들에게 첫 고해성사를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부활 대축일을 경기도 양근(楊根)에서 성 모방 베드로 신부와 함께 지내며 선교 의지와 각오를 새롭게 하고, 성 모방 베드로 신부가 조선의 남쪽 지방을 맡는 대신 그는 북쪽 지방을 맡아 사목하기로 했다. 이들의 활발한 노력으로 조선 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1837년 7월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심한 열병에 걸린 성 모방 베드로 신부를 위해 서울로 돌아왔고, 그에게 병자성사를 주었다. 다행히 3개월 뒤에 성 모방 베드로 신부가 건강을 회복했고, 그때부터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남쪽 지방 교우촌을 순회하며 성사를 주고 회장을 임명하는 등 선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해 말에 제2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Imbert Laurentius) 주교가 조선에 입국했고, 이듬해 5월에야 비로소 서울로 와서 주교를 만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다시 남쪽 지방으로 가서 전교에 힘썼다. 이렇게 한 명의 주교와 두 명의 선교 사제가 활발히 활동하면서 1836년 초에 6천여 명 미만이던 조선의 신자수가 1838년 말에는 9천 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1839년 기해년이 시작되면서 조정은 다시금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배교자의 밀고로 세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기해박해가 본격화하자 신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가 자수를 결심했고, 주교의 명에 따라 두 선교사 신부는 일단 충청도의 교우촌으로 피신하였다.
얼마 후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가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홍주(洪州) 교우촌에서 성 모방 베드로 신부와 헤어져 전라도의 한 교우촌으로 갔다. 그리고 며칠 후 신자들을 위해 자수를 권유하는 주교의 편지를 받고 성 모방 베드로 신부와 함께 포교에게 자수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 선교사는 비로소 포도청 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의연하게 신앙을 고백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 배교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형에 처하도록 판결하였다. 처형 장소는 한강 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1839년 9월 21일,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는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포졸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 쪽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선고문을 읽고 칼을 들어 처형하였다. 성 샤스탕 야고보와 성 모방 베드로 신부 그리고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마지막까지 태연하게 하늘을 향해 기도할 뿐이었다. 그들의 순교로 조선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모두 잃게 되었다. 이때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의 나이는 성 모방 베드로 신부와 같은 35세였다.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와 두 선교사의 시신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20일 뒤 죽음을 각오한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서강대 뒷산)에 매장되었다가 1843년 삼성산(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57-1)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01년 10월 21일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고, 그해 11월 2일 명동대성당에 안치했다가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4. 정국보 프로타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丁-- Protas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상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9-1839년 한국
정국보 프로타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쁘로따시오, 쁘로따시우스, 정 프로타시오, 정프로타시오, 프로타시우스.
정국보 프로타시오 자료
성 정국보 프로타시우스(Protasius, 또는 프로타시오)는 황해도 개성의 어느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가 직무상 괴실로 몰락하자 부친은 가문과 신분을 숨긴 채 서울로 올라와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정국보는 천성이 착하고 어질었는데, 나이 서른 살 때 입교하여 충실히 계명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는 홍살문 거리에 집을 마련하여 성사를 보기 위하여 서울로 모여드는 신자들의 숙박소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는 모든 교우들에게 한결같이 대하였고, 교우들의 일이라면 위험을 불사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또한 그는 지극히 가난하고 병이 잦았지만 어려운 빛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는 열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가 어릴 때에 모두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뜻으로 한 마디 원망의 소리조차 입 밖에 내지 않고 달게 참아 받았다. 또한 성서 읽기를 즐겨하고 강론 듣기를 좋아하였다.
1839년 3월 기해박해의 선풍이 일어났다. 조선에 외국인 신부들이 있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신자들을 잡아 가두기 시작하였다. 그는 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아내와 같이 잡혀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박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되어 관리들의 감언이설과 유혹에 빠져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었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자기 죄에 대하여 심한 가책을 느껴 침식을 잊은 채 울며 지내다가 이웃에 사는 열심한 신자의 격려와 권고에 용기를 얻어 자수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형조의 문지기는 그가 찾아와 자기가 배교한 사실과 배교한 것을 취소하고 죽기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 “이 못난 놈아, 한번 말했으면 그만이지 못 들어간다.”라고 호령하며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튿날 찾아가 다시 졸랐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흘째인 5월 12일에는 자신의 신병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들것에 실려 형조판서가 지나갈 길목에 지키고 앉아 기다렸다. 판서가 나오자 그는 길 한 가운데 엎드려 이렇게 말했다.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마음에 없는 말을 입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뉘우칩니다. 저는 천주교인입니다. 언제까지든지 그러하고자 합니다.” 하고 애원하였다.
그래도 판서가 그냥 지나치려 하자, 그가 하도 큰소리로 부르짖고 애원함으로 판서는 귀찮게 여기고 그를 잡아 옥으로 끌고 가도록 명했다.
이리하여 그는 기쁘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형리들에게 끌려 옥으로 들어갔다. 갇혀 있던 다른 신자들이 그를 반가이 맞으며 “잘 했다”는 축하의 말을 하자 그의 기쁨은 한층 더 하였다. 그는 다시 불려 나가 치도곤 스물다섯 대를 맞았다. 이때 그는 장티푸스로 기력이 떨어진데다가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므로 옥에 들어올 때에는 이미 다 죽어 있었다.
그는 바로 그날 밤, 1839년 5월 20일에 41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어쨌든 그는 기해박해의 첫 번째 순교자이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5.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 가톨릭 성인 이름
鄭-- Bartholomew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원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1866년 한국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르똘로메오, 바르똘로메우스, 바르톨로매오, 바르톨로매우스, 바르톨로메우스, 정 바르톨로메오, 정바르톨로메오.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자료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aeus, 또는 바르톨로메오)는 충청도 어느 양반집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많이 하여 원님까지 지냈으며, 학식과 교양과 인격을 겸비한 사람으로서 영세한 후부터는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해로 인하여 마을을 떠난 그는 전라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만년에야 전주의 대성 지방 신리골에 정착하게 되었다. 신리골에 살면서 그는 신자들에게나 비신자들에게나 차별 없이 상대했고, 또 교리를 밝혀 소상하게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예의범절도 잘 가르쳐 주었음으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았다.
그런데 전라도 일대에도 박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자, 그는 심부름꾼으로 오사영을 전주로 보내어 정세를 알아보게 하였다. 오사영은 비신자인데다가 고을의 관직에 있는 자였으므로 전주 포청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고, 또 자원하여 신자들을 도와 성심껏 협조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떠난 지 이틀이 지나도 아무런 전갈이 없자 정 바르톨로메우스는 조금은 안심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12월 3일 저녁 포졸들이 두 패로 나눠서 한 무리는 성지동 마을로 들어가 조화서 베드로(Petrus)와 그의 아들 조윤호 요셉 그리고 이명서 베드로를 체포하고, 다른 한 무리는 대성 마을로 침입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근처 주막으로 끌려가 성지동에서 체포된 다른 세 명과 만나게 되었다. 다음날 일곱 사람은 지방 감사의 집까지 압송되어 갔는데,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감사 집에 도착해서는 즉시 창고에 갇혀 있다가 얼마 후 불려나와 고문을 받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정 바르톨로메우스가 유혹에 넘어가 배교할 듯 했었는데, 조화서 베드로가 격려하여 다시 생각을 돌리고 마음을 잡아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정 바르톨로메우스는 순간적이나마 마음이 약해졌음을 참회하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용감한 마음으로 온갖 고문을 잘 이겨냈다. 그는 전주 숲정이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했다. 이때가 1866년 12월 13일이요,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6. 정원지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鄭--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농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6-1866년 한국
정원지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정 베드로, 정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정원지 베드로 자료
성 정원지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진잠의 어느 열심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일찍이 공주에서 순교하였기 때문에 그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을 떠나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살다가 체포되기 얼마 전에는 전주 완주군 소양면 성지동에 있는 조화서 베드로의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였다. 그는 여기서 결혼하여 형과 한집에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대단히 열심하고 또 지극히 착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조화서 베드로는 이 젊은이를 성의껏 지도해 주었다.
1866년 12월 3일 전라 감사가 보낸 포교와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하자 정 베드로는 마을을 몰래 빠져나와 산에서 하룻밤을 꼬박 세운 뒤, 마을 일이 궁금하여 발몬이라는 마을 뒷산마루 아래만 살피면서 정신없이 내려오다가 산마루로 오르던 포졸과 정면으로 마주쳐 꼼짝없이 체포되었다. 그는 조 베드로 일행과 구진포리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전주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효성이 지극하였기에 노모를 생각하다가 처음에는 신자임을 부인하였으나, 조 베드로 등의 위로와 격려로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교우임을 똑똑히 밝히게 되었다. 감사 앞에 끌려가 교리를 가르쳐 준 선생들을 대라고 하자, 그는 유일한 스승은 천주교를 믿다가 이미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 한 분뿐임을 확실히 밝혔다.
자기 아버지가 이 교를 신봉하다가 죽었는데도 같은 교를 믿는다고 해서 놀라는 포졸들에게 그는 “나는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를 만나 뵙기 위해서라도 성교를 충실히 따를 것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
그 후 그는 옥에서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전하였다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마시오. 천국에서 우리가 서로 만날 때가 오리니 그날을 기다립시다.”
갇힌 지 9일이 지난 12월 13일 정 베드로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전주 숲정이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 집행을 위해 모든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동안 포청의 관리 하나가 술에 취하여 죄수들을 희롱하며 “죽어 천당은 무슨 놈의 천당이냐?”고 하며 하늘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이때 그는 머리를 번쩍 들고 “몰상식한 놈 같으니, 그래 너는 네 아버지, 네 어머니를 저주하느냐?”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않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스물 한 살의 젊은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7. 정의배 마르코
- 가톨릭 성인 이름
丁義培 Mark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5-1866년 한국
정의배 마르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꼬, 마르꾸스, 마르쿠스, 마크, 말구, 정 마르코, 정마르코.
정의배 마르코 자료
성 정의배 마르코(Marcus)는 서울 창동의 어느 양반집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어질고 진실하며 행동이 신중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은 유학을 숭상하였기에 오로지 사서오경을 외우며 과거공부에만 전념하였다. 과거 공부를 마친 후 서울의 어느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살다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자식도 없이 홀로 생활하였다.
1839년에 그는 우연한 기회에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와 모방(Manbant, 羅),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순교하는 모습을 새남터에서 보게 되었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와서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전하며 모욕과 멸시와 학대를 달게 받고 있으니 그들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바라고, 누구를 사랑하는 것인가? 자기들을 죽이려고 날뛰며 악의에 찬 조소를 퍼붓는데 오히려 웃는 낯으로 불쌍히 여기지 않는가? 이처럼 그의 의문은 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고, 자기가 닦아온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제껏 나는 천주교 신자가 되면 착한 일을 할 수 없는 자로 보았었지만, 이제 알고 보니 진정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영세 입교하여 조선 교회의 훌륭한 일꾼이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1845년에 입국한 페레올(Ferreol, 高) 주교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는데, 죽는 날까지 모든 열성과 신심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기에 ‘산 성인’이라 할 정도로 신자들을 잘 이끌고, 예비자들을 잘 준비시키며, 병자들을 방문하고, 먹을 것조차 없어 고생하면서도 버려진 고아들을 데려다가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였는데 그에게 값진 옷이라곤 한 벌도 없었고, 군데군데 깁고 또 기운 헌 옷을 입었고, 조금 들다가 그만 밥상을 물리곤 하였다. 그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를 자기 집에 모셔 들여 조선말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자주 “순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로다. 반면 자기 집에 앉아 안일하게 죽는 것은 진정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1866년 2월 25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처음에는 감옥에 갇혔으나 의금부로 넘겨졌고, 3월 5일에는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같은 달 11일에 처형되었다. 사형 길에 나선 정 회장은 눈을 내리 뜨고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윽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11일로 바로 그의 72회 생일날이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8. 정하상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丁夏祥 Pau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신학생,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5-1839년 한국
정하상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정 바오로, 정바오로, 파울로, 파울루스, 폴.
정하상 바오로 자료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us)는 남인 양반의 후예로 1795년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인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丁若鍾, Augustinus)로 1801년 신유박해 때 맏아들인 복자 정철상 가롤로(丁哲祥, Carolus)와 함께 순교하였고, 어머니인 성녀 유 체칠리아(柳 Caecilia)는 기해박해의 여파로 1839년 11월 순교하였다. 아버지가 순교할 당시 겨우 일곱 살이었던 성 정하상 바오로와 누이동생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丁情惠, Elisabeth)은 어리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함께 풀려났다.
그러나 가산이 모두 몰수당해 살길이 막연해지자 양근 지방 마재에 있던 그의 숙부 정약용 요한(丁若鏞, Joannes)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그런데 숙부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가 있던 때였기에 천주교를 믿지 않던 친척들로부터 갖은 천대와 냉대를 받았지만, 성 정하상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충실히 배웠다. 하지만 외교인들 틈바구니에서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어려워 20살 때에 서울로 올라와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趙曾伊, Barbara)의 집에 머물면서 목자 없는 조선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 재건을 모색하였다.
그는 함경도에 귀양 가 있던 한학자 조동섬 유스티노(趙東暹, Justinus)에게 학문을 배우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양반 신분을 감추고 어떤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살다가 북경에 가서 세례와 견진과 성체 성사를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다.
그는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劉進吉, Augustinus)와 성 조신철 가롤로(趙信喆, Calolus) 그리고 강진에 유배 가 있는 삼촌 정약용의 자문과 후원으로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 등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 전교회에 위임됨과 동시에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되었다. 마침내 그는 유방제 파치피코(劉方濟, Pacificus) 신부를 조선으로 모셔 들이고, 성 모방 베드로(Maubant Petrus) · 성 샤스탕 야고보(Chastan Jacobus) 신부와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Imbert Laurentius) 주교까지 모셔 들여 자신의 집에 모셨다.
성 정하상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긴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가 그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던 중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다. 이때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여 “상재상서”(上宰相書, 재상에게 올리는 글)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조선교회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이다. 그는 이 글 속에서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 때문에 조정에서까지 이 글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기해박해가 한창이던 1839년 7월 11일, 포졸들이 성 정하상 바오로의 집에 달려들어 그와 그의 노모와 누이동생을 잡아 포도청으로 압송한 후 성 정하상 바오로와 4대 조상까지의 이름을 명부에 올리고 옥에 가두었다. 이튿날 “상재상서”를 포장대리에게 주니 사흘 후 문초가 시작되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무서운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나갔고 배교하라는 엄명 또한 단호히 거절하였다.
며칠 뒤 옥에서 다시 끌려 나와 톱질형을 받아 살이 떨어져 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또한 그는 성 샤스탕 야고보와 성 모방 베드로 신부의 은신처를 대라는 심문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후 두 신부가 자수한 다음 재차 심문을 받고 세 차례의 고문을 더 받았다. 그리하여 1839년 9월 22일, 서양 신을 나라에 끌어들인 모반죄와 부도(不道)의 죄명을 쓰고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성 정하상 바오로의 유해는 순교 후 고향인 양근의 분원(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인근 배알미리(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에 묻혔다. 그리고 1981년 10월 파묘되는 과정에서 남은 유해를 거두어 수원교구 하남 신장성당에 안치했다가 그해 12월 31일 천진암 성지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9. 정화경 안드레아
- 가톨릭 성인 이름
鄭-- Andrew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7-1840년 한국
정화경 안드레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정 안드레아, 정안드레아.
정화경 안드레아 자료
성 정화경 안드레아(Andreas)는 충청도 정산 고을에 사는 부유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본성이 순박하고 양순한 반면에 머리가 둔하고 지나치게 고지식하였다. 그래서 친구들이 천주교 봉행을 방해하자 고향을 떠나 여러 번 이사를 하며 피난처를 마련하느라고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처럼 그는 대단히 순박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정 안드레아는 교회 일에 참여할 나이가 되자 자주 서울을 오가며 자기 힘자라는 대로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기 때문에 교회 상황과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의 근황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조정에서 3명의 서양인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배교자 김여상은 필요한 인원만 주면 자기가 그들을 잡아 바치겠다고 장담하고는 지방으로 내려가 옛날 친구였던 자들을 찾아가 헛소문을 다음과 같이 퍼뜨렸다.
“서울에서는 똑똑한 교형들이 대관들 앞에서 성교회의 진리를 폈소. 천주의 은혜로 관장과 대신들까지도 눈을 떠서 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적당히 설명해 주기만 하면 모두가 받아들일 마음이 되어 있소. 자유의 때가 드디어 이르렀소. 그리고 주교님이나 신부님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온 조정이 분명히 천주교에 들어 올 것이오.”
이 말에 속아 넘어간 신입 교우들은 정 안드레아가 주교님의 처소를 알 것이라고 말하였고, 김여상은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도 똑같은 거짓말을 하였다.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춤을 출 듯이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하룻밤을 궁리하고 나서 자기 혼자 소식을 알아보러 가겠다고 말하여 그는 김여상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정 안드레아가 주교의 거처에 이르렀을 때 앵베르 주교는 “내 아들아, 너는 마귀에게 속아 넘어갔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미 배교자가 문 앞에 와 있다는 것과 이제 도망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신자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자수하였다.
주교가 붙잡힌 뒤에도 정 안드레아는 멀지 않아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리라는 포교들의 말에 속아 넘어가 몇몇 교우들의 집을 가르쳐 주어 그 신자들도 붙잡히게 되었다. 포교들은 또다시 그를 이용하여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도 찾아내려 하였으나, 아무리 바보 같았던 그도 마침내 원수들의 모략을 간파하여 지금까지 속아왔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신부들을 비밀리에 찾아보고 위험이 신변에 박두했다는 것을 일러주었으며, 고해성사를 받고 스스로 나아가 자수하겠다고 하였으나 신부들이 말렸기 때문에 몸을 피하여 숨을 곳을 찾았다.
그 후 정 안드레아는 배교자 김여상의 눈에 띄게 되어 1839년 7월에 포교들에게 잡혔다. 정 안드레아는 주리를 틀리고, 대꼬챙이로 찌르는 형벌을 받았으며, 100대의 치도곤, 매질 등의 형벌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 받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다섯 달 동안 옥에 갇혀 괴로운 형벌과 고통을 당하다가, 마침내 1840년 1월 23일에 3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0. 조신철 가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趙信喆 Charl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복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6-1839년 한국
조신철 가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조 가롤로, 조가롤로, 카롤로, 카롤루스, 칼.
조신철 가롤로 자료
성 조신철 카롤루스(Carolus, 또는 가롤로)는 강원도 회양에 살던 외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에 모친을 잃고,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부친이 탕진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집을 떠나 절에 들어가 몇 해를 지냈다.
그 후 절에서 내려와 이집 저집 다니며 머슴살이를 하다가, 나이 23세 때에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정직하고 용감했던 그는 사신의 종복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칭찬을 듣게 되었고, 여러 번 북경을 왕래하는 동안 모은 돈으로 아버지와 형제들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이 때 사신을 따라다니던 유진길과 정하상이 그의 착실함을 보고 장차 조선 교회의 큰 일꾼으로 만들고자 하는 생각에서 그를 입교시켰다. 얼마 후 그는 유진길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신부들을 만나보고 성세와 견진과 성체성사를 받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조선에 돌아온 그는 기쁨 중에 겸손과 인내와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생활하였고, 애긍시사로 새 신자들을 도왔으며, 아내를 권유하여 입교시켰으나 불행히도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조 카롤루스는 열심한 신자와 재혼하여 살았는데 그 부인이 곧 최영이 바르바라(Barbara)이다.
비록 그는 비천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성직자들이 입국하여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조선말을 잘 모르던 모방(Manbant, 羅) 신부의 통역관이 되어 지방 전교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39년 봄 북경에서 귀국하던 어느 날 꿈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는데, “금년에는 순교하는 은혜를 너에게 주노라”하시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셨다고 한다. 서울에 돌아와 보니 과연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 해 7월 어느 날 조 카롤루스가 외출한 사이에 포교들이 가족들을 잡아가고 말았다. 마침 집으로 돌아온 카롤루스는 곧 그들의 뒤를 따라 포도청으로 달려가서 스스로 잡혀온 사람들의 가장이라고 말하여 고문을 받게 되었다.
포장이 그의 집에서 압수한 종교서적과 묵주, 성패의 유래를 물으니 카롤루스는 자신이 북경에서 구하여 온 것이라고 대답하였을 뿐 그 밖의 물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에 형리들은 그의 팔과 다리를 묶어서 대들보에 매달고 닥치는 대로 매질을 하였으나 역시 별다른 말을 듣지 못하였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잡히자, 조 카롤루스는 이들과 함께 의금부로 보내져서 3일간의 고문과 매질을 받고 드디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그는 형장으로 싣고 갈 수레를 타기 전에 옥리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국으로 먼저 가서 기다릴 터이니 모두 용기를 내서 따라오도록 하라고 나의 가족들에게 전하여 주시오” 하며 희색이 만면하여 출발하였고, 가는 도중에도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서소문 밖에 이르러 수레 위의 십자가로부터 풀려 내려질 때, 그는 많은 구경꾼들 속에 끼어 있던 외인 친척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미소로 인사를 한 후 1839년 9월 26일 44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1. 조윤호 요셉
- 가톨릭 성인 이름
趙-- Josep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농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8-1866년 한국
조윤호 요셉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세푸스, 요제프, 조 요셉,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요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조윤호 요셉 자료
성 조윤호 요셉(Josephus)은 조화서 베드로(Petrus)의 아들로 충청도 신창에서 태어났고, 부친을 따라 1864년경부터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하였으며,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부인과 함께 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깊은 신심과 세심하리만큼 성실한 수계생활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 또 젊은 조 요셉은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과격하고 용감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1866년 12월 4일 포졸들이 아버지 조 베드로를 체포하여 집에서 심문을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부친 베드로는 아들에게 멀리 피하라고 당부하자 요셉은 “아버지, 저더러 이제 어디로 가란 말씀이십니까? 저도 같이 묶여 가기가 소원입니다. 이제껏 믿어온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아니하게 저도 잡혀가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되는 날을 그 얼마나 기다렸는지요.” 하며 아버지와 함께 잡혀 압송되었다.
전라 감사 앞에 불려나간 요셉은 먼저 문초를 받은 아버지가 배교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배교하라는 감사의 말에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가 처리하실 줄 압니다. 저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배교할 생각이 없으니 통촉하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감사가 성교회의 도리를 가르쳐 준 사람과 서양 책을 어디에다 숨겼느냐고 묻자 그는 “성교 도리를 가르쳐 준 분은 1839년에 치명하신 할아버지이며, 책은 가진 것이 한 권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감사는 다시 한 번 이 젊은이를 배교시켜 보려고 시도했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포졸들은 사형장으로 향하는 긴 여행 중에서까지 배교하면 잃어버린 재산을 모두 다시 찾아주겠다고 하면서 그를 꾀어보았다. 그러나 “나의 생사를 결정짓는 것은 당신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말은 그만 두십시오” 하고 거절했다.
1866년 12월 23일 포졸들은 그에게 큰 칼을 씌워 먼 길을 뛰어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그는 기진맥진하였다. 형장에 도착하자 관리가 사형 선고장을 그 앞에 가져다 놓자 그는 태연하게 서명한 후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했다. 이에 기가 질려버린 감사가 음식 맛이 어떠냐고 묻자, 요셉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음식이라 무척 맛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감사는 바지를 벗기고 엎드리게 하였다. 손을 머리 위로 묶고 양쪽에 서서 곤장을 교대로 치기 시작하였다. 곤장은 수없이 부러져 나갔고 얼마를 쳤는지 친 사람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렇게도 빳빳하던 고개가 드디어 푹 숙여졌다. 이를 본 사람들은 요셉이 죽은 줄 알았다.
그러나 요셉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뒤늦게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안 포졸은 장터로 모여든 거지 떼를 시켜 밧줄로 목을 매고 양쪽에서 당기니 숨을 거두었다. 조 요셉의 장한 순교로 그의 집은 연 3대의 순교자 가문이 되었다. 때는 1866년 12월 23일이요,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2. 조화서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趙--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농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5-1866년 한국
조화서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조 베드로, 조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조화서 베드로 자료
성 조화서 베드로(Petrus)는 수원 지방의 도마지에서 태어났고, 1839년에 순교한 조 안드레아(Andreas)의 아들이다. 부친을 잃은 뒤에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신창 땅으로 이사하여 몇 년 간을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 겸 마부로 일하였으나, 최 신부가 선종함으로써 1864년에 다시 전주 소양면 성지동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하고 착실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한 막달레나(Magdalena)를 아내로 맞아 아들 조윤호 요셉을 낳았는데, 얼마 후 부인 한 막달레나가 죽자 홀아비로 있다가 다시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그의 성격은 쾌활하면서도 겸손하고 양순했으며, 신자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켜 신자다운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
1866년 12월 5일 저녁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붙잡힌 조 베드로는 자기 집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놀란 그의 며느리가 달려 나가 자기 남편인 조윤호 요셉에게 집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하였다.
자기 아들 요셉이 집으로 들어오자 아버지는 “너는 여기에 들어와선 안 된다. 어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나 아들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면서 자기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 함께 체포되었다.
이렇게 하여 부자가 함께 묶여 전주로 향하는 도중에 여러 가지 수모와 혹심한 천대를 받았으며, 주막에서 며칠을 묵어가며 목적지인 전주에 도착한 후 곧이어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조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서도 함께 있는 다른 신자들을 격려하여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하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그는 죽인다고 협박하며 배교를 강요하는 원님에게 “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죽은 뒤 내 곧 새 세상에 가서 살게 될 것이요.”라고 응수하여 더욱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윽고 그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사형장에 도착한 조 베드로는 침착하게 죽을 준비를 한 다음 희광이에게 “이곳 처형장에서까지도 흉포한 그대여! 천주교를 좀 믿어보시오. 우리는 죽으면서도 천주교를 신봉할 것입니다”라고 한 후 성호를 긋고 나서 세찬 칼을 세 번 받고 장엄하게 순교하였다.
때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3. 최경환 프란치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崔京煥 Franci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5-1839년 한국
최경환 프란치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최 프란치스코, 최프란치스코,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최경환 프란치스코 자료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두 번째 방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부친으로 충청도 홍주군 다래골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의 계명을 지켰다.
그는 원래 성질이 괄괄해서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신앙의 힘으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사람들은 그가 본래 성질이 온순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우상숭배에 빠진 주위 사람들 속에서는 참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다.
그러나 이사를 하자마자 외교인과의 송사 문제로 가산을 탕진하게 되어 가족을 이끌고 산골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생활하다가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곳이 과천 고을 수리산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애긍시사를 하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오곤 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
기해박해가 엄습하고 또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순교토록 준비시킬 때가 된 것을 알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으나 서적은 감추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보고 조카 최 요한이 놀라서 “다른 교우들은 혐의를 받을만한 것을 모두 감추는데 이 책을 그렇게 내어 두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성물은 불경한 무리들이 더럽히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지만, 서적이야 어디 강복한 물건이냐? 군사가 전쟁 때에 병서를 참고하지 않고 언제 하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1839년 7월 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최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친절한 태도로 맞이하였고, 그의 이러한 태도에 포졸들은 안심하고 누워 잠을 잤다.
해뜰 무렵에 포졸들을 깨워 음식을 대접하고는 프란치스코와 남자들과 큰 아이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는 부인들과 젖먹이들이 따라가고, 맨 뒤에는 포졸들이 따라왔다. 때는 7월이라 찌는 듯한 더위로 빨리 걷지를 못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피곤하여 울부짖었다.
행인들은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고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그는 “형제들아 용기를 분발하라. 너희 앞을 서서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오 주 예수를 보라!”고 하며 격려하였다. 일행은 날이 저물어서야 옥에 당도하여 밤을 지냈다.
포장은 프란치스코를 두 차례나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게 하여 배교한다고 할 때까지 고문을 하게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아들 하나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안 포장은 더욱 분이 치밀어서 무지하게 매질을 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러졌다. 그는 태형 3백 40도와 곤장 1백 10도를 맞았다. 다른 많은 교우들은 석방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이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와 일가 부인 3명뿐이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 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신앙고백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4. 최창흡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崔昌洽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7-1839년 한국
최창흡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최 베드로, 최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최창흡 베드로 자료
성 최창흡 베드로(Petrus)는 서울의 중인 집안 출신으로서 1801년에 순교한 서울의 총회장 최창현의 아우이며, 자신과 같은 해에 순교한 손소벽 막달레나(Magdalena)는 그의 부인이고, 1840년에 순교한 최영이 바르바라(Barbara)는 그의 딸이다.
열세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또 형의 순교 후 집안의 파산되었으므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몇 해 동안을 신자들과 떨어져 어느 정도 냉담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신유박해가 끝난 1815년경에 다시 신자들과 가까워져 기도문과 교리를 배워 익혔다. 그리고 지난날의 자기 생활이 언제나 마음을 무겁게 하여 순교만이 자신의 잘못을 보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하여 순교하고자 하는 열렬한 원의를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는 30세경에 신유박해로 몰락한 집안인 서울 출신의 손소벽 막달레나를 아내로 맞이하여 자녀 열한 명을 낳았으나 아홉 명은 어려서 죽었다.
1821년 콜레라가 유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최창흡은 부인과 함께 대세를 받고 신자의 본분을 철저히 지켜나가 선교사들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에는 착실한 신자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이와 같이 열심히 살아가던 최 베드로와 그의 가족은 6월에 함께 잡혀 포도대장 앞에 끌려가 7회에 걸쳐 지극히 혹독한 신문(訊問)을 당하였다.
신문 중에 포장이 최 베드로에게 “네가 사도를 행하느냐?”고 묻자 베드로는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진리 가운데 악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과연 천주교를 믿습니다.” 하며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천주를 배반하라.” “못합니다.” “언제부터 천주학을 했느냐?” “어려서부터 믿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포졸들은 모두 “이 놈은 그 교의 늙은 괴수로구나” 하고 소리 지르며 욕하였다. 최 베드로는 다시 주리를 틀리고, 150도의 태형을 당하였으나 배교도 아니 하고 신자를 고발하지도 않았다.
형조로 옮겨 가서도 같은 형벌과 또 매우 혹독한 장형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한결같은 용기로 참아 받자, 바로 그날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최 베드로는 형장으로 끌려가며 옥졸에게 “여감방에 있는 내 아내와 딸에게 가서 내 운명을 슬퍼하지 말라고 전해 주게. 그것은 너무나 인성을 따른 감정이어서 진실한 신자에게 마땅치 않은 일일 것이니, 오히려 주님을 찬미하고 이러한 큰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잊지 말고 나를 따라오라고 전해 주시오.” 하고 부탁했다.
그는 수레를 타고서도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최 베드로는 옥에 갇힌 지 7개월 후인 12월 29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이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5. 최형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崔炯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4-1866년 한국
최형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최 베드로, 최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최형 베드로 자료
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던 성 최형 베드로(崔炯, Petrus)는 1814년 충청도 공주(公州)에서 스무 살에 천주교에 입교한 최인호 야고보(崔仁浩, Jacobus)와 황 안나(Anna)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살(또는 8살) 때부터 형제들과 함께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그의 형제 중 동생인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崔方濟, Franciscus Xavier)는 1836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s)와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와 함께 사제직을 준비하러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망한 신학생이었다.
그의 누이는 결혼을 거부하고 평생 동정녀로 살다가 1856년경 선종하였다. 그리고 그의 형 최수 베드로(崔燧, Petrus)는 옥중에서 신앙을 증거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절두산(양화진)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렇듯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한 그는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으나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부모를 도와 농사일이나 수공업 등의 손일을 하며 가계를 도왔다.
1836년 1월에 입국한 성 모방 베드로(Maubant Petrus, 羅) 신부는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했을 뿐 아니라 그의 형인 성 최형 베드로의 신심과 재능을 높이 평가해 복사(服事)로 선발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성 모방 베드로 신부가 순교할 때까지 2~3년간 그의 복사로 생활하며 전교에 힘썼다.
그리고 그 무렵인 1838년경(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1946년경)에 여 데레사(혹은 김 데레사)와 혼인하였다. 기해박해의 여파가 이어지던 1840년 성 최형 베드로는 아버지와 여러 신자와 함께 체포되었다. 다행히 관청까지 끌려가지는 않고 중간에 돈만 갈취당한 채 풀려났다.
1845년 1월 유학길을 떠났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어렵게 입국하여 서울에 도착하자 그를 도와 조선 입국을 애타게 기다리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와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安) 신부를 모셔오기 위해 배를 준비해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해 8월 17일 상해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사공 하나 없는 작은 목선 ‘라파엘호’를 타고 8월 31일 상해에서 출발해 풍랑을 만나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했다가 다시 배를 수리하여 10월 12일 밤 오늘날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나바위의 후미진 장소 또는 충청남도 강경읍 황산마을 인근 포구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丙午迫害)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뒤에 성 최형 베드로는 서울로 상경하여 순청동(巡廳洞, 오늘날 서울시 중구 순화동과 봉래동1가에 걸쳐 있던 마을)에 거주하며 생활하였다.
얼마간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의 복사로 활동한 그는 남대문 밖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경영하며(또는 목수 일을 하며) 어느 정도 부유하게 살았는데, 틈틈이 종교 서적을 베끼거나 묵주를 만들면서 외교인과 예비 교우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였다.
1856년 3월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가 입국한 뒤에는 여러 차례 주교를 방문해 교회 일을 도왔다.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교회 서적을 체계적으로 간행하기 위해 1861년(또는 1862년) 서울에 인쇄소를 세우고 그 책임자로 성 최형 베드로를 임명하였다. 그는 주교의 명대로 기꺼이 그 일을 맡아 여러 가지 어려움과 장애를 이겨 나가며 4년 동안 “성교일과”(聖敎日課)와 “성찰기략”(省察記略) 등의 교회 서적을 많이 간행하였다.
1863년 거처를 석정동(石井洞)으로 옮긴 그는 비록 회장은 아니었지만,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로부터 대세를 주는 권한을 받을 정도로 큰 신임을 받고 있었다.
1866년 2월 23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 서적이 적발되자 그는 사태가 위태롭게 전개됨을 알고 일단 몸을 피하였다. 하지만 이선이(李先伊)라는 밀고자가 포졸들에게 그의 집을 알려주었고,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미처 피신하지 못한 그의 아내가 혹독한 문초를 받아 피와 살이 범벅이 되면서도 끝까지 남편의 피신처를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집에 살던 14살 된 하녀가 밤중에 몰래 집을 빠져나가는 것을 본 포졸들이 그녀를 붙잡아 다그치며 곤장을 쳐서 그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냈다.
마침내 포졸들은 3월 1일 성 최형 베드로를 체포하여 온몸에 석회를 뿌리고 주먹으로 마구 때린 다음 포도청으로 끌고 갔다. 그는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죄와 사악한 책을 출판했다는 죄 그리고 다른 신자들을 선동했다는 죄 등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 선고문에는 “혹심한 곤장에도 굴하지 않고 쇠나 돌같이 고집이 세어 사교를 단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또 진리를 고백하면서 사형 선고문에 직접 서명까지 하였다. 이에 국법을 따라 마땅히 사형에 처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성실한 벗이자 함께 교회 서적을 출판하는 직무를 맡았던 성 전장운 요한(全長雲, Joannes)과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9일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얼마 후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장사지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어깨와 다리에 깊은 상처가 여럿 있었고 많은 뼈가 부서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교우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든 신앙 증거자 중에서 최형이 가장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순교 후 성 최형 베드로의 시신은 왜고개(현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5월 28일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Joannes)의 유해와 함께 발굴되어 명동 주교관으로 옮겨졌다가 6월 17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968년 시복식을 계기로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해실로 옮겨 안치하였다. 성 최형 베드로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6. 클리체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lic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38년 밀라노
클리체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리체리오, 글리체리우스, 글리케리오, 글리케리우스, 클리체리우스, 클리케리오, 클리케리우스.
클리체리오 자료
성 클리케리우스(또는 클리체리오)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교였다. 그는 글리케리우스(Glycerius, 또는 글리체리오)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7. 테오도로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dor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20년
테오도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오도로, 데오도루스, 떼오도로, 떼오도루스, 테오도루스.
테오도로 자료
로마의 군인이었던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또는 테오도로)와 그의 어머니인 성녀 필리파(Philippa)는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황제 치하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8. 테오피스토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pis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8년경
테오피스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테오피스또, 테오피스뚜스, 테오피스투스.
테오피스토 자료
불확실한 전설이긴 하지만 그에 따르면 성 에우스타키우스(Eustachius)는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에서 플라키두스(Placidus)라는 이름을 가진 로마의 장군이었다. 그는 로마 근처 티볼리(Tivoli)에서 사냥을 하던 중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잡으려던 수사슴의 뿔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선명한 십자고상이 달려 있었고, 사슴을 통해 “나는 네가 알지는 못하지만 이미 네가 존경하고 있는 그리스도”라고 말을 들었다. 이때 그는 가족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자신의 이름을 에우스타키우스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개종 이후 그의 신앙은 계속되는 시련을 견뎌내야만 했다. 마치 구약성경의 욥(Job)처럼 순식간에 세속적인 부를 잃고, 집과 나라를 떠나야 했으며, 가족들과도 떨어져 살아야 하는 불행한 일들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다시 군대에 소집되어 전쟁에 나가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승전을 기념하는 축하식에서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지내기를 거부해 그와 그의 가족은 처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성 에우스타키우스는 아내인 성녀 테오피스테(Theopistes) 그리고 두 아들인 성 아가피투스(Agapitus)와 성 테오피스투스(또는 테오피스토)와 함께 온가족이 황소 모양의 불타는 청동 가마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이들은 서방교회뿐만 아니라 동방교회에서도 예로부터 공경을 받아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9. 프란치스코 데 포사다스
- 가톨릭 성인 이름
Francis de Posada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설교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644-1713년
프란치스코 데 포사다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프란치스코 데 포사다스 자료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Cordoba)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 데 포사다스(Franciscus de Posadas, 또는 프란체스코 데 포사다스)는 가난한 채소장수인 부모 밑에서 늘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행복하게 자랐다. 그러나 부친이 사망하고 모친이 재혼하면서 새아버지는 그가 성직을 위해 공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수도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소년 노동자로서 일터로 보내졌다. 그가 처음 만나 고용주는 매우 인색했고, 그의 모든 희망은 다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열심히 일하며 주인이 난폭하게 대할 때에도 늘 인내와 성실로 대해 주인마저 감동시켰다. 마침내 그 주인은 프란치스코 데 포사다스의 인품이 더욱 훌륭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 쉬는 시간에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편의를 보아주었다.
그러던 중 새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19살이 된 프란치스코 데 포사다스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입회 초에 수도생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기보다 동료들의 오해와 질투 때문에 그다지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여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설교 직무를 시작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지막 40여 년 동안 제2의 빈첸시오 페레리우스(Vincentius Ferrerius, 4월 5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훌륭한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에스파냐의 남서부 전역을 순회하면서 설교하고 성사를 주었으며, 뛰어난 모범을 보여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또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겸손을 실천하였고, 직무를 봉사의 기회로 활용할 줄 알았다.
또한 그는 “정결의 승리”를 비롯하여 “성 도미니코(Dominicus)의 생애”, “윤리적인 권고” 등을 저술하였다. 그는 1818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0. 프리바토
- 가톨릭 성인 이름
Priva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프리바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쁘리바또, 쁘리바뚜스, 프리바또, 프리바뚜스, 프리바투스.
프리바토 자료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와 성 프리바투스(또는 프리바토)는 소아시아 중부 프리지아(Phrygia)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의 순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1. 한이형 라우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韓履亨 Lawrenc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9-1846년 한국
한이형 라우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오,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한 라우렌시오, 한라우렌시오.
한이형 라우렌시오 자료
성 한이형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는 충청도 덕산에 살던 양반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헌신적이며 열성이 지극하여, 14세 때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지 몇 주일 후 참으로 비상한 열심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는 여러 시간 동안 십자가 앞에서 묵상하였고, 전에 범한 죄를 진실한 마음으로 통회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주일과 축일에는 집에서 10여리 밖에 있는 신자 마을에 가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는데,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는 21세 때에 신자 처녀와 혼인하고 고향을 떠나 경기도 양지고을 은이 마을로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신심만 두터운 것이 아니었다. 이들 부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옷이 남루한 사람을 만나면 자기 옷을 주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늘 사람들이 몰려와 주막집 같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지나치게 애긍시사를 한다고 하면 그는 “헐벗은 이웃을 입히고 굶주린 이를 먹이는 것은 거저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오면 천주께서 이자를 듬뿍 붙여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라우렌티우스는 약간의 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무리 일이 바빠도 주일 파공을 철저히 지켰으며, 밤에는 날마다 한 시간 동안 묵상하였고, 사순절에는 매일 단식을 하였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조선에 들어와 그의 이러한 신덕을 보고는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46년의 병오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얼마동안 숨어서 지내기로 하였다. 그러던 중 김대건 신부가 잡힌 후 포졸들은 집주인이 이신규 토마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잡기 위해 먼저 그의 삼촌을 잡아 조카가 있는 곳을 물으니, 이 토마스의 삼촌이 포졸들을 은이 마을로 안내하였다. 포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그 동네 신자들은 도망한 뒤였으므로 그들은 라우렌티우스의 집을 둘러싸고 온 가족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내 놓아주고 라우렌티우스만을 포승으로 묶고 조롱하며 닥치는 대로 때렸다. 특히 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대들보에 매어단 후 물매질을 하면서 배교하고 동교인들을 대라고 협박하였다.
라우렌티우스가 이를 거절하자 포졸들은 그의 두 다리를 결박하고 그 사이에 깨어진 접시며 질그릇 조각을 끼우고 굵은 밧줄을 발목에 걸쳐서 앞뒤로 잡아당겨 살을 톱질하듯 하였다.
그러나 라우렌티우스가 이러한 잔학한 고문을 잘 참아내며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으므로 포졸들도 이에 감동하여 다른 신자들에게 “당신들이 정말 천주교 신자가 되려면 한이형과 같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 후 포졸들은 그를 서울로 압송하였는데, 포졸들이 말을 태워 주겠다고 하여도 이를 거절하였고 또 상처 때문에 신발을 신을 수가 없어서 백 여리나 되는 산길을 맨발로 걸어 서울까지 갔다. 그는 서울에서도 전과 같은 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다가 순교하였는데, 그의 죽음은 교수형 혹은 장살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때는 1846년 9월 20일(음력 8월 1일)이요,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2. 한재권 요셉
- 가톨릭 성인 이름
韓-- Josep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6-1866년 한국
한재권 요셉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한 요셉, 한요셉, 호세.
한재권 요셉 자료
성 한재권 요셉(Josephus, 또는 베드로 Petrus)은 충청도 진잠에서 독실한 신자인 한언적 도미니코(Dominicus)와 모친 성주 배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온순한 성격과 굳은 신앙을 지녔던 그는 서 막달레나(Magdalena)와 혼인하였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충청도 진잠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부친은 전라도 고산 다리실로 피신했고, 그 후 그는 가족을 이끌고 대성동 신리 마을로 가서 살았다. 한 요셉은 진잠에서 회장으로 활동했으나 이곳의 회장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회장님’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성실함과 착한 성품을 칭송하였다.
1866년 12월 3일 저녁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에 그는 장작을 패고 있었기에 포졸들에게 쉽게 체포되었다. 한 요셉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전주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는 옥중의 여러 가지 심문과 고문보다도 가족들의 구명 운동과 배교 강요 때문에 심한 번민을 하였으나, 끝내는 순교의 월계관을 받아썼다.
그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3. 허협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許- Pau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5-1840년 한국
허협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오로, 바울로,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폴, 허 바오로, 허바오로, 허임.
허협 바오로 자료
성 허협 바오로(許-, Paulus)는 훈련도감의 군인으로서 온 집안 식구와 함께 천주교 계명을 열심히 지키던 뛰어난 신자였다. 그는 기해년(1839년)의 박해가 한창이던 8월에 잡혀 포도대장에게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더 심한 형벌을 받게 된 것은 나라의 녹을 먹는 군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그는 모진 형벌을 받고도 신앙심에 있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나, 가혹한 형벌이 몇 주일이나 계속되자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살려달라고 하며 배교하겠다는 말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그렇게 석방되어 나간 성 허협 바오로는 곧 후회하고 자기의 과실을 뉘우친 다음, 다시 재판관을 찾아가서 “나는 죄를 지었으나 지금은 그걸 뉘우칩니다. 입으로는 배교하였으나 마음으로는 신자였고 지금도 신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잘못을 통회하여 다시 고문을 받겠다.”라고 말하자, 화가 치민 포장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몹시 괴롭혔다.
재판관은 “말로 취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네가 뉘우친다는 표를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라고 말하더니, 대소변이 가득 찬 통을 가리키며 “네가 참으로 뉘우친다면 여기 사발이 있으니 저 통에 있는 것을 떠 마셔라” 하고 명령했다.
잘못을 크게 뉘우친 성 허협 바오로는 서슴지 않고 그것을 한 사발 푹 떠서 단숨에 마시고 또 두 번째 사발을 마시려고 하자, 이번에는 옥졸들이 깜짝 놀라며 “그만둬라. 그만둬!” 하며 그를 말렸다고 한다.
그런 다음에는 십자가를 내어놓으면서 “네가 천주교를 정말로 배반하기 싫거든 엎드려서 십자가에 절하라”고 명령하였다. 성 허협 바오로는 꿇어앉아 이마를 땅에 조아리며 얼마 전에 입으로 배반한 잘못을 뉘우치며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흠숭하고 예배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마음은 용기로 가득 찼고 마음의 갈등도 가라앉았다. 그 후 그는 치도곤 130대를 맞은 후유증 때문에 포청의 옥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840년 1월 30일(음력 1839년 12월 26일)이고,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4. 현석문 가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玄錫文 Charl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7-1846년 한국
현석문 가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현 가롤로, 현가롤로.
현석문 가롤로 자료
성 현석문 카롤루스(Carolus, 또는 가롤로)는 1801년에 순교한 현계흠 베드로(Petrus)의 아들이고, 기해박해 때에 순교한 현경련 베네딕타는 그의 누님이며, 서울의 중인 계급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김 테레사(Teresia)와 아들 은석이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선교사와 교우들을 위한 삶이었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 이후 조선 땅에 성직자가 한 명도 없을 때, 그는 유진길, 정하상 및 조신철 등과 의논하여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영입하기 위하여 중국에도 다녀왔고, 샤스탕(Chastan, 鄭) 신부의 복사로서 항상 수행하던 중에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그는 자수하려고 하였으나, 선교사들이 만류하며 오히려 살아남은 신자들을 돌보아 주는 것이 좋겠으니 숨어 다니며 세심한 주의로써 포졸들의 손에 잡히지 않게 하라고 권하자 이를 따랐다. 앵베르 범 주교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조선교회를 현 카롤루스에게 맡겼다.
그래서 그는 주교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임무를 다하기 위해 이재영이라고 하는 가명을 사용하고 다니면서, 새 신자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한편 각지로 돌아다니며 얻은 것으로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흩어진 신자들을 모아 포졸들의 수색이 거의 없는 마을로 인도하는 등 동분서주하며 맡은 바 직책을 성의껏 수행하였다.
또 앵베르 주교가 수집했던 “기해일기”를 다른 동료들과 함께 보완하여 순교자의 전기를 완성하였다. 또 신자를 북경에 보내어 선교사들과 연락을 맺어 보려고 애썼으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부제 때에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상해로 길을 떠났을 때에도 함께 수행하였다.
서울로 돌아와서 김 신부가 거처하던 석전동의 집을 자기 명의로 등기하였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위였다. 김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그 집을 버리고 다른 집을 사들여 전교자금과 성물들을 사포서동의 새 집으로 옮겼다.
이렇게 한지 며칠 뒤에 포졸들이 그를 잡으려고 전에 살던 집을 습격하였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사할 때에 현 카롤루스를 도와주고 그 후에도 2, 3명의 신자들을 새집으로 안내한 일이 있었던 짐꾼들이 사실대로 고발하여 곧 포교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 그곳에 와 있던 김임이 테레사,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카타리나(Catharina), 우술임 수산나 등도 함께 붙잡히게 되었는데, 이때가 1846년 7월 15일이었다. 이리하여 현 카롤루스는 중대한 반역 죄인으로 군문효수를 선고받아 9월 19일 새남터에서 4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5.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
- 가톨릭 성인 이름
Jose Maria de Yermo y Parr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51-1904년 멕시코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요세푸스, 요셉,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 자료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는 1851년 11월 10일 멕시코의 할모롱가(Jalmolonga)에서 변호사인 아버지 마누엘 데 예르모 이 소비냐스(Manuel de Yermo y Sovinas)와 어머니 마리아 호세파 파레스(Maria Josefa Parres)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갓난아기 때 어머니를 여읜 그는 아버지와 숙모의 보살핌 속에 어려서부터 가정교사를 두고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867년 선교 수도원에 들어가 신학 공부를 위해 프랑스 파리(Paris)로 유학을 갔고, 공부를 마치고 멕시코로 돌아온 후에는 교구사제가 되기 위해 수도 공동체를 떠나 1879년 8월 24일 과나후아토(Guanajuato) 주(州)의 레온(Leon) 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교구청에서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던 그는 건강이 악화하여 교구청 밖의 일을 보게 되었다. 자신이 담당한 지역에서 만난 가난한 이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1885년 12월 13일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숙소인 성심의 집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데 헌신할 새로운 수도회로 ‘예수 성심과 가난한 이들의 종 수녀회’(Servant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 and the Poor)을 설립했다. 1889년에는 푸에블라(Puebla)로 가서 ‘그리스도인 자비회’(Christian Mercy)를 설립해 가난 때문에 매춘에 빠진 여성들의 재활을 위해 기술교육을 시행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던 그는 1904년 9월 20일 푸에블라 데 로스 앙헬레스(Puebla de los Angeles)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1990년 5월 6일 멕시코시티(Mexico City)의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이날 시성식에서는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5월 21일)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들, 그리고 멕시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성녀가 된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Maria de Jesus Sacramentado, 7월 30일)까지 모두 27위의 멕시코인 성인이 탄생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6. 홍병주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洪秉周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8-1840년 한국
홍병주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홍 베드로, 홍베드로.
홍병주 베드로 자료
성 홍병주 베드로(Petrus)와 성 홍영주 바오로(Paulus)는 형제지간이고, 매우 유명한 가문의 자손들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Lucas)는 그들의 조부이고, 1840년 전주에서 참수당한 홍재영 프로타시우스는 그들의 삼촌이다.
그리고 아버지 홍빈영은 1801년의 지긋지긋한 난을 치르고 나서 충청도 내포평야에 있는 서산 고을 여사울이란 곳에 살고 있었다. 이 형제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은 신앙과 견실한 학식뿐이었는데, 이들은 그것을 잘 이용하여 후일 천주교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그들의 학덕과 모범적인 신자생활을 익히 알던 전교 신부들은 그들 형제를 지방의 회장으로 임명하니, 그들은 남을 가르치는 일과 약한 자를 격려하는 일과 병자를 간호하는 일 그리고 자선 사업에서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므로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도 교회의 여러 가지 증대한 일을 처리하게 했고, 또 그들은 기대에 맞게 잘 처리하여 교회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성직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면 목숨을 잃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 형제는 선교사들을 용감하게 집에 모시고 접대하였으니, 이미 그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한편 조정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김여상은 체포자 명단에 그들의 이름도 올려놓고 있다가 그해 9월에 홍 베드로와 바오로를 붙잡았다.
그러나 형제는 똑같이 순교자의 자손답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포장은 이들 형제의 배교를 단념하고 형조로 이송하였는데, 당시 형조판서 홍명주는 이들의 친척이었다.
그는 이들 형제 때문에 자신에게 무슨 해가 미칠까 두려워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그들을 배교시키되 사형언도는 내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그 부하들은 상관에게 잘 보일 생각으로 그들을 배교시키지 위해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으니, 이 형제는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입장이 되자 마침내 그들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형인 홍 베드로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같이 참수되었고, 동생인 홍 바오로는 그 이튿날에 형을 따라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는 그 당시 법에서 형제를 같은 날 죽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따로따로 형을 집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형은 42세의 나이로 1840년 1월 31일에 순교하였으며, 동생은 39세의 나이로 그 이튿날에 참수당하여 영광스런 월계관을 함께 받았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7. 홍영주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洪永周 Pau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1840년 한국
홍영주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오로, 바울로,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폴, 홍 바오로, 홍바오로.
홍영주 바오로 자료
성 홍병주 베드로(Petrus)와 성 홍영주 바오로(Paulus)는 형제지간이고, 매우 유명한 가문의 자손들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Lucas)는 그들의 조부이고, 1840년 전주에서 참수당한 홍재영 프로타시우스는 그들의 삼촌이다.
그리고 아버지 홍빈영은 1801년의 지긋지긋한 난을 치르고 나서 충청도 내포평야에 있는 서산 고을 여사울이란 곳에 살고 있었다. 이 형제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은 신앙과 견실한 학식뿐이었는데, 이들은 그것을 잘 이용하여 후일 천주교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그들의 학덕과 모범적인 신자생활을 익히 알던 전교 신부들은 그들 형제를 지방의 회장으로 임명하니, 그들은 남을 가르치는 일과 약한 자를 격려하는 일과 병자를 간호하는 일 그리고 자선 사업에서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므로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도 교회의 여러 가지 증대한 일을 처리하게 했고, 또 그들은 기대에 맞게 잘 처리하여 교회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성직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면 목숨을 잃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 형제는 선교사들을 용감하게 집에 모시고 접대하였으니, 이미 그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한편 조정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김여상은 체포자 명단에 그들의 이름도 올려놓고 있다가 그해 9월에 홍 베드로와 바오로를 붙잡았다. 그러나 형제는 똑같이 순교자의 자손답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포장은 이들 형제의 배교를 단념하고 형조로 이송하였는데, 당시 형조판서 홍명주는 이들의 친척이었다.
그는 이들 형제 때문에 자신에게 무슨 해가 미칠까 두려워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그들을 배교시키되 사형언도는 내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그 부하들은 상관에게 잘 보일 생각으로 그들을 배교시키지 위해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으니, 이 형제는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입장이 되자 마침내 그들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형인 홍 베드로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같이 참수되었고, 동생인 홍 바오로는 그 이튿날에 형을 따라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는 그 당시 법에서 형제를 같은 날 죽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따로따로 형을 집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형은 42세의 나이로 1840년 1월 31일에 순교하였으며, 동생은 39세의 나이로 그 이튿날에 참수당하여 영광스런 월계관을 함께 받았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8. 황석두 루카
- 가톨릭 성인 이름
黃錫斗 Luk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3-1866년 한국
황석두 루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황 루가, 황 루카, 황루가, 황루카.
황석두 루카 자료
성 황석두 혹은 황재건이라고도 하는 루카(Lucas, 또는 루가)는 충청도 연풍의 부유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가문을 화려하게 번영케 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열심히 글공부를 시켰고,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역시 아버지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15세에 혼인하고, 20세가 되던 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했는데, 그가 묵은 어느 주막에서 천주교 신자를 만나 성교회의 도리를 듣고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천주교 교리책을 여러 권 얻어 가지고 집을 떠난 지 3일 만에 부친에게로 되돌아갔다.
부친은 아들이 되돌아 온 이유를 알자 분노가 치밀어 아들을 마구 때리고 급기야는 작두를 마당 가운데에 놓고 아들의 목을 작두에 걸게 하였다. 그러나 황 루카가 태연히 목을 내밀자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친의 책망과 모진 매질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그는 2년 이상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벙어리처럼 살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루카는 아버지 앞에 나아가 천주교 교리책을 한번 읽어 보시라고 설득하니, 이때부터 온 집안이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를 서두르게 되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비신자들까지도 루카의 신심과 열성 그리고 이에 못지않은 그의 훌륭한 예의범절에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그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자 루카는 성교회를 위해서 자기 일생을 바칠 것을 주님께 서약하였고, 페레올 주교는 처와 별거한다는 조건 하에 루카를 사제품에 올리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교황청에서 당시 조선 땅에는 여자 수도회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후 페롱(Feron, 權) 신부의 한문 선생 겸 전교회장 일을 맡아 수행하던 황 루카는 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돕게 되었다. 그는 주교와 함께 “회죄직지”를 위해 원고를 썼고,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도와 번역 출판과 그 교정에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포졸들이 다블뤼 주교를 잡으려고 몰려오자, 다블뤼 주교는 루카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권하였다. 그러자 루카는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오늘까지 주교님을 모셔온 제가 피신하다니 될 말입니까? 그래, 주교님은 혼자 천당 가시려는 심사인가요?”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주교와 신부들과 함께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윽고 그는 1866년 3월 23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다블뤼 주교와 다른 두 신부들과 함께 보령 갈매못으로 끌려가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30일이요,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그 외 세례명 날짜로 찾기
그 외 세례명 이름으로 찾기
#■월■일세례명 #남자세례명 #세례명찾기 #천주교세례명 #피어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