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데레사 쿠데륵, 루치아, 유스티나, 총 3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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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26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3가지
9월 26일 여자세례명 목록
1. 데레사 쿠데륵
- 가톨릭 성인 이름
Teresa Couderc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805-1885년
데레사 쿠데륵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테레사, 테레시아.
데레사 쿠데륵 자료
프랑스 사브리에르의 마슬에서 태어난 성녀 테레사 쿠데륵(Teresia Couderc, 또는 데레사)은 마리 빅토리아로 영세하고, J. 테름 신부가 자기 본당에 세운 교사 봉사회에 입회하여 활동하였다.
테름 신부가 남동 프랑스의 비브레의 선교사로 파견될 때, 그는 테레사와 다른 두 자매로 하여금 라 루베쉭의 성 프란치스코 레지스 경당에서 부녀자를 위한 숙박소를 운영토록 하고, 성 레지스 수녀회의 원장으로 그녀를 임명하였다(1829).
여기서 테레사는 평신도를 위한 피정도 실시하였는데, 1834년에 테름 신부가 타계하자 예수회가 이 경당을 맡았으며, 마더 테레사가 원장으로 있는 성 레지스 수녀회원 12명을 선발하여 피정 지도에만 전념토록 하였다. 이것이 세나클에서 피정을 전담하던 성모 수녀회의 모태였다.
1838년 테레사 수녀는 원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수녀회가 재정적인 난관에 봉착했을 때, 그녀는 리옹(Lyon)에 새 수도원을 세웠고, 여생을 평수녀로 봉사하면서 지냈다. 테레사는 1970년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루치아
- 가톨릭 성인 이름
Lucy - 호칭 구분
복녀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400년경? 칼타지로네
루치아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시,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루치아 자료
루치아(Lucia)는 시칠리아(Sicilia) 섬의 칼타지로네에서 열심하고 기품 있는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하느님께서는 루치아를 어려서부터 특별히 돌보아주셨다.
그녀가 여섯 살 때 한 번은 어머니와 함께 교외에 나갔다가 무화과열매를 따기 위해 나무에 올라갔다가 갑자기 폭풍이 몰려오며 번개가 쳐 나무가 산산이 부서지고 루치아 역시 죽은 듯이 땅에 떨어진 일이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 노인이 루치아 옆에 서서 그녀를 일으켜 세우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 노인은 바로 성 니콜라우스(Nicholaus)였다.
젊은 시절 늘 영적인 삶을 갈망하던 경건한 삶을 살던 루치아는 마침내 살레르노(Salerno)에서 프란치스코회 율수 3회에 입회하여 성녀 막달레나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련자 때부터 그녀는 겸손과 순명의 모범이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에 동참하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기쁨을 얻었다.
그녀의 성덕과 명성은 널리 퍼져나갔고, 사람들은 그녀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조언을 듣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왔다. 누구도 위안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지 않았고, 많은 죄인들이 회개했으며, 경건한 영혼들은 더욱더 격려를 받았다.
오랫동안 고통스런 병을 앓던 루치아는 1400년경 9월 26일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 후 그녀의 무덤에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그녀의 높은 성덕을 증명해 주었다. 교황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년)는 그녀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유스티나
- 가톨릭 성인 이름
Justin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안티오키아
유스티나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유스띠나.
유스티나 자료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나 엣 “로마 순교록”이나 전승에 따르면,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안티오키아에 살던 이교도로서 잡귀신들을 불러 마술을 부리는 마법사였다고 한다. 그는 이런 능력 때문에 그리스,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고 심지어는 인도까지 두루 여행하면서 그의 능력을 과시하고 추종자들을 모았다.
그런데 한 이교도 청년이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교 신자로 미모의 처녀인 성녀 유스티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성 키프리아누스에게 그녀의 사랑을 완전하게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고, 성 키프리아누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마술을 동원해 예식을 거행했으나 성녀 유스티나의 굳은 신앙심 때문에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났다.
결국 그는 자기 창고에 있는 모든 도구를 동원해 성녀 유스티나를 괴롭힐 악마들을 불러냈다. 그러나 성녀 유스티나는 십자가 표지로 마귀들의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이에 그는 갑자기 자신이 무력해지면서 억누를 수 없는 어떤 무서운 힘에 압도당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자신이 오히려 위험한 지경에 빠진 것이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이때부터 악마의 도움을 구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악마가 그를 덮치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친 성 키프리아누스는 십자가를 만들어 악마의 세력에서 빠져나오는 행운을 맛보게 되자, 즉시 에우세비우스(Eusebius)라는 사제에게 달려가서 교리를 배우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는 주교 앞에서 그동안 갖고 있던 모든 마술 서적을 불태우고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희사했으며, 마침내 이교도 청년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사제가 되었고 또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선임되었다고 하고, 성녀 유스티나는 수녀원장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안티오키아의 주교였다는 성 키프리아누스가 역사적 인물로 존재한 적이 없으며 같은 이름을 갖고 널리 알려진 카르타고(Carthago)의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 주교와 혼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고 있다. 성녀 유스티나 역시 파도바(Padova)의 성녀 유스티나(10월 7일)와 혼동해서 생긴 이야기로 보인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 뒤에 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체포되어 다마스쿠스(Damascus)로 압송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성 키프리아누스와 성녀 유스티나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 앞으로 끌려나가 재판을 받았고, 니코메디아(Nicomedia, 오늘날의 이즈미트)의 갈루스(Gallus) 강 언덕에서 황제의 명으로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이때 성 키프리아누스를 찾아와 위로했던 테옥티스투스(Theoctistus)라는 신자도 함께 처형을 당했다. 그들의 시신은 매장되지 않고 6일 동안 방치되어 있었으나, 밤중에 그리스도인 선원들에 의해 로마(Roma)로 옮겨졌다. 그들의 유해는 루피나(Rufina)라는 귀족 부인의 영지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콘스탄티누스 대성당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축일은 13세기부터 보편 전례력에서 기념했으나 실존 여부에 대한 역사적 증거 부족으로 인해 1969년 전례력 개정 때 보편 전례력에서 삭제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26일 목록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주었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이유로 그들의 이름을 삭제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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