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8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리오바, 에우스토키움, 테타, 총 3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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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28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3가지
9월 28일 여자세례명 목록
1. 리오바
- 가톨릭 성인 이름
Liob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782년
리오바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리오바 자료
성녀 리오바는 웨식스(Wessex)의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그녀의 모친 에바는 독일의 사도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와는 친척 사이였다. 원래 세례명은 트루트게바였으나 흔히들 지오브게타라고 부르다가 줄여서 리오바라 불렀다.
그녀는 성녀 테타(Tetta, 9월 28일)가 원장으로 있던 윔보른(Wimborne) 수도원에서 지냈는데, 그녀의 천진난만한 성품과 온순함은 다른 수녀들의 모범이 되었다.
성 보니파티우스가 주교가 되면서 원장 수녀에게 부탁하여 독일 내의 자기 선교지역에 30명의 수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하자, 원장은 성녀 리오바를 원장으로 삼아 수녀들을 파견하였다.
그들은 프랑코니아(Franconia)의 비쇼프스하임(Bischoffsheim)에서 활동을 시작한 후 급속도로 퍼져나가 독일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그들은 조화로운 공동체, 부지런한 수녀 혹은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자매들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성녀 리오바 원장은 용모도 아름다웠고 지적 수준도 어느 성직자 못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에서 그녀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무슨 위험이나 곤란한 일이 생기면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교나 성직자까지도 그녀의 충고를 들으러 왔다. 특히 카알 대제의 부인이 된 힐데가르트(Hildegard) 왕비와는 절친한 친구 관계였다.
776년에 그녀는 다른 수녀원으로 은퇴하여 지내다가 782년 9월 28일 마인츠(Mainz) 근처 쇼른스하임(Schornsheim)에서 선종하여 풀다(Fulda)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에우스토키움
- 가톨릭 성인 이름
Eustochium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419년경 베들레헴
에우스토키움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스또치움, 에우스또키움, 에우스토치움.
에우스토키움 자료
성녀 에우스토키움은 368년경 로마 원로원 의원인 톡소티우스(Toxotius)와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의 딸로 태어나 에우스토키움 율리아(Eustochium Julia)라는 이름을 얻었다.
379년경 아버지가 사망한 후 성녀 에우스토키움은 엄격한 금욕 생활을 실천하며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는 어머니를 도왔다. 로마에서 사막의 은수자들처럼 살던 성녀 에우스토키움은 382년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가 로마에 왔을 때 어머니와 함께 그를 영적 지도자로 모시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녀의 친척은 젊은 나이에 엄격한 생활보다는 세상의 쾌락을 즐기라고 설득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성녀 에우스토키움은 384년경 평생 동정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했는데, 그녀의 갸륵한 행동에 감탄한 성 히에로니무스는 “동정을 지키는 일에 관하여”(De custodia virginitatis)라는 유명한 편지를 보냈다.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 교황이 선종한 뒤에 성 히에로니무스는 로마를 떠나 안티오키아(Antiochia)로 갔다. 384년경 언니인 블레실라(Blaesilla)가 세상을 떠나자 성녀 에우스토키움은 어머니와 동료들을 따라 영적 스승이 있는 곳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팔레스티나를 순례하고 386년에 성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이집트로 가서 니트리아(Nitria) 사막의 은수자들을 만나 그들의 생활 방식을 연구한 후 팔레스티나로 돌아와 베들레헴에 정착해 본격적인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귀족 부인이었던 성녀 바울라는 자신의 재산으로 성 히에로니무스를 도와 베들레헴에 세 개의 남자 수도원과 한 개의 여자 수도원을 세우는 데 경제적 뒷받침을 했다. 그리고 성녀 에우스토키움은 어머니와 함께 성 히에로니무스의 성경 번역을 여러 면에서 도왔다.
특히 라틴어와 고전 그리스어 그리고 히브리어를 읽을 수 있었던 성녀 에우스토키움은 성 히에로니무스의 성경 번역 작업에 큰 힘이 되었다. 그녀는 성 히에로니무스가 설립한 새로운 수도 공동체를 지도하는 어머니를 도왔고, 404년 어머니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후에는 수녀원의 원장직을 맡았다.
성녀 에우스토키움은 수녀원장으로서 어머니의 아낌없는 자선으로 인해 생긴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노력했고, 성 히에로니무스는 따뜻한 격려와 조언으로 그녀에게 힘을 보탰다.
그녀는 수녀원 개혁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417년 폭도들의 무리가 베들레헴 수도원에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고 심지어 수녀 여럿을 살해하고 수도원을 파괴한 뒤로는 다시 수녀원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인 419년경 성녀 에우스토키움은 베들레헴에서 눈을 감았다.
생전에 그녀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낸 성 히에로니무스의 글에 따르면, 그녀는 작은 육체에 큰 덕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9월 28일 목록에서 어머니와 함께 로마를 떠나 주님의 탄생 현장에 와서 스승인 성 히에로니무스의 조언에 따라 충실한 삶을 산 성녀 에우스토키움 동정녀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테타
- 가톨릭 성인 이름
Tett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772년경
테타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떼따, 테따.
테타 자료
성녀 테타는 영국 남부 도싯셔(Dorsetshire) 지방 윔보른(Wimborne)의 베네딕토회 수녀원의 원장으로서 독일의 사도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의 선교 노력을 후원하였고, 복음화를 지원하기 위해 수녀들을 파견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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