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레오데가리오, 세쿤다리오, 엘레우테리오, 제리노, 치릴로, 테오필로, 토마스, 프리모, 총 8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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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0월 2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8가지
10월 2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레오데가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eodeg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16-679년 오툉
레오데가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레오데가리우스, 레제르.
레오데가리오 자료
성 레오데가리우스(또는 레오데가리오)는 클로테르 2세(Clotaire II)의 궁정에서 자랐고, 그의 삼촌인 푸아티에(Poitiers)의 디돈(Didon) 주교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는 디돈 주교에 의해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은 후 651-653년경에 막센티우스(Maxentius) 수도원의 원장이 되어 그 수도원에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수도규칙을 도입하였다. 이 시기에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겸손한 영혼을 가진 사제로서 생활하였다.
그가 궁정에 자발적으로 갔는지 소집되어 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655년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 2세(Clovis II)가 사망하고 훗날 클로테르 3세가 될 아들이 아직 어려 왕비인 성녀 바틸다(Bathildis, 1월 30일)가 섭정을 할 때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왕비를 보좌하였다. 663년에 오툉의 주교로 임명된 후에도 그는 여왕을 계속 도왔다.
당시 오툉 교구는 완벽한 무질서 상태였다. 2년 동안 주교가 없었고 그 전에는 두 명이 주교좌를 놓고 서로 다투기까지 하였다. 그 중 한 명은 살해당했고 다른 한 명은 권력의 남용으로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래서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마을의 성곽과 주교좌성당을 재건하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설교를 통해 평화와 화합으로 이끌지 못하는 이는 정의와 두려움을 통해서 평화에로 이끈다.”라는 속담이 있었다.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매우 엄격한 주교라는 평을 듣곤 했지만 교구를 분열시켰던 파벌싸움을 화해시키고, 개혁 정책을 도입하여 모든 수도원에 성 베네딕투스의 수도규칙을 도입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유명해졌다.
성녀 바틸다가 섭정에서 물러나고 클로테르 3세가 죽자 그는 궁정 대신이었던 에브로인(Ebroin)이 후원하는 티에리(Thierry)의 동생인 어린 칠데릭 2세(Childeric II)를 왕으로 지지하였다.
결국 칠데릭 2세가 왕위에 올랐고 에브로인은 뤽세이유(Luxeuil)로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삭발 수도사가 되었고, 칠데릭 왕의 조언자가 된 성 레오데가리우스의 신랄한 반대자가 되었다.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많은 일들을 엄격하게 처리하면서 불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의 높은 지위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칠데릭 왕이 그의 삼촌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비판하여 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어느 부활절에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되는 부활 대축일 미사에 칠데릭 왕을 초대했으나 왕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왕은 술에 취한 상태로 와서 큰 소리로 무례하게 소리를 지르며 미사를 방해했지만 왕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왕의 분노를 피해 도망가기로 결정했으나 오래지 않아 붙잡혀 궁정으로 소환되어 재판을 받고 675년에 뤽세이유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675년 칠데릭 왕이 살해당하자 그의 후계자인 테오도릭 3세(Theodoric III)는 성 레오데가리우스와 에브로인을 다시 궁정으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에브로인이 오툉을 공격하였을 때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마을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항복하였다.
결국 그는 에브로인에 의해 눈이 두 눈이 뽑히는 등 잔혹한 형벌을 당한 후 숲으로 쫓겨났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는 굶주림 속에서 죽어갔으나 그를 지키던 경비병이 불쌍하게 생각하여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치료하고 돌보아주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은 에브로인은 몇 년 후 칠데릭 왕이 성 레오데가리우스와 그의 형 성 게리누스(Gerinus, 10월 2일)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왕에게 주장하였다.
결국 성 게리누스는 돌에 맞아 죽었고,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고문을 당한 후 불구자가 되어 노르망디(Normandie)에 있는 페캉(Fecamp)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그가 자신의 형 성 게리누스의 죽음에 관해 어머니께 보낸 편지가 전해지고 있다.
2년 후 에브로인에 의해 궁정에 소환된 그는 주교좌에서 축출되었고, 그의 무죄 주장에도 불구하고 적대자들에 의해 아르투아(Artois) 부근의 숲에서 살해되었다.
로마 순교록은 그를 복자와 순교자로 호칭하고 있고, 성 레제르(Leger)로 널리 알려져 공경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그에게 이러한 영예가 부여되었는지에 대해 학자들은 많은 의심을 갖고 있다. 예술 작품에서 그는 눈이 도려내어지고 송곳으로 뚫린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는 시각 장애인의 수호성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세쿤다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Secund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세쿤다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꾼다리오, 세꾼다리우스, 세쿤다리우스, 쎄꾼다리오, 쎄꾼다리우스.
세쿤다리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2일 목록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초기 박해 중에 시리아(Syria)의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순교한 성 프리무스(Primus)와 성 키릴루스(Cyrillus) 그리고 성 세쿤다리우스(또는 세쿤다리오)의 이름을 전해 주었다. 하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 더는 그들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엘레우테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leuth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니코메디아
엘레우테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엘레우떼리오, 엘레우떼리우스, 엘레우테리우스.
엘레우테리오 자료
성 엘레우테리우스(또는 엘레우테리오)는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한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 지역의 니코메디아(오늘날의 이즈미트 Izmit)에서 로마 군대의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전에 불이 났을 때, 그리스도인이었던 성 엘레우테리우스와 많은 동료가 궁전에 불을 질렀다는 누명을 쓰고 황제의 명령에 따라 잔인하게 학살당한 일이 있었다.
어떤 이는 칼에 맞아, 어떤 이는 화형으로, 어떤 이는 바닷속에 던져 익사시키는 방법으로 희생되었다. 성 엘레우테리우스는 그들 가운데 유일한 장교이자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더 잔인한 방법으로 천천히 고문을 당하다가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2일 목록에서 니코메디아에서 순교한 성 엘레우테리우스의 이름만 간단히 언급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제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Ger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76년 아라스
제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리노, 게리누스, 제리누스.
제리노 자료
성 게리누스(또는 제리노)는 성 레오데가리우스(Leodegarius, 10월 2일) 주교의 형으로 궁전 행정관인 에브로인(Ebroin)의 명령에 의해 프랑스의 아라스 근교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치릴로
- 가톨릭 성인 이름
Cyri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치릴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치릴로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2일 목록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초기 박해 중에 시리아(Syria)의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순교한 성 프리무스(Primus)와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 그리고 성 세쿤다리우스(Secundarius)의 이름을 전해 주었다. 하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 더는 그들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테오필로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phi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50년 불가리아
테오필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떼오필로, 떼오필루스, 테오필루스.
테오필로 자료
불가리아 태생의 성 테오필루스(또는 테오필로)는 소아시아 지방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성화상 반대론자인 이사우리아(Isauria) 왕조의 레오 황제의 정책을 공공연하게 반대함으로써 황제에 의해 추방되었고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토마스
- 가톨릭 성인 이름
Thom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218-1282년 헤리퍼드
토마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마, 토머스.
토마스 자료
영국 잉글랜드(England)의 헤리퍼드의 주교이며 토마스 켄틀루프(Thomas Cantelupe)라고도 불리는 성 토마스는 노르만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서 헨리 3세의 무관인 바론 윌리엄 켄틀루프의 아들이다. 그는 잉글랜드 버킹엄셔(Buckinghamshire)에서 태어나 삼촌인 우스터(Worcester)의 월터(Walter) 주교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 후 토마스는 부친과 함께 1245년의 리옹(Lyon) 공의회에 참석했는데, 아마도 그 이후에 사제로 서품된 듯하다. 그 후 그는 오를레앙(Orleans)과 파리(Paris)에서 법률을 공부하였고, 옥스퍼드(Oxford)에서는 교회법을 교수하였으며 1262년에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정의와 융화를 바탕으로 직무를 수행하였으나 시몬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의 죽음을 계기로 파리로 은퇴하였다가 1274년에 헤리퍼드의 주교로 착좌하였다. 그는 교구의 개혁을 조심스럽게 단행하였고, 속권에 의해 유린된 교회의 권리를 회복시켰으며 참으로 지혜롭게 교구를 지도하였다.
그의 만년은 주로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인 토마스 존 페크햄(Thomas John Peckham)과의 교회법적 논쟁으로 보냈는데, 1282년에는 그 대주교에 의하여 파문 처분을 당하였다. 토마스는 이 사건을 교황에게 상소하기 위하여 로마(Roma)로 가던 중 몬테 피아스코네(Monte Fiascone)에서 서거하였다. 그는 1320년에 교황 요한 22세(Joannes XXII)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프리모
- 가톨릭 성인 이름
Pri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프리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쁘리모, 쁘리무스, 프리무스.
프리모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2일 목록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초기 박해 중에 시리아(Syria)의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순교한 성 프리무스(또는 프리모)와 성 키릴루스(Cyrillus) 그리고 성 세쿤다리우스(Secundarius)의 이름을 전해 주었다. 하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 더는 그들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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