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4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마르치아노, 마르코, 베드로, 베드로니오, 암몬, 카이오, 퀸시오, 크리스포, 프란치스코, 히에로테오, 총 10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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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0월 4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0가지
10월 4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마르치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마르치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시안, 마르치아누스, 마르치안, 마르키아노, 마르키아누스.
마르치아노 자료
성 마르코(Marcus)와 그의 형제인 성 마르키아누스(Marcianus, 또는 마르치아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이집트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셀 수 없이 많은 이들과 함께 순교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다른 순교자 그룹과 중복된 듯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르코
- 가톨릭 성인 이름
Mark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마르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꼬, 마르꾸스, 마르쿠스, 마크, 말구.
마르코 자료
성 마르코(Marcus)와 그의 형제인 성 마르키아누스(Marcianus)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이집트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셀 수 없이 많은 이들과 함께 순교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다른 순교자 그룹과 중복된 듯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50년 다마스쿠스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자료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주교인 성 베드로(Petrus)는 이슬람교가 그 지역을 점령했을 때 모하메드를 반대하는 설교를 한 이유로 이슬람교도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를 체포한 사람들은 그를 고문하고 장님으로 만들고 십자가형에 처한 뒤 결국 참수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베드로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etron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50년경 볼로냐
베드로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로니우스, 페트로니오, 페트로니우스.
베드로니오 자료
성 베드로니우스(또는 베드로니오)는 리옹(Lyon)의 주교인 성 에우케리우스(Eucherius, 11월 16일)가 쓴 편지의 내용으로 보면,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에 로마의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직으로 나아가기 위해 높은 사회적 신분을 포기했다고 한다.
5세기에 전기작가로 활동한 마르세유(Marseille)의 겐나디우스(Gennadius)가 쓴 “저명한 남자들”(De Viris Illustribus)에 따르면, 성 베드로니우스는 젊어서부터 수도 생활을 한 거룩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 후에 성 베드로니우스는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위해 팔레스티나(Palestina)로 갔는데, 그곳에서 그리스도교의 유물을 수집하기 위해 오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432년경 그는 이탈리아 볼로냐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성당 건축을 일차 목표로 정하고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성당을 세웠다. 그는 예루살렘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골고타와 주님 무덤 성당을 본떠서 새 성당을 건축했다.
12세기에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에 의해 성 베드로니우스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등장했는데, 대부분 전설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다만 그리스도교 예술 안에서 그를 표현하는 기초적 소재로 사용되었다.
그는 볼로냐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고, 14세기 말에 그의 이름으로 봉헌할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해 유럽에서 가장 큰 성당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연만한 나이에 수염을 기르고 주교 복장에 볼로냐 도시 모형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4일 목록에서 세상의 권위를 버리고 사제직에 올라 주교의 의무에 관한 저술과 모범적 가르침을 전한 볼로냐의 주교 성 베드로니우스에 대해 전해주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암몬
- 가톨릭 성인 이름
Amm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50년경
암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몬.
암몬 자료
성 암몬은 니트리아(Nitria) 사막에 수도원을 세운 최초의 이집트인 교부라고 불린다. 이 말은 확실치는 않지만 암몬이 이집트 사막에서 가장 유명한 은수자였음에는 틀림없다.
부유했던 부모가 죽은 뒤 그는 삼촌과 친척들의 강요에 따라 결혼을 하였으나, 성 바오로(Paulus)가 로마서에서 결혼보다 동정을 강조한 부분에 매력을 느끼고 이미 동정서원을 하였기 때문에 아내를 설득하여 한 지붕 밑에서 동정을 지키며 18년을 함께 살았다.
그 동안에 그는 사막의 은수자가 되는 훈련과 고행을 끊임없이 계속하다가 반대자들이 모두 물러선 뒤에 니트리아로 들어갔다. 한편 그의 아내는 자기 집에 수도자 생활을 꿈꾸는 여성들을 모아서 생활했고, 성 암몬이 6개월에 한 번씩 와서 그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성 암몬의 제자들은 성 안토니우스(Antonius, 1월 17일)가 함께 모여 사는 편이 낫다는 말을 할때까지 모두가 독립된 움막에서 살았다. 성 암몬과 성 안토니우스는 가끔씩 서로를 방문하였다. 성 암몬은 62세의 일기로 선종했는데, 그와 13일 거리나 떨어진 곳에 살던 성 안토니우스는 성 암몬의 운명 시각에 그의 영혼이 하늘로 떠올라 가는 것을 환시로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카이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a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사도들의 제자,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코린토스
카이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이오, 가이우스, 까이오, 까이우스, 카이우스.
카이오 자료
성 카이우스(또는 카이오, 가이오)는 성 크리스푸스(Crispus, 또는 크리스포, 그리스보)와 함께 코린토스(또는 고린토)에서 사도 성 바오로(Paulus)에게서 세례를 받았고(1고린 1,14), 사도 바오로의 동료가 되어 모든 교우들을 돌보았으며(로마 16,23), 요한(Joannes)의 셋째 편지의 수신인이다.
“원로인 나는 친애하는 가이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진정으로 그대를 사랑합니다”(3요한 1,1).
전승에 따르면, 코린토스의 회당장이던 성 크리스푸스(사도 18,8)는 아이이나(Aegina) 섬의 주교가 되었고, 성 카이우스는 테살로니카(Thessalonica)의 주교로서 사목하다가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퀸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Qui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70년경 투르
퀸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귄시오, 귄시우스, 귄투스, 퀸시우스, 퀸투스, 퀸티오, 퀸티우스.
퀸시오 자료
프랑스 투르(Tours) 태생인 성 퀸티우스(또는 퀸시오)는 프랑크 왕궁의 관리였다. 그가 여왕의 그릇된 음모를 반대했을 때 여왕은 그를 축출하여 몽트레소르(Montresor) 교외 인드로와스에서 목을 베었다. 그의 순교는 그리스도교 신앙 문제와 직결된 사건이므로 순교 성인으로 공경받는다. 퀸투스(Quint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크리스포
- 가톨릭 성인 이름
Crisp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사도들의 제자,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코린토스
크리스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리스보, 끄리스뽀, 끄리스뿌스, 크리스푸스.
크리스포 자료
성 카이우스(Cajus, 또는 카이오, 가이오)는 성 크리스푸스(Crispus, 또는 크리스포, 그리스보)와 함께 코린토스(또는 고린토)에서 사도 성 바오로(Paulus)에게서 세례를 받았고(1고린 1,14), 사도 바오로의 동료가 되어 모든 교우들을 돌보았으며(로마 16,23), 요한(Joannes)의 셋째 편지의 수신인이다.
“원로인 나는 친애하는 가이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진정으로 그대를 사랑합니다”(3요한 1,1).
전승에 따르면, 코린토스의 회당장이던 성 크리스푸스(사도 18,8)는 아이이나(Aegina) 섬의 주교가 되었고, 성 카이우스는 테살로니카(Thessalonica)의 주교로서 사목하다가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프란치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Franci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설립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81/1182?-1226년 아시시
프란치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프란치스코 자료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인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Pietro di Bernadone)와 프랑스인 어머니 피카 드 브를레몽(Pica de Bourlemont)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사업차 프랑스에 가 있었고, 어머니는 그에게 요한(Giovanni)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사업상의 이유 등으로 프랑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프랑스 사람’이란 뜻의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다가 기사가 될 꿈을 안고 1202년 아시시와 페루자(Perugia) 간의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듬해 두 도시 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듯 보이다가 중병을 앓았고, 병에서 회복한 뒤로는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여전히 기사가 될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1205년에 브리엔네(Brienne) 백작의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그는 스폴레토(Spoleto)에서 환시와 함께 메시지를 들었는데, “왜 주인을 섬기지 않고 종을 섬기려느냐? … 집으로 돌아가라. 내가 할 일을 알려주겠다.”라는 내용이었다.
군대에서 나온 그는 1206년 성 베드로 대성당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나병 환자를 만나 입맞춤을 한 후 삶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자주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 날 폐허가 된 산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중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내 집을 고쳐 세워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물건을 내다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고 했다. 이를 안 부친은 그를 작은 방에 가둘 정도로 분노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부친과 결별하게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주교 앞에서 재산 상속권을 포기하길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응하며 입고 있던 옷까지 모두 벗어 아버지에게 넘겨주고 알몸이 되어 가난한 삶을 선택했다.
이때부터 성 프란치스코는 허름한 농부의 옷을 입고 본격적으로 ‘가난 부인’을 모시는 통회의 생활을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기도와 노동을 하며 극도의 가난 생활을 실천했다. 1209년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들의 생활 양식을 인준해 주길 교황에게 요청했다.
그런데 그 회칙이 너무나 엄격하다고 여긴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는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성 프란치스코가 쓰러져 가는 라테라노 대성당을 떠받치고 있는 장면을 꿈에서 본 후 1210년 마침내 구두로 인준해 주었다. 그리고 극도의 가난을 살고자 하는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11명의 동료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설교의 사명까지 주었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 곧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본부는 오늘날 아시시 교외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gli Angeli) 안에 있는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이었다. 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부터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수도회는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했다.
성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은 이탈리아와 주변 나라들을 넘나들며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의 생활을 실천하도록 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 거부했고 교계 진출 또한 사양하였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사제품을 받지 않고 부제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공동체는 날로 지원자가 늘어 여러 곳에 분원이 생겼다. 그만큼 그들의 청빈 생활은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212년 아시시의 명문가 출신인 성녀 클라라(Clara, 8월 11일)도 그의 설교에 감명받아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가족과 친지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녀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지도를 받아 뜻을 같이하는 몇 명의 자매들과 함께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현 클라라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216년부터 프란치스코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해 조직이 강화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몇 개의 관구가 형성되었고, 1217년과 1219년의 총회에서는 잉글랜드(England)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결의하는 등 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무렵 성 프란치스코는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직접 찾아갈 정도로 선교와 순교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술탄 알 카밀(Al-Kamil)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교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성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총장직을 사임하였다. 이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재중에 몇몇 회원들이 수도회의 회칙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알고, 우고리노(Ugolino) 추기경의 도움으로 회칙을 보완해 1223년 11월 29일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에게 인준을 받았다.
1224년 성 프란치스코는 라 베르나(La Verna) 산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그 고통에 참여하길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五傷, Stigmata)이었다. 그리스도의 오상은 은총의 선물이었으나 그의 일생 내내 계속되면서 동시에 심한 육체적 고통도 안겨 주었다.
그는 오상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당나귀를 타고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을 다니며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기력이 쇠하여지고 눈마저 실명되어 갔다. 그런 고통 중에서도 그는 이탈리아어로 ‘태양의 찬가’를 지어 외우며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1226년 9월 병세가 깊어진 성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로 숙소를 옮겼다. 미리 유서를 작성한 그는 죽음이 다가온 것을 깨닫고 알몸으로 자신을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했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가난 중에 임종을 맞이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수사들에게 요한 복음의 주님 수난기를 읽게 한 후 시편 142(141)장을 노래하며 1226년 10월 3일 저녁에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유해는 다음날 아시시에 있는 산 조르조(San Giorgio)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선종 2년도 채 되지 않은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230년 5월 25일 그의 유해는 엘리아 형제가 그를 기념해 지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지하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지금도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공경은 세계 곳곳에서 활기차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가 세운 제3회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도 다른 재속 회원과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그의 성덕을 본받고 가난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1979년 11월 2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평소 하느님의 창조물을 사랑했던 성 프란치스코를 생태계와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2015년 6월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반포했는데, 회칙의 제목을 성 프란치스코가 바친 ‘태양의 찬가’ 후렴구에서 따왔다.
아시시의 가난뱅이 성 프란치스코만큼 교회 안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다시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는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성 프란치스코의 축일은 선종 다음 날인 10월 4일, 아시시 시내를 행렬해 산 조르조 성당으로 모신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이전 보편 전례력에서는 10월 4일 외에도 9월 17일에 성 프란치스코가 오상을 받은 것을 기념했으나 1969년 전례 개혁 이후 축일의 중복을 피하고자 오상 축일은 삭제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히에로테오
- 가톨릭 성인 이름
Hierothe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바오로의 제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아테네
히에로테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히에로테우스.
히에로테오 자료
성 히에로테우스(또는 히에로테오)는 교사이자 그리스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Areopagos)의 의회 의원인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0월 9일)의 친구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의 제자요 주교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거나 그를 아레오파고스의 성 디오니시우스보다 한참 후대(4세기 또는 5세기)의 인물로 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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