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9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마르치아나, 마르치오닐라, 바실리사, 알릭스 르 클레르, 파스카시아 총 5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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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9일 남자세례명 레보카토, 마르첼리노, 바닝고, 베드로, 베르트발드, 비탈리스, 비탈리코, 세쿤도, 아나스타시오, 안토니오, 에픽테토, 유쿤도, 율리아노, 첼소, 펠릭스, 포르투나토, 필란, 하드리아노, 호노리오 총 19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월 9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5가지
1월 9일 여자세례명 목록
1. 마르치아나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ian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마르치아나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키아나.
마르치아나 자료
성녀 마르키아나(또는 마르치아나)는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 연안 마우레타니아(Mauretania, 현재의 모로코와 알제리에 해당하는 지역의 로마시대 명칭)의 루수쿠르(Rusuccur) 태생으로서 천상 은혜를 보존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세속을 끊어버렸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기 때문에 용감하게 신앙을 지키던 그녀 역시 이방인들의 신상에 대한 우상숭배를 강요받았다. 이를 거절하면서부터 그녀는 무수히 얻어맞았고, 군인들이 순결을 빼앗으려고 덤벼들었을 때는 기적적인 힘으로 동정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주민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심을 보여 수많은 이들이 개종하였다고 전해온다. 결국 성녀 마르키아나는 마우레타니아의 카이사레아(Caesarea) 원형경기장에서 황소에게 찔리고 표범에게 물려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르치오닐라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ionill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마르치오닐라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끼오닐라, 마르키오닐라.
마르치오닐라 자료
성 율리아누스(Julianus)와 성녀 바실리사(Basilissa)의 행적과 순교 사실을 전해주는 그리스어 수난기에 따르면, 그들은 부부 사이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 중 이집트 중부의 안티노폴리스(Antinopolis, 또는 안티노에 Antinoe)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로마 순교록”에 라틴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안티오키아(Antiochia)로 잘못 번역해 순교지가 다르게 알려지기도 했다. 이 두 순교자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전승에 따르면 하느님께 동정을 서약한 성 율리아누스는 가족의 강요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성녀 바실리사를 아내로 맞이한 그는 아내와 합의하고 서로 평생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했다. 그들은 엄격한 생활로 자신들을 성화시켰으며, 가난한 사람과 병자들을 위해 그들의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런 뜻에서 동정 부부는 그들의 집까지도 일종의 병원과 같은 형태로 개조했는데, 어떤 때는 천 명 이상의 사람이 이용할 정도로 늘 붐볐다. 그 후 성녀 바실리사는 수녀원을 설립해 원장이 되었고, 성 율리아누스 또한 동료들을 모아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생활에 정진했다.
라틴어로 기록된 로마 순교록의 기록에 따르면, 잔혹한 박해를 피해 일단의 사제와 봉사자들이 성 율리아누스의 집에 피신했다가 체포되어 화형으로 순교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 말미암아 성 율리아누스가 시리아의 총독인 마르키아누스(Marcianus)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문을 받고 참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성 율리아누스와 성녀 바실리사 부부가 순교할 때, 그들과 함께 성 안토니우스(Antonius) 신부와 성 율리아누스의 순교를 보고 개종하여 그리스도의 은총에 참여하게 된 성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소년 성 켈수스(Celsus)와 그의 어머니인 성녀 마르키오닐라(또는 마르치오닐라)와 그녀의 일곱 형제,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이 안티오키아에서 순교했다.
그러나 그리스어 기록대로 이집트의 안티노폴리스에서 순교한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로마 순교록은 이들의 순교 기념일을 1월 9일에 기록하고 있고, 그리스어 전승은 1월 8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성 유스티누스와 성녀 바실리사의 축일은 함께 순교한 이들과 떼어서 1월 6일에 따로 기념하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바실리사
- 가톨릭 성인 이름
Basiliss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바실리사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실리싸.
바실리사 자료
성 율리아누스(Julianus)와 성녀 바실리사의 행적과 순교 사실을 전해주는 그리스어 수난기에 따르면, 그들은 부부 사이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 중 이집트 중부의 안티노폴리스(Antinopolis, 또는 안티노에 Antinoe)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로마 순교록”에 라틴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안티오키아(Antiochia)로 잘못 번역해 순교지가 다르게 알려지기도 했다. 이 두 순교자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전승에 따르면 하느님께 동정을 서약한 성 율리아누스는 가족의 강요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성녀 바실리사를 아내로 맞이한 그는 아내와 합의하고 서로 평생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했다.
그들은 엄격한 생활로 자신들을 성화시켰으며, 가난한 사람과 병자들을 위해 그들의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런 뜻에서 동정 부부는 그들의 집까지도 일종의 병원과 같은 형태로 개조했는데, 어떤 때는 천 명 이상의 사람이 이용할 정도로 늘 붐볐다.
그 후 성녀 바실리사는 수녀원을 설립해 원장이 되었고, 성 율리아누스 또한 동료들을 모아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생활에 정진했다.
라틴어로 기록된 로마 순교록의 기록에 따르면, 잔혹한 박해를 피해 일단의 사제와 봉사자들이 성 율리아누스의 집에 피신했다가 체포되어 화형으로 순교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 말미암아 성 율리아누스가 시리아의 총독인 마르키아누스(Marcianus)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문을 받고 참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성 율리아누스와 성녀 바실리사 부부가 순교할 때, 그들과 함께 성 안토니우스(Antonius) 신부와 성 율리아누스의 순교를 보고 개종하여 그리스도의 은총에 참여하게 된 성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소년 성 켈수스(Celsus)와 그의 어머니인 성녀 마르키오닐라(Marcionilla)와 그녀의 일곱 형제,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이 안티오키아에서 순교했다. 그러나 그리스어 기록대로 이집트의 안티노폴리스에서 순교한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로마 순교록은 이들의 순교 기념일을 1월 9일에 기록하고 있고, 그리스어 전승은 1월 8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성 유스티누스와 성녀 바실리사의 축일은 함께 순교한 이들과 떼어서 1월 6일에 따로 기념하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알릭스 르 클레르
- 가톨릭 성인 이름
Alix Le Clerc - 호칭 구분
복녀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76-1622년
알릭스 르 클레르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앨릭스.
알릭스 르 클레르 자료
알릭스 르 클레르는 1576년 2월 2일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로렌 공국(Duchy of Lorraine)의 르미르몽(Remiremont)에서 부유한 가족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음악과 춤을 좋아했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던 발랄한 소녀였다.
18세 때에 마탱쿠르(Mattaincourt)로 이사하고 3년 후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침대에 눕게 되었는데, 당시 그녀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신심 서적뿐이었다.
그녀는 영적 독서와 묵상을 통해 자신의 삶에 변화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고, 당시 그곳 본당신부였던 성 베드로 푸리에(Petrus Fourier, 12월 9일)를 만나 자신의 확신에 대한 공감을 얻었지만 자신에게 적합한 수녀원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성모님께서 환시를 통해 그녀의 의문에 답을 주셨다. 알릭스 르 클레르는 교육의 기회를 거의 또는 전혀 누리지 못하는 그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의 딸들을 돌봐주는 데서 자신의 소명을 찾았다.
그녀는 우선 성 베드로 푸리에 신부의 지원을 받아 네 명의 동료들과 함께 가난한 집안의 소녀들을 위한 성모 마리아의 무료 학교를 개설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소녀들에게 봉사하며 하느님의 현존 속에 기도하고 단순한 삶을 실천하는 작은 공동체를 설립했다.
그녀와 동료들은 1597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본당신부인 성 베드로 푸리에 앞에서 사적 서원을 발하였고, 이듬해 7월 푸세이(Poussay)에 소녀들에게 무료 교육을 제공하는 첫 번째 성모 마리아 학교를 세웠다.
알릭스 르 클레르 수녀와 성 베드로 푸리에 신부는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가톨릭 신자이거나 개신교 신자이거나 모든 소녀가 환영받으며 교육받을 수 있는 학교를 더 많은 지역에 설립해 나갔다.
로렌 공국의 수도인 낭시(Nancy)에 자리 잡은 그녀는 자신들의 활동이 교회와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법적 지위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수도회를 설립하였고, 후에 ‘성모의 성 아우구스티노 수녀회’라는 이름으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수녀회의 회헌은 1617년 3월 6일 낭시를 관할하는 툴(Toul)의 주교에게 처음으로 승인을 받았다.
일생을 소녀들을 위한 교육과 수녀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알릭스 르 클레르는 1622년 1월 9일 낭시의 수녀원에서 선종한 후 납으로 된 관에 안치되어 수녀원 내에 매장되었다.
그녀의 선종 이후 수녀회와 소녀들을 위한 학교는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이어서 신대륙으로까지 확산하였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당시 낭시의 수녀원 또한 무자비한 파괴를 피할 수 없었고, 수녀원 내의 무덤 또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졌다.
그녀에 대한 시복 절차가 진행되면서 유해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에 대한 시복 절차는 계속 진행되어 1947년 5월 4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 후 1950년 낭시의 한 건물 지하를 탐사하던 학생 그룹이 납으로 된 한 관을 발견했고, 1960년 그 관에 들어있는 유해가 알릭스 르 클레르 수녀임이 확인되었다.
그녀의 유해는 낭시의 성모 마리아 학교 경당에 안치되었다가 2007년 주교좌성당으로 옮겨져 신자들의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파스카시아
- 가톨릭 성인 이름
Paschasi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년경 디종
파스카시아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스까시아, 빠스카시아.
파스카시아 자료
성녀 파스카시아는 프랑스 디종에서 순교하였고 그곳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의 저서에 언급된 것에 의하면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후에 성녀에 대한 전설은 디종의 성 베니뇨(Benignus, 11월 1일)와 연관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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