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세례명 라우렌시오는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라우렌시오 18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라우렌시오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라우렌시오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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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렌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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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렌시오 남자세례명 목록
-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노 (1월 8일)
- 라우렌시오 (2월 2일)
- 라우렌시오 (2월 3일)
- 라우렌시오 (2월 7일)
- 라우렌시오 (4월 30일)
- 박취득 라우렌시오 (5월 29일)
- 라우렌시오 (6월 6일)
- 라우렌시오 험프리스 (7월 7일)
- 라우렌시오 (7월 21일)
- 라우렌시오 (8월 10일)
- 라우렌시오 네루치 (8월 11일)
- 라우렌시오 (8월 16일)
-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라우렌시오) (9월 20일)
- 한이형 라우렌시오 (9월 20일)
- 라우렌시오 (9월 28일)
- 라우렌시오 루이스 (9월 28일)
- 라우렌시오 오툴 (11월 14일)
- 라우렌시오 후옹 반 응우옌 (11월 24일)
1.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노
- 세례명 축일
1월 8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Justinian - 신분과 직업
총대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81-1456년 베네치아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노, 라우렌시누스, 라우렌시우스, 라우렌씨노, 라우렌씨누스, 라우렌티노, 라우렌티누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유스티니아니, 주스티니아니.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노 이야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저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라우렌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Laurentius Justinianus, 또는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러나 신심 깊은 어머니는 자녀들이 훌륭한 교육을 받도록 노력했다.
그는 19세 때에 빛으로 둘러싸인 한 처녀로부터 영원한 지혜에 관한 환시를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기본적인 욕망에 만족하기보다 자신과 함께 참된 행복을 찾아가자고 초대하였다. 그래서 성 라우렌티우스는 알가(Alga)에 있는 산 지오로지오(San Giorgio) 섬에서 수도 생활 형태를 따르는 의전 사제단에 속해 있는 그의 삼촌 마리노 퀘리노(Marino Qeurino)에게 자문을 구했다.
삼촌은 그에게 수도 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집에서부터 명예와 부 그리고 세속적 즐거움을 멀리하고 수도자다운 금욕생활을 실천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자 그의 건강을 염려한 어머니는 결혼 계획을 통해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성 라우렌티우스는 삼촌의 충고를 감추고, 어머니의 소망을 거부하고는 삼촌과 함께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매우 엄격한 금욕생활을 실천하고, 자주 어깨에 자루를 메고 다니며 자기 공동체를 위하여 음식을 구걸하러 다녔다고 한다.
1407년 사제품을 받은 후 그는 공동체를 위해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수도 규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첫 원장이 되었다. 그는 기도 생활과 참회의 생활을 통해 내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또한 미사 집전을 통해 모든 이들의 영혼을 돕고, 그들이 거듭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각시켜 주었다.
1433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는 산 지오로지오 수도원의 설립자 중 한 명인 성 라우렌티우스를 카스텔로(Castello)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구의 행정과 재정 관리 등에 환멸을 느껴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양 떼를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1451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는 그를 베네치아 교구의 초대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성 라우렌티우스는 공적인 일에서는 매우 정열적인 성직자였으나, 개인적인 생활은 매우 엄격하고 겸손했다고 한다. 성직자들의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는 1456년 1월 8일 베네치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524년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690년 10월 16일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는 보편교회 전례력에서 성인의 축일을 9월 5일에 경축하도록 정했다.
1969년 전례 개혁 이후 성인의 축일은 보편교회 전례력에서 빠지고, 그의 축일도 선종일인 1월 8일로 옮겨졌다. 그는 라우렌티누스 유스티니아누스(Laurentinus Justinianus, 또는 라우렌시노 유스티니아노)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라우렌시오
- 세례명 축일
2월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19년 캔터베리
라우렌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라우렌시오 이야기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는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의 명에 따라 영국 선교를 위해 파견된 캔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5월 27일)를 수행하여 로마(Roma)의 성 안드레아(Andreas) 수도원에서 영국으로 온 13명의 수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604년에 캔터베리의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브리턴인(Britons)들로 하여금 로마 전례를 수용케 하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또 에드발드가 부왕 에텔베르트를 계승하여 왕이 된 후 자기 부친의 아내와 결혼한 사건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지방으로 가려다가 꿈에서 사도 베드로(Petrus)의 지시에 보고 자기 양떼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고 한다. 그 환시 이후 그는 국왕 에드발드를 회개시켜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라우렌시오
- 세례명 축일
2월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76년 스폴레토
라우렌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라우렌시오 이야기
514년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이단자인 세베루스가 가톨릭을 박해하면서 300여 명의 지도자들을 시리아에서 축출했는데,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 역시 그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에 정착해 살던 중 교황 성 호르미스다(Hormisdas, 8월 6일)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움브리아(Umbria) 지방을 주로 다녔지만, 주로 아리우스파(Arianism) 이단자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 후 그는 스폴레토에 수도원을 짓고 살던 중에 주교로 피선되었는데, 그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한동안 반대를 받았고 또 어려움도 겪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열렬한 신심과 사랑 그리고 정열적인 선교열을 가지고 모범적으로 처신함으로써 모든 난관을 극복하였다.
그가 계몽주의자로 불리는 이유는 영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맹인이 된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치유하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라우렌시오
- 세례명 축일
2월7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46년 시폰토
라우렌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라우렌시오 이야기
성 라우렌티우스 마조라누스(Laurentius Majoranus, 또는 라우렌시오)는 시폰토의 주교로서 492년부터 선종할 때까지 50년을 넘게 교구를 돌보았다. 그는 이탈리아 가르가노(Gargano) 산 위에 성 미카엘(Michael) 성당을 건립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라우렌시오
- 세례명 축일
4월3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97년 노바라
라우렌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라우렌시오 이야기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 신부는 서부 에스파냐나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왔다. 그는 피에몬테(Piemonte) 지방 노바라의 주교인 성 가우덴티우스(Gaudentius, 1월 22일)의 협력자였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예비신자 교리반 어린이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박취득 라우렌시오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朴取得 Lawrence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9?-1799년 한국
박취득 라우렌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박 라우렌시오, 박라우렌시오.
박취득 라우렌시오 이야기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박취득(朴取得)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는 고향 인근에 전파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양으로 올라가 지황 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박 라우렌시오는 고향의 여러 교우들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자주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였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관장 앞으로 가서 “무죄한 사람들을 사납게 매질하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가둔다는 것은 무서운 죄가 아닙니까?” 하고 항의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해미와 홍주 관아로 이송되어 잔인한 형벌을 당하였지만, 조금도 용기가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옥에 갇힌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조정에서 석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므로 순교의 영광을 얻지는 못하였다.
박 라우렌시오는 이때부터 원 야고보, 방 프란치스코 등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1797년의 정사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지만, 아버지가 대신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면천 관아에 자수하였다.
이윽고 문초가 시작되었고, 박 라우렌시오는 그때마다 천주교 교리를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 화가 난 관장이 그에게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후 그는 다시 몇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고는 옥에서 여러 달을 지냈다. 그러다가 새 관장이 부임한 뒤 다시 문초를 받았으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홍주로 압송되었다.
홍주에서도 박 라우렌시오는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답변을 하였고, 갖가지 형벌을 인내로 참아 내었다. 그러자 홍주 영장은 화가 나서 ‘다리를 부러뜨리고, 죽도록 매를 치라.’고 한 뒤 옥에 가두었다. 이어 영장은 감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그때 감사는 ‘그놈의 다리를 치되, 열네 번을 때려도 항복하지 않거든 아주 죽여 버리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려보냈다.
이후 박 라우렌시오는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주 영장 앞으로 끌려 나가 형벌을 받았다. 또 옷이 벗겨진 채로 진흙 구덩이에 갇혀 밤새껏 추위와 비바람으로 고통을 받은 적도 있었다. 바로 이 무렵에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옥에 갇힌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천주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지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이 발현은 약간 희미하기는 하였지만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박 라우렌시오는 모두 일천사백 대 넘게 맞았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을 마시지 못한 적도 있었다. 옥졸들은 이제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옷을 벗긴 다음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박 라우렌시오는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가자,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목을 매면 죽을 것이오.”라고 옥졸에게 말하였다.
실제로 이튿날 밤에 교우들이 그에게 다가가서 보니 모든 상처가 기적적으로 나아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제서야 이를 요술이라고 생각한 옥졸이 새끼줄로 그의 목을 졸라 죽였으니, 이때가 1799년 4월 3일(음력 2월 2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약 30세가량이었다.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라우렌시오
- 세례명 축일
6월6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 신분과 직업
신부, 설교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476-1535년 빌라마냐
라우렌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라우렌시오 이야기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는 15-16세기의 시칠리아 왕국에서 중책을 맡았던 마스콜리(Mascoli) 가문의 후손으로 이탈리아 아브루치(Abruzzi) 지방의 빌라마냐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아버지의 강압적인 반대를 물리치고 오르토나(Ortona)에 있는 은총의 성모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입회하여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설교 직무를 수행해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당대의 최고의 설교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는 설교하기 전에는 항상 자신을 엄히 돌아보았고, 생활과 기도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설교의 권위가 더욱 높아졌다. 그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거의 모두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1535년 6월 6일 하느님의 품 안에서 평온하게 선종한 그에 대한 공경은 1923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 때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라우렌시오 험프리스
- 세례명 축일
7월 7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Humphreys - 신분과 직업
평신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71-1591년 영국
라우렌시오 험프리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오,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조, 험프리.
라우렌시오 험프리스 이야기
라우렌티우스 험프리스(Laurentius Humphreys, 또는 라우렌시오 험프리스)는 1571년 영국 잉글랜드 남부 햄프셔(Hampshire)의 성공회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경 읽기를 좋아하고 종교 활동에 착실히 참석했다.
18살 때 그는 토마스 스태니(Thomas Stanney) 신부를 만나 몇 번의 종교적 논쟁을 한 후 결국은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였다. 그는 토마스 스태니 신부를 도와 감옥을 방문하고 병자들을 돌보는 등 육체적 · 영적 자선 활동에 열심이었다.
1591년 중병에 걸린 그는 정신이 혼미한 중에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여왕에게 무례한 언사를 했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병이 다 낫기도 전에 윈체스터(Winchester)의 감옥에 갇혔다.
그는 끝까지 자신이 한 말을 뒤집지 않고 가톨릭 신앙을 증거하다가 1591년 7월 7일 로제루스 디킨슨(Rogerus Dickenson) 신부, 랄프 밀너(Ralph Milner)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라우렌티우스 험프리(Laurentius Humphrey)로도 불린다.
라우렌티우스 험프리스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7월 7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라우렌티우스 험프리스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라우렌시오
- 세례명 축일
7월 2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 신분과 직업
신부, 교회학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9-1619년 브린디시
라우렌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라우렌시오 이야기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는 1559년 7월 22일 나폴리(Napoli) 왕국의 브린디시에서 상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나 율리오 체사레 루소(Giulio Cesare Russo)라는 이름을 얻었다.
신앙심 깊은 부모가 일찍 돌아가자 그는 교육을 위해 베네치아(Venezia)의 삼촌 집으로 갔다. 그리고 1575년에 그곳에 있는 카푸친회에 입회하여 라우렌티우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파도바(Padova) 대학에서 교회 학문을 공부한 그는 언어에 대한 특별한 재능을 보여, 히브리어 · 그리스어 · 독일어 · 스페인어 · 프랑스어에 대한 상당한 실력을 지니게 되었다.
1582년 사제품을 받는 그는 북이탈리아 지방과 알프스 너머까지 순회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가로 활동했다. 그는 강론 중에 성경 말씀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는데, 그의 강연과 강론을 주로 담은 “전집”(Opera Omnia)을 보면 성경에 대한 그의 해박한 식견과 다양한 언어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카푸친회의 여러 고위직을 맡아 봉사했는데, 히브리어에 능통했기에 유대인의 개종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많은 랍비들의 개종을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1599~1613년 사이에는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독일로 파견되어 그곳의 호전적인 프로테스탄트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 나라의 주요 도시에 카푸친회 수도원을 설립한 그는 많은 개신교 신자들을 가톨릭으로 돌아오도록 했고, 그가 설립한 수도원들은 후일 각기 관구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160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Rudolf II)의 요청으로 수석 군종신부로 임명되어 고전 중이던 터키인과의 전투에 직접 말을 타고 십자가를 높이 들고 나가 독일 군사들을 격려해 승리로 이끌었다.
1602년 카푸친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한 그는 1605년 이후 교황과 황제의 특사 등을 활동하며 노련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1610년에 가톨릭 연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1614년에는 에스파냐와 사보이아(Savoia) 왕가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고, 총독의 학정에 시달리던 나폴리 사람들을 대표해 에스파냐의 펠리페 3세(Felipe III)를 만나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1619년 7월 22일 포르투갈의 리스본(Lisbon)에서 설교를 마치고 배를 타기 위해 이동하다가 선종했다.
그 후 그의 시신은 에스파냐 북부 아스토르가(Astorga) 교구의 비야프랑카(Villafranca)에 있는 클라라회의 성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성 라우렌티우스는 언제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교회에 헌신했다. 또한 그는 저술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특별히 성경 주석가로서 그의 능력은 강론과 강연, 성경 주해서(창세기와 에제키엘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와의 논쟁 등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반종교 개혁 과정에서 교회가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이었다. 그는 1783년 5월 23일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81년 12월 8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는 1959년 3월 19일에 그의 열렬한 활동과 폭넓고 조화로운 학식을 인정해 그를 특별히 ‘사도적 교회학자’(Doctor Apostolicus)로 선포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천상 탄일인 7월 22일 목록에서 그의 업적을 설명하며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며 7월 7일로 축일이 정해졌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21일 목록에서 그를 기념하며 7월 22일 리스본에서 선종했다는 사실을 함께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라우렌시오
- 세례명 축일
8월1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8년
라우렌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라우렌시오 이야기
로마(Roma)의 일곱 부제(차부제 포함) 중 한 명인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는 에스파냐의 우에스카(Huesca) 출신으로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는 새로운 법을 공표하면서 시작된 박해로 인해 258년 순교했다.
그는 교황 성 식스투스 2세(Sixtus II, 8월 7일)를 돕는 로마의 일곱 부제 중 수석으로, 주된 임무는 교회 재산 관리와 빈민 구호 및 일반적인 교회 관리였다. 교황 성 식스투스 2세가 카타콤바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중 체포되어 순교의 길을 걷자 성 라우렌티우스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해 울면서 그 뒤를 따라갔다.
교황은 그를 위로하며 앞으로 더욱 힘든 투쟁이 남아 있으니 그 전쟁에서 빛나는 승리를 얻어야 한다며, 그 또한 나흘 뒤에 체포되어 자신을 뒤따를 것이라는 예언을 해주었다. 그러자 성 라우렌티우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돌아와 교회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로마의 집정관이 그의 이런 행위를 알고 교회의 모든 보물을 즉시 황제에게 바치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 말을 들은 성 라우렌티우스는 교회의 재산을 모두 모아 정리하려면 3일의 여유가 필요하다며 시간을 청한 후, 교회의 값비싼 그릇들과 돈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재산을 요구하는 집정관에게 병자와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나타나 “이 사람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분노한 집정관은 그를 체포해 온갖 고문으로 괴롭히다가 뜨거운 석쇠 위에 눕히고는 구워 죽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석쇠 위에서 살이 익어가자 성 라우렌티우스는 “이쪽은 다 익었으니 뒤집어라.”라고 말한 후 한참 뒤에 “이제 다 익었으니 뜯어먹어라.”라고 당당히 말했다. 그리고 순교 때나 그 후에도 그의 몸에서는 향기가 났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순교 이야기는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가 389년에 쓴 “성직자 직무론”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 의해 전해졌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는 강론에서 “그는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을 받았기에 그 보답으로 자기 자신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 드렸습니다.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습니다.”라며 그의 순교에 대해 언급했다.
시인 프루덴티우스(Prudentius)는 그의 죽음과 표양이 로마의 회개를 가져왔고, 로마에서 이교의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며 그를 칭송했다.
성 라우렌티우스의 축일은 4세기 초부터 교회 전례에 도입되었고,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의 무덤이 있던 카타콤바 위에 세운 성당은 로마의 순례자들이 즐겨 찾는 주요한 일곱 성당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공경은 빠르게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
성 라우렌티우스는 로마와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이면서 가난한 사람과 요리사와 소방관의 수호성인이다. 교회 미술에서 그를 상징하는 문장은 순교 도구였던 석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라우렌시오 네루치
- 세례명 축일
8월 11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Nerucci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20년
라우렌시오 네루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라우렌시오 네루치 이야기
14세기 초 오늘날의 체코 공화국(The Czech Republic)에 속한 보헤미아(Bohemia) 지방은 종교적인 갈등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상당수의 문제는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표방하며 교황의 권위와 성체성사의 실체변화 교리를 부정하여 이단 판정을 받은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제자 중 하나인 얀 후스(Jan Hus)를 추종하던 후스파에 의해 야기되었다.
특히 1415년 프라하(Prague)에서 존 위클리프의 사상을 변호하던 얀 후스 신부의 주장이 콘스탄츠(Constance) 공의회에서 이단 판정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아 화형에 처해지자 물리적 충돌은 곧 비극적인 유혈사태를 가져왔다.
결국 얀 후스의 추종자들은 1420년 후스전쟁을 일으켰고, 보헤미아 지방은 10년이 넘게 지속된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교황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는 후스파에 의해 널리 퍼진 분파적이며 이단적인 교리 명제들을 논박하기 위해 선교사들을 파견하는 동시에 십자군을 조직하여 후스파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때 파견된 성모 종 수도회 소속 사제들 중에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 출신인 라우렌티우스 네루치(Laurentius Nerucci, 또는 라우렌시오 네루치), 아우구스티누스 첸니니(Augustinus Cennini), 바르톨로메우스 도나티(Bartholomaeus Donati), 요한 세례자 페트루치(Joannes Baptista Petrucci)가 있었다. 그들이 프라하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이 머물던 수도원이 후스파의 급습을 받았다.
4명의 사제와 60명의 성모의 종 수도회 수사들이 성당에서 사은 찬미가인 ‘테 데움’(Te Deum)을 노래하고 있을 때 후스파가 건물에 불을 질러 모두 산 채로 불에 타 죽고 말았다. 그들은 1918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순교자로서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라우렌시오
- 세례명 축일
8월16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 신분과 직업
통회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43년
라우렌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라우렌시오 이야기
이탈리아 풀리아(Puglia)의 파넬로 태생인 라우렌티우스 로리카투스(Laurentius Loricatus, 또는 라우렌시오 로리카토)는 젊어서 실수로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는데, 이 사건에 대한 보속으로 그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수비아코(Subiaco)로 가서 은수자가 되었다.
그는 사크로스페코 교외의 어느 동굴에서 거의 33년 동안이나 살면서 무서우리만큼 고행을 하여 '로리카토'란 칭호를 들었는데, 이는 '흉갑(胸甲)을 입은 사람'이란 뜻으로 고행하는 사람들의 복장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라우렌시오)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范 Lawrence(Imbert Lawrence)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6-1839년 한국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라우렌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범 라우렌시오, 범라우렌시오, 범세형.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라우렌시오) 이야기
성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 주교의 세례명은 라우렌시오(Laurentius)이며,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이다. 그는 1796년 3월 23 프랑스 남부 엑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Cabries)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조차 없었는데,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알파벳을 배우고 카브리에 본당 신부의 도움을 받아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공부뿐만 아니라 기도에도 열심이었다. 틈틈이 묵주를 만들어 팔아 생활하며 연로한 아버지의 생활도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었다.
이렇듯 어려운 시절을 꿋꿋하게 견뎌낸 그는 1812년 엑스 교구의 대신학교에 진학해 사제의 길을 준비했다. 대신학교 때부터 그는 선교사가 되어 동방의 선교 지방으로 가려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818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819년 12월 18일에 성품성사를 받고 곧 중국의 사천(四川)으로 파견되었다.
그 후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신부는 10여 년간 사천 대목구에서 선교 사제로 활동했다. 그는 중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며 모든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던 중 1836년 4월 조선의 제1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
실제로 그 이듬해에 임명 소식과 함께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1835년 10월) 소식을 들은 그는 1837년 5월 14일 사천 대목구장 퐁타나 주교에 의해 제2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성성되었다. 그리고 사천을 떠나 10월경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했고, 다시 북경과 산해관을 경유해서 12월에 국경지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조선 사신단의 수행원으로 동행한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us)와 성 조신철 가롤로(趙信喆, Carolus) 등을 만나 그들의 도움을 받아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일행은 1837년 12월 31일 서울에 도착했는데, 이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처음으로 주교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는 조선 교회가 창설된 지 53년 만의 일이었다.
불과 3개월 정도 조선말을 배운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조선말로 고해성사를 줄 수 있었고, 어려운 한자를 잘 모르는 신자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1838년경에는 우리말 기도서를 완성했다.
그는 또한 이미 조선에 와 있던 성 모방 베드로(Manbant Petrus) 신부와 성 샤스탕 야고보(Chastan Jacobus) 신부와 함께 지방을 순회하며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교회는 오랜 환난을 겪은 후 주교를 맞으면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무를 수행해 1년 남짓한 활동 기간 중에 수천 명의 신자가 증가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그는 허약하고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매우 바쁜 사목활동을 전개하며 그 안에서 최고의 행복을 찾았다. 다만 그에게 무한히 괴로운 것은 박해로 말미암아 신입교우들의 신앙이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자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박해가 본격화되기 전에 더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기 위해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그러는 동안 사태는 점점 위태롭게 돌아갔고, 배교자의 밀고로 주교의 거처와 세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배교자 김순성(일명 김여상)은 관헌들과 짜고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를 유인하려 했으나, 그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다른 신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1839년 8월 11일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다른 두 명의 신부들도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즉시 관청에 자수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 선교사는 포도청 옥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여러 번의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당하면서 두 신부와 함께 모든 고초를 이겨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 배교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형에 처하도록 판결하였다. 처형 장소는 한강 변의 새남터로 결정되었다.
1839년 9월 21일,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는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포졸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 쪽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선고문을 읽고 칼을 들어 처형하였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와 두 신부는 마지막까지 태연하게 하늘을 향해 기도할 뿐이었다. 그들의 순교로 조선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모두 잃게 되었다. 이때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의 나이는 43세였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와 두 신부의 시신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20일 뒤 죽음을 각오한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서강대 뒷산)에 매장되었다가 1843년 삼성산(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57-1)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01년 10월 21일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고, 그해 11월 2일 명동대성당에 안치했다가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한이형 라우렌시오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韓履亨 Lawrence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9-1846년 한국
한이형 라우렌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오,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한 라우렌시오, 한라우렌시오.
한이형 라우렌시오 이야기
성 한이형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는 충청도 덕산에 살던 양반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헌신적이며 열성이 지극하여, 14세 때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지 몇 주일 후 참으로 비상한 열심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는 여러 시간 동안 십자가 앞에서 묵상하였고, 전에 범한 죄를 진실한 마음으로 통회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주일과 축일에는 집에서 10여리 밖에 있는 신자 마을에 가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는데,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는 21세 때에 신자 처녀와 혼인하고 고향을 떠나 경기도 양지고을 은이 마을로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신심만 두터운 것이 아니었다. 이들 부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옷이 남루한 사람을 만나면 자기 옷을 주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늘 사람들이 몰려와 주막집 같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지나치게 애긍시사를 한다고 하면 그는 “헐벗은 이웃을 입히고 굶주린 이를 먹이는 것은 거저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오면 천주께서 이자를 듬뿍 붙여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라우렌티우스는 약간의 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무리 일이 바빠도 주일 파공을 철저히 지켰으며, 밤에는 날마다 한 시간 동안 묵상하였고, 사순절에는 매일 단식을 하였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조선에 들어와 그의 이러한 신덕을 보고는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46년의 병오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얼마동안 숨어서 지내기로 하였다. 그러던 중 김대건 신부가 잡힌 후 포졸들은 집주인이 이신규 토마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잡기 위해 먼저 그의 삼촌을 잡아 조카가 있는 곳을 물으니, 이 토마스의 삼촌이 포졸들을 은이 마을로 안내하였다.
포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그 동네 신자들은 도망한 뒤였으므로 그들은 라우렌티우스의 집을 둘러싸고 온 가족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내 놓아주고 라우렌티우스만을 포승으로 묶고 조롱하며 닥치는 대로 때렸다.
특히 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대들보에 매어단 후 물매질을 하면서 배교하고 동교인들을 대라고 협박하였다. 라우렌티우스가 이를 거절하자 포졸들은 그의 두 다리를 결박하고 그 사이에 깨어진 접시며 질그릇 조각을 끼우고 굵은 밧줄을 발목에 걸쳐서 앞뒤로 잡아당겨 살을 톱질하듯 하였다.
그러나 라우렌티우스가 이러한 잔학한 고문을 잘 참아내며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으므로 포졸들도 이에 감동하여 다른 신자들에게 “당신들이 정말 천주교 신자가 되려면 한이형과 같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 후 포졸들은 그를 서울로 압송하였는데, 포졸들이 말을 태워 주겠다고 하여도 이를 거절하였고 또 상처 때문에 신발을 신을 수가 없어서 백 여리나 되는 산길을 맨발로 걸어 서울까지 갔다.
그는 서울에서도 전과 같은 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다가 순교하였는데, 그의 죽음은 교수형 혹은 장살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때는 1846년 9월 20일(음력 8월 1일)이요,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라우렌시오
- 세례명 축일
9월28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457년 리파프라타
라우렌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라우렌시오 이야기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는 이미 부제품을 받고서 피사(Pisa)에 있는 설교자회에 입회하여 다년간 학문과 설교를 연구하였으며, 코르토나(Cortona) 수도원의 수련장이 되었다.
그는 매우 엄격히 회칙을 준수하는 사람이었으나, 이해심이 많았고 수련자들이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오르도록 지도했던 뛰어난 수도자였다.
그의 수련생 중에서 뛰어난 제자들은 피렌체(Firenze)의 성 안토니누스(Antoninus, 5월 10일), 복자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2월 18일) 그리고 무젤로의 베네딕투스(Benedictus)가 있다.
그는 복자 프라 안젤리쿠스와 베네딕투스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안배하면서, 입에서 나오는 말과 같이 그림으로도 설교할 수 있다는 신념을 그들에게 심어주어 후일 위대한 화가로 만들었다. 또 그의 해박한 성서 지식은 그로 하여금 '성서의 궤'라는 별명을 얻게 하였다.
또한 그는 총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 특히 농아들을 위하여 수도자들이 봉사토록 배려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51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라우렌시오 루이스
- 세례명 축일
9월 28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Ruiz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00?-1637년 마닐라
라우렌시오 루이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루이즈.
라우렌시오 루이스 이야기
성 라우렌티우스 루이스(Laurentius Ruiz, 또는 라우렌시오 루이스)는 첫 번째 필리핀인 성인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 순교한 첫 필리핀 순교자이다.
그는 1600년경 마닐라의 비논도(Binondo)에서 신자였던 중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국어와 타갈로그어를 배웠다. 그리고 도미니코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스페인어를 배웠다. 그는 비논도 성당의 복사로 활동하였고 성사 보조자와 성사 기록자로 봉사하였다.
그는 아마도 서예로 생계를 유지했으리라 짐작되는데, 사적 혹은 공적인 용도의 서류를 아름다운 필기체로 만들어주는 일을 하였다. 그 직업은 안정되고 교육받은 사람임을 암시하는데, 당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는 사실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1636년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운한 사건에 연루되어 살인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릇된 재판으로 사형을 받을까 두려운 나머지 성 라우렌티우스는 필리핀을 떠나기 위해 배를 탔다.
그런데 그 배에는 세 명의 도미니코회 신부인 성 안토니우스 곤살레스(Antonius Gonzalez), 성 귈레르무스 쿠르테(Guillermus Courtet), 성 미카엘 데 아오자라자(Michael de Aozaraza)와 일본인 사제인 성 빈첸시오 시오즈카 드 라 크루스(Vincentius Shiwozuka de la Cruz)와 평신도이며 나환자인 교토(Kyoto)의 성 라자루스(Lazarus)가 타고 있었다.
그는 바다에 나오고 나서야 그 배가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박해가 일어나고 있는 일본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본의 오키나와(Okinawa)에 도착한 성 라우렌티우스와 동료들은 곧 그리스도인임이 발각되어 체포되어 나가사키(Nagasaki)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며칠 동안 갖은 비인간적인 고문을 당했으나 용감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였다.
성 라우렌티우스는 신앙을 철회하지 않았고 그의 사형집행인에게 자신은 하느님을 위해 죽으며, 자신이 죽는 대신 수천 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1637년 9월 27일 그는 교수대에 거꾸로 달려 구덩이로 떨어졌다. 이틀 동안의 고통 후에 그는 출혈과 질식으로 인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성 라우렌티우스 루이스와 같이 이 시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순교한 15명의 동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1년 2월 18일에 마닐라에서 시복되었고, 1987년 10월 18일 같은 교황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라우렌시오 오툴
- 세례명 축일
11월 14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O’Toole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128-1180년 더블린
라우렌시오 오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라우렌시오 오툴 이야기
성 라우렌티우스 오툴(Laurentius O'Toole, 또는 라우렌시오 오툴)은 머레이족의 족장 무르타그의 아들로서 아일랜드 킬데어(Kildare) 지방의 케슬더모트(Castledermot)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그들을 적대시하던 상대방 가문의 포로로서 지내다가 후일 수도자가 되었고, 글렌달로그(Glendalough)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던 중에 더블린의 대주교로 서임되었다. 그러나 복잡한 정치적 사정으로 수많은 곤경을 당하다가 1179년의 로마 회의에서 아일랜드의 교황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국왕은 그의 부임을 거부하면서 끝까지 입국을 금지하였다. 그는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고 비밀리에 여행하여 아일랜드로 돌아왔지만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자기 양떼를 지극히 사랑하였고 단순함의 덕이 뛰어났으며, 매우 엄격한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매년 사순시기에 글렌달로그 수도원으로 가서 고요와 적막함 속에서 기도와 고행 생활에 전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225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라우렌시오 후옹 반 응우옌
- 세례명 축일
11월 24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Huong Van Nguyen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2?-1856년 베트남
라우렌시오 후옹 반 응우옌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흐엉.
라우렌시오 후옹 반 응우옌 이야기
1533년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베트남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된 베트남 교회의 역사는 오랜 박해의 역사였다. 1615년 예수회 선교사들이 베트남의 중부지역에 선교기반을 마련하면서 베트남의 복음화는 활기를 찾았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 왕실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명령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이로 인해 1833년부터 약 50년 동안 30여만 명의 신자들이 모진 박해를 받았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했다.
베트남 북부 통킹에서 태어난 성 라우렌티우스 후옹 반 응우옌(Laurentius Huong Van Nguyen, 또는 라우렌시오 후옹 반 응우옌)은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방인사제로서 복음을 전하며 베트남 교회를 위해 수십 년 동안 성실하게 사목하다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혹독한 박해의 시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1856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09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1988년 6월 1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 안드레아 둥락(Andreas Dung-Lac) 사제와 116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시성하면서 그들의 축일을 11월 24일에 기념하도록 보편교회 전례력에 포함시켰다.
안남(Annam) 또는 통킹(Tongkin)의 순교자들로도 불리는 117위의 베트남 순교자들은 출신별로 보면 96위의 베트남 순교자, 11위의 에스파냐 도미니코회 선교사, 10위의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이뤄져 있다.
신분별로는 8위의 에스파냐와 프랑스 출신 주교, 50위의 사제(에스파냐와 프랑스 출신 13위와 베트남 출신 37위), 59위의 베트남 출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 강론에서 혹독한 박해를 이기고 영웅적인 모범을 보인 순교자들의 용기와 신앙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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