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막셀렌다, 아우구스티나 리비아 피에트란토니, 엔나타,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 총 4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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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 남자세례명 니콜라오 1세, 미트리오, 바울릴로, 발렌티노, 브릭시오, 빅토르, 솔루토르, 아르카디오, 아보, 안토니노, 에우제니오, 에우티키아노, 제르마노, 제비나, 퀸시아노, 파스카시오, 프로보, 호모보노, 총 18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1월 13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4가지
11월 13일 여자세례명 목록
1. 막셀렌다
- 가톨릭 성인 이름
Maxellendis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70년경 코드리
막셀렌다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막셀렌디스, 막쎌렌다.
막셀렌다 자료
성녀 막셀렌다는 프랑스 북부 캉브레(Cambrai) 근교 코드리의 귀족인 우몰린(Humolin)가의 딸로 태어났으므로 부친은 좋은 집안과 결혼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녀 막셀렌다는 결혼을 끝내 마다하였다. 이때 그의 부친은 결혼을 해도 하느님을 잘 섬길 수 있고, 또 그렇게 성공한 부부도 많음을 역설하자 그녀는 다음날 오전까지 결정짓겠다고 말하였다. 그 다음날 그녀는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배우자도 원치 않는다고 최후의 결심을 밝혔다.
그녀는 결혼식 준비를 서두르는 집을 몰래 빠져나와서 카토캄 브레시스 교외의 어느 수녀원에 피신하였으나, 곧 부모에게 잡혀간 뒤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녀는 또 몰래 도망치다가 부친이 보낸 사람들의 칼에 맞아 운명하였다.
그녀는 인근 성당에 안장되었으나 후에 캉브레의 주교인 성 빈디키아누스(Vindicianus, 3월 11일)가 코드리 성당으로 성대히 이장하여 공경하였다. 그 후 그의 부친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여 개과천선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아우구스티나 리비아 피에트란토니
- 가톨릭 성인 이름
Augustina Livia Pietrantoni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수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4-1894년
아우구스티나 리비아 피에트란토니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삐에뜨란또니, 아고스띠나, 아고스티나, 아우구스띠나, 피에뜨란또니.
아우구스티나 리비아 피에트란토니 자료
성녀 아우구스티나 리비아 피에트란토니는 1864년 3월 27일 이탈리아 리에티(Rieti)의 포차글리아 사비나(Pozzaglia Sabina)에서 태어나 리비아 피에트란토니라는 이름을 얻었다.
수도 성소를 느낀 그녀는 1886년 22살의 나이로 로마에 있는 자비의 수녀회(애덕 수녀회)에 입회하여 아우구스티나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수련기를 마친 후 로마에 있는 700년 전통의 성령(Santo Spiroto) 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성녀 아우구스티나 수녀는 1889년 여름부터 위독한 환자나 전염성이 강한 환자들을 돌보며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그러던 중 1893년 9월 폐결핵에 전염되어 위독한 상태에 놓였다.
겨우 병에서 회복된 성녀 아우구스티나는 계속해서 폐결핵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던 중 폭력 문제로 병원에서 쫓겨난 한 환자의 공격을 받고 칼에 찔려 숨을 거두게 되었다. 1894년 11월 13일, 칼에 찔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자신을 공격한 이를 용서하였다.
아고스티나 리비아 피에트란토니(Agostina Livia Pietrantoni)로도 불리는 그녀는 1972년 11월 12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99년 4월 18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엔나타
- 가톨릭 성인 이름
Ennath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97년
엔나타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엔나따.
엔나타 자료
성 안토니누스(Antoninus), 성 제비나(Zebinas), 성 게르마누스(Germanus)와 성녀 엔나타는 갈레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했는데, 그들은 황제 앞에서도 용감히 복음을 선포하였다. 성녀 엔나타는 다른 동료들이 참수되는 동안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
- 가톨릭 성인 이름
Frances Xaveria Cabrini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50-1917년 미국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가, 프란체스까, 프란체스카, 프란치스까, 프랜시스, 하비에르.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 자료
농부인 아고스티노 카브리니(Agostino Cabrini)와 스텔라 올디니(Stella Oldini)의 13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딸인 성녀 카브리니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Lombardia)의 산탄젤로 로디지아노(Sant'Angelo Lodigiano)에서 1850년 7월 15일에 태어나 마리아 프란치스카 사베리아(Maria Francisca Xaveria, 또는 프란체스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학교 교사가 될 꿈을 꾸었으나 18세 때 고아가 되자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건강상의 문제로 두 공동체로부터 입회를 거부당하였으나, 1874년에 안토니우스 세라티(Antonius Serrati) 몬시뇰의 초청을 받고 곤란한 상태에 빠진 섭리의 집이란 고아원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집의 설립자인 안토니아 톤디니(Antonia Tondini)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히자 토디(Todi)의 주교는 프란치스카로 하여금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녀는 7명의 동료들과 함께 코도뇨(Codogno)의 버려진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으로 이주하여 소녀들의 교육에 헌신하는 ‘성심의 선교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녀회는 1880년 주교의 승인을 받은 즉시 그루멜로(Grumello), 밀라노(Milano) 그리고 로마(Roma)로 퍼져나갔다.
1889년 성녀 프란치스카는 미국 뉴욕(New York)의 대주교 코리건(Corrigan)의 초청으로 뉴욕으로 가서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위한 일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성녀 프란치스카가 설립한 성심의 선교 수녀회는 미국에까지 확장되었으며, 1892년 뉴욕의 콜럼버스(Columbus)에 첫 번째 병원을 개설하였다.
그 후 중남미와 영국으로 진출하였고, 1907년에는 성좌로부터 회헌의 승인을 받았다. 1917년 12월 22일 그녀가 시카고(Chicago)에서 운명할 즈음에는 이미 50개 이상의 병원과 학교, 고아원과 수도원 등 괄목할만한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1909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고, 1938년 11월 13일에 복자품에 올랐으며, 1946년 7월 7일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로부터 시성됨으로써 미국 시민으로는 첫 번째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는 1950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하여 이주민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한편 미국 교회에서는 성녀의 천상 탄일인 12월 22일에 축일을 경축하기가 어려워 시복식이 거행된 날인 11월 13일로 이동하여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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