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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일 여자세례명 4가지

피어나네 2023. 11. 1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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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마르가리타, 아녜스, 제르트루다(대), 테옥티스타, 총 4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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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일 남자세례명 그라시아, 루피노, 마르첼로, 마르코, 발레리오, 아판, 에드문도 리치, 에우스토키오, 에우케리오, 엘피디오, 오트마로, 피덴시오, 총 12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1월 16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4가지

 

 

 

 

11월 16일 여자세례명 목록

 

  1. 마르가리타

  2. 아녜스

  3. 제르트루다(대)

  4. 테옥티스타

 

11월 16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4가지

 

 

1. 마르가리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왕비

  • 활동 연도와 지역
    1046-1093년 스코틀랜드

 

 

마르가리타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마르가리타 자료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1046년 헝가리의 레스카(Reska)에서 앵글로 색슨 왕조 최후의 왕인 에드워드 애틀링(Edward Atheling)과 헝가리의 왕비 아가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헝가리의 성왕(聖王) 스테파누스(Stephanus, 8월 16일)의 조카로 어린 시절 대부분을 성 스테파누스 왕의 궁중에서 보냈다. 1066년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노르망디의 윌리엄(William) 대공이 쳐들어왔고,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에서 패한 후 그녀의 가족들은 헝가리로 피난을 가려고 했으나 배가 표류하여 스코틀랜드에 도착했다.

이때 스코틀랜드의 왕 말콤 3세(Malcolm III)는 성녀 마르가리타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그녀의 인품과 선행에 반해 결혼을 청하였다. 이렇게 스코틀랜드의 왕비가 된 성녀 마르가리타는 여섯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를 낳고 직접 훌륭하게 교육하였는데, 스코틀랜드의 성 다윗 1세(David I, 5월 24일)가 바로 그녀의 아들 중 하나이다.

그녀의 성덕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특히 기도와 고행과 단식에서 철저하였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놀라웠다. 그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만연하던 성직 남용과 성직매매를 금지하려는 시노드(Synod)를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교회 개혁에도 이바지하였다.

그녀는 또한 남편인 말콤 3세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예술과 교육의 진흥을 위해 노력했고, 던펌린(Dunfermline)에 성삼위 대수도원을 세우고 이오나(Iona)를 비롯한 여러 곳의 켈트 성당들을 복구하는 일을 후원하였다.

왕비라는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성녀 마르가리타는 겸손을 잃지 않았고, 가족에 대한 사랑과 특별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말콤 3세 왕과 장남 에드워드(Edward)가 노섬브리아(Northumbria)와의 안윅 전투(Battle of Alnwick)에서 사망하고 3일 뒤인 1093년 11월 16일 슬픔에 잠겨 에든버러(Edinburgh)에서 선종하였다.

그녀는 124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 1670-76년 재위)는 오래전부터 스코틀랜드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성녀 마르가리타를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아녜스

 

  • 가톨릭 성인 이름
    Agnes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197/8-1253년 아시시

 

 

아녜스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그네스, 아네스.

 

 

아녜스 자료

성녀 아녜스는 1197년 또는 1198년에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귀족 출신인 파바로네(Favarone)와 오르톨라나(Ortolana)의 딸로 태어나 카테리나(Caterina)라는 이름을 얻은 듯하다.

그녀의 언니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가족의 극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수도 생활을 시작한 성녀 클라라(Clara, 8월 11일)이다.

성녀 클라라는 1212년 3월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밤에 부모 몰래 집을 빠져나와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고 그의 첫 여성 동료가 되었다.

그로부터 16일 뒤에 성녀 아녜스 또한 불과 15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와 언니가 머물고 있던 산 안젤로 디 판초(San Angelo di Panzo) 성당으로 가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성녀 클라라가 수도 생활에 들어간 후 집안 단속이 더 심해졌지만, 수도 생활을 향한 성녀 아녜스의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다.

두 딸을 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 그녀의 아버지는 강제로라도 성녀 아녜스를 데려오려고 몇몇 친척을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들은 강제로 그녀를 끌고 가려 했지만, 성녀 아녜스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버티어냈다.

결국 하느님의 힘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고 느낀 친척들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에게 수도복을 받으며 아녜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리고 언니와 몇 명의 자매들과 함께 산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지도를 받아 공동생활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에 클라라 수도회로 불리게 된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의 시작이었다.

그 후 성녀 아녜스는 1219년 성 프란치스코가 세운 피렌체(Firenze) 근교 몬티첼리(Monticelli)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언니와 함께 생활하던 산 다미아노 모원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성녀 아녜스는 만투아(Mantua), 베네치아(Venezia), 파도바(Padova) 등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에 수도원을 설립했고, 언니를 도와 클라라 수도회의 청빈 정신을 고수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또한 그녀는 덕이 있는 사람으로서 늘 친절하게 자매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1253년 성녀 아녜스는 중병으로 병상에 누운 성녀 클라라를 간호하기 위해 아시시로 돌아왔다. 8월 11일 성녀 클라라의 임종을 지킨 성녀 아녜스는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11월 16일 언니를 뒤따라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시신은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그녀의 묘소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1753년에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는 그녀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였다. 로마 순교록은 그녀의 선종일인 11월 16일에 축일을 기념하는데,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는 11월 19일로 옮겨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제르트루다(대)

 

  • 가톨릭 성인 이름
    Gertrude the Great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수녀, 신비가, 저술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256-1302년 헬프타

 

 

제르트루다(대)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거트루드, 게르투르다, 게르투르데스, 게르투르디스, 게르트루다, 게르트루드, 제르뜨루다, 제르뜨루디스, 제르트루드, 제르트루디스, 제르트루트, 젤뚜르다, 젤뜨루다, 젤투르다, 젤트루다.

 

 

제르트루다(대) 자료

성녀 제르트루다(Gertrudis)는 1256년 1월 6일 독일에서 태어났다. 출생지와 가족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다섯 살이 되던 1261년 아이슬레벤(Eisleben)에 있는 헬프타 베네딕토회의 성 마리아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성덕으로 유명했던 이 수도원은 설립자이자 원장인 하크본(Hackeborn)의 제르트루다 수녀가 지혜롭게 운영하면서 문화와 영성의 중심지가 되었다. 어린 나이의 성녀 제르트루다는 수녀원장의 동생이며 수도원 학교 교장이었던 하크본의 성녀 메히틸다(Mechtildis, 11월 19일) 수녀의 지도하에 개방적이고 휴머니즘적인 교육을 받았다.

15세 때 학교를 마치고 수녀회에 입회했는데, 그녀의 지적 열망과 타고난 지능으로 인해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와 클레르보(Clairvaux)의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8월 20일)의 영성뿐 아니라 음악, 문학, 문법학, 예술 등에도 탁월한 재능을 드러냈다. 특히 라틴어에 정통해서 수녀원 내 필사실에서 일하는 소임을 맡았다.

그러나 세속 학문과 모든 것을 지성적으로만 판단하려는 사고로 인해 영적 생활이 소원해지고 거의 냉담 상태까지 갔었다. 그로 인해 극심한 영적 고통을 겪던 성녀 제르트루다는 1281년 1월 27일 환시를 통해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했다.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발현한 예수님께서는 지적 공부에만 몰두한 그녀를 책망하며 “멀지 않아 너의 구원은 올 것이다. 왜 그렇게 고통을 받느냐? 너를 슬픔에서 벗어나게 조언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자신과 예수님 사이에 사랑의 유대가 있음을 깨달은 성녀 제르트루다는 내적 평온함을 찾고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갔다. 그녀는 예수님과의 깊은 일치와 친교 속에서 새로운 열정을 불태우게 되었다.

세속적인 학문에 흥미를 잃고 오로지 성경과 교부들의 저서 그리고 전례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 성녀 제르트루다는 머지않아 스콜라 사상에도 정통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계시와 여러 발현을 보게 되었다. 이로써 그녀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기리는 영원한 찬가’로 바뀌게 되었다. 그녀의 생활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영적 체험의 연속이었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의 심장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성흔(聖痕, stigma)을 주셨다고 밝혔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자신의 삶과 그리스도의 발현,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비로운 은총의 계시를 다룬 “하느님 사랑의 사자(使者)”(Legatus Divinae Pietatis)를 저술했다. 5권으로 된 이 책은 그녀의 대표적 저서로 자서전적 고백서이자 영적 유언서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영성 수련”과 성녀 메히틸다에 의해 기록된 기도와 시로 된 소책자가 전해지고 있다. 그녀의 신심의 특징은 예수 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 체험과 헌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영성사에서 ‘예수 성심의 신학자’라고 불렸고, 예수 성심 공경을 시작한 선구자 혹은 첫 사도로 여겨졌다. 그녀는 중세의 신비신학과 신비주의에 중요한 역할과 기여를 했고, 특히 13세기 독일 교회 안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가로 여겨진다. 그녀의 풍부한 신비 경험으로 인해 ‘독일의 테레사’로 불리기도 한다.

1288년 심한 병을 알게 된 성녀 제르트루다는 합병증으로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기도 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던 그녀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수녀원의 시간 전례(성무일도)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헬프타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중병으로 고통받던 성녀 제르트루다는 1302년 11월 16일 “아! 신랑이 오신다.”라고 외치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5세였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올려지지 않았지만, 1606년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전례의 기도와 독서, 찬가에서 그녀를 공경할 수 있다는 공인을 받았다.

이후 그녀의 축일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로 확대되었고, 1738년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는 다른 제르트루다 성녀와 구별하고 그녀의 영적인 깊이를 재평가하면서 ‘위대한’(the Great)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테옥티스타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ctiste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세기 레스보스

 

 

테옥티스타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테옥띠스따, 테옥띠스떼스, 테옥티스따, 테옥티스테스, 테옥티스트.

 

 

테옥티스타 자료

전승에 의하면 성녀 테옥티스타(Theoctistes, Theoctista)는 에게해(Aegean Sea)의 레스보스 섬에 살다가 아랍인들에게 납치되어 파로스(Paros) 섬으로 끌려가던 중에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녀는 숲 속으로 도망하여 수색대가 돌아갈 때까지 죽은 듯이 숨어 있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그곳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30년 동안 은수자로서 생활하였다. 그녀는 오직 채소와 열매만을 먹었다. 그러나 성체를 모신 적이 없었기에 늘 걱정하던 중에, 한 번은 그 주위를 지나는 연로한 사제를 만났다.

이 사제의 이름은 시몬(Simon)으로 1년 뒤에 성체를 모시고 그녀를 찾았고 그녀는 비로소 성체를 모셨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그 성녀를 본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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