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6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니콜라오, 마요리코, 베드로 파스카시오, 보니파시오, 아브라함, 에밀리아노, 테르시오, 폴리크로니오, 총 8분 목록이에요.
12월 6일이 영명축일인 남자세례명은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천주교 세례명 상세정보로 이동합니다. 어울리는 세례명을 지금 바로 찾아보세요.
12월 6일 여자세례명 다티바, 디오니시아, 레온시아, 마리아 카르멘 살례스, 아셀라, 제르트루다, 총 6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2월 6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8가지
12월 6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니콜라오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270?-341년경 미라
니콜라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니콜라오 자료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는 오늘날 지중해 연안 터키 남서부 지역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리키아(Lycia) 지방의 항구 도시인 파타라(Patara)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뛰어난 행적으로 인한 전설과 비공식 전기 등을 통해 오래전부터 교회 안팎에서 큰 사랑을 받아왔다.
그는 파타라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막대한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성 니콜라우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활동에 헌신했다. 가난한 이들을 더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 사제가 될 마음을 가질 정도로 그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성 니콜라우스가 사제품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미라(Myra, 오늘날 터키의 뎀레 Demre)의 주교가 선종했다. 후임자를 찾기 위해 주교들이 열심히 기도하자 어느 날 밤,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아침 성당에 맨 먼저 들어오는 ‘니콜라우스’라는 자를 뽑아라.” 다음 날 아침 성당에 기도하러 왔던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주교로 축성되었다.
얼마 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성 니콜라우스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면서 10여 년의 옥고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교회 재건과 이교도들의 개종을 위해 노력했고, 당시 성행하던 아리우스(Arius) 이단에 대항해 제1차 니케아(Nicaea) 공의회(325년)에도 참석했다고 한다. 그는 미라의 주교로서 뛰어난 성덕을 바탕으로 교구 내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 활동에 전념하면서, 동시에 놀라운 기적을 통해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을 구해주었다.
성 니콜라우스의 선행과 기적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로는 어떤 아버지가 가난 때문에 세 딸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해 출가시키지 못하고 사랑하는 딸들을 매춘부로 넘겨야 할 곤경에 처했을 때의 일이다. 이를 안 성 니콜라우스는 그때마다 몰래 창문으로 금이 든 자루를 넣어 주어, 마침내 세 자매가 모두 정당하게 혼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 기근이 든 어느 해에 고약한 푸주한이 아이 셋을 살해한 후 소금에 절여 먹거리로 팔려고 할 때, 성 니콜라우스가 이들 세 어린이를 구해 소생시킨 일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기근으로 굶주리고 있던 어느 해에 식량을 가득 실은 여러 척의 배가 폭풍우에 밀려 미라 해안으로 떠밀려왔다.
이때 성 니콜라우스는 각 배의 선장에게 얼마간의 식량을 기증해 달라고 간청해서 굶주리는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출항 후에 식량을 살펴본 선원들은 그 양이 이전과 비교해서 전혀 줄지 않았음을 발견하고 놀라워했다. 그 외에도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사형에 처한 세 명의 청년을 구해주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에 나타나서 모함을 받아 위기에 처한 고관들을 구해준 일도 있었다. 그리고 물에 빠진 선원들을 여러 번 기적적으로 구해주기도 했다.
이렇듯 성 니콜라우스 주교는 생전에 소외되고 불행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그래서 341년경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명성은 더 멀리 전 서방으로 퍼져나갔고, 그의 전구로 많은 기적도 일어났다. 그의 유해는 원래 그가 주교로 있던 미라에 있었는데, 이 도시가 아랍의 침략을 받자 1087년 5월 9일 이탈리아 상인들이 미라의 주교좌성당에서 이탈리아의 바리(Bari)로 옮겨와 경당을 세우고 그곳에 모셨다.
그러자 많은 이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찾아와 점차 유럽 최대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래서 유해가 이장된 해에 바로 대성당 건축에 들어가 110년간의 건축 기간을 거쳐 1197년 성 니콜라우스 대성당을 완성해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가 축성식을 거행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보통 ‘바리의 성 니콜라우스’로 불리게 되었다. 성 니콜라우스 주교는 그의 행적과 여러 기적으로 인해 어린이와 누명 쓴 죄수, 폭풍우에 갇힌 뱃사람, 항해사, 어부, 여행자 등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성탄절 때 어린이들에게 성 니콜라우스의 자선과 사랑을 기리는 뜻에서 그의 이름으로 선물을 주는 관습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성 니콜라우스는 네덜란드에서는 ‘신터 클레스’(Sinter Claes), 영어권에서는 ‘산타 클로스’(Santa Claus)로 불렸다. 중세 후기 유럽 전역에서 성 니콜라우스의 축일 행사가 성대히 거행되면서, 독일에서 처음으로 성 니콜라우스가 산타클로스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산타클로스의 붉은색 옷도 사실은 주교가 입는 빨간색 복장에서 유래했다. 현대에 와서 성 니콜라우스는 산타클로스로서 대중적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이는 네덜란드계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미국에 정착하면서, 성 니콜라우스 축일에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관습을 소개하고 이를 성탄 전야 행사와 함께하면서부터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성 니콜라우스는 어린이와 가난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 시칠리아, 풀리아(Puglia), 로렌(Lorraine), 러시아 등 여러 지방과 나라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도 성 니콜라우스는 그의 행적이나 기적과 관련해서 보통 주교 지팡이를 들고 주교관을 쓴 채 한 손에 세 개의 황금 구슬이 놓인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세 아이를 소생시키거나 무죄한 세 사람을 구하는 장면, 그리고 기적적으로 선원들을 구하는 모습 또한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주제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요리코
- 가톨릭 성인 이름
Majori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84년
마요리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요리꼬, 마요리꾸스, 마요리쿠스.
마요리코 자료
484년 아리우스파(Arianism) 왕 후네릭은 아프리카에서 가톨릭 주교들을 추방하는 것을 시작으로 정통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가속화 시켰다.
이 당시에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성녀 디오니시아(Dionysia)는 아름답고 열심한 부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신자인데, 그녀의 몸에 유혈이 낭자할 정도로 심한 매를 맞았다.
이것을 보고 있던 그녀의 아들 성 마요리쿠스(또는 마요리코)는 겁에 질려 떨기만 하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들아, 우리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음을 잊지 마라. 우리가 구원의 갑옷을 잃을 수 없다.” 하고 타일렀다.
어머니의 이 말씀에 용기를 얻은 마요리쿠스는 당당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잔인한 죽음을 당하였다.
디오니시아의 동생 성녀 다티바(Dativa), 의사 성 에밀리아누스(Aemilianus), 성녀 레온티아(Leontia), 성 테르티우스(Tertius) 그리고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등 이때 순교한 수많은 분들이 로마 순교록에 기록되어 있고, 그들 모두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베드로 파스카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Pascha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대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00년 톨레도
베드로 파스카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파스카시오 자료
성 베드로 파스카시우스(Petrus Paschasius, 또는 베드로 파스카시오)는 어릴 때부터 프랑스 나르본(Narbonne)의 사제이며 파리(Paris)의 신학박사인 분을 가정교사로 모시고 교육을 받았다.
그 후 그는 그 가정교사와 함께 파리로 가서 학업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에스파냐 발렌시아(Valencia)로 돌아와서 24세의 나이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아라곤(Aragun)의 제임스 1세가 자기 아들 산초의 가정교사로 임명할 때까지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신학을 가르쳤고, 그 후 그는 톨레도(Toledo)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직도 무어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의 주교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포로들을 속량하고 겁에 질려 떠는 신자들을 격려했을 뿐만 아니라, 이교인과 배교자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그즈음에 그는 무어인들에게 체포되어 그라나다(Granada)의 지하 감옥에 갇혔는데, 옥중에서도 쉬지 않고 이슬람을 반대하는 글을 썼다. 그는 기도하던 중에 살해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73세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보니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Bonifac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84년
보니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보니파시우스, 보니파키오,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티오, 보니파티우스, 보니페이스.
보니파시오 자료
484년 아리우스파(Arianism) 왕 후네릭은 아프리카에서 가톨릭 주교들을 추방하는 것을 시작으로 정통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가속화 시켰다. 이 당시에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성녀 디오니시아(Dionysia)는 아름답고 열심한 부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신자인데, 그녀의 몸에 유혈이 낭자할 정도로 심한 매를 맞았다.
이것을 보고 있던 그녀의 아들 성 마요리쿠스(Majoricus)는 겁에 질려 떨기만 하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들아, 우리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음을 잊지 마라. 우리가 구원의 갑옷을 잃을 수 없다.” 하고 타일렀다.
어머니의 이 말씀에 용기를 얻은 마요리쿠스는 당당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잔인한 죽음을 당하였다.
디오니시아의 동생 성녀 다티바(Dativa), 의사 성 에밀리아누스(Aemilianus), 성녀 레온티아(Leontia), 성 테르티우스(Tertius) 그리고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또는 보니파시오) 등 이때 순교한 수많은 분들이 로마 순교록에 기록되어 있고, 그들 모두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아브라함
- 가톨릭 성인 이름
Abraham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58년 크라티아
아브라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브람, 에이브러햄.
아브라함 자료
시리아(Syria)의 에메사 태생인 아브라함은 수도자가 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수색 때문에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피해야 했다. 이곳에서 그는 수도원의 대리가 되었고, 불과 26세 약관의 나이로 크라티아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원장으로 10년을 지낸 후 그는 수도원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팔레스티나(Palestina)로 가서 관상생활에 알맞은 한적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교에 의하여 강제로 귀향해야 했고, 그가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크라티아의 주교로 승품되었다. 그는 주교로서 13년 동안 봉사하다가 마침내 팔레스티나(Palestina)의 고적한 곳으로 갈 수 있게 되어 여생을 그곳 수도원에서 지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에밀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Emil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의사,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84년
에밀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이밀리아노, 아이밀리아누스, 애밀리아노, 애밀리아누스, 에밀리아누스.
에밀리아노 자료
484년 아리우스파(Arianism) 왕 후네릭은 아프리카에서 가톨릭 주교들을 추방하는 것을 시작으로 정통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가속화 시켰다. 이 당시에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성녀 디오니시아(Dionysia)는 아름답고 열심한 부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신자인데, 그녀의 몸에 유혈이 낭자할 정도로 심한 매를 맞았다.
이것을 보고 있던 그녀의 아들 성 마요리쿠스(Majoricus)는 겁에 질려 떨기만 하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들아, 우리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음을 잊지 마라. 우리가 구원의 갑옷을 잃을 수 없다.” 하고 타일렀다.
어머니의 이 말씀에 용기를 얻은 마요리쿠스는 당당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잔인한 죽음을 당하였다.
디오니시아의 동생 성녀 다티바(Dativa), 의사 성 에밀리아누스(Aemilianus, 또는 에밀리아노), 성녀 레온티아(Leontia), 성 테르티우스(Tertius) 그리고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등 이때 순교한 수많은 분들이 로마 순교록에 기록되어 있고, 그들 모두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테르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Ter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84년
테르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떼르띠오, 떼르띠우스, 테르시우스, 테르티오, 테르티우스.
테르시오 자료
484년 아리우스파(Arianism) 왕 후네릭은 아프리카에서 가톨릭 주교들을 추방하는 것을 시작으로 정통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가속화 시켰다. 이 당시에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성녀 디오니시아(Dionysia)는 아름답고 열심한 부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신자인데, 그녀의 몸에 유혈이 낭자할 정도로 심한 매를 맞았다.
이것을 보고 있던 그녀의 아들 성 마요리쿠스(Majoricus)는 겁에 질려 떨기만 하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들아, 우리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음을 잊지 마라. 우리가 구원의 갑옷을 잃을 수 없다.” 하고 타일렀다.
어머니의 이 말씀에 용기를 얻은 마요리쿠스는 당당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잔인한 죽음을 당하였다.
디오니시아의 동생 성녀 다티바(Dativa), 의사 성 에밀리아누스(Aemilianus), 성녀 레온티아(Leontia), 성 테르티우스(또는 테르시오) 그리고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등 이때 순교한 수많은 분들이 로마 순교록에 기록되어 있고, 그들 모두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폴리크로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olychron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
폴리크로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뽈리끄로니오, 뽈리끄로니우스, 폴리끄로니오, 폴리끄로니우스, 폴리크로니우스.
폴리크로니오 자료
성 폴리크로니우스(또는 폴리크로니오)는 동로마제국에 살던 신부로 니케아(Nicaea)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리우스주의(Arianism)를 반대하였다. 그는 극단적인 아리우스파에 의해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 때에 미사를 봉헌하다가 살해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그 외 세례명 날짜로 찾기
그 외 세례명 이름으로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