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3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루치아, 오틸리아, 총 2분 목록이에요.
12월 13일이 영명축일인 여자세례명은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천주교 세례명 상세정보로 이동합니다. 어울리는 세례명을 지금 바로 찾아보세요.
12월 13일 남자세례명 마르다리오, 아우트베르토, 아욱센시오, 에드부르가, 에우스트라시오, 에우제니오, 오레스테스, 요한 마리노니, 유도코, 총 9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2월 13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2가지
12월 13일 여자세례명 목록
1. 루치아
- 가톨릭 성인 이름
Lucy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14년
루치아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시,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루치아 자료
성녀 루치아(Lucia)는 시칠리아(Sicilia)섬의 시라쿠사(Siracusa)에서 부유한 귀족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워 신심 깊은 아이로 성장했으나 불행히도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성녀 루치아는 스스로 하느님께 동정을 서원했는데, 어머니조차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일찍이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어머니 에우티키아(Eutychia)는 한 귀족 청년의 청혼을 허락하며 딸의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원했다. 그러나 스스로 동정을 서원했던 성녀 루치아는 자신의 결심을 어머니에게조차 말하지 못하고 오로지 기도에만 매달렸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불치의 병에 걸리자 성녀 루치아는 카타니아(Catania)에 있는 성녀 아가타(Agatha, 2월 5일)의 무덤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간절히 기도하였다. 기도의 은총으로 어머니의 병이 치유되자 성녀 루치아는 동정으로 살고 싶은 뜻을 밝히고 어렵게 어머니의 허락을 받았다.
동정 생활을 허락받은 성녀 루치아는 자신의 결혼 지참금마저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자 성녀 루치아에게 청혼했던 젊은이는 자신의 소유가 될 재산이 사라진 것에 분개해 성녀 루치아가 그리스도인이며 로마제국의 법을 어겼다고 고발하였다.
이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기에 성녀 루치아는 즉각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는 배교를 강요하며 심한 고문을 가하는 재판관 앞에서 “당신이 황제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듯 나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소원”이라고 당당히 자신의 신앙과 의견을 피력했다.
재판관은 도저히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매음굴로 보내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여러 남자와 소 떼까지 이용해서 성녀 루치아를 끌어내려 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녀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재판관은 성녀 루치아를 불에 태워 죽이려고 했으나 나무에 불이 붙지 않아 그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박해자는 긴 칼을 성녀에 입속에 찔러 넣어 죽였다고 한다.
빛을 의미하는 ‘룩스’(Lux)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성녀 루치아는 이런 모진 고문을 받을 때 눈알이 뽑히는 형벌까지도 받았다. 그러나 천사의 도움으로 뽑힌 눈알을 돌려받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성녀 루치아는 이름 그대로 어둠을 밝히는 빛나는 동정 순교자로서, 시력이 약하거나 시력을 잃은 이들과 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특별한 공경을 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교회 미술에서 성녀 루치아는 순교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나 칼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두 눈알이 담긴 쟁반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오틸리아
- 가톨릭 성인 이름
Othili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660-720년 알자스
오틸리아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딜리아, 오딜, 오딜리아, 오띨리아.
오틸리아 자료
오딜리아(Odilia), 아딜리아(Adilia), 오딜(Odile) 등의 이름을 가진 성녀 오틸리아는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 지방 보주(Vosges) 산맥의 오베르하임(Oberheim)에서 알자스의 공작이었던 아버지 아티크(Attich)와 메로빙거 왕가 출신인 어머니 베레스윈드(Bereswinde)의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잔인한 성격을 지닌 사람으로 앞을 볼 수 없는 데다 딸로 태어난 성녀 오틸리아를 하인들을 시켜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유모의 도움을 받아 겨우 숨길 수 있었는데, 아버지의 분노를 피해 성녀 오틸리아가 맡겨진 곳은 지금은 프랑스 지역이 된 발마(Balma)에 있던 한 수녀원이었다.
그녀는 비록 앞을 보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밝고 착하게 자랐다. 673년경 성녀 오틸리아는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성 에르하르두스(Erhardus, 1월 8일)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주교가 세례 중에 바른 성유가 그녀의 눈에 닿자마자 눈이 열려 시력이 온전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눈을 뜨고 세상을 보게 된 성녀 오틸리아는 아버지의 화가 풀렸으리라 생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아버지는 어머니의 집안인 메로빙거 왕조와 싸움을 벌이던 중이라 딸을 더는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성녀 오틸리아의 남동생들을 죽이고 생트 오딜(Sainte-Odile) 산에 딸을 감금시켰다.
680년경 성녀 오틸리아의 아버지는 처가인 메로빙거 왕조를 없애려는 음모가 어느 정도 성공해서 권력을 차지하자 그녀를 풀어 주고, 보주 산꼭대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몽생트오딜(Mont Sainte-Odile) 수녀원을 설립해 원장이 되도록 관용을 베풀었다.
12세기까지 이 수녀원은 호헨부르크(Hohenburg) 수녀원으로 불렸다. 몇 년 후 성녀 오틸리아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수녀원 아래 산기슭에 니더뮌스터(Niedermunster) 수녀원을 설립해 원장이 되었다.
두 번째로 설립한 수녀원에는 신자들을 위한 병원도 함께 지었다. 여기서 성녀 오틸리아는 아버지의 변화에 기뻐하며 남은 생을 기도와 봉사로 지내다 720년 선종해 몽생트오딜 수녀원에 묻혔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프랑스를 넘어 독일까지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미 9세기부터 여러 지역 교회의 성인 호칭 기도에 그녀의 이름이 등장했다. 그녀가 묻힌 무덤은 신자들, 특히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즐겨 찾는 순례지가 되었다. 그로 인해 14세기까지 성녀 오틸리아의 유해가 유럽 여러 도시에 나뉘어 모셔졌다.
적어도 16세기 이전부터 성녀 오틸리아는 알자스 지방과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나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져 왔다. 1807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는 공식적으로 성녀 오틸리아를 알자스 지방과 시각장애인 및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그 후 성녀 오틸리아가 살던 몽생트오딜 수녀원의 샘물은 눈병을 치료한다고 여겨지면서, 샤르트르(Chartre)와 루르드(Lourdes) 등과 더불어 프랑스에서 유명한 순례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교회 미술에서 성녀 오틸리아는 보통 두 눈이 있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그 외 세례명 날짜로 찾기
그 외 세례명 이름으로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