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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5일 여자세례명 2가지

피어나네 2023. 12. 15.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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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5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마리아 크로치피사 디 로사, 비르지니아 첸투리오네 브라첼리, 총 2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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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5일 남자세례명 막시미노, 바오로, 발레리아노, 이레네오, 총 4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2월 15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2가지

 

 

 

 

12월 15일 여자세례명 목록

 

  1. 마리아 크로치피사 디 로사

  2. 비르지니아 첸투리오네 브라첼리

 

12월 15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2가지

 

 

1. 마리아 크로치피사 디 로사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Crocifissa di Ros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1-1855년

 

 

마리아 크로치피사 디 로사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싸, 로즈,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크로치피사 디 로사 자료

이탈리아의 브레시아(Brescia)에서 9남매 중에 한 명으로 태어난 성녀 마리아 크로치피사 디 로사(Maria Crocifissa di Rosa)는 바울라 프란치스카 마리아(Paula Francisca Maria)라는 이름으로 영세한 유복하고 신심 깊은 집안의 딸이었다.

그녀는 성모 방문 수녀회의 교육을 받고 자랐으나 17세 때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학교를 떠나 집에 돌아와 부친의 집안일을 돕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수도생활에 대한 갈망이 열화같이 치솟았고, 그녀는 아버지는 이를 반대하고 결혼시키려 했기 때문에 크게 실망하여 나날을 지냈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콰프레다에 있는 아버지의 직물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영적인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한편, 1836년의 콜레라 희생자들을 돌보기 위하여 병원에서도 활동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버려진 소녀들을 위한 집을 짓고 원장이 되었다. 또 그녀는 농아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개설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1840년 그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인 몬시뇰 파우스티노 핀초니에 의하여 병자를 돌보는 수녀회의 장상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그녀는 마리아 크로치피사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 수녀회는 브레시아의 애덕 시녀회로 불린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이 수녀회는 1843년에 브레시아의 주교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1848년에 유럽을 휩쓴 전쟁 중에는 이탈리아의 북부 전선에서 부상자를 치료하는 한편 브레시아 병원을 운영하였다.

성녀 마리아는 1850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수녀회 승인을 받았고, 그 5년 후에 브레시아에서 운명하여 영웅적인 삶을 마감하였다. 그녀는 1954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비르지니아 첸투리오네 브라첼리

 

  • 가톨릭 성인 이름
    Virginia Centurione Bracelli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과부, 설립자,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587-1651년 제노바

 

 

비르지니아 첸투리오네 브라첼리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버지니아, 첸뚜리오네.

 

 

비르지니아 첸투리오네 브라첼리 자료

성녀 비르지니아 첸투리오네 브라첼리는 1587년 4월 2일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공화국의 총독을 역임(1621-1622년)한 조르지오 첸투리오네(Giorgio Centurione)와 렐리아 스피놀라(Spinola)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전통적인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세례성사를 받은 그녀는 어머니와 가정교사로부터 신앙과 문학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비르지니아는 봉쇄 수도생활에 대한 성소를 느꼈지만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에 의해 1602년 12월 10일 가스파레 그리말디 브라첼리(Gaspare Grimaldi Bracelli)와 결혼을 했다.

그녀의 남편인 가스파레는 저명하고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도박에 깊이 빠져 방탕한 생활을 했다. 비르지니아는 결혼 생활을 통해 렐리아(Lelia)와 이사벨라(Isabella) 두 딸을 얻었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스파레 브라첼리는 결혼을 한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쾌락에 빠진 생활을 포기하지 않아 결국 짧은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다.

비르지니아는 마지막까지 인내하며 기도와 애정을 갖고 남편을 겸손하고 정상적인 생활로 이끌려고 노력했지만, 불행히도 병약해진 남편은 1607년 6월 13일 이탈리아 서북부 알레산드리아(Alessandria)에서 사망하였다. 신앙심 깊은 비르지니아는 남편이 하느님 안에서 은총과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도록 도와주었다.

20살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홀로 된 그녀는 평생 정결을 지키며 살겠다며 아버지가 제안한 재혼의 기회를 거절했다. 그녀는 시댁에 머물며 자녀들을 교육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기도와 자선 활동에 전념하였다.

1610년 가난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특별한 소명을 느낀 비르지니아는 아버지의 엄격한 통제 하에서도 가문을 훌륭히 지키며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재산의 반을 가지고 개인적 또는 자선기관을 이용해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두 딸이 결혼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자 그녀는 버려진 아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병든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소외된 이들의 생활을 개선하는데 전적으로 투신하였다.

1624년 가을부터 이듬해까지 이어진 리구오리(Liguori) 공화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사부아(Savoie) 공작 간의 전쟁으로 직업을 잃고 굶주리는 이들이 증가하였다. 비르지니아는 처음에는 15명의 버려진 아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다가 점차 마을의 난민들 전체로 확장해갔다.

그녀는 특별히 가난한 여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였다. 1635년 8월 시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녀는 본격적으로 마을로 나가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가난한 이들과 그릇된 길에 빠질 위험에 놓인 이들을 찾아다니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점증하는 가난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지역주민들의 조직인 ‘자비로운 8명의 부인회’와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이들의 자비로운 보호자인 100명의 부인회’를 설립하였다. 그녀는 가정 방문을 통해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특별히 숫기가 없는 이들의 요구를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1629-1630년의 전염병과 대기근의 시기에 그녀는 어린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사업을 더욱 본격화하기 위해 몬테 칼바리오(Monte Calvario)에 있는 빈 수도원 건물을 빌려 피난처이신 성모의 집의 보호 하에 있던 이들을 데리고 1631년 4월 13일 입주하였다.

그 후 3년의 시간 동안 그녀가 설립한 기구는 300명의 환자들을 돌보는 세 개의 시설로 확장되었다. 그러자 비르지니아는 제노바 공화국 의회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하여 1635년 12월 13일 마침내 그 뜻을 이루었다.

이 시설에 수용된 이들은 함께 음식과 옷을 나누며 비르지니아의 훌륭한 자매들이 되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스스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였다.

비르지니아는 몬테 칼바리오 수도원을 아예 매입하고자 했으나 값이 너무 비싸 포기하였다. 대신 카리냐노(Carignano) 언덕 옆에 있는 두 채의 주택을 구입하여 피난처이신 성모의 집과 성당으로 개축하여 그녀가 설립한 기구의 모원으로 삼았다.

그녀가 설립한 기구의 정신은 1644-1650년에 편찬된 규칙서에 잘 표현되어 있다. 모든 거주시설은 피난처이신 성모의 집과 같은 형태를 갖춰야 하며 공화국 의회에서 임명된 훌륭한 평신도 보호자의 감독과 관리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수도복을 입는 자매들과 그렇지 않은 자매들 간의 구분은 필요하지만 그들 모두 서원 여부와 상관없이 순명과 가난, 노동과 기도 안에서 엄격한 수도승처럼 살아야 한다.

또한 공공의 보호시설에서 봉사할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서원의 한 가지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정신에 따라 운영되던 기구는 그 후 두 개의 수도회, 즉 골고타 언덕의 피난처이신 성모의 자매회와 골고타 언덕의 성모의 자매회로 분리되었다.

1641년 7월 3일 수도회의 진정한 책임자인 보호자 모임이 임명되자 비르지니아는 비로소 행정적인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녀는 모든 직무에서 물러나 가장 낮은 자매의 자세로 기꺼이 허드렛일을 수행하며, 아침부터 밤까지 거리에 나가 자선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였다. 그녀는 모든 이들, 특별히 병든 이들의 어머니로서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고자 했다.

비르지니아는 몇 년 동안 죄악의 뿌리를 치유하고, 타락으로부터 예방하며, 병자와 장애인들을 기구에 모셔오고, 건장한 남자들에게 일터를 찾아주며, 여성들에게는 자수와 양말을 만드는 기술을 훈련시키고, 어린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돕는 다양한 사회활동 그룹을 조직하였다. 그녀가 설립한 수도회의 활동이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협력자들이 감소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비르지니아는 건강이 나빠지면서 다시 관리직 활동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 지역 전체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노력했고, 1637년에는 제노바 공화국의 수호성인으로서 성모 마리아가 선정될 수 있도록 활약하기도 했다.

또한 40시간 기도 모임과 가정 사명의 회복을 위해서 힘썼다. 귀족 가문과 기사들 간의 평화 조정자로서도 활동한 그녀는 1647년 교회와 공화국 간의 화해를 도모해 공화국 당국이 보호시설에 대한 지원을 포기함으로써 야기된 논쟁을 종식시켰다. 그녀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시간을 사회적 신분과 관계없이 도움을 청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환시와 내적 담화 등 많은 신비적 은사를 받은 그녀는 1651년 12월 15일 64세의 나이로 제노바에서 선종하였다. 1985년 8월 22일 제노바를 방문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녀의 시복식을 거행했고, 2003년 5월 18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그녀를 성인품에 올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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