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1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글리체리오, 디오스코로, 미카, 베드로 카니시오, 세베리노, 아나스타시오, 테미스토클레, 총 7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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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2월 2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7가지
12월 21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글리체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Glyc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니코메디아
글리체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리체리우스, 글리케리오, 글리케리우스.
글리체리오 자료
성 글리케리우스(또는 글리체리오) 신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소아시아 지방 니코메디아에서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디오스코로
- 가톨릭 성인 이름
Diosco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3년
디오스코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디오스꼬로, 디오스꼬루스, 디오스코루스.
디오스코로 자료
성 테미스토클레(Themistocles)는 리키아(고대 소아시아 남서쪽 끝에 있던 지방)의 미라(Myra)에서 목동으로 생활하였다.
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중에 성 디오스코루스(또는 디오스코로)가 피신한 장소를 누설하지 않은 죄로 참수되었다. 성 디오스코루스 역시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미카
- 가톨릭 성인 이름
Mica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구약인물, 예언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세기BC
미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미가, 미카이아스, 미캐아스, 미케아스.
미카 자료
성 미카(라틴어 Michaeas)는 구약성경의 열두 소예언서 가운데 한 권인 미카서의 저자로, ‘미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미카야후’ 또는 ‘미카예후’의 축소형으로 ‘누가 주 하느님과 같으랴?’라는 뜻으로 구약 시대에 흔한 이름이었다. 예언자 미카의 신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른 예언자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소개되는 아버지 이름이 생략되어 있고, “유다 임금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카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미카 1,1)이라는 머리말을 통해 모레셋 출신임을 알려줄 뿐이다. 모레셋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 유다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그리고 그의 예언 활동 시기도 1장 1절의 언급과는 달리 요탐과 관련된 예언은 찾아볼 수 없고, 기원전 722/721년 북부 이스라엘(사마리아) 왕국이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함락된 사실의 선포(1,6-7)나 기원전 701년에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남부 유다 왕국 일부가 아시리아에게 병합된 사실(1,10-16)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 701년 무렵까지 예언 활동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미카 예언자는 이사야(Isaias)와 아모스(Amos)와 동시대인 기원전 8세기 말에 활동했을 것이다.
심판을 선포하는 사명을 띠고 온(미카 3,8) 유다 출신 예언자 미카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사제들과 직업 예언자들의 부정과 부패를 비난했고, 사회적 · 경제적 불의에 대해 신랄하게 고발하였다. 또한 그는 아모스의 ‘정의와 공정’, 호세아(Hosea)의 ‘사랑’ 그리고 이사야의 ‘거룩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겸손)’를 지닌 예언자였다.
그가 활동했던 1세기 후에 유다의 원로들은 “모레셋 출신 미카가 유다 임금 히즈키야 시대에 예언하였다”(예레 26,18)라고 증언하였고, 그의 활동을 들어 예레미야(Jeremias) 예언자를 변호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컸었다.
히즈키야 임금의 종교 개혁도 미카의 예언을 통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 직업 예언자들과는 달리 세련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한 미카는 사회 정의를 선포한 예언자일 뿐만 아니라 지배 계층에 대하여 소농(小農)들의 권리를 주장한 농촌 예언자로도 알려져 있다.
미카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순수한 예배를 강조하면서 심판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에 대해서도 선포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을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미카가 선포한 예언의 절정이라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고를 들 수 있다. 미카는 온 인류의 주님께서 다윗 가문에서 새 영도자를 태어나게 하시어 온 세상을 통치하도록 하실 것임을 선포하였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5,1)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의 삶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골, 다윗 임금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분이 몸소 평화가 되시리라고 선포하였다(5,4ㄱ 참조).
옛 “로마 순교록”은 1월 15일에 예언자 미카와 하바쿡(Habacuc)을 함께 기념했으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예언자 미카를 12월 21일로, 하바쿡을 12월 2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베드로 카니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Cani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교회학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21-1597년
베드로 카니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니시오, 가니시우스, 베드루스, 카니시우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카니시오 자료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Petrus Canisius, 또는 베드로 카니시오)는 네덜란드 동부 네이메헨(Nijmegen)에서 아홉 차례나 시장으로 선출된 야곱 카니스(Jacob Kanis)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 베드로 카니스로도 불리는 그는 법률가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독일의 쾰른(Koln) 대학교로 갔으나, 그 대학의 저명한 교수이며 예수회원이던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 8월 1일) 신부의 영향을 받아 신학으로 전향하고, 1543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산을 모두 나눠 준 후 1546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그는 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로 유명해졌다. 그는 트렌토(Trento) 공의회의 여러 회의에 참석했고,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가 시칠리아(Sicilia)의 메시나(Messina)에 설립한 예수회의 첫 번째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러던 중 바이에른(Bayern)의 빌리암 4세 공작이 그곳의 프로테스탄트들을 물리치고 가톨릭을 재건하기 위하여 그의 도움을 요청하자 1549년에 잉골슈타트(Ingolstadt)로 갔다. 그는 이와 비슷한 일을 오스트리아의 빈(Wien)에서도 수행했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는 오랫동안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여 가톨릭의 신앙을 옹호하는 일을 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그런 주제를 다루는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가 독일어 교리서의 첫판을 출판하자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즉시 15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1556년에 프라하(Prague)로 파견되어 그곳에 새로 짓는 대학교를 위해 일하는 동안에, 남부 독일과 보헤미아(Bohemia)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새 관구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독일 전역을 순회하면서 강의하고 설교하였고, 프로테스탄트를 반박했으며, 여러 개의 대학을 설립하고, 그가 설교하는 도시의 가톨릭을 부흥시켰으며, 폴란드에 예수회를 널리 보급한 장본인이었다. 1559년부터 1565년 사이에 그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대성당의 대표적인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아주 정열적인 사람으로 30년 동안 도보로 또는 말을 타고 2만 마일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톨릭의 부흥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후일 그는 독일의 딜링엔(Dillingen),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Innsbruck)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프리부르(Fribourg)에서 끝까지 교육과 집필에 전념하다가 1597년 12월 21일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현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조차 ‘고상한 예수회원’, ‘결점 없는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 평할 만큼, 트렌토 공의회에 연이어 일어난 가톨릭 재건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그 당시 논객들 가운데에서 가장 예의 바르고 올바르며 예리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펜과 신문의 영향력을 간파했기 때문에 모든 인쇄업자와 출판사에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는 또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루스(Cyrillus)와 교황 성 대 레오 1세(Leo I) 전집을 편집하였고,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편지를 비롯해 순교 신학, 성무일도 개정 그리고 가톨릭 공과(기도서) 등 수많은 저서를 출판했다.
흔히들 그를 ‘독일의 두 번째 사도’로 부른다. 그는 186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5년 5월 2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며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예수회에서는 4월 27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세베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ever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0년 트리어
세베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베리누스, 쎄베리노, 쎄베리누스.
세베리노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21일 목록에서 오늘날 독일 트리어의 주교이자 증거자인 성 세베리누스(또는 세베리노)의 이름만 간단히 전해주었다.
300년에 선종했다고 알려진 그에 대해서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아나스타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nasta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총대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09년 안티오키아
아나스타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나스따시오, 아나스따시우스, 아나스타시우스.
아나스타시오 자료
정통 교리의 수호자인 안티오키아의 성 아나스타시우스(4월 21일)를 계승하여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가 된 성 아나스타시우스(또는 아나스타시오)는 참으로 어려운 난국을 극복해야 하였다.
609년 시리아계 유대인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따라 황제 포카스의 지나친 압제로 인하여 성 아나스타시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살해한 폭도들은 사지를 절단하여 불태워 죽였다. 이 끔찍한 범죄는 황제군에 의하여 정당하게 다스려졌지만, 그로인한 교회의 피해는 막대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테미스토클레
- 가톨릭 성인 이름
Themistocl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3년 리키아
테미스토클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떼미스또끌레스, 테미스또끌레스, 테미스토클레스.
테미스토클레 자료
성 테미스토클레는 리키아(고대 소아시아 남서쪽 끝에 있던 지방)의 미라(Myra)에서 목동으로 생활하였다.
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중에 성 디오스코루스(Dioscorus)가 피신한 장소를 누설하지 않은 죄로 참수되었다. 성 디오스코루스 역시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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