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9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갈리스토, 다윗, 도미니코, 리보소, 마르첼로, 베드로, 보니파시오, 빅토르, 사투르니노, 세쿤도, 에브룰포, 크레센시오, 토마스 베케트, 트로피모, 펠릭스, 프리미아노, 호노라토, 총 17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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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2월 2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7가지
12월 29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갈리스토
- 가톨릭 성인 이름
Callis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갈리스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갈리스도, 갈리스투스, 깔리스또, 깔리스뚜스, 칼리스토, 칼리스투스.
갈리스토 자료
성 칼리스투스(또는 갈리스토)와 성 펠릭스(Felix) 그리고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는 모든 서방교회 순교록에 그 이름이 올라있다.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로마(Roma)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 그들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더 이상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다윗
- 가톨릭 성인 이름
Davi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왕, 예언자, 구약인물 - 활동 연도와 지역
+10세기BC 이스라엘
다윗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비드, 데이비드.
다윗 자료
성 다윗은 이사이의 막내아들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다윗 왕조의 태조로서 예루살렘에서 기원전 1000-961년 사이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이었다.
다윗은 유다 지방 베들레헴 출신이고 룻기 4장 18-22절에 의하면 보아스와 모압 여인 룻 사이에서 태어난 오벳의 손자이다. ‘다윗’이란 이름은 전통적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백성들의 요구에 못 이겨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왕정 제도를 시작한 예언자이자 판관인 사무엘(Samuel, 8월 20일)은 사울이 왕으로 살아 있을 때 이미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미래의 왕으로 세웠다(1사무 16,1-13). 이는 이사이도 다윗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앞서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아말렉의 왕 아각과 가장 좋은 양과 소와 짐승들을 없애지 않음으로써 헤렘(Herem) 법을 지키지 않았다. 그로 인해 주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는 말씀과 함께 그를 왕위에서 배척하셨다는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1사무 15,10-31).
주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면서 사울은 악령의 괴롭힘을 받았다. 그러면서 다윗이 사울을 위한 비파 연주자로 발탁되어 사울의 총애를 받으며 그의 무기병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음악에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에게 악령이 내릴 때마다 비파를 타서 악령을 쫓아내고 사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1사무 16,14-23).
이어서 다윗은 필리스티아의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1사무 17장).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침략한 갓 출신의 필리스티아인 투사로서 엄청난 키와 갑옷으로 중무장한 군인이었다.
이스라엘 군사들이 그를 보고 도망갈 때, 다윗은 돌멩이 다섯 개를 넣은 양치기 가방을 메고 손에는 무릿매 끈을 들고 다가갔다. 그리고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골리앗의 이마를 맞혀 쓰러뜨리고 그를 죽였다.
이스라엘의 승리와 함께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사울 왕 앞에 나섰다. 이 모든 것은 주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듯 구약성경은 다윗의 출현을 다양한 전승을 통해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시기를 받아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외적과의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며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사울의 딸 미칼과 결혼해 그의 사위가 되었으나 왕의 시기와 위협은 그치지 않았다.
다윗의 절친한 친구인 요나탄 왕자의 중재로 겨우 현상 유지는 했으나 이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다윗은 라마로 도망갔다가(1사무 19,18-24) 놉으로 가서 사제 아히멜렉의 도움을 받았다(1사무 21장).
그리고 필리스티아의 갓 나라 임금 아키스에게 가서 잠시 머물다가(1사무 21,10-15) 아둘람으로 가서 곤경에 빠진 이들, 빚진 이들, 그 밖에 불만에 찬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 수는 사백 명가량 되었다(1사무 22,1-2).
그 후로 사울의 추적을 피해 모압의 미츠파, 크일라, 지프 광야, 마온 광야, 엔 게디 산성을 전전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군대를 이끌고 엔 게디 광야로 왔을 때, 다윗은 동굴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단지 겉옷 자락만 잘라왔다(1사무 24장).
마온에서 포악한 부자 나발을 물리치고 슬기로운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한 다윗(1사무 25장)은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으로 망명해 갓의 임금 아키스와 더불어 살았다. 다윗은 아키스에게 청해 치클락 성읍을 받아 부하들과 함께 아키스의 용병으로 1년 4개월을 살았다(1사무 27,1-7).
사울이 죽자 다윗은 주님의 뜻에 따라 필리스티아를 떠나 헤브론으로 이주하였다. 두 아내와 부하들을 데리고 헤브론 성읍에 자리 잡자 유다 사람들이 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유다의 임금으로 세웠다(2사무 2,4).
헤브론은 곧 유다의 수도가 되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사울 군대의 장수인 아브네르가 마하나임으로 가서 사울의 아들 이스 보셋을 온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2사무 2,9). 이렇게 유다와 이스라엘은 개별국가로 대립했다.
이스 보셋이 살해된 후(2사무 4,1-12)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자 그는 예루살렘을 점령해 수도로 삼고 새로운 성전 건립을 구상하며 유다와 이스라엘의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이를 위해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2사무 6장). 예루살렘에서 33년의 통치 기간 중 이스라엘은 강대한 국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시련도 많았다. 다윗이 총애했던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란이 대표적이었다(2사무 15,1-18,17). 많은 아내를 두었던 다윗은 왕자들의 암투와 반란까지 겪게 되었다. 이미 예언자 나탄이 왕자의 난을 예언한 적이 있다. 다윗 왕이 밧 세바에게 빠져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을 때다.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2사무 12,10)
압살롬의 반란이 진정되자 다시 벤야민 지파 세바가 반란을 일으켰다. 다윗은 강경 진압으로 초기에 반란을 진압했지만, 앙금이 남아 솔로몬 사후 북쪽 지방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다윗은 구약성경에 800번 이상 등장할 만큼 이스라엘 역사에 중요한 인물이다. 마태오와 루카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더라도 분명 예수님의 조상이다. 구약성경은 이런 다윗의 다양한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긍정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모습도 진솔하게 전해준다. 이는 왕정 제도에 대한 긍정적 · 부정적 견해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보다 주님의 선택과 그 선택이 다윗에게 변함없이 머물렀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때때로 주님의 질책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돌아서서 하느님을 향했던 다윗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을 사랑하셨고, 그의 후손을 일으키시어 그의 왕좌를 튼튼히 해주셨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고 바빌론 유배를 경험하면서 다윗을 떠올리며 그와 같은 임금, 새로운 다윗을 희망하게 되었고, 그 희망은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도미니코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도미니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도미니코 자료
성 도미니코(Dominicus)와 성 빅토르(Victor), 성 프리미아누스(Primianus), 성 리보수스(Lybos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크레스켄티우스(Crescentius), 성 세쿤두스(Secundus), 성 호노라투스(Honoratus)는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리보소
- 가톨릭 성인 이름
Lybos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리보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보수스.
리보소 자료
성 도미니코(Dominicus)와 성 빅토르(Victor), 성 프리미아누스(Primianus), 성 리보수스(또는 리보소),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크레스켄티우스(Crescentius), 성 세쿤두스(Secundus), 성 호노라투스(Honoratus)는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마르첼로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485년
마르첼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로, 마르셀루스, 마르첼루스, 마르켈로, 마르켈루스.
마르첼로 자료
시리아의 아파메아(Apamea) 출신인 성 마르첼루스 아키메테스(Marcellus Akimetes, 또는 정의로운 사람 마르첼로)는 양친을 잃고서부터 세속 일에 흥미를 잃고, 안티오키아(Antiochia)로 가서 전심전력으로 성서를 공부하였다.
그 후 에페수스(Ephesus)로 가서 하루 종일 쉼 없이 성무일도를 외는 수도 공동체에 입회하여 주로 성서 필사본을 만들고 기도하며 지냈다. 그런 그의 높은 성덕과 고독 그리고 엄격한 생활이 크게 돋보이기 시작했으므로 그는 그 공동체의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공동체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압박으로 고난을 받던 중, 그의 뛰어난 지혜와 관리 덕분으로 날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그는 청빈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극성을 부리던 이단 퇴치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은 사람도 성 마르첼루스였다. 그는 45년 동안 수도원 원장을 지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092-1156년 클뤼니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자료
베드로 드 몽보아시엘(Petrus de Montboissier)은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Auvergne)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클뤼니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20세 때에 이미 베절레이의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1122년 30세 때에는 클뤼니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 남부에서 성행하던 베드로 부루시아 이단을 반대하는 글을 썼고, 랭스 시노드(Synod of Reims)에도 참석하는 등 교회사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을 30년이나 지도하여 이곳이 서방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수도원이 되게 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보니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Bonifac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보니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보니파시우스, 보니파키오,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티오, 보니파티우스, 보니페이스.
보니파시오 자료
성 칼리스투스(Callistus)와 성 펠릭스(Felix) 그리고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또는 보니파시오)는 모든 서방교회 순교록에 그 이름이 올라있다.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로마(Roma)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 그들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더 이상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빅토르
- 가톨릭 성인 이름
Vict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빅토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빅또르, 빅똘, 빅톨.
빅토르 자료
성 도미니코(Dominicus)와 성 빅토르, 성 프리미아누스(Primianus), 성 리보수스(Lybos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크레스켄티우스(Crescentius), 성 세쿤두스(Secundus), 성 호노라투스(Honoratus)는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사투르니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aturn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사투르니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사뚜르니노, 사뚜르니누스, 사투르니누스.
사투르니노 자료
성 도미니코(Dominicus)와 성 빅토르(Victor), 성 프리미아누스(Primianus), 성 리보수스(Lybosus), 성 사투르니누스(또는 사투르니노), 성 크레스켄티우스(Crescentius), 성 세쿤두스(Secundus), 성 호노라투스(Honoratus)는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세쿤도
- 가톨릭 성인 이름
Secund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세쿤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군도, 세꾼도, 세꾼두스, 세쿤두스.
세쿤도 자료
성 도미니코(Dominicus)와 성 빅토르(Victor), 성 프리미아누스(Primianus), 성 리보수스(Lybos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크레스켄티우스(Crescentius), 성 세쿤두스(또는 세쿤도), 성 호노라투스(Honoratus)는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에브룰포
- 가톨릭 성인 이름
Ebrulf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517/626-596/706년 우슈
에브룰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브룰뽀, 에브룰뿌스, 에브룰푸스, 에브룰프.
에브룰포 자료
성 에브룰푸스(Ebrulphus, 또는 에브룰포)는 626년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의 바이외(Bayeux)에서 태어나 힐데베르트 3세(Childebert III)의 궁중에서 성장하고 결혼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수녀원으로 들어갔고, 그는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국왕의 허가를 받아 수도자가 되려고 준비하였다. 마침내 그는 바이외 교구의 어느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즉시 그는 성덕과 인격에서 높은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심한 유혹에 사로잡히게 되자 세 명의 동료 수도자와 함께 노르망디의 우슈 숲 속으로 은거하였다. 이들 은수자들은 움막도 없이 개울가에서 지내면서 엄격한 보속생활을 계속하였다. 한 농부가 그들을 보고 크게 놀라서 이 숲은 맹수가 득실거리고 먹을 것이 없는 곳이라고 일러 주자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 죄를 보속하기 위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굳게 믿고 살겠습니다.”
이 농부는 그 다음날 빵과 꿀을 가져온 뒤에 그들과 함께 보속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의 공동체가 인근 주민들에게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개종하였으며, 늘어나는 제자들을 수용할 수 없어서 남자와 여자를 위한 다른 두 수도원을 지었다.
성인은 은수자들에게 노동을 권유했고, 자신의 일로써 일용할 양식을 얻어야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성 에브룰푸스는 80세가 되어 운명하였는데, 그는 성체와 소량의 물로 6주간 동안 지낸 적도 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크레센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resce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크레센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크레센시우스, 크레센씨오, 크레센씨우스, 크레센티오, 크레센티우스, 크레셴시오, 크레셴시우스, 크레스켄티오, 크레스켄티우스.
크레센시오 자료
성 도미니코(Dominicus)와 성 빅토르(Victor), 성 프리미아누스(Primianus), 성 리보수스(Lybos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크레스켄티우스(또는 크레센시오), 성 세쿤두스(Secundus), 성 호노라투스(Honoratus)는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토마스 베케트
- 가톨릭 성인 이름
Thomas Becke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18-1170년 캔터베리
토마스 베케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마, 베케트, 베켓, 토머스.
토마스 베케트 자료
런던의 주 장관인 길버트 베케트(Gilbert Becket)와 마틸다(Matilda)의 아들로 태어난 성 토마스 베케트는 노르만족의 후손이다. 그는 런던에서 출생하여 서리(Surrey)의 머튼 프리오리(Merton Priory)에서 수학했으며, 런던에서는 법률을 공부하고 파리 대학교에서도 그의 전문 과목을 계속 연구하였다.
부친의 사망으로 궁핍한 환경으로 내몰린 그는 1141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관으로 들어갔다. 이때 테오발드(Theobald) 대주교는 성 토마스 베케트가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와 프랑스의 오세르(Auxerre)에서 법률을 공부하도록 조처해 주었다.
그는 1154년에 부제로 서품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테오발드 대주교의 명을 받고 로마(Roma)를 오가면서 중요한 일들에 관여하였다. 1155년 성 토마스 베케트는 헨리 2세 왕에 의하여 잉글랜드(England)의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국왕 다음의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헨리 2세를 수행하여 프랑스 툴루즈(Toulouse)로 원정을 나갈 때에는 부대장도 맡았다. 1161년 테오발드 대주교가 서거하자 헨리 2세는 성 토마스 베케트를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물론 그는 이 직책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1162년 그는 수상직을 사임한 후 사제품을 받고서 대주교로 착좌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엄격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1166년 성 토마스 베케트는 소위 '클라렌든 칙령'을 거부하였는데, 이 법은 교회 법정에서 행해야 할 성직자의 권리와 교황청에 호소하는 권리를 부인하는 악법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성 토마스 베케트는 프랑스로 축출되었다.
성 토마스 베케트는 이 사실을 교황에게 상소하였지만 헨리 2세와 반목하기를 원치 않았던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 교황은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 이처럼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케트가 반목하고 있을 때, 성 토마스 베케트는 교황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 퐁티니(Pontigny)의 시토회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1166년 헨리 2세가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지역에서 모든 시토회 회원들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할 때, 성 토마스 베케트는 상스(Sens) 교외의 성 콜룸바(Columba) 수도원으로 가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Louis VII)의 보호를 받았다. 루이 7세의 노력에 의해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케트는 평화 협정을 맺었고, 비로소 그는 잉글랜드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정치적인 사건 때문에 그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무참히 살해당하였다. 이 사건은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성 토마스 베케트는 사망 즉시 순교자로 선포되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그를 성인으로 공포하자 헨리 2세는 공적으로 잘못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유해가 모셔진 성 토마스 베케트의 경당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모이는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남긴 다음의 말은 아주 유명하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기꺼이 행하였다."
영국의 시인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은 그를 소재로 "대성당의 살인"을 썼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트로피모
- 가톨릭 성인 이름
Trophi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선교사,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 아를
트로피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드로피모, 드로피무스, 뜨로피모, 뜨로피모스, 뜨로피무스, 트로피모스, 트로피무스.
트로피모 자료
역사가인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 주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성 트로피무스(또는 트로피모)는 3세기 중엽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이후 오늘날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방의 재복음화를 위해 성 파비아누스(Fabianus, 1월 20일) 교황에 의해 파견된 7명의 선교사 주교인 ‘갈리아의 사도들’ 중 한 명이라고 한다.
로마에서 파견된 7명의 사도는 아를에 도착해 그곳의 초대 주교가 된 성 트로피무스 외에 나르본(Narbonne)의 성 바오로(Paulus, 3월 22일), 투르(Tours)의 성 가티아누스(Gatianus, 12월 18일), 툴루즈(Toulouse)의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11월 29일), 파리(Paris)의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0월 9일), 클레르몽(Clermont)의 성 아우스트레모니우스(Austremonius, 11월 1일), 리모주(Limoges)의 성 마르티알리스(Martialis, 6월 30일)가 있다. 그중에서 툴루즈의 성 사투르니누스와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는 순교하였다.
5세기 무렵부터 아를 지역의 전통은 초대 주교인 성 트로피무스를 사도 시대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사도적 전통과 연결하여 지역교회의 전통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에페수스(Ephesus)에서 소동이 일어난 후 성 바오로의 제3차 선교 여행을 수행했고(사도 20,4),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다인들이 군중을 선동해 성 바오로를 체포할 때 함께 있었던 에페수스 출신 이방인인 트로피모스(Trophimos)와 동일시했다(사도 21,27-30).
옛 “로마 순교록”도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성 트로피무스를 사도 성 바오로가 티모테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트로피모스와 동일시하며(2티모 4,20), 사도 성 바오로에 의해 주교로 서품되어 프랑스의 아를 지방에 복음을 전하도록 처음으로 파견된 사람으로 기록하였다.
또한 교황 성 조시무스(Zosimus, 12월 26일)의 표현을 인용해, 샘물과도 같은 그의 설교를 통해 갈리아 전체가 구원을 물을 받아 마셨다고 적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Provence)의 아를에서 성 트로피무스를 그 도시의 초대 주교로 믿고 기념한다고 간단히 기록함으로써 사도적 전통과 연결했던 부분들을 삭제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펠릭스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x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펠릭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체.
펠릭스 자료
성 칼리스투스(Callistus)와 성 펠릭스 그리고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는 모든 서방교회 순교록에 그 이름이 올라있다.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로마(Roma)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 그들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더 이상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프리미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Prim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프리미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쁘리미아노, 쁘리미아누스, 쁘리미안, 프리미아누스, 프리미안.
프리미아노 자료
성 도미니코(Dominicus)와 성 빅토르(Victor), 성 프리미아누스(Primianus, 또는 프리미아노), 성 리보수스(Lybos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크레스켄티우스(Crescentius), 성 세쿤두스(Secundus), 성 호노라투스(Honoratus)는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호노라토
- 가톨릭 성인 이름
Honora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호노라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호노라또, 호노라뚜스, 호노라투스.
호노라토 자료
성 도미니코(Dominicus)와 성 빅토르(Victor), 성 프리미아누스(Primianus), 성 리보수스(Lybos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크레스켄티우스(Crescentius), 성 세쿤두스(Secundus), 성 호노라투스(또는 호노라토)는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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