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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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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문도 남자세례명 목록
- 라이문도 (1월 7일)
- 라이문도 (3월 15일)
- 라이문도 (5월 29일)
- 라이문도 룰로 (6월 30일)
- 라이문도 (7월 8일)
- 라이문도 논나토 (8월 31일)
- 라이문도 (10월 5일)
1. 라이문도
- 세례명 축일
1월 7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Raymund - 신분과 직업
총장,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175-1275년 페냐포르트
라이문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이문두스, 레이먼드.
라이문도 이야기
에스파냐 북동부 카탈루냐(Cataluna) 지방의 페냐포르트에서 태어난 성 라이문두스(Raymundus, 또는 라이문도)는 바르셀로나(Barcelona)의 주교좌성당 부속 학교에서 공부한 후 그곳에서 논리학과 수사학을 가르쳤다.
그 후 이탈리아로 가서 볼로냐(Bologna) 대학에서 8년 동안 법학을 공부해 1218년 교회법과 민법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강의를 했다. 바르셀로나로 다시 돌아온 그는 1222년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 수도원에 들어가 도미니코회의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또한 성 베드로 놀라스코(Petrus Nolasco, 1월 28일)가 ‘노예 해방을 위한 속량의 성모회(메르체다리오회, Mercedarian Order)를 설립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수도회는 에스파냐 남부와 북아프리카에서 무슬림에 의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돈을 내고 구출하는 사업을 위해 시작되었다.
이미 바르셀로나와 볼로냐에서 학문 연구와 풍부한 강의 경험이 있던 성 라이문두스는 1230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가서 교황궁 고해 사제와 교황청 내사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신학교와 대학교의 교과서로 사용하기 위해 그때까지 반포된 역대 교황들의 교령을 수집하라는 교황의 명을 받고 이를 수행했다. 그는 수집한 것을 모두 묶어서 “그레고리우스 9세 교령집”(Decretales Gregorii IX)을 편찬하였다. 이 교령집은 1234년 교황 칙서로 공포되었다.
성 라이문두스는 1235년 아라곤(Aragon) 왕국의 수도인 타라고나(Tarragona)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다음 해에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오로지 설교 임무에만 전념하였다.
명예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1238년에 동료 회원들의 추대로 도미니코 수도회 제3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설립자인 성 도미니쿠스(Dominicus, 8월 8일)가 적용한 관습을 보존하면서도 설교자 수도회로서 도미니코회의 회헌을 개정하였다.
2년의 총장직을 마치고 다시 에스파냐로 돌아온 그는 이후 35년 동안 이단과 싸우면서 유다인과 무슬림의 개종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그즈음에 그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를 격려하여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Summa Contra Gentiles)을 쓰도록 격려했고, 도미니코회 학교에서 히브리어와 아랍어 학과를 설치하도록 했다.
100세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위한 생애를 살았던 성 라이문두스는 1275년 1월 6일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처음에 바르셀로나의 카타리나 수도원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1878년에 바르셀로나의 주교좌성당의 요한 바오로 소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교회법 연구의 기초를 놓은 공로로 교회법 학자의 수호성인이 된 그는 1601년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1671년에 1월 23일로 로마 보편 전례력에 추가되었으나, 1969년 전례력 개혁을 하면서 그의 선종 다음 날인 1월 7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자신의 긴 망토를 이용해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으로 종종 표현된다. 이는 그의 관련된 기적적 일화에서 유래한다.
성 라이문두스가 아라곤의 왕 제임스 1세(James I)의 고해 사제로 있을 때 무슬림의 개종을 위해 마요르카(Mallorca)섬에 간 적이 있었다. 왕은 그를 돕기 위해 방문하면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과 함께 왔다. 성 라이문두스는 왕의 잘못된 행동을 비판했으나 왕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왕과 함께 더는 머무를 수 없다며 바르셀로나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화가 난 왕은 그가 섬을 떠나는 것을 금지하고 그의 출발을 돕는 선장도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성 라이문두스는 해변으로 가서 하느님께 기도한 후 자신의 망토를 바닷물에 적셔 지팡이를 이용해 돛대처럼 만들고 그 위에 올라타 바르셀로나까지 무사히 바다를 건너갔다. 많은 이들과 선원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제임스 1세 왕도 참회하고 올바른 길을 걸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라이문도
- 세례명 축일
3월 15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Raymund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163년 피테로
라이문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이문두스, 레이먼드.
라이문도 이야기
에스파냐 북동부 아라곤(Aragon)에서 태어난 성 라이문두스(Raymundus, 또는 라이문도)는 타라조나(Tarazona) 주교좌성당의 참사회원으로 활동하다가 프랑스로 가서 시토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그는 에스파냐로 파견되어 나바르(Navarre)에 피테로 수도원을 설립하고 원장의 소임을 수행하였다. 당시 그곳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에스파냐와 무어인들간의 전투의 최전방이었다.
1157년 말과 1158년 초 사이에 칼라트라바(Calatrava)의 전초기지인 톨레도(Toledo)에 대한 무어인들의 대규모 공격이 있을 때 그 도시의 군인이 절대 부족하여 왕과 온 도시가 위급한 상황에 빠졌다.
이때 성 라이문두는 카스티야(Castilla)의 왕 산초(Sancho)를 설득하여 도시를 수호할 군대를 만들었다. 그는 톨레도의 대주교의 도움으로 사람들을 모아 대규모의 군대를 조직하여 무어인들에게 맞섰다. 결국 무어인들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그 후 그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규칙을 따르는 칼라트라바의 기사회를 조직하였다. 위대한 기사와 수도자로서 존경과 사랑을 받던 그에 대한 공경은 1719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라이문도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aymund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42년 툴루즈
라이문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이문두스, 레이먼드.
라이문도 이야기
도미니코 회원인 빌리암 아르노(William Arnaud)는 같은 수도회의 두 명의 동료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의 명으로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로 파견되어 스테파누스(Stephanus)와 라이문두스(Raymundus, 또는 라이문도) 등과 함께 알비파(Albigenses)와 맞서 싸웠다.
하지만 그들은 알비파에 의해 툴루즈, 나르본(Narbonne) 등 여러 지방에서 추방을 당했다. 아비뇽(Avignon)에서 설교한 빌리암 아르노와 그의 동료들은 밤을 이용하여 툴루즈의 레이몬드 7세 백작의 성으로 피신하였으나, 성을 지키던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모두 순교하였다.
이때 빌리암 아르노와 11명의 동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도미니코회와 작은 형제회의 순교자들이다. 그들은 1866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툴루즈의 순교자들로 시복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라이문도 룰로
- 세례명 축일
6월 30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aymund Lull - 신분과 직업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232-1316년
라이문도 룰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이문두스, 레이먼드, 룰로, 룰루스.
라이문도 룰로 이야기
라이문두스 룰루스(Raymundus Lullus, 또는 라이문도 룰로)는 모슬렘으로부터 마요르카(Mallorca) 섬을 구출한 어느 장군의 아들로서 마요르카 섬의 팔마(Palma) 태생이며, 아라곤(Aragun)의 야고보 1세 왕의 신하가 되었고, 1257년에 블랑카 피카니와 결혼하였다.
2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라이문두스는 은거생활을 추구하였는데, 1263년에 그리스도의 환시를 본 뒤로 생활을 완전히 바꾸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와 로카마두르를 순례한 후, 그는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었고, 가족들의 생계 외에는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사하였다.
그는 마호메트 교도들의 개종에 관심에 많았으며, 9년 동안 모슬렘에 대해 공부한 뒤, 자신의 이상을 꽃피우기 위하여 마요르카 섬에 트리니타스 대학을 세워 설교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는 마호메트 교도들의 선교를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그 당시의 정세 때문에 허가를 받지 못하다가, 1306년에 부지에 가는데 성공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추방되었다.
그는 철학, 음악, 항해, 법률, 천문학, 수학, 신학 등의 저서를 아라비아어로 남겼고,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a)와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에 버금가는 신비적인 시를 남겼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50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라이문도
- 세례명 축일
7월 8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Raymund - 신분과 직업
자선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118년 툴루즈
라이문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이문두스, 레이먼드.
라이문도 이야기
프랑스 툴루즈에서 태어난 성 라이문두스(Raymundus, 또는 라이문도)는 그곳의 성 세르닌 성당에 봉사하던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는 이 성당에서 합창대원으로 활약하다가 결혼하였으나, 곧 아내와 사별하였다.
그 후 그는 세상을 등지기로 결심하고 가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 참다운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실시하는 자선단체를 만들었다.
그는 이 자선행위를 유대인들에게도 베풀어 말썽을 빚기도 했으며, 가난한 성직자들을 돕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성 세르닌 성당의 건축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라이문도 논나토
- 세례명 축일
8월 3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Raymund Nonnatus - 신분과 직업
추기경,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04-1240년
라이문도 논나토 세례명과 같은 이름
논나투스, 라이문두스, 레이먼드.
라이문도 논나토 이야기
성 라이문두스 논나투스(Raymundus Nonnatus, 또는 라이문도 논나토)는 1204년 에스파냐 카탈루냐(Cataluna) 지방의 포르텔라(Portella)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출산 중에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성 라이문두스는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비로소 태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름 뒤에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논나투스’(Non-natus)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당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고, 성장하면서 남몰래 수도자가 되려는 꿈을 키워갔다. 가난한 귀족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농장을 물려받아 세속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랐고, 성 라이문두스는 아버지의 뜻을 어길 수 없어 집안일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산에 있는 농장에서 일하면서 매일 조용히 기도와 묵상을 할 수 있음에 매우 행복해했다. 그는 시간만 나면 인근의 성 니콜라우스 성당을 찾아 성모상 앞에서 주님을 뜻을 찾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돌려주시길 간청했다.
마침내 기도의 응답으로 어렵게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그는 기도 중에 받은 성모님의 권고대로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그리스도인 노예들의 해방을 위해 활동하던 성 베드로 놀라스코(Petrus Nolasco, 1월 28일)가 설립한 메르체다리오회(Mercedarian Order)에 입회하였다.
성 베드로 놀라스코의 지도를 받아 1222년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북아프리카 알제리(Algeria) 지방에서 모슬렘에게 팔려 노예 생활을 하던 신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가능한 많은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해방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이슬람교도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노예들을 해방하기 위해 준비해온 대속금이 모두 바닥나자 그는 본국에서 돈이 올 때까지 자신이 볼모가 되어 인질로 잡히는 선택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노예를 구출하기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그의 헌신과 희생을 보고 모슬렘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신앙의 길로 들어섰다. 반면 노예 상인들은 그를 점점 눈엣가시로 여겼고, 인질로 잡힌 그에게 온갖 형벌과 고문을 가했다.
배상금을 받기 위해 차마 죽이지는 않고, 더는 선교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불에 달군 꼬챙이로 입술을 뚫어 그 입에 자물쇠를 채워놓았다. 이렇게 8개월을 고통 속에서 보낸 성 라이문두스 논나투스는 성 베드로 놀라스코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에스파냐로 돌아올 수 있었다.
1239년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모진 형벌과 노동으로 건강을 해친 그는 귀국 후 바로 열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교황의 초청으로 로마로 가던 중 1240년 8월 31일 바르셀로나 근교 카르도나(Cardona) 성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그가 어렸을 때 기도하러 즐겨 찾았던 고향의 성 니콜라우스 성당에 안치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여러 곳에서 서로 그의 시신을 모시겠다고 주장하면서 논쟁이 생겼을 때, 신자들의 노새의 눈을 가리고 그의 시신을 실어 보냈더니 그가 어려서부터 기도하기 위해 즐겨 찾던 성 니콜라우스 성당 근처에서 노새가 멈춰 섰다고 한다.
그에 대한 공식적 공경은 1626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허용되었고, 1657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임산부와 신생아, 산부인과 의사와 조산사의 수호성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라이문도
- 세례명 축일
10월 5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aymund - 신분과 직업
총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330-1399년 카푸아
라이문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이문두스, 레이먼드
라이문도 이야기
라이문두스 델레 비네(Raymundus delle Vigne, 또는 라이문도)는 이탈리아의 카푸아 출신으로, 볼로냐(Bologna)에서 공부하던 중에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고, 로마(Roma)의 미네르바 수도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그는 피렌체(Firenze)와 시에나(Siena)의 교수를 역임하던 중,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4월 29일)를 만났다. 1376년 그는 그녀의 영적 지도자겸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그 당시 시에나를 강타한 페스트의 희생자 구호에 헌신하면서 성녀의 기도를 간청하였다.
성녀 카타리나와 더불어 그는 십자군 출정에도 큰 공을 세웠고, 아비뇽(Avignon)에 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 XI)를 설득하여 로마로 귀향케 하였다.
1378년 교황이 서거하였을 때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를 반대하여 우르바누스 6세(Urbanus VI) 교황을 지원했는데, 이것이 대이교의 시작이었다.
1380년 성녀 카타리나가 사망한 후에도 그는 이단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계속 노력했으며, 같은 해에 도미니코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성녀 카타리나의 전기와 몬테풀치아노(Montepulciano)의 성녀 아녜스(Agnes, 4월 20일) 전기 등을 남겼으며, 독일의 뉘른베르크(Nuremberg)에서 서거하였다. 그는 1899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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