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세례명 바르바라는 발바라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바르바라 14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바르바라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바르바라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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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라
천주교 여자세례명
14인 목록
바르바라 여자세례명 목록
- 구성열 바르바라 (5월 29일)
- 심아기 바르바라 (5월 29일)
- 심조이 바르바라 (5월 29일)
- 정순매 바르바라 (5월 29일)
- 최조이 바르바라 (5월 29일)
- 고순이 바르바라 (9월 20일)
- 권희 바르바라 (9월 20일)
- 김 바르바라 (9월 20일)
- 이 바르바라 (9월 20일)
- 이정희 바르바라 (9월 20일)
- 조증이 바르바라 (9월 20일)
- 최영이 바르바라 (9월 20일)
- 한아기 바르바라 (9월 20일)
- 바르바라 (12월 4일)
1. 구성열 바르바라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具性悅 Barbara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6?-1816년 한국
구성열 바르바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구 바르바라, 구바르바라, 발바라.
구성열 바르바라 이야기
충청도 홍주의 한내장벌(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출신인 구성열(具性悅) 바르바라는 본디 성격이 온화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덕행이 남달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입교한 그녀는, 첫 남편을 잃고 서석봉 안드레아에게 개가하였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서 과부’라고 불렀다.
구 바르바라 부부는 사위인 최봉한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교우들이 모여 사는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1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밀고자를 앞세우고 노래산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체포될 당시에 구 바르바라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이를 용감하게 이겨 냈다.
경주로 압송되자마자 구 바르바라는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면서 차츰 마음이 약해졌고, 옥으로 돌아와서는 배교할 마음까지 가지게 되었다.
이때 그녀의 사위인 최 프란치스코가 그녀를 위로하면서 ‘천주를 위하여 함께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설명해 주었다. 이러한 권면 덕택에 구성열 바르바라는 다시 신앙을 다잡고 어떠한 형벌도 꿋꿋이 참아 낼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구 바르바라는 남편과 사위, 그리고 신앙을 고수한 다른 동료들과 함께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또다시 여러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고,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남편과 사위는 형벌 때문에 옥사하고 말았다.
이러한 아픔이 있었음에도 구성열 바르바라는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면서 모든 고통을 이겨 내었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약 40세가량이었다.
구 바르바라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구성열 바르바라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심아기 바르바라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沈阿只 Barbara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3-1801년 한국
심아기 바르바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바라, 심 바르바라, 심바르바라.
심아기 바르바라 이야기
경기도 광주 태생인 심아기(沈阿只) 바르바라는 오빠 심낙훈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신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성인들의 모범에 감동하여 하느님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으며, 이후로는 조용히 집 안에서만 지내면서 모범적으로 교회의 법규를 지켜 나갔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오빠가 체포되자, 심 바르바라는 포졸들이 얼마 안 있어 자신에게도 찾아올 것이라 예상하고 그들을 기다렸다.
마침내 포졸들이 들이닥쳐 체포하려고 하자, 그녀는 어머니를 향해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제가 천주의 성스러운 뜻에 순종하도록 놓아두십시오.”라고 말한 뒤,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아가 분명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런 다음 동요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고서 한양으로 끌려갔다.
이후 심아기 바르바라는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모진 형벌을 받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계속되는 형벌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초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18세였다.
반면에 심 바르바라에 앞서 체포된 오빠는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무안(務安)으로 유배되었다. 그녀가 매를 맞다가 순교한 뒤, 그녀의 오빠가 박해자들에게 진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제 누이 바르바라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쳐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죽게 하였는데, 누이는 끝까지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심아기 바르바라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심조이 바르바라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沈召史 Barbara - 신분과 직업
양반,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3-1839년 한국
심조이 바르바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바라, 심 바르바라, 심바르바라.
심조이 바르바라 이야기
심조이(沈召史) 바르바라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20세 무렵에 홍봉주 토마스와 혼인하였다. 1801년의 순교자 홍낙민 루카는 그녀의 시조부였으며, 그녀와 같이 체포되어 1840년에 순교한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그녀의 시아버지였다. 남편 홍 토마스도 1866년에 순교하였다.
심 바르바라는 지능이 아주 낮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중요한 교리 외에는 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신앙은 말할 수 없이 굳었으며, 자선하려는 마음 또한 열렬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에, 심 바르바라는 전라도 광주에서 살았다. 시아버지가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자기 집으로 피신해 오자, 심 바르바라는 그들을 헌신적으로 거두어 주었다. 그녀는 조금도 짜증을 내지 않았고, 음식을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자신에게 짐이 된다는 눈치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에 심 바르바라는, 시아버지를 비롯하여 함께 살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체포될 때나 문초를 받는 가운데서도,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건강이 나쁘고 체질이 약하였음에도, 앞에 늘어놓은 형구를 볼 때나 관장들의 고함 소리를 들을 때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심 바르바라는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한 뒤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고통을 참아 내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천주를 위해 당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은 한 살이 된 막내아들이 굶주림과 병으로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을 보는 일이었는데, 그녀는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마침내 전라 감사는 심 바르바라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심 바르바라에게 처형 때까지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녀는 형벌의 고통과 더불어 이질까지 걸렸으며, 스스로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되자 타당하게 준비한 뒤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처럼 심조이 바르바라가 옥중에서 순교한 날은 1839년 11월 11일(음력 10월 6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 뒤를 이어 그녀의 아들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이에 앞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그녀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심조이는 시아버지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배웠는데, 부부 사이의 정을 끊으면서까지 천주교를 올바른 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육신이 죽기를 원하면서 이를 ‘영혼이 승천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미 7년 동안이나 천주교의 가르침을 배워 왔으니, 십자가 앞에서 서약한 것을 결코 바꿀 수 없으며, 죽어도 (천주교를 믿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심조이 바르바라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정순매 바르바라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鄭順每 Barbara - 신분과 직업
양반,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7-1801년 한국
정순매 바르바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바라, 정 바르바라, 정바르바라.
정순매 바르바라 이야기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정순매(鄭順每) 바르바라는 열여덟 살 되던 해인 1795년에 오빠 부부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오빠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도와 교회 일에 참여한 정광수 바르나바였고, 올케는 유명한 교우 집안 출신인 윤운혜 루치아로, 모두 1801년에 순교하였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정 바르바라는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또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려고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뒤, 주변 사람들에게는 ‘허가와 혼인하였다가 과부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과부로 행세하였다.
정 바르바라는 이후, 서울로 올라가 생활하면서 오빠 부부를 도와 교회 서적과 성물을 신자들에게 보급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윤점혜 아가타가 회장으로 있던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공소 예절을 치를 때면 언제나 정성을 다해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1800년에 세례를 받았고, 이후로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착한 일을 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정순매 바르바라는, 문초와 형벌을 겪으면서도 아주 뛰어난 용덕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한 사람의 교우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므로 관장은 그녀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지만, 자신이 원하던 것을 전혀 얻어낼 수가 없었다.
마침내 정 바르바라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고향으로 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명령에 따라 여주로 이송되었다. 그런 다음 1801년 7월 3일(음력 5월 23일), 또는 7월 4일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는 24세의 나이로 동정녀였다.
정순매 바르바라가 사형 판결을 받기 전에 말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포도청에서 모진 형벌을 받고 형조에서 엄한 문초를 당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저는 천주교 신앙을 너무나 좋아하여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정순매 바르바라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최조이 바르바라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崔召史 Barbara - 신분과 직업
양반,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0-1840년 한국
최조이 바르바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바라, 최 바르바라, 최바르바라.
최조이 바르바라 이야기
최조이(崔召史) 바르바라는, 1801년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한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자가 된 그녀는 부친이 순교한 뒤에는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천주나 이웃에 대한 열렬한 애덕과 인내는 모든 사람들을 탄복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장성한 뒤 최 바르바라는, 신태보 베드로의 아들과 혼인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시아버지 곁에 홀로 남은 탓에 거북하기도 하였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결코 피로나 슬픔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또 1827년 정해박해 때에는 시아버지와 같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적도 있었다.
이후 최 바르바라는 친척이나 친구들의 집에 얹혀살아야만 하였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는 시아버지를 자주 찾아갔고, 미약하나마 시아버지와 다른 죄수들에게 도움을 베풀려고 노력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최 바르바라는 전라도 광주에 있던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압송된 그녀는 첫 번째 문초와 형벌을 평온한 마음으로 참아 받았다. 그런 다음 감사 앞에 끌려가자, 1801년에 순교한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딸이라는 것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또 ‘자신의 시아버지 신 베드로가 올봄에 전주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도 밝혔다.
감사는 최 바르바라의 고백을 들은 뒤 “너는 죽는 길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죽음은 제가 바라던 것이고, 오래전부터 저는 그 준비를 해 오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최 바르바라는 이후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올 때까지 옥에 갇혀 있게 되었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였다. 그녀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최조이는 그 부친과 시아버지가 모두 천주교 신자로 흉악한 종자이며,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믿어 고질이 되었다. 천주교 교리를 가업으로 여기고, 형벌을 다반사(茶飯事)로 여기니, 이는 죄를 끊임없이 저지르는 무리와 같다.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최조이 바라바라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고순이 바르바라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高順伊 Barbara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8-1839년 한국
고순이 바르바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고 바르바라, 고바르바라, 바르바라, 발바라.
고순이 바르바라 이야기
성녀 고순이 바르바라는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고광성(高光晟)의 딸로서 서울에서 출생하였는데 지조가 굳고 지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부친이 피로써 증명한 신앙을 전심으로 본받아 수덕생활에도 열심이었다.
바르바라는 18세에 열심한 교우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결혼한 후 자녀 셋을 낳아 가정을 자녀 교육과 신심의 요람이 되는 모범가정으로 꾸몄다.
남편 박종원은 신자들의 회장이었으므로 그녀는 남편의 자선사업을 도와주며, 자신도 냉담신자 권면에 힘썼고,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치며 여자 병자들을 진심으로 간호하였다. 선교 신부들이 들어온 후에는 성사를 받고 더 큰 은총의 힘으로 분발하였다.
그러던 중에 남편이 체포되자 고 바르바라는 남편과 괴로움을 함께 할 생각으로 자수하려고 하였지만, 박해자들은 그의 소원을 앞질러 그녀를 잡아 가두었다. 그러므로 체포 당시 그녀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이러한 은혜를 어떻게 갚을꼬? 나는 천주를 위하여 치명함으로써 그분께 사과하련다.”고 말하여 그녀의 신앙이 굳고 확실함을 증명하였다.
이들 부부는 그 후 포청에서 서로 만나게 해 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서로 축복하며 고통의 새로운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자고 서로 격려하였다. 포장은 그들 부부를 함께 불러내어 똑같은 질문을 하고 똑같이 배교하라고 강요하였지만, 단호히 거절하므로 또 같은 형벌을 내렸다.
바르바라는 여섯 차례나 어찌나 잔인하게 고문당하였던지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에게 굳센 정신을 주셨으므로 마음의 평온은 조금도 잃지 않았다. 열흘 뒤에 그들은 다시 형조로 끌려가 새로운 고문을 받았는데 너무나 심하게 매를 맞아 살이 떨어져 나가기까지 하였다.
그 후 사형선고를 받은 바르바라는 사형집행일로 정해진 날까지 며칠이 남았는지를 손꼽아 가며 고대하다가 다른 6명의 신자와 함께 12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2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권희 바르바라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權喜 Barbara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4-1839년 한국
권희 바르바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권 바르바라, 권 발바라, 권바르바라, 권발바라, 바르바라, 발바라.
권희 바르바라 이야기
성녀 권희 바르바라는 원래 어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결혼 후에 남편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수계생활을 하였다. 바르바라는 순교자 이광헌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아내이며 순교자 이광렬 요한(Joannes)의 형수이고, 순교자 이 아가타(Agatha)의 어머니이다.
한 마디로 권희 가족은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일가’이다. 그녀는 남편을 도와서 앵베르 주교 및 신부들을 자기 집에 모셔 와서 신자들을 모아 미사에 참여케 하고, 강론을 듣게 하며, 성사를 받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1839년 4월 7일 그녀는 남편과 시어머니 그리고 8세된 아들과 17세 된 딸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배교를 강요하는 수많은 형벌을 받았으나, 가장 괴로웠던 고문은 어린 자녀들이 한없는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형조에서는 어린이들을 형조에서 신문하는 것이 법률에 허락되지 않는다는 구실로 바르바라의 자녀를 전에 있던 옥으로 돌려 보내내, 이 어린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부모들과 헤어져 있지 않게 하여 달라고 울부짖었던 것이다.
형리들은 이 어린이들을 이용하여 바르바라의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바르바라는 뼈를 깎는 아픔을 앓으면서도 끝까지 항구했던 것이다.
다행히 포청에서 80세 된 시어머니와 8세의 아들을 풀어주었으나, 그의 딸 이 아가타가 끝까지 남아 태장 300대 이상과 대곤 90대를 맞았고, 주림과 목마름과 추위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렇게 고통의 나날을 4개월 넘게 지내다가, 마침내 다른 신자 5명과 함께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여 순교하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6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김 바르바라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金 Barbara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5-1839년 한국
김 바르바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발바라, 김바르바라, 김발바라, 바르바라, 발바라.
김 바르바라 이야기
성녀 김 바르바라는 어느 시골의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순하고 또 신뢰심이 있던 이 소녀는 부모를 통하여 성교회를 알고 있던 중, 13세 때에 서울의 어느 부자 신자집의 하녀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열심히 성교회를 믿으며 동정 지키길 바라고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찾아와 딸에게 “훌륭한 자리가 나서 나는 벌써 승낙을 했으니 너도 시집갈 준비를 하라”고 하면서, 마치 결혼 상대가 신자 청년인 것 같이 꾸며 결혼하기를 강요하므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남편 된 사람은 완고한 비신자였으므로 그 사이에 태어난 여러 자녀 중 딸 진주 하나만 영세시킬 수 있었다. 바르바라는 남편을 입교시키려고 15년 동안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에 남편을 여의고 조선에 새로 들어 온 서양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전보다 더 열심한 마음으로 기도와 선한 일에 전념하였다. 그녀는 교우들 사이에 바르바라 또는 진주 엄마로 널리 알려졌다.
1839년 3월경 그녀는 자신이 살던 집 주인과 함께 잡혀 포청으로 끌려갔다가 나중에는 형조로 옮겨졌다. 그 동안에 배교하라, 동교인을 대라는 명령을 거부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사지가 부러져서 늘 고생했으며,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지만,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쇠약해진 몸이 열병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3개월을 고생하다가 옥 마룻바닥에 누워 35세의 일기로 옥사하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이 바르바라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 Barbara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5-1839년 한국
이 바르바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바라, 이 발바라, 이 발바라, 이바르바라.
이 바르바라 이야기
성녀 이 바르바라는 서울 청파동에 살던 교우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두 숙모인 이영희 막달레나(Magdalena)와 이정희 바르바라에게 양육되어 열심히 믿음을 지키며 자라났다.
그녀가 15세 되던 1839년 박해가 일어났고, 4월 11일에 두 숙모와 함께 체포되었다. 어린 나이에 포청에서 받은 무수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자 형조로 옮겨졌고, 형조판서는 이 바르바라를 배교시키기 위해 때로는 무서운 말로 위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달래기도 하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녀를 유혹해 보았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 아니하고 그 뜻을 굽히는 표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에 형관은 “나이 어린 것이 요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형조에서 처단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이 바르바라를 나이가 어리다는 명목을 붙여 포도청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러던 중 불행하게도 바르바라는 옥중에 퍼져 있던 전염병을 앓게 되었다. 열병에 걸린 이 바르바라는 1개월가량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또 약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운명하였다. 이때가 1839년 5월 27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겨우 15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이정희 바르바라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貞喜 Barbara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9-1839년 한국
이정희 바르바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바라, 이 바르바라, 이 발바라, 이바르바라, 이발바라.
이정희 바르바라 이야기
성녀 이정희 바르바라는 시홍군 봉천의 어느 가난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순교한 허 막달레나(Magdalena)의 딸이요, 순교자 이 막달레나의 언니로서 오직 성교회의 교리만을 따라 열심한 수계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완강한 외교인이자 천주교를 몹시 싫어하는 아버지 때문에 신앙생활에 많은 고통이 있었음은 물론 기도와 수계생활을 몰래 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집안의 귀찮은 일을 수 없이 당해야 했지만, 그녀는 뛰어난 신앙과 강력한 의지력을 가지고 열심한 생활을 하였다.
이 바르바라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어느 외교인 청년과 결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결혼을 거짓으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3년 동안을 앉은뱅이 노릇을 하였다. 3년이 지나자 약혼자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녀를 단념하였다.
사실 그녀의 이러한 인내와 고통은 뛰어난 신앙이 아니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르바라의 이러한 실제 행동을 알고 있던 어떤 교우 청년이 청혼을 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래서 바르바라는 외교인 아버지 밑에서 동정을 지킬 수 없다면 신자와 결혼하는 것이 낫다는 그녀의 소원대로 신자와 혼인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 2년 뒤에 남편을 여의고 친정에 돌아왔다가 다시 서울에 있는 고모 이 테레사(Teresia)의 집으로 가 있었다. 이때 동생인 이 막달레나도 동정을 지키며 살기 위해 서울로 와서 함께 살며 주님께 대하여 충성을 지키고 박해를 만나는 경우에도 항구하자고 서로를 격려하였다.
1839년 가해박해가 일어나자 이 바르바라는 동생 막달레나와 고모 테레사와 함께 스스로 포도청에 나가서 신앙을 고백하고 온갖 형벌을 받았다. 결국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1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조증이 바르바라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趙曾伊 Barbara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2-1839년 한국
조증이 바르바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바라, 조 바르바라, 조 발바라, 조바르바라, 조발바라.
조증이 바르바라 이야기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는 명문가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16세에 남이관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난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그
리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시아버지와 어머니가 희생되고 남편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때 남편을 따라갈 수도 없었고 또 의지할 데도 없었으므로 시골 친정으로 돌아가 남동생 집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았다.
그 당시 조선에는 신부가 한 분도 없었고 신자들과의 교류도 없었기에 바르바라도 자연히 냉담하게 지냈다. 30세 때에 서울로 올라온 그녀는 열심한 신자 친척집에 머물면서부터 예전의 허송세월을 보충하려는 뜻으로 신앙을 지키며 열심히 살았다.
또 바르바라는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Paulus)가 북경으로 선교사를 모시러 가는 계획을 도우며 그 여비를 보태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였다. 1832년에 남편이 귀양지에서 돌아오자 그녀는 남편과 함께 유 파치피코(본래 이름은 余恒德) 신부를 보살펴 드렸고, 나중에는 집에 신자들을 위한 강당을 마련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유 신부가 중국으로 돌아간 후 바르바라는 작은 집을 구하여 이사하였는데,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조 바르바라는 가끔 이런 말을 하였다. “만일 박해가 일어나면 우리는 죽어야 할 터이니, 천주의 영광을 현양하고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고통을 참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자.” 과연 이것은 빈 말이 아니었고 그녀의 행동과 말이 일치하게 되었다.
그때는 기해박해가 한창이었기 때문에 남편은 시골에 가서 숨어 있었고, 바르바라는 혼자 있다가 7월 붙잡혔다. 그녀는 그녀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남편의 피신처도 대지 않았으며, 신앙을 배반하지도 않았기에 고문을 20회 이상이나 당하였다.
바르바라는 “만 번 죽어도 나는 천주를 배반할 수 없고 또 내 남편이 어디 숨어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비밀을 지킨 것 때문에 바르바라는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180대나 맞았고, 형조로 옮겨가서도 다시 세 차례나 곤장을 더 맞았다.
바르바라는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 집행일이 되자 옥에 갇혀 있던 모든 신자들이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없게 된 것을 슬퍼하였다. 조증이 바르바라는 사형장에 나가기 전에 둘러싼 신자들을 애정과 신앙에 넘치는 말로 위로하고, 신앙을 증거하는데 굳건하라고 격려하며 서소문 밖의 형장으로 나아갔다.
때는 1839년 12월 29일이었으며, 그녀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최영이 바르바라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崔榮伊 Barbara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8-1840년 한국
최영이 바르바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바라, 최 바르바라, 최 발바라, 최바르바라, 최발바라.
최영이 바르바라 이야기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는 순교자인 아버지 최창흡 베드로(Petrus)와 어머니 손소벽 막달레나(Magdale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11남매의 맏딸이었으나, 다른 형제는 어려서 모두 죽고 나이 어린 여동생 하나만 남았다고 한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모범을 본받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려는 열의로 가득 찼으며, 또 본성이 순량하고 총명하였다.
그녀가 스물 살에 접어들어 부모들이 출가시키려 하였을 때 바르바라는 부모님에게 “이렇게 중요한 일에 있어서 지위가 높다든지 낮다든지 부자라든지 가난하다든지 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저 열심하고 글을 많이 배운 교우와 혼인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나이와 문벌에 격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부이던 조신철 카롤루스(Carolus)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때 바르바라의 나이는 스무 살이고, 조 카롤루스의 나이는 마흔 네 살이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열성적인 교우를 남편으로 맞이하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였으며, 서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깊이 하고 선행을 하도록 격려하였다.
또한 그들의 결합은 이듬해에 태어난 아들의 출생으로 축복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더 덕을 닦았으며 신자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켜나갔다.
1839년 5월 바르바라는 친정 부모인 최 베드로와 손 막달레나와 함께 잡혀 포도대장 앞에 끌려가 7회에 걸쳐 지극히 엄한 신문과 형벌을 받았다. 특히 남편 조 카롤루스가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이 집에서 압수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사정없이 매를 맞았다.
최 바르바라는 어머니와 함께 태장 2백 60대를 맞고, 여러 번 주리를 틀렸으나 그녀의 굳건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으며, 매를 맞아 살이 헤어져 떨어지고 상처에서는 피가 흘렸지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더욱 불타올랐다.
당시 바르바라가 옥에 들어갈 때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 손 막달레나가 그랬듯이 자기도 어머니 된 마음에서 정에 나약해질까봐 귀여운 아들을 친척 집으로 보내야만 했다. 이런 큰 희생을 치른 뒤 포장이 배교하고 신자들의 이름을 대라고 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아는 사람도 많지 않으니 동범자도 없습니다. 물건으로 말씀드리면 누가 그것을 사라고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바르바라는 일곱 번의 문초 중에 두 번의 주리와 곤장 250대를 맞았다.
형조로 옮겨진 바르바라는 고문을 또 받았지만 그 전과 같은 용기를 보여 마침내 12월 19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부모와 남편과 베네딕타(성 현경련)가 모두 순교하였으니 내 마음이 어찌 안온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천국을 생각하면 스스로 위로를 받고 이 은혜를 천주께 감사하게 됩니다. 나는 기쁨이 넘쳐흐르고 마음이 흔희작약합니다.”
이리하여 마침내 그녀는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이때가 1840년 2월 1일이며, 그녀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한아기 바르바라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韓阿只 Barbara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2-1839년 한국
한아기 바르바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르바라, 발바라, 한 바르바라, 한 발바라, 한바르바라, 한발바라.
한아기 바르바라 이야기
성녀 한아기 바르바라는 열심한 어느 교우 집에서 태어났고, 또 어머니가 매우 열심이어서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웠기에 자신도 꽤 열심할 수 있었지만, 부모의 교훈과 모범을 무시하고 신앙 없이 지내다가 어느 외교인과 결혼하였다.
하루는 한 바르바라가 친정에 다니러 왔다가 문간에서 김 막달레나(Magdalena)를 만났다. 이때 김 막달레나가 바르바라에게 주님께 회두하기를 열렬히 권고하자, 그녀는 곧 회개하여 그때부터 교리를 배우고 깨달으며 그리스도교의 가장 훌륭한 덕을 닦았다.
30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남편과 자녀들을 여의고 친정어머니에게로 돌아 왔다. 그녀는 이때부터 더욱 열심히 수계하여 모든 슬픔을 잊었고, 사람의 영혼을 구하려는 열정이 불타올라 외교인들에게 교를 전하고 죽어 가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며, 죄인들이 회개하도록 권면하고 자주 단식을 하며 극기를 많이 행하였다.
한 바르바라는 김 막달레나와 함께 1836년 10월에 체포되어 포청에 갇혔고, 배교를 강요하는 포장 앞에서 갖은 형벌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고집하였다. 그녀는 3년 동안이나 옥중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1839년 5월 24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바르바라
- 세례명 축일
12월 4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Barbara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6년?
바르바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바라.
바르바라 이야기
성녀 바르바라는 중세 시대에 가장 인기 있던 14명의 수호성인 중 한 명으로 대중적인 성녀이다. 그녀의 출생과 생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전설에 의하면, 이교도인 디오스코루스(Dioscorus)의 딸로서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성녀의 부친은 수많은 청혼자들을 물리치고 세상에 의해 딸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높은 탑 속에 그녀를 가두었다고 한다.
어느 날 부친은 성녀 바르바라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알고는 격분한 나머지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녀는 다행히 아버지의 분노를 피해 기적적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그녀는 숨어 지내면서 일꾼에게 은신처에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창문을 만들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은신처 또한 발각되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도착하기 전 기적적으로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결국 붙잡혀 아버지에 의해 재판관 막시미누스 다자(Maximinus Daja)에게 넘겨져 모진 고문을 당하였고, 배교하라는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여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때 아버지 디오스코루스가 직접 성녀 바르바라를 참수했는데,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번개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녀는 306년경에 순교한 것으로 여겨지며, 순교 장소는 이집트, 니코메디아(Nicomedia),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토스카나(Toscana), 로마(Roma) 등 여러 곳으로 전해져 정확하지 않다.
성녀 바르바라는 번개나 포탄으로 인해 또는 광산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이었다. 이는 그녀의 아버지가 번개에 맞아 죽음을 당한 것에 근거하며, 이러한 공경이 더욱 확산되어 후에 성녀 바르바라는 영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의 포병대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았다.
또한 15-16세기에는 플랑드르의 작가와 이탈리아의 많은 건축가들의 작품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성녀 바르바라는 포병, 건축가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바르바라의 상징물은 탑이며, 그녀의 상본에는 왕관, 종려가지와 칼, 탑과 공작, 그리고 그녀의 행복한 죽음을 상징하는 성작이 함께 그려져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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