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이름 찾기

아우구스타 여자세례명 3인 목록

피어나네 2024. 5. 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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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세례명 아우구스타는 아우구스따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아우구스타 3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아우구스타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아우구스타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본받고 싶은 여자 세례명 찾기

아우구스타
천주교 여자세례명
3인 목록

 

 

 

 

아우구스타 여자세례명 목록

 

  1. 아우구스타 (3월 27일)

  2. 세레나 아우구스타 (8월 16일)

  3. 풀체리아 아우구스타 (9월 10일)

 

아우구스타 천주교 여자세례명 3인 목록

 

 

1. 아우구스타

 

  • 세례명 축일
    3월 27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ugusta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세기 트레비소

 

 

아우구스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우구스따.

 

 

아우구스타 이야기

성녀 아우구스타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을 때 이탈리아 프리울리(Friuli) 공국의 대공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격노하여 자신의 손으로 딸을 죽이고 말았다. 그 후 성녀 아우구스타는 이탈리아 북부 트레비소 인근 세라발레(Serravalle)에서 일찍부터 공경을 받았다. 

교회미술에서 그녀는 일반적으로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 칼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때때로 그녀를 죽인 아버지와 함께 묘사되거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11월 25일)처럼 수레바퀴와 함께 묘사되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세레나 아우구스타

 

  • 세례명 축일
    8월 16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Serena Augusta

  • 신분과 직업
    황후

  • 활동 연도와 지역
    +290년 로마

 

 

세레나 아우구스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쎄레나, 아우구스따.

 

 

세레나 아우구스타 이야기

로마 순교록은 로마의 성 키리아쿠스(Cyriacus, 8월 8일)의 위(僞)행전의 내용에 근거하여 성녀 세레나 아우구스타를 종종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박해자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부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성 키리아쿠스가 마귀 들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딸을 치유해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인 성녀 세레나(Serena, 8월 16일)를 따라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하지만 성녀 세레나의 신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풀체리아 아우구스타

 

  • 세례명 축일
    9월 1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Pulcheria Augusta

  • 신분과 직업
    동정녀, 황후

  • 활동 연도와 지역
    399-453년

 

 

풀체리아 아우구스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우구스따, 풀케리아.

 

 

풀체리아 아우구스타 이야기

아르카디우스(Arcadius) 황제와 아일리아 에우독시아(Aelia Eudoxia) 황후의 딸로 태어난 성녀 풀케리아 아우구스타(또는 풀체리아)는 아홉 살 때에 부친을 여의었고, 어린 동생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가 황제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414년에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받고 왕의 섭정이 되었다. 

그녀는 동정서원을 발하고 오로지 동생의 성장과 교육을 위하여 헌신하였는데, 그 결과는 궁중의 분위기를 마치 수도원과 같이 변화시켰다.

421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테나이스(Athenais)와 결혼하였다. 아테나이스는 에우도키아(Eudocia)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나서 남편으로부터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래서 풀케리아와 에우도키아 사이의 알력이 불가피해졌다.

에우도키아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를 지지한 반면 풀케리아는 정통 교회를 옹호하였다. 이때 에우도키아는 풀케리아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며 그녀를 귀양가게 했는데, 에우도키아 역시 황제에 대한 불충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으로 귀양을 갔다.

황제는 에우티케스(Eutyches)와 그의 그리스도 단성설을 지지하고 또 에페수스(Ephesus)의 불법 시노드(Synod)에서 결의된 칙서를 옹호하였지만 풀케리아는 교황 성 대 레오(Leo)를 지지하였다.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사냥 중에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자 풀케리아가 황녀가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동정을 존중한다는 조건으로 마르키아누스(Marcianus) 장군과 결혼하였고 그와 함께 제국을 통치하였다.

그들은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를 적극 후원하여 그리스도 단성설을 단죄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교회, 구호소, 병원 등을 세우면서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실천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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