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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비코 남자세례명 9인 목록

피어나네 2024. 5. 1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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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세례명 루도비코는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루도비코 9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루도비코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루도비코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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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비코
천주교 남자세례명
9인 목록

 

 

 

 

루도비코 남자세례명 목록

 

  1. 루도비코 이바라키 (2월 6일)

  2.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4월 28일)

  3. 루도비코 (4월 30일)

  4. 루도비코 (8월 19일)

  5. 루도비코 (8월 25일)

  6. 루도비코 알레망 (Louis Allemard)

  7. 루도비코 베르트란도 (10월 9일)

  8. 루도비코 모르비올리 (11월 9일)

  9. 서 루도비코(볼리외 루도비코) (9월 20일)

 

루도비코 천주교 남자세례명 9인 목록

 

 

1. 루도비코 이바라키

 

  • 세례명 축일
    2월 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ouis Ibaraki

  • 신분과 직업
    복사, 3회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5-1597년 일본

 

 

루도비코 이바라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이바라끼.

 

 

루도비코 이바라키 이야기

성 루도비쿠스 이바라키(Ludovicus Ibaraki, 또는 루도비코 이바라키)는 함께 순교한 성 레오 카라수마루(Leo Karasumaru)와 성 바오로 이바라키(Paulus Ibaraki) 형제의 조카이다. 그는 작은 형제회의 3회원으로서 선교사들을 도와 복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일본 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려 많은 선교사가 추방되고 포교 행위가 금지되었으나 신앙 자체가 금지되지는 않았다. 1590년대에 들어서 에스파냐를 비롯한 서양 세력과 일본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조심스럽게 선교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1596년 무렵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오늘날의 교토(京都, Kyoto) 지방인 미야코(宮古, Miyako)에서 성당과 수도원과 병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고 일본 지배층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게다가 그해 여름 필리핀의 마닐라(Manila)를 떠나 멕시코로 가던 에스파냐 선박 산 펠리페(San Felipe)호가 태풍에 밀려 일본 해안으로 떠밀려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선원들이 일본 관리들과 대화 중에 에스파냐의 왕권과 정복욕을 자랑하며 일본을 무시하는 말을 하고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자아냈다.

결국 1596년 12월에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 내려지면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성 루도비코 이바라키도 미야코에서 체포되었다. 이 박해로 게이한 지방에서 체포된 이들은 작은 형제회의 신부와 수사 6명, 작은 형제회의 일본인 재속 3회원 15명, 예수회의 수사 3명 등 모두 24명에 달했다.

그들은 1597년 1월 3일 미야코 감옥에서 광장으로 끌려 나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장인 나가사키(長崎, Nagasaki)까지 혹한의 추위 속에서 걸어가야 했다. 그들이 처형을 위해 나가사키까지 가는 동안 예수회 회원들을 돌보도록 오르간티노(Gnecchi-Soldo Organtino) 신부에 의해 파견된 성 베드로 스케지로(Petrus Sukejiro)와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돌보던 성 프란치스코 키치(Franciscus Kichi)도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드러나 체포되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순교의 길에 동참해 순교자는 모두 26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2월 5일에 나가사키 근교 우라카미(浦上, Urakami)라는 교우촌에 도착해 2명의 예수회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성 루도비코 이바라키와 동료들은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자카(西坂, Nishizaka)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이때 성 루도비코 이바라키의 나이는 불과 12세였다. 너무 어린 나이에 처형되는 것이 안쓰러워 신앙을 버리고 목숨을 구하라는 어느 사무라이의 말에 그는 오히려 “당신도 그리스도인이 되어 나와 함께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라고 당당히 외쳤고, 자기 체구에 맞게 만들어진 십자가를 발견하고는 달려가 그것을 껴안고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나가사키의 골고타 언덕으로 불리는 니시자카 언덕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할 수 있어서 기뻐했던 성 루도비쿠스 이바라키와 25명의 동료는 이렇게 해서 일본 최초의 순교자들이 되었고, 그들이 순교한 언덕은 이후 ‘순교자의 언덕’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 루도비코 이바라키와 25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627년 9월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26위의 일본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성 바오로 미키와 25명의 동료가 순교한 2월 5일 목록에서 그들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의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이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 추가되었다.

그러면서 성녀 아가타(Agatha, 2월 5일) 동정 순교자와의 중복을 피하려고 2월 6일로 날짜를 옮겨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또한 2월 6일 목록에서 26위의 일본 성인인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 세례명 축일
    4월 28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ouis Mary Grinion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73-1716년 몽포르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리농,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이야기

프랑스 몽포르의 어느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란 성 루도비쿠스 마리아 그리뇽(Lodovicus Maria Grinion, 또는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은 렌(Rennes)의 예수회 대학에서 교육받은 후 170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의 첫 임지는 푸아티에(Poitiers)의 한 병원이었는데, 병원 관계자의 재정비로 인하여 원성을 사게 되자 사임하였다.

그는 이 병원을 떠나기 전에 일단의 여성 그룹을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가 후일 ‘지혜의 딸 수녀회’가 되었다. 그는 주로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였는데, 이것이 또 그곳 주교의 원성을 듣게 되어 설교권을 박탈당하였다. 그래서 그는 로마(Roma)로 가서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로부터 선교사 총대리로 임명되어 브르타뉴(Bretagne) 선교 길에 올랐다.

그가 늘 문제를 일으키게 된 주된 이유는 과도한 신심 때문이었으나 또한 그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의 주요 신심은 마리아와 로사리오(묵주기도)였다. 그는 이 신심을 전파하기 위하여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이란 책을 저술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1715년 그는 수 명의 사제들을 규합하여 ‘마리아 선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생로랑쉬르세브르(Saint-Laurent-sur-Sovre)에서 운명하였고 1947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루도비코

 

  • 세례명 축일
    4월 3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oui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55년 코르도바

 

 

루도비코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루도비코 이야기

성 아마토르(Amator)는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 부근 마르토스(Martos)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수학한 후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수도승인 성 베드로(Petrus)와 평신도 친구인 성 루도비쿠스(Ludovicus, 또는 루도비코)와 함께 설교자로 활동하다가, 코르도바에서 복음선포자들을 깨끗이 쓸어버리려는 사라센 제국에 의해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루도비코

 

  • 세례명 축일
    8월 1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ouis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274-1297년 툴루즈

 

 

루도비코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루도비코 이야기

성 루도비쿠스(Ludovicus, 또는 루도비코)는 시칠리아(Sicilia) 섬의 왕 카롤루스 2세(Carolus II)의 아들로 태어났다. 1284년 그의 부친이 아라곤(Aragun) 왕과의 해전에서 포로가 되었을 때, 석방 조건으로 그의 아들 세 명을 보내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져 성 루도비쿠스도 인질로 잡혀갔다.

그는 7년 동안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지내면서 여러 가지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하는 한편,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영향을 받아가며 공부하였다. 이윽고 그는 작은 형제회 회원과 함께 기거하면서 밤낮으로 기도하고, 철학과 신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1295년 그는 석방되었으나 아라곤 국왕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하고 겸손하신 예수를 따르기 위해 세속적인 모든 것을 물리치고는 “나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 후 그가 툴루즈의 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로부터 관면을 받고 23세의 나이로 사제 서품 후 착좌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로마(Roma)로 가서 작은 형제회 회원으로서 서원하였다.

그는 가난한 수도자로서 주교직을 수행하였으나, 툴루즈 사람들은 그를 왕 못지않게 공경하였다. 그의 신심과 자태는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주교관의 모든 화려한 물건은 배격하고, 작은 형제회의 회원답게 오로지 작은 형제회 회원에 알맞은 의복과 음식으로 만족하며 살았다.

그는 마르세유(Marseilles)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 안장되어 있다. 1317년 요한 22세(Joannes XXII)로부터 시성될 때 그의 모친도 생존해 있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루도비코

 

  • 세례명 축일
    8월 25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ouis

  • 신분과 직업
    왕, 3회원

  • 활동 연도와 지역
    1214-1270년 프랑스

 

 

루도비코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루도비코 이야기

성 루도비쿠스(Ludovicus, 또는 루도비코)는 프랑스 왕 루이 8세와 카스티야(Castilla)의 블랑쉬(Blanche)의 아들로 1214년 파리(Paris)에서 서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푸아시(Poissy)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1226년 그의 아버지가 서거했을 때 그의 나이는 12세에 불과했으므로 어머니가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아들의 왕권을 노리는 샹파뉴(Champagne)의 티보 4세(Thibaud IV)를 비롯하여 야심 많은 귀족과 대항했고, 어떤 때에는 전쟁도 불사하였다.

그는 1234년 5월에 프로방스(Provence)의 공작 레이먼드의 딸인 마르가리타(Margarita)와 결혼하여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들을 훌륭하고 경건하게 교육하였다. 결혼한 해에 그는 왕권을 물려받고 통치자가 되었고, 어머니인 블랑쉬는 고문관으로서 아들을 도왔다.

그는 1242~1243년에 일어난 남프랑스 반란을 진압했고, 잉글랜드(England)의 헨리 3세(Henry III)를 타유부르(Taillebourg) 전투에서 격퇴하고, 프랑스 서부의 푸아투(Poitou)를 손에 넣는 등 국가의 권력을 점점 확대하였다. 1248년 그는 십자군을 지휘하여 출정하였으나 1249년에 이집트 북부의 다미에타(Damietta)에서 포로가 되어 사라센인들의 손에서 곤욕을 치렀다.

그 후 그는 석방되어 이스라엘 성지로 가서 1254년까지 머물다가 어머니의 선종 소식을 듣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플랑드르(Flandre)와의 평화를 이룩하고 리모주(Limoges)와 카오르(Cahors) 등 수많은 지역을 평정하였다.

성 루도비코는 천성적으로 신심이 깊었고, 또 실제로 이상적인 수도자 생활을 꿈꿨었다. 그래서 그는 정의로운 정치를 펼치며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왕으로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권리를 옹호하여 성왕(聖王)으로 불렸다. 동시에 그는 예리하고 강인한 군주였으며,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불경한 태도나 말을 한 사실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맏아들에게 한 유언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설명하고 지켜나가도록 부탁할 정도였다. 1270년 그는 재차 십자군을 일으켰다가 8월 25일 튀니스(Tunis)에서 당시 그의 군대를 휩쓸었던 전염병인 이질에 걸려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프랑스로 옮겨져 생드니(Saint-Denis) 수도원 성당을 비롯해 여러 곳의 성당에 모셔져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루도비코는 한마디로 가장 이상적인 중세의 그리스도인 왕이었다. 그의 통치 기간에 프랑스는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 그의 신심은 스스로 작은 형제회의 3회원이 됨으로써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그는 작은 형제회 제3회의 남자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1297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Bonifatius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선종 때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주님, 저는 이제 당신의 집에 들어가렵니다.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하리이다.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드리나이다.”

그리고 오후 3시경에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라고 말을 한 후 숨을 거두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프랑스 왕실의 문장인 백합 문장을 들고 있거나 예루살렘 성지에서 가져온 성물인 그리스도의 가시관을 들거나 머리에 쓴 모습으로 주로 그려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쓰셨던 가시관은 성 루도비코가 사라센 사람들에게 노예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석방을 위해 많은 도움을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동로마 황제가 선물한 것이다.

평소 신심이 깊었던 그는 수천 명의 신자와 함께 맨발로 먼 길까지 마중 나와 손수 가시관을 모시고 행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시관과 십자가 보목(寶木) 등을 모시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파리에 생트샤펠(Sainte-Chapelle) 왕실 성당을 1248년에 완공했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8월 25일 목록에서 그에 대해 전해 주었다.

개정 “로마 순교록”은 특히 성 루도비코가 평화로운 시기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수호를 위해 벌어진 전쟁 중에도 변함없는 믿음으로 정의와 가난한 이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으며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도 힘썼다고 했다. 또한 주님께서 쓰신 가시관과 십자가 보목을 모시기 위해 힘쓰고 튀니스 근처에서 전염병에 걸려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루도비코 알레망

 

  • 세례명 축일
    9월 16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Louis Allemard

  • 신분과 직업
    대주교, 추기경

  • 활동 연도와 지역
    +1450년 아를

 

 

루도비코 알레망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알레만.

 

 

루도비코 알레망 이야기

루도비쿠스 알레망(Ludovicus Allemard, 또는 루도비코 알레망)은 14세기 말 프랑스 벨리(Belley) 교구의 아르뱅(Arbent)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비뇽(Avignon)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1409년에는 삼촌을 따라 피사(Pisa) 시노드에 참석하여 서방의 대이교 논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그는 새 교황으로 선출된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를 지지함으로써 대이교의 막을 내리게 하는데 기여한 공로로 1418년에 마귈론(Maguelonne)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1423년에는 아를 교구의 대주교로 또 1426년에는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또 한 차례의 격동기를 맞아 로마(Rome)에서 감금되기도 했지만 과감히 탈출하여 아를 교구로 돌아왔다. 그의 시대는 한마디로 교회가 영혼 구원보다 외적인 여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주던 때였다.

그는 내적으로 아무리 거룩하더라도 교회의 외부 일에 휘말리면 어쩔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는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가능하면 통회자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1450년 9월 16일 루도비쿠스 알레망이 선종한 후 그의 무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보고되었다. 1527년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는 그를 복자로 공경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그는 루이스 알레만(Louis Aleman)으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루도비코 베르트란도

 

  • 세례명 축일
    10월 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ouis Bertrand

  • 신분과 직업
    신부, 설교가,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526-1581년

 

 

루도비코 베르트란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루도비코 베르트란도 이야기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에서 태어난 성 루도비쿠스 베르트란두스(Ludovicus Bertrandus, 또는 루도비코 베르트란도)는 동향 출신으로 도미니코회의 신부이자 성인품에 오른 성 빈첸시오 페레리우스(Vincentius Ferrerius, 4월 5일)가 세례받은 성당, 같은 세례대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장성하여 18세 되던 해에 도미니코회에 입회했고, 1547년 발렌시아의 대주교인 빌라노바(Villanova)의 성 토마스(Thomas, 9월 22일)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수련장으로 선발되어 거의 30여 년을 역임할 정도로 수도회의 엄격한 규율과 정신을 충실히 지키며 체득해나갔다. 

그는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고, 또 다양한 분야의 많은 이들에게 영적 가르침을 주었다. 1557년에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eresa of Avila, 10월 15일)를 만나 그녀가 추진하는 카르멜회의 개혁 운동을 적극적으로 격려했고, 그해에 페스트가 발렌시아에 만연하자 감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몸을 아끼지 않고 영웅적 구호 활동을 펼쳤다.

당시 에스파냐는 국운이 가장 강대하던 때로 신대륙에 활발히 진출했고, 여러 수도회에서도 선교사 파견에 적극적이었다. 성 루도비쿠스 베르트란두스 역시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로 나서길 간절히 원했다. 마침내 그의 뜻이 이루어져 1562년 선교사로서 라틴 아메리카의 콜롬비아로 가게 되었다.

그는 원시림을 맨발로 다니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해 수많은 원주민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또한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더 나은 대우를 받도록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상인들과 권력자들의 사주를 받은 괴한으로부터 수차례 공격을 받았다.

한번은 괴한이 총으로 그를 해치려 하자 십자성호를 그으니 총구 부분이 십자가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나 무사할 수 있었다. 이렇듯 그의 거룩한 삶에서부터 나오는 기적과 예언 그리고 언어의 은사를 통해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했다.

1569년에 발렌시아로 돌아온 그는 여생을 오노프리우스 수도원의 원장으로 지내며 고행과 설교에 전념하고 많은 이들의 영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는 1581년 사순절에 발렌시아 주교좌 대성당에서 설교하던 중 졸도하여 그 길로 병석에 누워 그해 10월 9일 임종을 맞이했다. 그는 1608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1671년 4월 12일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루도비코 모르비올리

 

  • 세례명 축일
    11월 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Ludovico Morbioli

  • 신분과 직업
    통회자, 3회원

  • 활동 연도와 지역
    1433-1485년

 

 

루도비코 모르비올리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루도비코 모르비올리 이야기

루도비쿠스 모르비올리(Ludovicus Morbioli, 또는 루도비코 모르비올리)는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멋진 젊은이로 성장한 그는 요한 투라(Joannes Tura)의 딸 루치아(Lucia)와 결혼한 후 베네치아(Venezia)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다가 중병에 걸리자 완전히 생활을 개선하였다.

1470년경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개심은 볼로냐의 청년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더욱이 그는 아내와 헤어지고 회개생활을 간증하기 위하여 이곳저곳을 다니며 설교하였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문전걸식을 하였으며, 청소년들과 무지한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만년에 그는 남의 집 계단 밑에서 잠을 잤고, 병이 들었으나 의사의 진료를 거부하였다. 그 대신 그는 놀라운 신심으로 기도하고 성체를 모셨다.

결국 1485년경 11월 9일 볼로냐에서 선종하여 성 베드로(Petrus) 주교좌성당에 묻혔다. 그의 사후에 알려진 일이지만 그는 회개한 후 카르멜 3회원으로서 일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4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서 루도비코(볼리외 루도비코)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徐 Louis(Beaulieu Louis)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0-1866년 한국

 

 

서 루도비코(볼리외 루도비코)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서루도비코, 서몰례.

 

 

서 루도비코(볼리외 루도비코) 이야기

성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Bernard-Louis Beaulieu, 서 루도비코 또는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의 세례명은 베르나르도(Bernardus)이고, 한국 이름은 서몰례(徐沒禮)이다. 그는 1840년 10월 8일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Bordeaux) 교구의 랑공(Langon)에서 베르나르와 마리 데지레(Marie-Desiree)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결혼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머니는 유복자인 아들을 낳자마자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신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성장한 성 볼리외 루도비코(Beaulieu Ludovicus)는 여섯 살 되던 해에 공민학교에 들어갔고, 일곱 살에 복사를 시작했고, 아홉 살이 되던 1849년 10월에 고향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에 성 볼리외 루도비코는 중국 사천성(四川省)에서 전교한 경험이 있는 한 선교사 신부로부터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동양 전교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1857년 보르도 대신학교에 입학해서 사제직을 준비하던 중 이듬해에 어머니를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대신학교에서 5년간 수학하여 부제품을 받은 그는 계속해서 동양 전교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었으나 보르도 교구장의 허락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어렵게 허락을 받은 그는 1863년 8월 28일에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이듬해 5월 21일 동료인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Ranfer de Bretenieres Justus, 白) · 성 도리 헨리코(Dorie Henricus, 金) 등과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후 즉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함께 임명된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 성 도리 헨리코 · 성 위앵 루카(Huin Lucas, 閔) 신부 등과 함께 1864년 7월 15일 파리(Paris)를 출발해 마르세유(Marseille)에서 상선을 타고 극동으로 향해 9월 중순 무렵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상해(上海)를 거쳐 11월에 요동(遼東)의 차쿠에 도착해 한문 공부를 하며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인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의 연락을 기다렸다. 이윽고 1865년 4월 17일 차쿠를 출발한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와 동료들은 백령도 인근에서 주교가 보낸 배로 갈아타고 5월 27일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조선 땅을 밟았다. 그들은 마침 내포 지방에 와 있던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安) 주교를 만나 그의 지시를 받고 상경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태평동(太平洞)에 있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 댁에서 잠시 머무른 후 주교의 명에 따라 6월에 뫼논리(현 경기도 성남시 운중동의 山畓里) 교우촌으로 가서 그곳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면서 조선말을 배웠다.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준비하던 그는 입교한 지 얼마 안 된 장제철이라는 교우 집에서 조선말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때 그의 동료인 성 도리 헨리코 신부가 이웃인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蓀谷) 교우촌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주 연락을 취하며 서로 의지하였다. 한편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잘 전교할 수 있는 지방에 오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라고 행복하게 말했으며, 고해성사를 들을 정도로 조선말에도 능숙해졌다.

어느 정도 조선말 공부를 마친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1866년 2월 12일 상경하여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로부터 새 임지로 충청도 지방을 부여받았는데, 출발 직전에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 주교가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박해 소식을 들은 신자들로부터 피신을 권유받은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처음에 머물던 장제철의 집을 나와 이 요셉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미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의 하인으로 있던 배교자 이선이(李先伊)가 그와 성 도리 헨리코 신부의 거처를 밀고한 뒤였다. 결국 2월 27일 아침에 장체철을 앞세우고 찾아온 포졸들은 먼저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를 체포하고, 이어서 손골에 있는 성 도리 헨리코 신부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서울로 압송된 후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관헌들이 원하는 교우들 이름이나 정보는 하나도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은 조선에 천주교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왔으며,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본국으로 송환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순교의 뜻을 강력히 피력하였다.

결국 그는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7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동료 선교사인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와 성 도리 헨리코 신부 등과 함께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이날 순교한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와 주교와 동료 신부들의 시신은 다른 순교자의 시신과 함께 형장에 방치되었다가 2개월 후인 5월 12일 박순지 요한(朴順之, Joannes) 등에 의해 발굴되어 새남터 인근에 잠시 묻혔다가 5월 27일 와서(瓦署, 왜고개,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로 옮겨 안장되었다. 용감한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정성껏 장례 지내고 와서에 모신 것이다.

그 뒤 이들 순교자의 유해는 1899년 10월 30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9월 5일 명동 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가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7일 목록에서 한국의 새남터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와 동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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