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이름 찾기

루카 남자세례명 11인 목록

피어나네 2024. 6. 2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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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세례명 루카는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루카 11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루카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루카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본받고 싶은 남자 세례명 찾기

루카
천주교 남자세례명
11인 목록

 

 

 

 

루카 남자세례명 목록

 

  1. 루카 (2월 6일)

  2. 루카 (2월 7일)

  3. 루카 벨루디 (2월 17일)

  4. 루카 (4월 22일)

  5. 김종륜 루카 (5월 29일)

  6. 홍낙민 루카 (5월 29일)

  7. 루카 커비 (5월 30일)

  8. 루카 바아나바킨투 (6월 3일)

  9. 민 루카(위앵 루카) (9월 20일)

  10. 황석두 루카 (9월 20일)

  11. 루카 (10월 18일)

 

루카 천주교 남자세례명 11인 목록

 

 

1. 루카

 

  • 세례명 축일
    2월 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uke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35/238년경 에메사

 

 

루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루카 이야기

옛 “로마 순교록”은 2월 6일 목록에서 페니키아(Phoenicia,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해안지대로 지중해 동안을 일컫는 고대 지명) 지방 에메사에서 40년 동안 교회를 이끌던 성 실바노(Silvanus) 주교가 막시미아누스 황제(286~305년, 306~308년 재위) 치하에서 다른 두 명의 그리스도인과 함께 체포되어 맹수들에게 던져져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성 실바노 주교에 대해 기록하였다. 

오늘날 시리아 서부의 도시인 홈스(Homs, 고대 도시명은 에메사)에서 40년 동안 교회를 이끌었던 성 실바노 주교를 기념하는데, 막시미누스 황제(235~238년 재위) 치하에서 부제인 성 루카스(Lucas, 또는 루카)와 독서자인 성 무치오(Mucius)와 함께 맹수에게 던져져 순교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을 전해주었고, 옛 “로마 순교록”이 티레(Tyre)의 주교인 성 티란니오(Tyrannio, 2월 20일)와 비슷한 시기에 순교했다고 보았으나 그보다 70년 이상 앞선 시대로 수정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루카

 

  • 세례명 축일
    2월 7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uke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955년경 스테이리

 

 

루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타우마투르고, 타우마투르구스.

 

 

루카 이야기

성 루카스(Lucas, 또는 루카)의 별명은 ‘타우마투르구스’(Thaumaturgus, 기적을 행하는 사람[Wonder-worker])로 그리스 북서부의 카스토리아(Kastoria)에서 일곱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아테네(Athenae) 앞바다에 있는 아이기나섬(Aegina Is.)의 농부였는데 사라센인들의 침공으로 그리스 북부 에게해에 면한 테살리아(Thessalia)로 이주해 가난하게 살았다. 

성 루카는 어려서부터 금욕적으로 생활하며 신심 깊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소년으로 성장했다. 들에서 양들을 돌보거나 들일을 거들며 지냈는데, 종종 굶주리는 가난한 이를 위해 자기가 먹을 것을 나눠주거나 옷을 벗어 헐벗은 이에게 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부친의 분노를 산 적이 많았다고 한다.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들일을 그만두고 수도자가 되려는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났으나 탈출한 노예로 착각한 군인에게 붙잡혔다가 신분 확인 후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두 번째로 로마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두 명의 수도자를 만나 그들을 따라 아테네의 한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그의 어머니의 기도로 인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의 어머니도 결국 성 루카의 수도 성소를 이해하고 더는 그의 선택을 막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그리스 중부 마케도니아주(州)의 야니차(Giannitsa)에 은둔소를 짓고 은수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밤에도 거의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하며 금욕적인 삶을 실천했다. 하지만 불가리아 군대에 의해 함께하던 이들과 함께 쫓겨나 해안을 따라 여행하며 많은 사람을 기적으로 치유하고 코린토스(Corinthos) 근처에 정착해 10여 년을 살았다.

927년경 야니차의 은둔소로 돌아온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기적을 행하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야 했다.

그런데 몇 년 후 마자르족(Magyar)으로 불리는 헝가리인들의 침략으로 인근 섬으로 피신해야 했고, 그 척박한 섬에서 3년 정도 극기와 절제를 실천한 후 그곳을 떠나 디스토모(Distomo) 남동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보이오티아(Boiotia)의 스테이리로 가서 은둔소를 세웠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많이 모여들자 그는 헬리콘산(Mount Helicon) 경사면에 작은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에 살면서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그는 기도 중에 공중에 떠오른 최초의 성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955년경 선종하여 수도원에 묻혔고, 그가 설립한 수도원은 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호시오스 루카스(Hosios Loukas, 성 루카) 수도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10세기 중반에 설립된 이 수도원은 중세 비잔틴 건축과 예술의 가장 중요한 기념물 중 하나로 199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2월 7일 목록에서 그리스 포키스(Phocis) 지방 스테이리에서 성 루카(Luke the Younger) 은수자를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루카 벨루디

 

  • 세례명 축일
    2월 17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Luke Belludi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200-1285년

 

 

루카 벨루디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루카 벨루디 이야기

이탈리아 파도바(Padova) 교외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루카 벨루디(Lucas Belludi, 또는 루가 벨루디)는 20세가 되었을 때,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로부터 직접 작은 형제회의 수도복과 띠를 받았다. 

아마도 그는 파도바(Padova) 성 안토니우스(Antonius, 6월 13일)의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것 같다. 그는 관구장을 역임했고 설교에도 능하여 선교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성 안토니우스에 대한 공경이 그토록 널리 전파된 이면에는 루카의 헌신적인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역사가들은 증언한다. 그에 대한 공경은 1927년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루카

 

  • 세례명 축일
    4월 2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uke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0년

 

 

루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루카 이야기

성 파르메니우스(Parmenius), 성 헬리메나(Helimenas)와 성 크리소텔루스(Chrysotelus)는 모두 사제로 테키우스 황제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를 침략했을 때 바빌론(Babylon) 근교에서 신앙 때문에 부제였던 성 루카(Lucas, 또는 루가)와 성 무키우스(Mucius)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김종륜 루카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金宗倫 Luke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9-1868년 한국

 

 

김종륜 루카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루카, 김루카,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김종륜 루카 이야기

김종륜 루카(金宗倫, Lucas)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다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경주요,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경희’(敬熙)이다.

김 루카는 평소에 화목함을 특히 강조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부모님을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다시 언양 간월(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을 거쳐 울산 죽령(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죽령 교우촌에서 김 루카는 이양등 베드로(李陽登, Petrus) 회장과 허인백 야고보(許仁伯, Jacobus)를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김 루카는 얼마 되지 않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김 루카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하기로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어서 김 루카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한결같이 증언하였기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중구 남외동)로 끌려 나가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허인백 야고보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순교 당시에 김종륜 루카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 야고보의 아내 박조예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김종륜 루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홍낙민 루카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洪樂敏 Luke

  • 신분과 직업
    양반, 지평,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1-1801년 한국

 

 

홍낙민 루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홍 루카, 홍루카.

 

 

홍낙민 루카 이야기

홍낙민 루카(洪樂敏, Lucas)는 1751년에 충청도 예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와 한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리고 1776년에는 양근의 유명한 학자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제자가 되었으며, 4년 뒤에는 진사가 되고, 1788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서게 되었다. 

1839년의 순교자 홍재영 프로타시오(洪梓榮, Protasius)는 그의 아들이며, 1840년의 순교자 홍병주 베드로(洪秉周, Petrus) · 홍영주 바오로(洪永周, Paulus) 형제 성인과 1866년의 순교자 홍봉주 토마스는 그의 손자이다.

그에 앞서 홍 루카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또 한때는 가성직 제도의 신부로서 다른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한 적도 있었다. 이는 당시의 신자들이 성직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교리와 교회법을 잘 알지 못하던 상황에서 행한 잘못이었다. 다행히 이러한 행위는 오래 가지 않았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난 뒤, 홍 루카는 임금의 명에 따라 천주교 신앙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기도 생활을 계속하였고,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재(齋)를 지키기도 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Jacobus)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다음 해, 홍 루카는 성사 받을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을묘박해가 일어나 체포되자, 두려운 나머지 천주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여기에서 그는 “천주교의 폐해는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므로 철저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홍 루카는 다시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神主)도 모시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천주교를 멀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홍 루카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두려운 나머지 처음부터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십계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라고 가르친 것은 옳다.”고 대답하였으며, 결코 동료들을 밀고하지 않았다.

혹독한 문초와 형벌이 계속되는 동안 홍 루카는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하여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이전에 보이지 않던 용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재판관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답변하였다.

“저는 천주교 신앙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억지로 사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10년 동안 이를 멀리하였으니 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제는 천주교를 버릴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지도 않겠습니다.”

이처럼 굳게 신앙을 증언한 홍낙민 루카는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홍낙민 루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루카 커비

 

  • 세례명 축일
    5월 3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uke Kirby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49?-1582년 영국

 

 

루카 커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키르비.

 

 

루카 커비 이야기

성 루카스 커비(Lucas Kirby, 또는 루카 커비)는 1549년경 영국 잉글랜드 북동부 요크셔(Yorkshire)의 리치몬드(Richmond) 부근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아마도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을 졸업한 듯한데, 그 이후 가톨릭 신자가 되어 사제가 되기 위해 프랑스의 두에(Douai)로 가서 영국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1577년 두에 또는 캉브레(Cambrai)에서 사제품을 받고 다음 해에 로마의 영국 신학교로 가서 학업을 계속 이어갔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자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580년에 그는 성 에드문도 캠피언(Edmundus Campion, 12월 1일)과 성 랄프 셔윈(Ralph Sherwin, 12월 1일) 등과 함께 영국 선교단의 일원으로 선택되었다. 그들은 그해 4월 중순 로마에서 출발해 5월 말에 랭스(Reims)에 도착했다. 그리고 6월 중순 복자 윌리엄 하틀리(William Hartley, 10월 5일) 신부와 함께 랭스를 떠나 걸어서 두에와 덩케르트(dunkirk)까지 갔다.

그는 계속해서 잉글랜드로 건너가 항구마을인 도버(Dover)에 도착했는데, 미처 선교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체포되어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에 있는 게이트하우스(Gatehouse)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12월 4일 런던탑으로 이송되어 ‘스캐빈져 더터’(Scavenger’s Daughter)로 알려진 금속 도구를 이용한 기구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는 1581년 11월 성 에드문도 캠피언과 그 동료들과 함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여왕에 대한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그에 대한 집행은 다음 해 5월까지 연기되었다. 처형일까지 쇠사슬에 묶여 지내야 했던 그는 1582년 5월 30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예수회 신부인 복자 토마스 코탐(Thomas Cottam)과 교구 신부인 복자 윌리엄 필비(William Filby)와 복자 라우렌시오 존슨(Laurentius Johnson)이 그와 함께 순교하였다.

성 루카 커비 신부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한 날인 5월 30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30일 목록에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박해 중에 성 루카 커비 신부가 많은 고문 끝에 다른 세 명의 신부와 함께 타이번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루카 바아나바킨투

 

  • 세례명 축일
    6월 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uke Baanabakintu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52?-1886년 우간다

 

 

루카 바아나바킨투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바아나바낀뚜, 바아나바킨뚜.

 

 

루카 바아나바킨투 이야기

성 가롤로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가롤로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가롤로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가롤로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가롤로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포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스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 또는 루카 바아나바킨투)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시아노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Matthias Mulumba)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가롤로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가롤로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가롤로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민 루카(위앵 루카)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閔 Luke(Huin Luke)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6-1866년 한국

 

 

민 루카(위앵 루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민 루카, 민루카.

 

 

민 루카(위앵 루카) 이야기

성 마르티노 루카 위앵(Martin Luc Huin, 민 루카 또는 위앵 루카) 신부의 세례명은 마르티노 루카(Martinus Lucas)이고, 한국 성은 민(閔)이다. 그는 1836년 10월 20일 프랑스 북동부 랑그르(Langres) 교구의 기용벨(Guyonvelle)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포도밭을 경작하던 그의 부모는 늘 자기 가문에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자랑하면서 9남매 모두 훌륭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도록 교육했다. 막내로 태어나 신앙적인 환경에서 자란 성 위앵 루카는 1851년 본당신부의 추천으로 랑그르 소신학교에 입학해 부지런히 공부한 후 1856년 10월에 랑그르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861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아 랑그르 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수품 후 그는 2년 동안 멜레(Melay)와 부아제(Voisey)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활동하면서도 전교 사제의 꿈을 키우다가 1863년 8월 20일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받고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자신의 선교지가 조선임을 알았을 때, 그는 기뻐하며 부모님은 물론 옛 본당신부에게도 편지를 썼다고 한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1864년 7월 15일에 함께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Ranfer de Bretenieres Justus) · 성 도리 헨리코(Dorie Henricus) · 성 볼리외 루도비코(Beaulieu Ludovicus) 신부와 함께 파리(Paris)를 떠나 마르세유(Marseille)에서 상선을 타고 극동으로 향해 9월 중순 무렵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상해(上海)를 거쳐 11월에 요동(遼東)의 차쿠에 도착해 한문 공부를 하며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인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의 연락을 기다렸다. 이윽고 1865년 4월 17일 차쿠를 출발한 성 위앵 루카 신부와 동료들은 백령도 인근에서 주교가 보낸 배로 갈아타고 5월 27일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조선 땅을 밟았다.

마침 내포에 와 있던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주교의 환영을 받은 성 위앵 루카 신부 일행은 주교의 지시를 받아 서울과 경기도로 떠났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6월 18일까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함께 내포 지방에 머물며 조선말을 공부했다. 그러고 나서 당진 합덕 지방의 세거리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초가집에 거처하며 조선의 풍습에 적응하고자 노력하고 한문과 조선말 공부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성 위앵 루카 신부는 1866년 2월에 벌써 교우들의 고해성사를 듣고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수가 있었다. 그는 박해 직전까지 5백여 명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15명에서 20명에게 병자성사를 주었을 뿐 아니라 몇몇 교우의 혼인성사도 집전해 주었다.

1866년 초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자 그는 3월 9일에 거더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로 가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성 오매트르 베드로(Aumaitre Petrus) 신부를 만나 하루를 보내고 세거리로 돌아왔다.

신자들의 권유로 거처를 옮기던 중 3월 11일 거더리에서 체포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편지를 받고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날 주교의 뜻대로 자수하여 거더리로 끌려왔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도 거더리로 와서 자수하였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함께 체포된 주교와 동료 신부와 함께 홍주 관아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갇혔다. 3월 19일 포도청에서 두 차례의 신문을 받은 그는 3월 23일에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지인 충청남도 보령 수영(保寧水營)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국혼(國婚)이 가까운 시기라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 나쁜 징조라 하여 멀리 떨어진 보령 수영으로 처형지를 정했다. 그래서 성 위앵 루카 신부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 ·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Lucas) · 성 장주기 요셉(張周基, Josephus)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처형장인 갈매못(현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내 마음에 아픈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토록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도 아니요, 이곳과 같은 처절한 장소에서 죽게 된 때문만도 아니라, 이 나라 불쌍한 백성들의 구령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게 되니 그것만이 마음 아플 뿐이오.”

성 위앵 루카 신부를 포함해 갈매못에서 순교한 5위의 순교자 중에서 성 황석두 루카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홍산 삽티(현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를 거쳐 고향인 연풍 병방골(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 이장했고, 1982년 연풍 순교성지로 천묘(遷墓)하였다.

나머지 4위 순교자들의 시신은 사흘 뒤에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형장 부근에 묻혔다가 6월 초 몇몇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서짓골(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에 매장하였다.

그 후 1882년 3월 제7대 조선 교구장인 블랑(Blanc, 白)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 대교구의 오우라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2년 만인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30일 목록에서 한국의 갈매못에서 성 위앵 루카 신부와 동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황석두 루카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黃錫斗 Luke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3-1866년 한국

 

 

황석두 루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황 루가, 황 루카, 황루가, 황루카.

 

 

황석두 루카 이야기

성 황석두 혹은 황재건이라고도 하는 루카(Lucas, 또는 루가)는 충청도 연풍의 부유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가문을 화려하게 번영케 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열심히 글공부를 시켰고,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역시 아버지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15세에 혼인하고, 20세가 되던 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했는데, 그가 묵은 어느 주막에서 천주교 신자를 만나 성교회의 도리를 듣고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천주교 교리책을 여러 권 얻어 가지고 집을 떠난 지 3일 만에 부친에게로 되돌아갔다.

부친은 아들이 되돌아 온 이유를 알자 분노가 치밀어 아들을 마구 때리고 급기야는 작두를 마당 가운데에 놓고 아들의 목을 작두에 걸게 하였다. 그러나 황 루카가 태연히 목을 내밀자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친의 책망과 모진 매질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그는 2년 이상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벙어리처럼 살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루카는 아버지 앞에 나아가 천주교 교리책을 한번 읽어 보시라고 설득하니, 이때부터 온 집안이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를 서두르게 되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비신자들까지도 루카의 신심과 열성 그리고 이에 못지않은 그의 훌륭한 예의범절에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그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자 루카는 성교회를 위해서 자기 일생을 바칠 것을 주님께 서약하였고, 페레올 주교는 처와 별거한다는 조건 하에 루카를 사제품에 올리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교황청에서 당시 조선 땅에는 여자 수도회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후 페롱(Feron, 權) 신부의 한문 선생 겸 전교회장 일을 맡아 수행하던 황 루카는 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돕게 되었다. 그는 주교와 함께 “회죄직지”를 위해 원고를 썼고,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도와 번역 출판과 그 교정에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포졸들이 다블뤼 주교를 잡으려고 몰려오자, 다블뤼 주교는 루카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권하였다. 그러자 루카는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오늘까지 주교님을 모셔온 제가 피신하다니 될 말입니까? 그래, 주교님은 혼자 천당 가시려는 심사인가요?”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주교와 신부들과 함께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윽고 그는 1866년 3월 23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다블뤼 주교와 다른 두 신부들과 함께 보령 갈매못으로 끌려가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30일이요,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루카

 

  • 세례명 축일
    10월 18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uke

  • 신분과 직업
    복음사가,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

 

 

루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루카 이야기

전통적으로 성 루카스(Lucas, 또는 루카)는 교회사학자 에우세비우스(Eusebius) · 성 예로니모(Hieronymus, 9월 30일) · 리옹의 성 이레네오(Irenaeus, 6월 28일) 등에 따르면, 안티오키아(Antiochia) 출신의 그리스인 의사로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의 ‘협력자’(필레 1,24)이자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라고 알려졌다. 

실제로 성 바오로는 서간에서 그를 ‘사랑하는 의사 루카’라고 지칭했다(콜로 4,14). 성 스테파노(Stephanus, 12월 26일) 부제의 순교와 박해로 많은 이들이 흩어져 복음을 전했는데, 안티오키아도 그런 도시 중의 하나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들을 돌보기 위해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를 파견했고, 성 바르나바는 타르수스에 있던 성 바오로를 데려와 함께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성 루카는 아마도 이때 사도들과 알게 되고 특별히 성 바오로를 깊이 존경하고 따랐던 것 같다. 그는 51년경에 있었던 사도 바오로의 제2차 선교 여행을 수행하며 힘껏 도왔고, 57년까지 필리피(Philippi)에 머물면서 그곳의 공동체를 지도한 후 성 바오로의 제3차 선교 여행 때도 만난 듯하다. 

그는 성 바오로가 카이사리아의 감옥에 갇혔을 때도, 로마로 호송되어 감옥에 갇히고 재차 갇혔을 때도 늘 곁에 있었다(콜로 4,14; 필레 1,24; 2티모 4,11). 그는 사도 성 바오로의 순교 이후 그리스로 건너간 듯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복음서를 집필하기 위해 성모 마리아(Maria)를 찾아뵙고 주님의 탄생 전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반대로 성모 마리아를 직접 뵐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마리아의 초상화를 여러 개 만들어 섬겼다고도 한다.

전통적으로 가장 오래된 성모 마리아 초상화로 알려진 이콘의 작가가 성 루카라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그는 ‘붓’보다는 ‘펜’으로써 다른 복음서들이 전해주지 않은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 이야기 속에서 마리아의 모습을 마치 그림처럼 묘사해 주었다(루카 1-2장).

성 루카가 언제 어디서 복음서를 집필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확실한 것은 팔레스티나 밖에서 80년 전후에 쓰였다고 한다.

그리고 루카 복음을 시작하는 머리말(1,1-4)에 따르면, 그는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Theo-philos)을 뜻하는 ‘테오필로스’라는 인물을 통해 이미 그리스도교의 기본 진리를 전해 들은 이들이나 입문자가 더욱 확고한 신앙을 갖게 하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대체로 성서학자들은 복음사가 성 루카가 염두에 둔 독자는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로 보고 있다.

루카 복음서와 이어지는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부터 63년경 사도 성 바오로가 로마에서 수인으로 생활하며 선교 활동에 매진할 때까지 초대교회의 성장기를 서술하고 있다. 전반부는 사도 성 베드로(Petrus, 6월 29일)에게 그리고 후반부는 사도 성 바오로에게 집중하고 있지만 정작 성 루카 자신에 관한 구절은 하나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겸손함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성 바오로의 순교 이후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 아카이아(Achaia) 지방과 소아시아 지방에서 선교하며 온갖 고난을 참아내며 주님을 섬기다가 84세를 일기로 선종한 듯하지만 순교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의 열두 사도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복음서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에 대해 특별히 강조했던 성 루카는 의사와 화가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루카는 성경(에제 1,10; 묵시 4,7)에 언급된 ‘살아있는 네 생물’에서 유래한 상징에 의하면 황소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는 성 루카 복음사가의 침착하고 강인한 성격과 주님과 사도 성 바오로를 위한 희생과 충직함을 상징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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