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날짜 찾기

1월 21일 남자세례명 10가지

피어나네 2023. 1. 21. 08:00
반응형

 

1월 21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메인라도, 아우구리오, 알바노 로, 에드워드 스트란샴, 에울로지오, 에피파니오, 토마스 레이놀즈, 파트로클로, 푸블리오, 프룩투오소, 총 10분 목록이에요.

 

1월 21일이 영명축일인 남자세례명은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천주교 세례명 상세정보로 이동합니다. 어울리는 세례명을 지금 바로 찾아보세요.

 

1월 21일 여자세례명 브리지다, 아녜스, 총 2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월 2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0가지

 

 

 

 

1월 21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메인라도

  2. 아우구리오

  3. 알바노 로

  4. 에드워드 스트란샴

  5. 에울로지오

  6. 에피파니오

  7. 토마스 레이놀즈

  8. 파트로클로

  9. 푸블리오

  10. 프룩투오소

 

1월 2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0가지

 

 

1. 메인라도

 

  • 가톨릭 성인 이름
    Meinra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61년 아인지델른

 

 

메인라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인라트, 메인라두스.

 

 

메인라도 자료

성 메인라두스(Meinradus, 또는 메인라도)의 이름은 스위스 취리히 호수 근방에 있는 아인지델른의 성 메인라두스 수도원과 관련이 있다. 이곳은 천여 년 이상 순례의 중심지이며 또 엄청난 규모의 수도원으로 유명하다.

성 메인라두스는 라이헤나우(Reichenau) 수도원 섬의 수도자였는데, 836년경에 은둔소에서 살다가 지금의 수도원이 서 있는 곳으로 왔다. 아인지델른의 고적한 숲 속에서 초막을 짓고 은수생활을 하던 그는 861년 강도들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순교자로서도 공경을 받는다. 그가 은둔 생활을 하던 곳에는 후에 그를 기념하여 베네딕토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거대한 성당 안에 있는 동정 성모 마리아상은 이 성인의 작품이라고 전해온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아우구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ugu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9년 타라고나

 

 

아우구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우구리우스.

 

 

아우구리오 자료

에스파냐 타라고나 지방의 주교인 성 프룩투오수스(Fructuosus)는 성 아우구리우스(또는 아우구리오) 부제, 성 에울로기우스(Eulogius) 부제와 함께 발레리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인 갈리에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그들은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에 체포되어 집정관 앞으로 끌려갔다. 심문은 간단했다. 왜냐하면 죄수들은 하느님 한 분만을 섬긴다는 말 외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화형 선고를 받았다.

형장으로 끌려가던 중에 신분을 숨긴 펠릭스(Felix)라는 신자 군인이 성 프룩투오수스에게 다가가서 기도를 청하자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동방과 서방의 모든 보편 교회를 내 마음 안에 품고 있습니다. 언제나 가톨릭 교회 안에 머물면 당신은 내 기도의 한몫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자들을 위로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알바노 로

 

  • 가톨릭 성인 이름
    Alban Ro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3-1642년 영국

 

 

알바노 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르똘로메오, 바르똘로메우스, 바르톨로매오, 바르톨로매우스, 바르톨로메오, 바르톨로메우스, 알바누스, 알반.

 

 

알바노 로 자료

성 알바누스 바르톨로메우스 로(Albanus Bartholomaeus Roe, 또는 알바노 로)는 1583년 7월 20일 영국 잉글랜드 동부 서퍽(Suffolk)의 베리(Bury)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로 성장한 후 그의 형제 제임스(James)와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나중에 둘 다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열정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기질을 지녔지만 유쾌함과 끈기 있는 성격으로 성덕을 쌓았다고 한다.

그의 개종 체험도 이례적이었다. 그는 감옥에 갇힌 어느 가톨릭 신자를 프로테스탄트로 개종시키려고 했지만, 그와의 논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자신의 종교적 확신에 대해 불안해하던 그는 가톨릭 사제들을 만나 토론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 안에 참된 보화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웃에게도 그것을 전하고 싶은 열망을 느꼈다. 그래서 1607년에 사제가 되기 위해 프랑스 두에(Douai)의 영국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규칙을 어겨 1610년 퇴학을 당했다.

그는 1613년에 프랑스 북동부 로렌(Lorraine)의 디외루아르드(Dieulouard)에서 베네딕토회에 입회해서 ‘알바누스’라는 수도명을 얻고, 1615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파리에 영국인 베네딕토회 공동체를 만드는 공동 창설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사제품을 받은 성 알바누스 로는 영국으로 가는 선교단에 합류해 런던으로 갔지만 도착 직후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그는 1618년에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4개월 만에 체포되어 1623년까지 감옥에 갇혔다가 에스파냐 대사의 협조로 추방령을 받고 다시 두에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영국 선교에 대한 열정 때문에 2년 후 재차 입국했다가 체포되어 17년 동안이나 런던의 플리트 강변에 있는 플리트(Fleet)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편한 편이었다.

그는 밤에 감옥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낮에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회심을 위해 활동할 수 있었다. 교회에서 만나기는 어렵지만,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개종을 위해 활동하는 것은 당시 영국의 베네딕토회에서 허용된 방법이었다. 대신 내기로 거는 것은 화폐가 아닌 짧은 기도였다.

그는 또한 감옥에서 방문자를 맞이하는 것도 허락받아 방문자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그들의 개종을 위해 노력해 실제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그리고 몇 권의 영성 서적을 영어로 번역해 일부는 출판되었고 일부는 원고로 남았다.

1641년 그는 엄격한 뉴게이트(Newgate)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1642년 초 재판에서 가톨릭 사제라는 이유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1월 21일 아침, 복자 토마스 레이놀즈(Thomas Reynolds, 1월 21일)와 함께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알바누스 로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1월 21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에드워드 스트란샴

 

  • 가톨릭 성인 이름
    Edward Stransham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6년

 

 

에드워드 스트란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애드워드, 에두아르도, 에두아르두스, 에드아르도, 에드아르두스, 에드와드, 에드워즈.

 

 

에드워드 스트란샴 자료

에드워드 스트란샴은 영국 옥스퍼드(Oxford) 근교에서 태어나 세인트존스 대학에서 공부하여 문학학사가 되었다.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기 위해 프랑스의 두에(Douai)와 랭스(Reims)로 갔으나 건강에 나빠져서 귀향하였다가 다시 랭스로 갔다. 그는 1580년에 수아송(Soissons)에서 사제로 서품되었고, 그해 여름에 다른 사제와 함께 영국 선교 길에 올랐다.

그는 1583년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인 활동을 하였는데, 옥스퍼드 대학에서만도 12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체포의 위험을 느끼고 프랑스에서 2년 동안 머물렀는데, 또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영국으로 잠시 돌아왔다가 비숍게이트 스트리트의 어느 집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중에 체포되었다.

그는 6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한 뒤 타이번(Tyburn)에서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에울로지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log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9년 타라고나

 

 

에울로지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울로기오, 에울로기우스, 에울로지우스.

 

 

에울로지오 자료

에스파냐 타라고나 지방의 주교인 성 프룩투오수스(Fructuosus)는 성 아우구리우스(Augurius) 부제, 성 에울로기우스(또는 에울로지오) 부제와 함께 발레리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인 갈리에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그들은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에 체포되어 집정관 앞으로 끌려갔다. 심문은 간단했다. 왜냐하면 죄수들은 하느님 한 분만을 섬긴다는 말 외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화형 선고를 받았다.

형장으로 끌려가던 중에 신분을 숨긴 펠릭스(Felix)라는 신자 군인이 성 프룩투오수스에게 다가가서 기도를 청하자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동방과 서방의 모든 보편 교회를 내 마음 안에 품고 있습니다. 언제나 가톨릭 교회 안에 머물면 당신은 내 기도의 한몫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자들을 위로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에피파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piphan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96년 파비아

 

 

에피파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삐빠니오, 에삐빠니우스, 에피파니우스.

 

 

에피파니오 자료

성 에피파니우스(또는 에피파니오)의 성덕과 기적에 관한 명성은 그 당시 로마 황제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뛰어난 웅변과 사랑으로 수많은 야만인들을 유순하게 만들었고, 전투에서 포로로 체포된 사람들과 그 아내들에게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여러 가지 악법을 폐지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놀라운 애덕으로 아사 직전의 국민들을 기근에서 구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안테미우스 황제와 국왕 유릭에게 교회의 대사로 파견되어 전쟁을 억제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왕 오도아케르(Odoacer)에 의해 파괴된 파비아를 재건하였으며, 곤데발드와 고데지실루스에 의하여 포로가 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직접 부르고뉴(Bourgogne)로 갔으나 돌아오는 길에 추위와 열병으로 운명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8세였지만 수많은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사랑의 순교로 단정하였고,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은 성 에피파니우스의 사망 후에도 끊이질 않아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개종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붙여진 이름도 많았는데 ‘평화의 수호자’, ‘이탈리아의 영광’, ‘주교들의 빛’ 등이 대표적인 칭호이다.

성인의 유해는 작센(Sachsen)의 힐데셈으로 옮겨 안장되어 많은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파비아의 성녀 호노라타(Honorata, 1월 11일)와는 남매 사이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토마스 레이놀즈

 

  • 가톨릭 성인 이름
    Thomas Reynold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42년 영국

 

 

토마스 레이놀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린, 도마, 토머스.

 

 

토마스 레이놀즈 자료

1562년경 영국 옥스퍼드셔(Oxfordshire)에서 태어났다고 추정되는 토마스 레이놀즈의 본래 이름은 토마스 그린(Green)이나 당시 박해 중의 많은 가톨릭 사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역시 레이놀즈(Reynolds)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해 프랑스의 랭스(Reims)를 거쳐 1590년 9월부터 에스파냐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영국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그는 그 대학의 첫 번째 학생 그룹 중 한 명이었다. 그러고 나서 세비야(Sevilla)에 새로 설립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영국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1592년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영국 선교를 위해 고국으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1605년 ‘화약 음모 사건’(Gunpowder Plot)이 발생한 후 반가톨릭적 분위기가 높아진 1606년에 체포되었다. 그는 그런 상황 속에서 다행히 처형을 면하고 추방당한 사제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영국으로 돌아와 1628년 다시 체포될 때까지 약 20년 동안 비밀리에 신자들을 사목했다. 그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프랑스의 공주 출신으로 가톨릭을 옹호하던 헨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 왕비의 명령으로 집행이 유예되었다.

그는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방문객을 맞이하는 것이 허용되는 등 비교적 온건한 조건 속에서 지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그를 방문해 그를 돌볼 뿐만 아니라 영적 상담과 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1635년 그는 다른 여러 사제와 함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 런던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을 정기적으로 사목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
당시 왕실은 가톨릭에 대한 동정심이 커졌고, 가톨릭에 대한 사회적 압력도 많이 누그러든 상태였다. 그래서 많은 사제들이 토마스 레이놀즈와 비슷하게 사목활동을 할 수 있었다.

1640년 재정적 압박에 시달린 찰스 1세(Charles I) 왕은 의회와의 협력이 필요해졌는데, 당시 의회에는 가톨릭에 대해 적대적인 청교도들이 많은 의석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 가톨릭 신자들과 사제들은 다시금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사제들에 대한 재판과 사형 선고도 재개되었다.

토마스 레이놀즈도 그 초기 희생자 중 한 명으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평소 소심하고 허약했던 80여 세의 토마스 레이놀즈는 처형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힘들었지만, 기도로써 이를 극복해냈다.

그리고 뉴게이트(Newgate) 감옥에 함께 갇힌 성 알바누스 로(Albanus Roe) 신부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했다. 결국 그는 1642년 1월 21일 아침에 성 알바누스 로 신부와 함께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토마스 레이놀즈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순교한 날인 1월 21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토마스 레이놀즈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파트로클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atroc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9년경 트루아

 

 

파트로클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뜨로끌로, 빠뜨로끌루스, 파트로클루스.

 

 

파트로클로 자료

성 파트로클루스(또는 파트로클로)는 프랑스 트루아 지방 출신의 부유한 사람으로 선행과 자선 활동으로 유명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체포되었고, 지방 총독 앞에서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다가 결국 센(Seine) 강에 던져졌다. 그러나 간신히 목숨을 구한 그는 다시 체포되어 결국은 트루아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파트로클루스의 순교록이 발견된 후 그는 트루아에서 높은 공경을 받았다. 트루아의 성 사비니아누스(Sabinianus, 1월 24일)를 그리스도교로 이끌었다고 알려진 그의 유해는 10세기에 독일 베스트팔렌(Westfalen)에 있는 조스트(Soest)로 이장되어 그곳에서도 큰 공경을 받게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푸블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ubl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2년경 몰타

 

 

푸블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뿌블리오, 뿌블리우스, 푸블리우스.

 

 

푸블리오 자료

지중해 몰타 섬의 집정관이던 성 푸블리우스(또는 푸블리오)는 사도 바오로(Paulus)가 죄수로서 로마(Roma)로 끌려가던 길에 사도를 영접했던 인물이다. 이때 바오로 사도는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그의 부친이 앓던 열병을 고쳐주었다. 

전승에 의하면 푸블리우스는 후일 몰타의 초대주교로 임명되었고,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아테네(Athenae)의 주교로 봉직하던 중 트라야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로 순교하였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프룩투오소

 

  • 가톨릭 성인 이름
    Fructuos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9년 타라고나

 

 

프룩투오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프룩뚜오소, 프룩뚜오수스, 프룩투오수스.

 

 

프룩투오소 자료

에스파냐 타라고나 지방의 주교인 성 프룩투오수스(또는 프룩투오소)는 성 아우구리우스(Augurius) 부제, 성 에울로기우스(Eulogius) 부제와 함께 발레리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인 갈리에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그들은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에 체포되어 집정관 앞으로 끌려갔다.

심문은 간단했다. 왜냐하면 죄수들은 하느님 한 분만을 섬긴다는 말 외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화형 선고를 받았다.

형장으로 끌려가던 중에 신분을 숨긴 펠릭스(Felix)라는 신자 군인이 성 프룩투오수스에게 다가가서 기도를 청하자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동방과 서방의 모든 보편 교회를 내 마음 안에 품고 있습니다. 언제나 가톨릭 교회 안에 머물면 당신은 내 기도의 한몫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자들을 위로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그 외 세례명 날짜로 찾기

 

날짜순 천주교 세례명

어떤 세례명이 좋을까?

pieonane.com

 


 

그 외 세례명 이름으로 찾기

 

이름순 가톨릭 세례명

본받고 싶은 가톨릭 성인 찾기

pieonane.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