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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릭스 르 클레르 천주교 여자세례명

피어나네 2024. 7. 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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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세례명 알릭스 르 클레르는 데레사, 마리아, 메리, 미리암, 알레시아, 앨릭스, 테레사, 테레시아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알릭스 르 클레르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알릭스 르 클레르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알릭스 르 클레르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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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릭스 르 클레르
천주교 여자세례명

 

 

 

 

알릭스 르 클레르 여자세례명 목록

 

  1. 알릭스 르 클레르 (1월 9일)

 

알릭스 르 클레르 천주교 여자세례명

 

 

1. 알릭스 르 클레르

 

  • 세례명 축일
    1월 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lix Le Clerc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76-1622년

 

 

알릭스 르 클레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레사, 마리아, 메리, 미리암, 알레시아, 앨릭스, 테레사, 테레시아.

 

 

알릭스 르 클레르 이야기

복녀 알릭스 르 클레르는 1576년 2월 2일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로렌 공국(Duchy of Lorraine)의 르미르몽(Remiremont)에서 부유한 가족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음악과 춤을 좋아했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던 발랄한 소녀였다. 

18세 때에 마탱쿠르(Mattaincourt)로 이사하고 3년 후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침대에 눕게 되었는데, 당시 그녀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신심 서적뿐이었다. 

그녀는 영적 독서와 묵상을 통해 자신의 삶에 변화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고, 당시 그곳 본당신부였던 성 베드로 푸리에(Petrus Fourier, 12월 9일)를 만나 자신의 확신에 대한 공감을 얻었으나 자기에게 적합한 수녀원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성모님께서 환시를 통해 그녀의 의문에 답을 주셨다. 복녀 알릭스 르 클레르는 교육의 기회를 거의 또는 전혀 누리지 못하는 그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의 딸들을 돌봐주는 데서 자신의 소명을 찾았다. 

그녀는 우선 성 베드로 푸리에 신부의 지원을 받아 네 명의 동료들과 함께 가난한 집안의 소녀들을 위한 성모 마리아의 무료 학교를 개설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소녀들에게 봉사하며 하느님의 현존 속에 기도하고 단순한 삶을 실천하는 작은 공동체를 설립했다. 

그녀와 동료들은 1597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본당신부인 성 베드로 푸리에 앞에서 사적 서원을 발하였고, 이듬해 7월 푸세이(Poussay)에 소녀들에게 무료 교육을 제공하는 첫 번째 성모 마리아 학교를 세웠다.

복녀 알릭스 르 클레르 수녀와 성 베드로 푸리에 신부는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가톨릭 신자이거나 개신교 신자이거나 모든 소녀가 환영받으며 교육받을 수 있는 학교를 더 많은 지역에 설립해 나갔다. 

로렌 공국의 수도인 낭시(Nancy)에 자리 잡은 그녀는 자신들의 활동이 교회와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법적 지위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노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수도회를 설립하였고, 후에 ‘성모의 성 아우구스티노 수녀회’라는 이름으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수녀회의 회헌은 1617년 3월 6일 낭시를 관할하는 툴(Toul)의 주교에게 처음으로 승인을 받았다. 이듬해 12월 2일 복녀 알릭스 르 클레르는 동료들과 함께 회헌에 따른 공식 서원을 하면서 가르멜회의 개혁을 위해 헌신한 아빌라(Avila)의 성녀 데레사(Teresia, 10월 15일)의 이름을 따서 ‘예수의 마리아 데레사’(Marie-Therese de Jesus)라는 수도명을 선택했다.

일생을 소녀들을 위한 교육과 수녀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복녀 알릭스 르 클레르는 1622년 1월 9일 낭시의 수녀원에서 선종한 후 납으로 된 관에 안치되어 수녀원 내에 매장되었다. 

그녀의 선종 이후 수녀회와 소녀들을 위한 학교는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이어서 신대륙으로까지 확산하였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당시 낭시의 수녀원 또한 무자비한 파괴를 피할 수 없었고, 수녀원 내에 있었던 그녀의 무덤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그녀에 대한 시복 절차가 진행되면서 유해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에 대한 시복 절차는 계속 진행되어 1947년 5월 4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바티칸에서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에 낭시의 한 건물 지하를 탐사하던 학생들이 약 1.5미터 아래에 묻혀 있는 납으로 된 관을 발견하였다. 1960년 그 관에 들어있는 유해가 복녀 알릭스 르 클레르 수녀임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녀의 유해는 낭시의 성모 마리아 학교 경당에 안치되었다가 2007년 낭시 주교좌성당 내에 그녀를 위해 마련한 경당으로 옮겨져 신자들의 공경을 받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월 9일 목록에 그녀의 이름을 추가하면서, 프랑스 낭시에서 여성 청소년의 교육을 위해 성 베드로 푸리에 신부와 함께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을 따르는 수녀회를 설립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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