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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첼리노 남자세례명 11인 목록

피어나네 2024. 10. 1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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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세례명 마르첼리노는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마르첼리노 11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마르첼리노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마르첼리노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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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첼리노
천주교 남자세례명
11인 목록

 

 

 

 

마르첼리노 남자세례명 목록

 

  1. 마르첼리노 (1월 2일)

  2. 마르첼리노 (1월 9일)

  3. 마르첼리노 (4월 6일)

  4. 마르첼리노 (4월 20일)

  5. 마르첼리노 (4월 26일)

  6. 최창주 마르첼리노 (5월 29일)

  7. 마르첼리노 (6월 2일)

  8. 마르첼리노 (6월 5일)

  9. 마르첼리노 샴파냐 (6월 6일)

  10. 마르첼리노 (7월 14일)

  11. 마르첼리노 (8월 27일)

 

마르첼리노 천주교 남자세례명 11인 목록

 

 

1. 마르첼리노

 

  • 세례명 축일
    1월 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inus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20년

 

 

마르첼리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마르첼리노 이야기

성 나르키수스(Narcissus)와 성 아르게우스(Argeus)는 리키니우스 황제의 군인으로 형제간이다. 그들은 흑해 연안 폰투스(Pontus)의 토미(Tomi)에서 고난을 이겨내고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군복무 이행을 거부한 소년으로서, 잔인하게 매를 맞고 오랫동안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르첼리노

 

  • 세례명 축일
    1월 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inus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77년경 안코나

 

 

마르첼리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마르켈리노, 마르켈리누스.

 

 

마르첼리노 이야기

이탈리아 중부 안코나에서 태어난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6세기 중엽 고향인 안코나의 제5대 주교가 되었다. 그는 단식과 고행을 실천하며 기도와 자선 사업에 헌신했다.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Gregorius, 9월 3일)는 그의 “대화집”에서 그를 ‘존경받을 덕을 지닌 사람’으로 평했고, 특별히 화재로 인해 안코나가 파괴될 위험 속에서 기적적으로 도시를 구했다고 전해주었다.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바람에 의해 불이 맹렬히 도시를 삼킬 때 주민들의 청을 받은 성 마르첼리노는 통풍으로 인해 움직이기도 어려웠지만, 의자에 실려 불이 가장 심각한 곳으로 가서 복음서를 펼쳐 읽었다.

복음서에 불이 붙어 일부 타기도 했지만, 책을 덮는 순간 도시의 불이 꺼졌다고 한다. 나중에 그 복음서를 만지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질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고, 그의 축일 전날 복음서를 들고 도시를 행렬하는 관습도 생겼다.

오늘날 화재로부터 도시를 구한 성 마르첼리노의 복음서는 안코나 교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1월 9일 목록에서 화재로부터 안코나를 구한 성 마르첼리노 주교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마르첼리노

 

  • 세례명 축일
    4월 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inu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13년 카르타고

 

 

마르첼리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마르첼리노 이야기

에스파냐의 톨레도(Toledo)에서 태어난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교양 있고 관대하며 신학에 관심이 많은 인물로 서로마 제국 황제 호노리우스의 국무장관이었다. 

409년 황제는 북아프리카 교회의 한 이단 종파인 도나투스파(Donatism)에게 공적인 예배를 허용하는 자유를 준 적이 있었다.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들은 이 허가를 악용하여 황제의 결정에 반대하던 정통교회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카르타고에 파견되어 가톨릭교회와 도나투스파 주교들의 회의를 주재하고 재판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성 마르첼리누스는 일련의 조사를 마친 후 도나투스파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정통교회로 돌아올 것을 판결했다.

하지만 그는 이 결정에 반대하던 이들에 의해 체포되고 감옥에 갇혔다. 그와 평소 가까운 친구였던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 주교가 그를 방문해 구출하려고 노력했으나 수포로 끝났다.

그는 도나투스파와 그 지지자들을 대적하기 위해 황제가 보낸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형제와 함께 참수되었다. 후일 황제는 그에 대해 ‘가장 훌륭한 기억을 안겨준 위인’이었다며 애통해했고, 가톨릭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선언했다.

그와 가까운 사이였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가 그의 장례식에 추도사를 썼다.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413년 그의 저서 “신국론”(De ciavitate Dei)의 첫 권을 성 마르첼리누스에게 헌정했다.

그의 축일은 9월 13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마르첼리노

 

  • 세례명 축일
    4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inus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74년 앙브렁

 

 

마르첼리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마르첼리노 이야기

프랑스 앙브렁의 초대 주교인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아프리카 출신의 사제였다. 그는 성 빈첸시오(Vincentius)와 성 돔니누스(Domninus)를 대동하고 유럽으로 건너와 후일 도피네(Dauphine)로 알려진 미지의 땅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본부를 앙브렁에 두고 수많은 이방인들을 개종시켰다. 그리고 세례를 베풀 때에는 이상하게도 치유의 기적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리우스(Arius) 이단들의 끊임없는 박해로 인해 평탄하게 활동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성 마르첼리누스 주교는 교구를 탈출하여 오베르뉴(Auvergne) 산속에 숨어서 여생을 지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마르첼리노

 

  • 세례명 축일
    4월 2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inus

  • 신분과 직업
    교황,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마르첼리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마르첼리노 이야기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296년에 교황 성 카이우스(Caius, 4월 22일)를 계승하여 로마(Roma)의 주교인 교황좌에 올랐다. 그의 생애나 재임 기간 등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그는 프로젝투스(Projectus)의 아들로 로마인이며 순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303년 로마에서 시작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받지 않고 선종한 뒤에, 사제 마르첼루스(Marcellus)에 의해 로마의 비아 살라리아(Via Salaria)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Priscilla)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년 정도 후인 4세기 초에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박해 시기에 일시적으로 배교를 했고, 박해자에게 성경을 넘겨주었다는 악의적 주장이 주로 도나투스파(Donatismus) 이단 신봉자들에 의해 퍼뜨려졌다.

하지만 히포(Hippo)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는 이 같은 주장이 잘못된 중상모략임을 강력히 피력했다.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 역시 그를 ‘박해를 극복한 교황’이라고 했고, 키프로스의 주교인 테오도레트(Theodoret)도 그가 박해 중에 훌륭한 역할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의 배교 주장을 근거 없는 거짓으로 생각하고 있다.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은 4월 26일 목록에서 다른 전승을 전해주고 있다.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참수형을 선고받고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성 키리누스(Cyrinus), 성 안토니누스(Antoninus)와 함께 순교했다는 것이다.

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그는 4월 1일 순교한 후 25일이 지난 4월 26일 비아 살라리아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리베리오 교황표”(Catalogus Liberianus)는 10월 25일을 순교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10월 25일에 성인의 두 번째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동방 교회는 6월 7일에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최창주 마르첼리노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崔昌周 Marcellinus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49-1801년 한국

 

 

최창주 마르첼리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최 마르첼리노, 최마르첼리노.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야기

‘여종’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최창주 마르첼리노(崔昌周, Marcellinus)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40대 초반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온 가족을 입교시키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광주로 압송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崔召史, Barbara)는 그의 딸이다.

이후 최 마르첼리노는 자신이 지은 죄를 깊게 뉘우쳤고, 순교의 은총을 입어 죄를 씻어 낼 방도를 구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가족과 이웃 교우들을 힘써 권면하였으며, 두 딸을 모두 교우에게 출가시켰다. 그 가운데 하나는 1801년 여주에서 순교한 원경도 요한(元景道, Joannes)의 아내이고, 다른 하나는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申太甫, Petrus)의 며느리 최 바르바라이다.

여주 지방에서는 1800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다시 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사위인 원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최 마르첼리노의 아내는 그에게 피신할 것을 간청하였고, 그의 어머니 또한 피신을 종용하였다. 이에 그는 한양으로 피신하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집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순교를 다짐했던 이전의 마음을 되찾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으며, 그날 밤에 체포되어 여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관장은 곧바로 최 마르첼리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알고 있는 천주교 신자를 밀고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에서는 누구에게라도 해를 끼치는 것을 금하고 있으니, 한 사람도 고발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밀고하기를 거부하였다. 이에 그는 다시 옥으로 끌려가 원 요한과 이중배 마르티노(李中培, Martinus) 등과 함께 갇히게 되었다.

이후 최 마르첼리노의 옥중 생활은 6개월이나 계속되었다. 또 10월에는 경기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형벌을 받았지만, 그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1801년에 들어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이때 최 마르첼리노는 신자들을 대표하여 “모든 사람들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신 참 천주를 알고, 그분을 섬기는 행복을 받았으니, 저희는 그분을 배반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제 형벌은 점점 더 가혹해져 갔다. 그럼에도 최 마르첼리노는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를 권면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들을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는 최후 진술을 받아서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최 마르첼리노는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경기 감사가 조정에 보고한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최후 진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최창주는 (천주라는 큰 부모가 있다 하여) 제 아버지를 진정한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아버지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말할 정도로 아주 흉악합니다. 또 모진 형벌을 당하면서도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지 않았고, 끝내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을 고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인륜과 도덕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최창주 마르첼리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마르첼리노

 

  • 세례명 축일
    6월 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inus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마르첼리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마르첼리노 이야기

“예로니모 순교록”(Martyrologium Hieronymianum)에 따르면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의 박해 때에 로마에서 활동하던 뛰어난 사제였고, 성 베드로(Petrus)는 구마자(驅魔者)였다. 

그들은 새로운 개종자를 얻고 그들의 신앙을 돈독히 하는데 온갖 정열을 쏟았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세레누스(Serenus) 판사 밑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가시덤불과 찔레가 무성한 실바 니그라(Silva Nigra, ‘검은 숲’이란 뜻)로 끌려가 자기들의 무덤을 직접 판 후 참수되었다. 

세레누스 판사는 순교자의 유해를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해서 순교자 공경을 막고자 보통 사람들이 들어오기 힘든 가시덤불 숲속에서 그들을 처형하고 몰래 파묻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심 깊은 부인인 루칠라(Lucilla)와 피르미나(Firmina)가 꿈에서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라는 말씀을 듣고 기적적으로 그들의 유해를 발견해 로마의 라비카나 가도(Via Lavicana)에 있는 앗 두아스 라우로스(Ad Duas Lauros, ‘두 월계수’라는 뜻) 지하 묘지의 성 티부르시오(Tiburtius) 무덤 근처에 정중하게 안장하였다.

그 뒤로 그들이 순교한 장소인 실바 니그라는 실바 칸디다(Silva Candida, ‘하얀 숲’)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들이 묻힌 지하 묘소 위에 성당을 세웠다고 한다.

교황 성 다마소 1세(Damasus I, 366∼384년 재위)는 젊은 시절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형 집행인으로부터 직접 그들의 순교 이야기를 들었고, 그들의 순교에 관한 기록을 발견한 후 직접 비문을 작성하고 묘비를 세웠다.

비록 고트족에 의해 묘비가 파괴되었으나 그 비문의 내용은 나중에 그들의 무덤을 복원하고 로마 미사 경본 감사 기도 제1양식에 그들의 이름을 넣은 교황 비질리오(Vigilius, 537~555년 재위)가 작성한 “순교 기록”(Passio)의 자료로 쓰인 듯하다.

7세기부터 성 마르첼리노와 성 베드로의 무덤은 순례지가 되었고, 그들의 축일이 지역 전례력과 성인전에 기록되었다.

1896년에 그들이 묻혔던 지하 묘소에서 그들이 포함된 프레스코화가 발견되었는데,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Paulus) 사이의 그리스도 아래 어린양 옆에서 한 손을 들어 어린양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2일 목록에서 성 마르첼리노와 성 베드로의 선교 활동과 순교 그리고 매장에 관한 내용을 교황 성 다마소 1세의 증언을 중심으로 전해주었다.

그리고 후대에 기록된 “성 베드로와 성 마르첼리노의 순교록”(Passio Sancti Petri et Marcellini)에는 그들이 갇혀 있던 감옥의 간수였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성 아르테미오(Artemius, 6월 6일) 가족의 순교 이야기가 나온다.

그에 따르면 성 마르첼리노와 성 베드로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뒤에도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해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다. 이런 놀라운 일들을 목격한 성 아르테미오는 귀신에 들려 괴로워하는 딸을 데려와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한 후 아내인 성녀 칸디다(Candida, 10월 3일)와 딸인 성녀 파울리나(Paulina, 6월 6일)와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로 인해 세레누스의 명으로 성 아르테미오는 납덩어리가 달린 채찍으로 매를 맞고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그의 아내와 딸은 광산의 구덩이에 던져진 후 돌과 흙에 파묻혀 생매장당했다.

옛 “로마 순교록”은 6월 6일 목록에서 성 아르테미오와 그의 아내인 성녀 칸디다와 딸인 성녀 바울리나가 성 마르첼리노와 성 베드로에 의해 개종한 후 세레누스에게 사형 선고를 받고 참수형과 생매장형으로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런데 개정 “로마 순교록”은 6월 6일 목록에서 로마의 아우렐리아 가도(Via Aurelia) 근방에 성 아르테미오와 성녀 바울리나 순교자가 묻혀 있다고 두 명의 이름만 기록하였다.

대신 10월 3일 목록에서 로마의 포르투엔세 가도(Via Portuense)에 있는 폰시아노(Pontianus) 공동묘지에 성녀 칸디다가 묻혀 있다고 적었는데, 그 성녀 칸디다를 성 아르테미오의 아내인 성녀 칸디다와 같은 사람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녀 칸디다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을 타원형으로 둘러싼 열주 위에 세워진 140명의 성인 입상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마르첼리노

 

  • 세례명 축일
    6월 5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inu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0년

 

 

마르첼리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마르첼리노 이야기

성 플로렌티우스(Florentius), 성 율리아누스(Julianus), 성 키리아쿠스(Cyriacus),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와 성 파우스티누스(Faustinus)는 데키우스 황제 때에 이탈리아의 페루자(Perugia)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마르첼리노 샴파냐

 

  • 세례명 축일
    6월 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inus Champagnat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9-1840년

 

 

마르첼리노 샴파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슬랭, 마르첼리누스, 베누아, 조제프.

 

 

마르첼리노 샴파냐 이야기

1789년 5월 20일 프랑스 리옹(Lyon)의 아모 뒤 로제(Hameau du Rosey)에서 가난한 물방앗간 집의 아홉 번째 자녀로 태어난 성 마르첼리누스 샴파냐(또는 마르첼리노 샴파냐)는 신심 깊은 부모로부터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다.

일찍이 성소의 꿈을 키운 그는 리옹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816년 7월 22일 사제품을 받고, 라 발라(La Valla) 본당의 보좌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는 신학교 생활 이후 늘 소년들을 교육하는 수도회의 설립에 관심을 가져오다가, 마침내 1817년 ‘마리아의 작은 형제회’(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를 설립하여 1836년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그는 마리스타의 교육 이념인 학교 지침을 발간하였고, 교육 분야에서 기여하다가 1840년 6월 6일 51세를 일기로 노트르담 에르미타주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1955년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9년 4월 18일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마르슬랭 조제프 베누아 샴파냐(Marcellin Joseph Benoit Champagnat)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마르첼리노

 

  • 세례명 축일
    7월 14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inus

  • 신분과 직업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762년경

 

 

마르첼리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름, 마르첼리누스, 마르첼모, 마르쿨프.

 

 

마르첼리노 이야기

마르첼모(Marchelm), 마르쿨프(Marculf)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는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프리슬란트(Friesland)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성 빌리브로르드(Willibrord)를 따라 네덜란드로 갔던 영국인이다. 

그는 위트레흐트(Utrecht)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와 합류하여 15년 동안이나 프리슬란트와 구엘더랜드에서 활동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성 그레고리우스가 순교하자 그의 관할 구역이 성 레부인(Lebuin)의 수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그는 그 성인의 명에 따라 오브리셀의 이방인들에게 가서 성공적으로 활동하다가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유해는 나중에 데벤터로 이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마르첼리노

 

  • 세례명 축일
    8월 27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inus

  • 신분과 직업
    호민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경 토미

 

 

마르첼리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로, 마르셀루스,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로, 마르첼루스, 마르첼리누스, 마르켈로, 마르켈루스, 마르켈리노, 마르켈리누스.

 

 

마르첼리노 이야기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27일 목록에서 로마제국의 폰투스 속주에 속한 토미(오늘날 루마니아의 흑해 연안 항구 도시인 콘스탄차[Constanta])에서 호민관인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와 그의 아내인 성녀 만네아(Mannea)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성 요한(Joannes), 성직자인 성 세라피온(Serapion), 군인인 성 베드로(Petrus)가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성 마르첼리노와 16명의 동료(주교 1명과 3명의 성직자와 평신도들)가 로마제국의 칙령을 무시하고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총독 앞으로 끌려갔는데, 전승에 따라 흑해 연안의 토미가 아닌 이집트의 테베(Thebae, 나일강 중류에 있는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Luxor])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의 박해 중에 총독에게 심문을 받았다고도 한다. 하지만 “로마 순교록”은 그들이 순교한 곳을 흑해 연안의 토미로 전해주었다.

성 마르첼리노와 동료들은 총독 앞에서 당당히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고, 사형선고를 받고 원형경기장의 사나운 짐승들에게 던져졌으나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총독은 그들을 질책하며 물었다.

“기록을 보니 이미 오래전에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또는 본시오 빌라도) 총독의 명에 따라 죽고 묻힌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으냐?”

그러나 그들은 그 어떤 술책에도 말려들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모든 고통을 참아냈다. 결국 그들 모두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옛 “로마 순교록”은 개정 “로마 순교록”과 달리 성 마르첼리노 부부와 다른 세 명의 순교자 모두를 그들의 세 아들로 기록하였다.

성 마르첼리노는 성 마르첼루스(Marcellus, 또는 마르첼로)로, 성녀 만네아는 성녀 맘메아(Mammea) 또는 맘네아(Mamnea)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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