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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벳 여자세례명 10인 목록

피어나네 2024. 11. 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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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세례명 엘리사벳는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이사벨, 이사벨라, 이자벨, 이자벨라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엘리사벳 10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엘리사벳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엘리사벳을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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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벳
천주교 여자세례명
10인 목록

 

 

 

 

엘리사벳 여자세례명 목록

 

  1. 엘리사벳 앤 시튼 (1월 4일)

  2. 엘리사벳 피체나르디 (2월 19일)

  3. 엘리사벳 (6월 18일)

  4. 엘리사벳 (7월 4일)

  5. 요안나 엘리사벳 비쉬엘 (8월 26일)

  6. 정정혜 엘리사벳 (9월 20일)

  7. 엘리사벳 (9월 23일)

  8. 엘리사벳 (삼위일체의) (11월 9일)

  9. 엘리사벳 (11월 17일)

  10. 엘리사벳 (11월 25일)

 

엘리사벳 천주교 여자세례명 10인 목록

 

 

1. 엘리사벳 앤 시튼

 

  • 세례명 축일
    1월 4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Elizabeth Ann Seton

  • 신분과 직업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4-1821년 미국

 

 

엘리사벳 앤 시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낸시, 니나, 씨튼, 안나, 애나, 애니,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이사벨, 이사벨라, 이자벨, 이자벨라.

 

 

엘리사벳 앤 시튼 이야기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미국 뉴욕(New York)에서 성공회 신자이자 의사인 아버지 리처드 베일리(Richard Bayley)와 어머니 캐서린(Catherine)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나 1794년 1월 25일 부유한 상인의 아들인 윌리엄 매기 시튼(William Magee Seton)과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1803년 남편이 폐결핵으로 사망한 후 홀로 되었는데, 그 후부터 가톨릭 신앙생활에 눈을 뜨고 1805년에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였다.

볼티모어(Baltimore) 교구 캐롤(John Carroll) 대주교의 초청을 받아 자녀들과 함께 뉴욕을 떠나 볼티모어로 간 엘리사벳은 탁월한 지성과 하느님의 은사로 1809년에 미국 최초의 가톨릭 교구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25일 볼티모어 시의 성 메리 신학교 강당에서 청빈, 정결, 순명 서원을 하면서 미국 최초의 현지인 수도회인 사랑의 시튼 수녀회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6월에는 메릴랜드(Maryland)의 에미츠버그(Emmitsburg)에 수녀원과 학교를 신축하여 사도적 활동 수녀회로서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녀는 1821년 1월 4일 에미츠버그 수녀원에서 선종하였다. 시튼 원장은 1963년 3월 17일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미국 태생으로는 첫 번째로 시복되었으며, 1975년 9월 14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의 의해 최초의 미국 출신 성녀로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엘리사벳 피체나르디

 

  • 세례명 축일
    2월 1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Elizabeth Picenardi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428-1468년 만투아

 

 

엘리사벳 피체나르디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이사벨, 이사벨라, 이자벨, 이자벨라.

 

 

엘리사벳 피체나르디 이야기

엘리사벳 바르톨로메아 피체나르디(Elisabeth Bartholomea Picenardi)의 생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는 이탈리아의 만투아에서 존경받던 분들로 자녀들의 종교교육을 철저히 시켰다. 

부친이 직접 딸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성모소일과를 매일 바쳤으며, 어머니는 실천적인 묵상방법을 가르쳐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한 번도 결혼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와 사별한 뒤 그녀와 다른 여동생은 마리아의 종 수도회(Order of Servants of Mary)의 3회원으로 입회하였다. 엘리사벳은 특히 겸손하고 관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 은총까지 받았으므로 같은 또래의 수많은 처녀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리아의 종 수도회 3회원의 공동체를 만들어 지도하기도 했다. 예언의 은혜를 받은 그녀는 자신의 사망일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1804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엘리사벳

 

  • 세례명 축일
    6월 18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Elizabeth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129-1164년 쇼나우

 

 

엘리사벳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이사벨, 이사벨라, 이자벨, 이자벨라.

 

 

엘리사벳 이야기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난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12세 때에 독일 본(Bonn) 근교의 쇼나우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하여 1147년에 서원을 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극히 엄격한 수덕생활을 시작하였다. 

1152년경에 그녀는 첫 번째 환시를 보았다. 그 후 일생동안 수많은 초자연적 현상, 곧 환시, 탈혼, 예언 등을 하였으나 가끔 그녀의 몸에 타박상을 내고 때리는 악마적인 환시도 있었다.

엘리사벳은 자신의 환시, 특히 주님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대한 환시를 묘사하였는데, 이를 처음으로 기록한 사람은 자신의 남동생인 에그베르투스(Egbertus)였다고 한다. 그 역시 쇼나우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가 후일 그곳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녀의 책에 기록된 어떤 환시 내용은 분명치 못한 것도 있고 또 학자들로부터 의문시 되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그녀의 동생의 친구이던 대립교황 빅토르 4세(Victor IV)를 지지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진실에 대한 의구심은 추호도 없고 높은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다. 그녀는 1157년에 원장이 되었고 7년 후에 운명하였다. 그녀가 공식적으로 시복 혹은 시성된 기록은 없지만 로마 순교록에는 성녀 엘리사벳으로 언급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엘리사벳

 

  • 세례명 축일
    7월 4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Elizabeth

  • 신분과 직업
    여왕, 3회원

  • 활동 연도와 지역
    1271-1336년 포르투갈

 

 

엘리사벳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이사벨, 이사벨라, 이자벨, 이자벨라.

 

 

엘리사벳 이야기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1271년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왕 페드로 3세(Pedro III)와 시칠리아(Sicilia)의 왕 만프레디(Manfredi)의 딸인 콘스탄스(Constance)의 딸로 사라고사(Zaragoza)의 알하페리아 궁전(Aljaferia Palace)에서 태어났다. 

페드로 3세 왕은 자신의 딸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헌신한 그녀의 고모할머니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11월 17일)을 본받으라고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녀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포르투갈의 왕 데니스 1세(Denis/Dinis)와 결혼하여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하다가 후에 남매를 얻었다. 딸 콘스탄스는 후에 카스티야(Castilla)의 왕인 페르난도 4세(Fernando IV)와 결혼해 왕비가 되었고, 아들은 포르투갈의 왕위를 승계해 아폰수 4세(Afonso IV)가 되었다.

데니스 1세 왕은 능력 있는 강력한 통치자였지만 남편으로서는 칭찬받지 못할 사람이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불신앙을 감내하면서 자신이 낳지 않은 서자들의 교육까지 담당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기도와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자선 사업에도 힘써 병원 · 고아원 · 매춘 여성들의 보호소 · 양로원 등을 설립하고, 순례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숙소도 마련해주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냉대에도 인내심을 갖고 대했고, 1297년 이복형제들에게 관대한 아버지의 행동에 분개한 아들 아폰소 4세와 남편 사이의 대립을 중재하고 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그녀의 노력과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오해를 받아 한때 알랑케(Alenquer)로 추방되기도 했다.

성녀 엘리사벳은 1324년 남편 데니스 1세가 병을 얻자 헌신적으로 간호해 주었다. 그녀의 정성에 감동한 남편은 뒤늦게 회심하고 신앙을 찾았으나 이듬해에 선종하고 말았다.

남편이 사망한 후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성녀 엘리사벳은 아들이 왕위를 승계한 후 수도원 · 성당 · 빈민 구제소 등을 세우는데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리고 코임브라(Coimbra)에 자신이 세운 성녀 클라라(Clara)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 근처로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그곳에서 수녀가 되겠다는 이상은 포기했지만, 작은 형제회의 3회원이 되어 수도자 못지않은 엄격한 보속의 생활과 봉사활동에 전념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다.

‘평화의 조정자’로 알려진 성녀 엘리사벳은 말년에도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전쟁을 막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녀는 1336년 아들인 아폰수 4세와 카스티야의 왕이자 자신의 조카인 알폰소 11세(Alfonso XI) 간의 평화를 중재하러 가능 도중 과로와 열병으로 인해 병을 얻어 그해 7월 4일 에스트레모스(Estremoz) 요새에서 선종했다.

전쟁을 막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친 그녀의 유해는 평소 소망했던 대로 코임브라의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 성당에 묻혔고, 훗날 두 왕은 동맹을 맺었다.

성녀 엘리사벳의 무덤에서 기적이 일어나면서 그녀에 대한 공경이 시작되었고,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복자로 선언됨으로써 코임브라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공경 예절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어 시성 절차가 진행되면서 1612년에 그녀의 무덤을 열었는데 시신이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1625년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녀 엘리사벳의 이름은 옛 “로마 순교록”에 수록되었고, 1630년 로마 보편 전례력에서 7월 4일에 기념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1694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12세(Innocentius XII)가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팔일 축제와 날짜가 겹치지 않도록 7월 8일로 옮겼다.

그래서 옛 “로마 순교록”은 7월 4일 목록에서 교황 인노첸시오 12세의 결정으로 포르투갈의 여왕이자 미망인인 성녀 엘리사벳의 축일을 7월 8일에 기념한다고 적고, 7월 8일 목록에서 미덕과 기적으로 유명한 성녀 엘리사벳이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고 전해주었다.

1955년에 두 사도의 팔일 축제가 폐지되고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성녀 엘리사벳의 축일은 원래대로 그녀가 선종한 날인 7월 4일로 복원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7월 4일 목록에서 포르투갈의 여왕인 성녀 엘리사벳이 왕들 간의 화해를 도모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 사업의 모범이 되었으며, 데니스 왕의 미망인으로서 아들과 조카의 화해를 위해 애쓰다가 자기가 설립한 에스트레모스 수도원에서 성녀 클라라회의 3회원으로서 주님께 돌아갔다고 기록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성녀 엘리사벳은 ‘평화와 화해의 조정자’답게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혹은 올리브 가지가 그려진 왕비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주로 등장한다. 그리고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과 마찬가지로 장미의 기적을 주제로 한 작품도 많이 있다.

14세기의 한 제단화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어느 겨울 아침에 성녀 엘리사벳이 성(城)을 나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전(또는 빵)을 나눠줬는데, 그녀와 마주친 왕이 무엇을 감싸고 있냐고 묻자 ‘주님의 장미’라 답했고, 1월임에도 불구하고 풀어헤친 앞치마에는 장미가 가득 있었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을 타원형으로 둘러싼 열주 위에 세워진 140명의 성인 입상의 주인공 중 한 명이며, 보통 포르투갈 또는 아라곤의 이사벨라(Isabella, Isabel)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요안나 엘리사벳 비쉬엘

 

  • 세례명 축일
    8월 26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Elizabeth Bichier

  • 신분과 직업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3-1838년 아제스

 

 

요안나 엘리사벳 비쉬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비쉬에르,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요한나, 이사벨, 이사벨라, 이자벨, 이자벨라,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엘리사벳 비쉬엘 이야기

프랑스 부르주(Bourges) 근방 러 블랑의 샤토 데 아제스에서 그 지방의 영주인 안토니 비쉬엘의 딸로 태어난 성녀 요안나 엘리사벳 비쉬엘(Joanna Elisabeth Bichier)은 조안 엘리사벳 마리 루시(Jeanne Elizabeth Marie Lucy)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항상 엘리사벳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녀는 푸아티에(Poitiers) 근방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녀의 부친은 의회의 몰수령으로부터 가족의 재산을 성공적으로 방비한 뒤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1796년 모친과 함께 푸아티에 근교인 베티네스로 이사한 후부터 혁명 정부의 사제들과 무신론자들을 배격하면서 시골에서 홀로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1797년 그녀는 성 안드레아 후베르투스 푸르네(Andreas Hubertus Fournet, 5월 13일) 신부를 만나 가까운 친구가 되었는데, 성 안드레아 푸르네 신부는 그녀에게 교육에 종사하면서 병자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봉사하는 수도회 설립에 따른 규칙을 만들어 주었다.

1804년 그녀의 모친이 운명하자 그녀는 푸아티에의 카르멜회 수녀원의 수련자가 되었으나, 섭리회로 가서 성 안드레아 푸르네 신부가 계획하는 수녀 공동체의 일원이 될 준비를 하였다. 그래서 성녀 요안나 엘리사벳은 어린이를 가르치고 병자와 노인들을 돌보는 공동체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 단체는 1807년에 첫 서원식을 거행하였고, 1816년에 푸아티에의 주교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 수녀회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1811년과 1830년 사이에 60개 이상의 수도원이 생겼다. 이 수녀회는 보통 성 안드레아 사도 수녀회로 불렸으나 공식적인 명칭은 십자가의 딸 수녀회이다.

성녀 요안나 엘리사벳은 점잖고 온순한 여성으로 많은 여행으로 경험을 얻었고, 또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극히 단순한 여성으로 비쳤다.

그녀가 1834년에 임종할 때 바스크(Basque) 사제인 성 미카엘 가리코이트(Michael Garicoits, 5월 14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성 미카엘이 ‘베타람의 성심 사제회’라 부르는 선교회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1947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정정혜 엘리사벳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丁情惠 Elizabeth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7-1839년 한국

 

 

정정혜 엘리사벳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이사벨, 이사벨라, 이자벨, 이자벨라, 정 엘리사벳, 정엘리사벳.

 

 

정정혜 엘리사벳 이야기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Elisabeth)은 학문으로도 유명하고 또 한국 천주교회 설립자 중 한 명으로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딸이다. 

성녀의 어머니는 유 체칠리아이며 최초의 신학생인 정하상 바오로(Paulus)가 그녀의 오빠이다. 이들은 모두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여 성인품에 올랐다. 집안 전체가 열심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일찍부터 성교회의 진리를 몸에 익히며 성장하였다. 

이미 1801년 박해 때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와 큰오빠인 복자 정철상 카롤루스(Carolus)가 순교하였다. 이때 정 엘리사벳도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자기 오라버니들과 같이 붙잡혀 들어갔으나 조정에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한 후 부인과 어린 아이들은 놓아주었다.

그러나 살 길이 막연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마재에 살던 시동생 정약용 요한의 집으로 갔지만 그곳에서 친척들의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몹시 궁핍하게 지냈다. 그래서 정 엘리사벳은 어머니가 당하는 수많은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았다.

그녀는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나갔고, 가난과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나가는 데 익숙할 정도였다. 또한 바느질과 길쌈으로 어머니와 장차 신자들의 일꾼이 될 오빠 정하상 바오로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처음에는 천주교가 집안을 망쳐 놓았다 하여 적대시하던 몇몇 친척들도 그녀의 아름다운 모범과 덕에 감화되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어려서부터 주님께 동정을 허원하였던 그녀는 언제나 단정하게 지냈지만, 30세쯤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약해져 5년 이상이나 강한 유혹을 당하였다. 그녀는 이 유혹을 이기기 위해 기도와 단식과 편태를 사용하였는데, 마침내 그녀의 눈물은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선교사 신부들이 조선에 오기를 절실히 원하여 전심으로 그 뜻을 주님께 청하였다. 그리하여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와 두 명의 신부가 입국하자 그들을 자기 집에 모시고 주밀하게 보살펴 드림으로써 하느님께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앵베르 범 주교는 “엘리사벳은 참으로 여회장의 일을 볼만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앙과 신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박해가 일어남을 보고 무서움을 감추지 못하였으니, “내게는 과연 짐이 될까봐 무섭다”고 했던 것이다.

박해의 조짐을 알고 주교가 서울을 떠나 시골로 피신해 있는 동안 정 엘리사벳과 어머니 그리고 정 바오로는 옥에 갇힌 이들을 보살펴 주다가 결국 그녀도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7회의 혹독한 고문과 곤장을 320대나 맞았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잠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관원은 그를 이길 희망을 버리고 10월 2일 형조로 보냈다. 형조에서 다시 6회의 심문과 고문을 당한 후 사형선고를 받았다.

엘리사벳은 형장으로 떠나면서도 신자들에게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 주세요.”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1839년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43세를 일기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동정 순교자의 월계관을 얻었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엘리사벳

 

  • 세례명 축일
    9월 23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Elizabeth

  • 신분과 직업
    신약인물, 부인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엘리사벳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이사벨, 이사벨라, 이자벨, 이자벨라.

 

 

엘리사벳 이야기

마리아의 사촌인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 성 즈카르야(Zacharias)의 아내이자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한 성 요한 세례자(Joannes Baptistae, 6월 24일)의 어머니이다.

루카 복음서 1장에 따르면, 성녀 엘리사벳은 사제 아론(Aaron)의 자손으로 남편과 함께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들도록 아이가 없었다. 그녀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을 뿐 아니라 부부가 이미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성 즈카르야는 자신의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주님의 성소에 분향하러 들어갔다가 주님의 천사를 만났다.

주님의 천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성 즈카르야에게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며 자신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러 파견된 가브리엘(Gabriel, 9월 29일) 천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많았던 그는 이 사실을 의심함으로써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말문이 막혀 말을 하지 못했다.

성녀 엘리사벳은 동정 마리아(Maria)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들었을 때 이미 임신한 지 여섯 달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표징이 되어 마리아의 응답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이렇듯 성녀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루카 복음에서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여는 주도적인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성녀 엘리사벳이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자 이웃과 친척들은 모두 기뻐하며 아기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했다. 그때 성녀 엘리사벳은 아이 이름을 요한이라 해야 한다고 했다.

의아해하는 이들에게 성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고, 그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했다. 성령으로 가득 찬 그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68-79)

‘즈카르야의 노래’(Benedictus)는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루카 1,46-55) · ‘시메온의 노래’(Nunc Dimittis, 루카 2,29-32)와 함께 루카 복음서에서 대표적으로 아름다운 하느님 찬가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매일 시간 전례(성무일도) 기도를 바칠 때 아침기도에서 ‘즈카르야의 노래’를, 저녁기도에서 ‘마리아의 노래’를, 그리고 끝기도에서 ‘시메온의 노래’를 바친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5일 목록에서 사제이자 예언자이며 성 요한 세례자의 아버지인 성 즈카르야와 선구자의 어머니인 성녀 엘리사벳의 기념일을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3일로 기념일을 옮기고, 루카 복음 1장이 전해 준 주님의 선구자인 성 요한 세례자 부모의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하였다. 정교회에서는 이들 부부의 축일을 9월 5일 또는 6월 24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엘리사벳 (삼위일체의)

 

  • 세례명 축일
    11월 9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Elizabeth of the Trinity

  • 신분과 직업
    수녀, 신비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880-1906년

 

 

엘리사벳 (삼위일체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이사벨, 이사벨라, 이자벨, 이자벨라.

 

 

엘리사벳 (삼위일체의) 이야기

삼위일체의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1880년 7월 18일 프랑스의 부르주(Bourges) 근처에서 태어나 4세 때 육군 장교였던 아버지를 여의었고,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heresia ab Avila, 10월 15일)의 저서에 심취할 정도로 열심한 신자였던 어머니에게 충실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4세 때 동정녀가 될 것을 서약한 그녀는, 1901년 8월 2일 디종(Dijon)의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1903년 첫서원을 하였으며, 이듬해 11월에는 “삼위일체께 바치는 기도”라는 기도문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1905년 부활절을 앞두고 사도 바오로(Paulus) 안에서 삼위일체의 영광을 찬미하는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는 영적 체험을 한데 이어, 이듬해 주님 승천 대축일과 그 후 얼마 안 있어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영적인 은총을 체험하였다. 

성녀 엘리사벳은 약 9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고통스러운 병고를 치르다가 1906년 11월 9일 디종 수녀원에서 선종했다. 1984년 11월 25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16년 10월 16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엘리사벳

 

  • 세례명 축일
    11월 17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Elizabeth

  • 신분과 직업
    왕비, 3회원

  • 활동 연도와 지역
    1207-1231년 헝가리

 

 

엘리사벳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이사벨, 이사벨라, 이자벨, 이자벨라.

 

 

엘리사벳 이야기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1207년 헝가리의 프레스부르크(Pressburg,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서 국왕 앤드레 2세(Endre II)와 왕비 제르트루다(Gertruda)의 딸로 태어났다. 

튀링겐(Thuringen) 영주 헤르만 1세(Hermann I)는 정략적 이유로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성녀 엘리사벳과 자신의 맏아들 헤르만과의 정혼을 제의했다. 그 후 그녀는 어린 나이에 튀링겐의 궁정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생활했다. 

궁정의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생활 속에서도 성녀 엘리사벳은 자주 기도하며 경건하고 희생적인 삶을 살고자 했다. 1213년 어머니가 헝가리 귀족들에게 살해당하고, 1216년 12월 31일 결혼하기로 약속되어 있던 헤르만이 사망하는 등 어린 나이에 시련도 계속되었다. 

헤르만 1세는 자신의 둘째 아들 루트비히와 그녀를 다시 약혼시켰다. 튀링겐 궁정 안에서 많은 사람의 시기를 받으며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지만, 약혼자 루트비히는 그녀를 보호해주었고 시어머니가 될 소피아도 친어머니처럼 성녀 엘리사벳을 돌보아주었다.

교회를 등지고 정치적 야망을 좇던 헤르만 1세가 1217년 사망하고, 1221년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루트비히 4세는 그 해에 성녀 엘리사벳과 결혼했다.

신랑의 나이는 21살, 신부는 14살이었다. 그들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며 서로를 깊이 신뢰하는 모범적인 부부였다. 성녀 엘리사벳은 자선활동과 기도 생활을 열심히 했고, 남편은 그런 아내를 존중하고 옹호해주었다.

그들의 집은 아이제나흐(Eisenach) 근교의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있었고, 자녀는 세 명을 두었다. 맏아들은 어려서 죽었고, 둘째 딸에 이어 셋째 아들은 남편이 사망한 몇 주 후에 유복자로 태어났다.

1221년 작은 형제회가 독일에 정착하면서 성녀 엘리사벳의 삶은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작은 형제회의 첫 독일인 회원인 로데거(Rodeger)가 한동안 그녀의 영성 지도를 담당하면서 성녀 엘리사벳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에 대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작은 형제회가 1225년 아이제나흐에 수도원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1227년에 루트비히 4세가 풀리아(Puglia)로 출정하는 십자군에 가담했다가 9월 11일 이탈리아 남동부 오트란토(Otranto)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남편이 죽은 후 두 자녀는 다른 곳으로 보내지고 성녀 엘리사벳은 자신의 유산인 헤센의 마르부르크(Marburg) 성에서 쫓겨났다. 친척의 도움으로 밤베르크(Bamberg)의 주교인 숙부 에크베르트(Eckbert)에게 가서 어느 정도 지냈다.

로데거에 이어서 마르부르크의 콘라트(Conrad)가 그녀의 영성 지도를 맡았다. 그는 매우 금욕적이며 엄격한 사람으로 성녀 엘리사벳에게 수도자와 같은 삶을 요구했다.

남편의 유해와 유품을 튀링겐의 가족무덤에 안장한 후 성녀 엘리사벳은 콘라트의 도움으로 남편의 유산을 정리해 자녀들을 위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나머지 상당 부분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았다.

그리고 1228년 성금요일에 콘라트가 있는 아이제나흐로 가서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마르부르크에 ‘성 프란치스코의 자선 병원’을 세우고 스스로 병든 자, 특히 가장 혐오스러운 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성녀 엘리사벳은 콘라트에게 영적 지도를 받으면서 성덕을 위한 자아 포기의 길에 헌신했다. 누구나 놀랄 정도로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으며 깊은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감싸주었다. 그녀는 선종하기 4년 전에 자신을 쫓아냈던 시동생으로부터 마르부르크 성으로 돌아올 허가를 받았고 또 그녀의 아들에게 백작을 승계시킬 수 있었다.

여왕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직접 음식을 날라주고 옷을 지어 주는 일 등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이런 이유로 성녀 엘리사벳은 독일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녀가 되었다.

그녀는 불과 24년밖에 살지 못하고 1231년 11월 17일 마르부르크에서 선종했지만, 오늘날 작은 형제회 재속 제3회의 수호성인으로 높은 공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선종 다음 해에 그녀의 영성 지도신부였던 콘라트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 성녀 엘리사벳의 영적 풍요로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여인만큼 관상에 깊이 젖어 들어간 이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수사들과 수녀들이 여러 번 목격했듯이 그녀가 기도의 은밀함에서 나올 때 그 얼굴은 광채로 빛나 그 눈에서 태양 광선과 같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선종한 후 자신이 마르부르크에 세운 성 프란치스코 병원 성당에 묻혔다. 그녀의 무덤을 찾는 순례자가 늘어나고 무덤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면서 그녀에 대한 시성 절차가 빠르게 시작되었다.

그래서 선종 4년 후인 1235년 5월 28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이탈리아 페루자(Perugia)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Gregorius IX)는 그녀를 성대히 성인품에 올렸다. 그녀에게 봉헌된 마르부르크의 성녀 엘리사벳 성당의 기초가 그해에 놓였고, 1249년 성녀 엘리사벳의 유해가 새로 건립된 성당에 안치되면서 순례자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1474년에 성녀의 축일이 로마 전례력에 수록되면서 그녀의 성덕은 더욱 널리 퍼져나갔다. 성녀 엘리사벳의 축일은 전통적으로 1969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른 전례 개혁 이전까지는 장례가 거행된 11월 19일에 기념해왔다.

옛 “로마 순교록” 역시 11월 19일 목록에서 성녀 엘리사벳을 기념했었다. 전례 개혁 이후 선종한 날인 11월 17일로 옮겨 그녀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는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역시 11월 17일 목록에서 그녀의 성덕을 전해주고 있다.

14세기 이후 교회 미술에서 성녀 엘리사벳은 망토에 장미꽃을 담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졌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려고 몰래 빵을 감추고 나가다가 남편에게 들키자 그 빵이 장미꽃으로 변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빵 제조업자와 빵집 그리고 자선사업 기관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녀는 헝가리와 독일의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으로서만 아니라 독일의 ‘국가적 성인’으로도 여겨졌었고, 헌신적인 자선활동으로 인해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고 있다. 그녀는 헝가리 또는 튀링겐의 엘리사벳이나 이사벨라(Isabella, Isabel)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엘리사벳

 

  • 세례명 축일
    11월 25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Elizabeth

  • 신분과 직업
    동정녀, 신비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386-1420년 로이테

 

 

엘리사벳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이사벨, 이사벨라, 이자벨, 이자벨라.

 

 

엘리사벳 이야기

독일 뷔르템베르크(Wurrttemberg)의 발트제(Waldsee)에서 태어난 엘리사벳(Elisabeth)은 요한과 안나라 부르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천진난만하고 부드러운 천성이 두드러졌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착한 베시’로 알려졌다. 

그녀가 14세 되던 해부터 고해신부인 콘라두스(Conradus)가 그녀의 생활을 지도하였고, 작은 형제회 재속 3회원이 되도록 추천하였다. 17세에 그녀는 베를 짜는 어느 부인과 함께 로이테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하였고, 콘라두스 신부의 도움으로 이 작은 공동체는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평생을 이 작은 공동체에서 지낸 그녀는 중세의 신비가 중 한 사람이었고, 극도의 엄격한 생활과 환시 등으로 그녀의 성덕이 아주 높았음이 입증되었다.

특히 그녀는 수난받으신 주님의 오상을 받았다. 가시관을 쓴 흔적이 뚜렷하고 매 맞은 자국이 선명하였는데, 주님 수난 성금요일과 사순시기 동안에는 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

물론 그에 따른 고통도 극심하였다. 엘리사벳에 대한 공경은 1766년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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