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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5월 남자세례명
17인 목록
베드로 5월 남자세례명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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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 (5월 8일)
- 베드로 (5월 15일)
- 고성대 베드로 (5월 29일)
-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5월 29일)
- 김대권 베드로 (5월 29일)
- 김정득 베드로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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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 베드로 (5월 29일)
- 신태보 베드로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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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양등 베드로 (5월 29일)
- 이태권 베드로 (5월 29일)
- 정산필 베드로 (5월 29일)
- 조숙 베드로 (5월 29일)
- 조용삼 베드로 (5월 29일)
- 최필제 베드로 (5월 29일)
1.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7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735년 파비아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이야기
성 베드로(Petrus) 주교는 랑고바르드족(Langobard)이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에 세운 랑고바르드 왕국의 왕이자 그의 혈족인 리우트프란드(Liutprand)의 통치 기간 중에 파비아의 주교좌를 짧은 기간 동안 다스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8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102-1175년 타랑테즈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이야기
성 베드로(Petrus)는 프랑스 비엔(Vienne) 교외의 생모리스(Saint-Maurice) 태생으로 스무 살 경에 그의 두 형제와 아버지와 함께 본느보(Bonnevaux)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의 성덕이 알려지면서 1132년에 그는 제네바(Geneva)와 사부아(Savoie) 사이 타랑테즈 산맥에 있는 타미(Tamie) 수도원의 첫 번째 원장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 순례자들을 위한 집을 지었다.
1142년에 그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타랑테즈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시토회의 규칙을 교구 개혁에 도입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주요 사업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의 산맥을 넘는 순례자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도움을 베푸는 일이었다.
그는 또한 수확 전 춘궁기에 가난한 농민들에게 빵과 수프를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프랑스인들은 이를 '5월의 빵'이라고 불렀고 프랑스 혁명 전까지 지속되었다.
타랑테즈의 주교로서 13년이 지났을 때 그는 몰래 교구를 떠나 스위스에 있는 한 시토회 수도원에서 평수사로 지내고자 했으나 결국 다시 교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교황과 왕의 고문으로서 프랑스에서 교황권을 옹호하는데 힘썼다. 그는 1191년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타랑테즈의 베드로'로 불리는 유명한 두 사람 중 한 명으로 다른 한 명은 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5세(Innocentius V, 6월 22일)가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15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1년 람프사쿠스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이야기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소아시아 헬레스폰투스(Hellespontus) 지방의 람프사쿠스에 한 젊은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그는 귀족 출신으로 재능의 탁월함과 신앙과 덕에 있어서 뛰어난 성 베드로(Petrus)였다. 트로아스(Troas)에서 지방총독인 옵티무스(Optimus)는 모든 신자들을 비너스(Venus) 신전 앞에 끌어다 놓고 희생 제물 바치기를 강요하였다.
이때 성 베드로는 용감하게 “당신이 그 행동은 나에게 악명 높은 음란한 여신에게 제사를 올리라고 명령하는 것인데 그저 놀랍기만 할 뿐이오. 언급조차 하기 싫은 여신에게 제사를 올리지 않는 것을 당신의 법으로 처벌한다는 것도 놀랍소” 하며 거절하였다.
그 즉시 옵티무스는 그를 바퀴에 매달라고 명령하였고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그의 뼈는 부스러지게 되었다. 순교자는 자신의 눈을 하늘로 향하고 힘찬 표정으로 말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이 잔인한 폭군을 이길 수 있는 인내를 주셨기에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립니다.”
흔들리지 않는 성 베드로의 결심을 본 옵티무스는 참수를 명령하였다.
성 베드로의 참수 후 세 명의 다른 그리스도인들, 즉 성 안드레아(Andreas)와 성 바오로(Paulus) 그리고 니코마쿠스(Nicomachus)가 옵티무스 앞에 섰다. 지방총독은 각자의 고향과 종교를 물었고 니코마쿠스는 대답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인이오.”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강요받자 니코마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악마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소.”
지방총독은 그를 고문대에 매달고 고문하도록 명령했다. 고통을 못이길 정도가 되자 그는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준비가 되어 있소” 하며 배교하였다.
지방총독은 즉시 그를 고문대에서 끌어내리라고 명령하였고, 그는 제사를 드리자마자 마귀에 의해 사로잡혀서 땅에 넘어져 머리를 찧으며 고통스러워하다가 죽었다.
16세가량 된 나약한 처녀였던 성녀 디오니시아(Dionysia)는 이 현장을 목격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가엾은 사람! 순간의 안락을 위해 영원한 고통에로 자신을 내던지다니!” 이 말을 들은 옵티무스는 그녀가 그리스도교 신자인지를 물었고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매춘을 시킨 후 화형에 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위협이 효과가 없자 지방총독은 두 명의 젊은 청년에게 그녀의 순결을 빼앗도록 명령했고 청년들은 그녀를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갔지만 너무도 거센 저항에 그만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자정을 넘기자 빛으로 반짝이는 젊은이가 나타나 집 전체에 빛을 퍼뜨리며 그들 앞에 섰다. 놀란 두 청년은 성스러운 처녀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녀는 청년들을 일으켜 세우고 겁내지 말라고 하며 말했다.
“이분은 나의 수호자이자 보호자이십니다.”
그 청년들은 자신들에게 해가 끼치지 않도록 그녀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다음날 아침 이교도의 사제에 의해 흥분된 군중들이 지방총독의 집을 에워싸고 성 안드레아와 성 바오로를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거칠게 요구하였다. 군중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지방총독은 그들을 불러내어 디아나(Diana) 여신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
그들이 거부하자 총독은 그들에게 채찍질을 하고 구경꾼들에게 넘겨주었다. 구경하던 군중들은 성 안드레아와 성 바오로에게 돌을 던져 죽게 하였다.
성녀 디오니시아는 성 안드레아와 성 바오로를 처형하는 무질서한 소리를 듣자 울부짖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경비병들로부터 빠져나와 그들이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을 보면서 외쳤다.
“당신들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지금 당신들과 함께 이곳에서 죽겠습니다.”
지방총독은 성녀 디오니시아가 순결을 지키게 된 놀라운 사건과 순교자들과 함께 죽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를 성 안드레아와 성 바오로에게서 데리고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참수시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고성대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高聖大 Peter - 신분과 직업
독신,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6년 한국
고성대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고 베드로, 고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고성대 베드로 이야기
‘여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고성대(高聖大)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본디 성격이 매우 포악하여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뒤로는 그러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고 베드로는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였다. 언제인가는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그는 아우인 고성운 요셉과 함께 8개월 동안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다. 또 그들 형제는 언제나 합심하여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으므로,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후 고 베드로는,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끌려간 그는 처음에는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였지만, 목숨을 보전하려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고 베드로는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이후로는 가끔 “이 큰 죄를 보속하려면 칼을 맞아야 마땅하다.”고 되뇌곤 하였다. 그러다가 아우와 함께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으로 이주하여 그곳 신자들과 함께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15년, 고 베드로와 요셉 형제는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밀고자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이때가 그해 2월 22일경이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는 가운데서도 고 베드로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경주 관장은 그들 형제와 함께 배교를 거부하는 모든 교우를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이송하였다. 대구에서는 또다시 문초와 형벌이 여러 차례 이어졌으며,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고 베드로는 한결같이 이러한 고통을 참아 내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아우와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은 채 동정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앞서 대구의 감사는 고성대 베드로 형제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것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조정에 보고하였다.
“고성대와 고성운 형제는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천주교에 미혹되어 깨달을 줄 모르기에, 엄한 형벌을 하면서 깨우쳐 주려고 하였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 죽기로 한 마음을 목석과 같이 고집하니, 그들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고 베드로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고성대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金耆良 Felix Peter - 신분과 직업
중인, 상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6-1867년 한국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펠릭스 베드로, 김펠릭스 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펠리체, 피터.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이야기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Felix Petrus)는, 1816년 제주 섬 함덕리(현,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를 ‘김 선달’이라고 불렀다. 그는 배를 타고 다니면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무역을 하려고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였다.
그로부터 1개월 이상이 지난 3월 26일, 김기량은 중국의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었는데, 동료들은 이미 탈진하여 죽은 상태였다.
이후 김기량은 홍콩의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졌으며,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었다. 이 바울리노는 당시 그곳에서 휴양 중이었다.
이 바울리노는, 김기량을 만난 다음 날부터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김기량은 여기에 마음이 쏠려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하였고, 그의 신앙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깊어졌다. 그런 다음 그는 1857년 5월 31일에 홍콩의 부대표인 루세이유(J. J. Rousseille)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김 펠릭스 베드로는 고향인 제주로 내려가기 전 1858년 3-4월에 페롱(S. Feron, 權)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신부들은 그가 ‘제주의 사도’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그는 가족과 그의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으며, 이듬해 봄에는 육지로 나와 교구장인 성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김 펠릭스 베드로는 이후로도 육지를 오가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5년에는 두 번째로 난파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에서 프티장(Petitjean) 신부를 만나고 다음 해에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육지로 다시 나와 리델(F. Ridel) 신부를 방문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사공 2명을 세례 받도록 하였다. 이 무렵 그는 다음과 같은 천주가사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
그러나 제주의 복음화를 위한 김 펠릭스 베드로의 노력은 1866년의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여느 때처럼 무역을 하러 경상도 통영으로 나갔다가 그곳의 게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되었다.
이윽고 통영 관아로 끌려간 김 펠릭스 베드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켰다. 더욱이 옥에 갇혀서는 함께 있던 교우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하였다.
통영 관장은 대구 감사에게 ‘김기량과 그 동료들을 배교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들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김 펠릭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다시 혹독한 매질을 당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목숨이 붙어 있자, 관장은 그들 모두를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나이는 51세였다. 이때 관장은 특별히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김대권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金大權 Peter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9년 한국
김대권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베드로, 김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김대권 베드로 이야기
김대권(金大權)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현, 충남 보령군 청라면 청라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화춘 야고보은 바로 그의 아우이다.
김 베드로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교리를 배워 왔으나, 열심히 계명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부모가 사망한 뒤였다.
김 베드로는 한때 충청도 공주의 옹기점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이 무렵에는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그의 아내는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을 뻔하였다. 그 사고 뒤에 그들은 지난날의 잘못을 서로 이야기하였고, 이후로는 아내와 화합하여 화목한 가정을 꾸려 나가게 되었다.
김 베드로는 언제나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계명을 지키는 데에 열중하였다. 주일마다 이웃에 복음을 전하였으며, 예수 성탄 대축일이면 근처의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면서 밤을 새웠다. 언젠가는 호랑이가 그의 앞에 나타난 적도 있었는데,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평소처럼 기도를 다 하고 내려왔다.
사순 시기 때면 기도와 묵상을 거르지 않았고, 하루에 한 끼의 식사만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아우 김 야고보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도 아우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순교의 뜻을 밝혔다.
김 베드로는,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1827년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교우들에게 피신을 권유하면서도 자신은 천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오래지 아니하여 포졸들이 그 마을로 들이닥치자, 김 베드로는 웃는 얼굴로 그들 앞에 나아가 순순히 고산 관아로 끌려갔다.
고산에서 한차례 신앙을 증언한 김 베드로는, 곧 전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서적을 갖다 바치거나 교우들의 이름을 댈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전주 관장이 그의 아들을 데려와 목에 칼을 겨누었을 때도 그는 “이러한 일로 목이 잘리면 아들에게도 크나큰 영광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은 유배형을 받았다.
감사 앞으로 끌려가서도 김 베드로의 신앙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수난의 은혜를 한 터럭만이라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순교의 뜻을 드러냈다. 그의 결심이 얼마나 굳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저의 살과 뼈에 사무쳐 있으므로, 사지를 자르거나 뼈를 부순다고 하여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감사는 할 수 없이 김 베드로를 옥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김대권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임금의 명으로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이었다.
김대권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김정득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金丁得 Peter - 신분과 직업
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
김정득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베드로, 김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김정득 베드로 이야기
‘대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정득(金丁得)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홍주의 대흥 고을에서 태어나, 친척인 김광옥 안드레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그가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김 베드로는 김 안드레아와 함께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탓에, 포졸들이 쉽게 그들의 종적을 찾아내고 말았다. 이후 베드로는 홍주로,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각각 압송되었다.
홍주 관장은 김 베드로가 끌려오자마자, 그를 배교시키기 엄한 문초와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김 베드로는 감사의 명에 따라 김광옥 안드레아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 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여기에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하여 참수하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당시 김정득 베드로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는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속에 숨어 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며, 형벌과 문초를 가하여도 아주 모질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예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김 베드로와 김 안드레아는 천상의 기쁨에 가득 차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김 베드로는 예산에서 얼마를 더 가, 대흥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읍내로 끌려 나가 칼날 아래 목숨을 바쳤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이었다.
김정득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베드로 페트로니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Petroni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361년
베드로 페트로니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페트로니 이야기
이탈리아 시에나(Siena)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베드로 페트로니(Petrus Petroni)는 어릴 때부터 하느님의 일에 대하여 놀라운 관심과 행동들을 표현하였다.
그는 멀리 떨어져 혼자서 기도하기를 즐겨하였으며, 거리에서 부랑자들을 발견하면 그들을 도우며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에 마치아노에 카르투지오 수도원이 세워지자 그는 온갖 반대를 물리치고 17세의 나이로 입회하였다.
그 후 사제가 된 그는 여러 가지 놀라운 은혜와 초자연적인 지식을 받았다. 그는 당시 유명한 보카치오가 속된 활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보카치오는 처음에는 화를 냈으나 끝내는 개종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송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宋 Peter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1-1867년 한국
송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송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송 베드로 이야기
송(宋)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장성한 뒤에는 부친 송 베네딕토를 모시면서 성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데 열중하였다.
송 베드로는 부친인 송 베네딕토와 함께 가족을 데리고 진천 배티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송 베드로의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송 베드로와 그의 부친 송 베네딕토, 그리고 그의 딸과 며느리 이 안나, 이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송 베드로는 한양으로 압송된 뒤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송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신태보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申太甫 Peter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9?-1839년 한국
신태보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신 베드로, 신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신태보 베드로 이야기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Petrus)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뒷날의 행적에서 미루어볼 때 그는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학식을 습득했던 것 같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는 그의 며느리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10년이 지난 뒤, 사촌인 이여진 요한과 함께 입교한 신 베드로는 일찍부터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고자 하였지만, 주 야고보 신부가 워낙 비밀리에 활동하였던 탓에 만날 수가 없었다.
이후 신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가 끝난 뒤,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그러다가 사촌 이 요한을 비롯하여 다른 교우들과 연락이 닿게 되자, 그들과 함께 교회 재건 운동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우들이 가장 시급한 일로 생각한 것이 바로 북경에서 다시 성직자를 영입해 오는 일이었다. 그 결과, 1811년 말에 이 요한이 교우 한 명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신자들의 서한 두 통을 전하게 되었다.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신 베드로는 이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의 희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신 베드로는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기로 작정하고,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동안 그는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신 베드로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가족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상주의 포졸들과 함께 잣골로 들이닥쳤다. 당시 포졸들은 이미 체포된 신자들을 통해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나누어준 사실과 그의 거주지를 알고 있었다.
신 베드로는 이내 전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뒷날 그 자신이 성 샤스탕(St. J. Chastan, 鄭) 신부의 명에 따라 기록한 ‘옥중 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 다음의 내용은, 그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내 다리는 살이 헤어져서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앉을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내 상처는 곪아서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더욱이 내 방은 벌레와 이투성이였으므로, 아무도 내게 근접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건강한 몇몇 교우들이 부축을 해 주어 몸을 좀 움직일 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가끔 내 방을 치워 주기도 하였다. 이 애덕의 행위를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처럼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 베드로는 결코 교회 서적과 동료들이 있는 곳을 밀고하지 않았다. 또 관장이 배교를 강요할 때면, “천주교가 없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욕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감사는 할 수 없이 신 베드로를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고, 그는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때때로 마음이 약해진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용맹한 신앙심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에, 임금의 명에 따라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가량이었다.
신태보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원시장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元 Peter - 신분과 직업
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32-1793년 한국
원시장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원 베드로, 원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원시장 베드로 이야기
원(元)시장 베드로(Petrus)는 1732년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 무렵, 곧 56-57세가 되었을 때, 사촌 형인 원시보 야고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시장’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어느 날 원 베드로는 집을 떠나 1년 이상 다른 지방에 가서 생활하면서 교리를 공부하였다. 그동안 그는 ‘천주교 신앙이 수천 년 동안 목숨을 보전해 주는 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친척과 친구들에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설명에 힘을 보태 주었고, 친척과 친구들은 마음이 움직여 하느님을 믿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때까지도 그는 세례를 받지 못하였었다.
본디 원 베드로의 성격은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앙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 성격이 변하여 어떠한 일에서나 온화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거나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데 열중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관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원 베드로와 원 야고보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사촌인 원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원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내 원 베드로는 홍주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관장의 어떠한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천주를 배반하거나 동료들을 밀고할 수 없으며, 교회 서적이 있는 곳도 말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관장은 화가 나서 형리들에게 주리를 틀고, 치도곤 70대를 치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하느님과 부모님께 대한 본분과 천주교의 참된 도리를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러 달을 옥에 갇혀 있으면서 원 베드로는 자주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고 형벌을 받았는데,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포졸과 형리들에게 전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우가 그를 만나러 옥으로 찾아왔고, 이때 원 베드로는 그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홍주 관장은 감사에게 모든 사실을 보고하였으며, 감사에게서 ‘원시장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관장은 다시 원 베드로를 옥에서 끌어내 갖은 형벌을 가하였지만, 한결같은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관장은 마지막으로 혈육의 정에 호소해 보기로 하였다. 원 베드로를 기다리고 찾는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식들 이야기를 듣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는 제 마음을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 목소리에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홍주 관장은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그래서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음식을 가져다주도록 하고는,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도록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관장은 다른 방법을 생각한 끝에, 그의 몸에 물을 붓고 밖에 내다 놓아 얼어 죽게 하라고 명하였다.
원시장 베드로가 덮어쓴 물은 이내 얼음으로 변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오로지 주님의 수난만을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에게 바쳤으니, 그때가 1793년 1월 28일(음력 1792년 12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원시장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이양등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李陽登 Peter - 신분과 직업
회장, 상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8년 한국
이양등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이 베드로, 이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이양등 베드로 이야기
이양등(李陽登) 베드로(Petrus)는 경상도 울산의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회장이었다. 본디 성품이 선량하였던 그는 꿀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였다.
이 베드로는,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 온 허인백 야고보와 김종륜 루카를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이 베드로는 얼마 되지 않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이 베드로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어 이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한결같이 증언하였기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중구 남외동)로 끌려 나가 김종륜 루카, 허인백 야고보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이었다.
순교 당시에 이양등 베드로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야고보의 아내 박조예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이양등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이태권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李太權 Peter - 신분과 직업
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2-1839년 한국
이태권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이 베드로, 이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이태권 베드로 이야기
‘승화’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태권(李太權)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홍주의 배울에 살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라도로 유배를 갔다가 3년 뒤에 그곳에서 사망한 이무명은 그의 아버지이고, 1812년 홍주에서 순교한 이여삼 바오로는 그의 삼촌이다.
이 베드로는, 아홉 살 때인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석방된 적이 있으며, 1801년의 박해 때에는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형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또다시 석방되었다. 또 1802년에도 삼촌들과 함께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이 베드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심약한 마음을 나타냈지만, 석방된 뒤에는 천주교의 본분을 계속해서 지켜 나갔다. 또 교회 서적을 베껴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과 함께 전라도 지역으로 이주해서 살던 그는, 1827년에 다시 한 번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려고 하였으나, 가족을 남겨 두고 떠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천주의 명을 기다리기로 결심하고 동생만을 피신시켰다.
과연 얼마 뒤에 포졸들은, 이 베드로가 살고 있는 마을에 나타났고, 그는 이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처음에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교회 서적을 바치고 교우들이 있는 곳을 말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는 아무것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는 혹독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전주 감사는 “그를 도저히 살려둘 수 없다.”고 하면서 옥에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이 베드로는, 김대권 베드로, 이일언 욥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 임금의 명으로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7세였다.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이태권 베드로는 성 샤스탕(St. J. Chastan, 鄭) 신부의 명에 따라 옥중 수기를 남겼다. 한편 사형 판결이 있기 전에 형조에서 임금에게 올린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태권은 밤낮으로 천주교에 깊이 빠져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를 받들었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이태권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정산필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鄭山弼 Peter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39-1749)-1799년 한국
정산필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정 베드로, 정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정산필 베드로 이야기
충청도 덕산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난 정산필(鄭山弼) 베드로(Petrus)는, 본래 성격이 괄괄하고 힘이 예사롭지 않아 모두가 무서워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로는 아주 겸손하고 온순해졌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정 베드로는 주 신부를 찾아가 직접 그에게 세례를 받는 행복을 누렸다. 또 이후에는 내포 지역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자신이 맡은 직분을 다하였다. 부지런히 기도와 독서를 하였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격려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정 베드로에게는 박 라우렌시오, 원 야고보, 방 프란치스코 등 절친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오가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1797년에 일어난 정사박해 때에 자신들이 살던 마을에서 체포되어 모두 순교하였다.
정 베드로가 체포된 때는 1798년이나 1799년이었다. 그는 덕산 관아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용감하게 천주의 가르침을 증언하였다. 또 옥에서는 함께 갇힌 동료들을 격려하였으며,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도 전혀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사형 집행일이 되자, 정 베드로는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동료들에게 같이 먹자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천주께서 사람을 위하여 창조하신 음식이니,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먹읍시다. 이제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정 베드로는 형장으로 나가 장사형(또는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799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에서 60세 사이였다.
정산필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조숙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趙淑 Peter - 신분과 직업
양반, 동정 부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6-1819년 한국
조숙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조 베드로, 조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조숙 베드로 이야기
‘명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조숙(趙淑) 베드로(Petrus)는 1786년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숙’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이후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양친과 함께 강원도의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성장해 감에 따라, 조 베드로는 출중한 재능을 보였고, 성품 또한 착하고 친절하였으며, 나이에 비해 아주 점잖았다. 그러나 주변의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점차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7세 때 권천례 데레사를 아내로 맞이하면서이다.
혼인날 밤, 아내 권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조 베드로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뜻을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사람이 되었다.
이후 조 베드로 부부는, 남매처럼 지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그들의 신심은 날로 깊어져 기도와 복음 전파, 고신 극기 행위가 일상이 되었으며, 가난하게 살면서도 남을 위한 애긍에 열중하게 되었다. 이렇게 15년을 생활하는 동안, 조 베드로는 처음의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아내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조 베드로 부부는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성직자를 영입하려고 북경을 오갈 때마다 필요한 뒷바라지는 모두 그들 부부의 몫이었다.
정 바오로 성인은 교회 일을 위해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양에 있는 조 베드로 부부의 집에 머무르면서 모든 준비를 하였다. 당시 고 바르바라(또는 막달레나)라는 과부가 그 집에 살면서 그들 부부를 도와주었다.
그러던 가운데 정 바오로 성인이 다시 한 번 북경에 갔을 때, 포졸들이 수색 과정에서 우연히 조 베드로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이내 포졸들은 그의 집으로 몰려들어 그를 체포하였다. 이때 아내 권 데레사는 자원하여 남편을 따라나섰고, 고 바르바라도 그들 부부와 함께 투옥되었다. 그때가 1817년 3월 말경이었다.
문초가 시작되자, 관장은 조 베드로 부부를 유혹하면서 ‘배교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혹독한 형벌을 꿋꿋하게 참아 내었다. 관장은 몇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가하였지만, 그들 부부의 신앙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고통스러운 옥살이 중에도 조 베드로 부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특히, 아내 권 데레사는 남편 조 베드로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순교를 권면하였다.
조숙 베드로 부부와 고 바르바라는 이렇게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하였고,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격을 얻게 되었으니, 그들 셋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것은 1819년 8월 10일(음력 6월 20일) 이후로, 당시 조 베드로의 나이는 33세였다. 교우들은 한 달이 지나서야 그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조숙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조용삼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신분과 직업
독신,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
조용삼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조 베드로, 조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조용삼 베드로 이야기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Petrus)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 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비웃기만 하였다. 그는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그 뒤 조 베드로는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조 베드로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스승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모든 사람이 조 베드로를 조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심을 칭찬해 주면서 차츰 신앙의 길로 인도해 나갔다.
조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려고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임에도 조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자 바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자, 박해자들은 화가 나서 더욱 세게 매질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박해자들은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다가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를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조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 마르티노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조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전처럼 그의 마음을 꺾을 수 있으리라 믿고는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무렵 조용삼은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으며, 이후로는 착한 행동과 아름다운 말로 여러 신자들을 감동시켰다.
조 베드로는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지막 형벌 때에 그는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조용삼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최필제 베드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崔必悌 Peter - 신분과 직업
중인, 약재상,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0-1801년 한국
최필제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최 베드로, 최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최필제 베드로 이야기
최필제(崔必悌) 베드로(Petrus)는 1770년 한양의 의원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는 1801년에 순교한 최필공 토마스의 사촌 동생으로, 1790년에 그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본래 진실하고 후덕한 성품을 지녔던 최 베드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질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또 그가 파는 약은 값이 싼 데다가 약재도 좋아 모두가 신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촌인 최 토마스는 어떠한 일을 할 때마다 그에게 의견을 들어 본 다음에 실행에 옮길 정도였다.
최 베드로는 천주교에 입교한 뒤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때 최 토마스의 아우 중에서 신자들을 욕하면서 다니는 이가 있었는데, 그도 ‘최필제만은 본받을 만하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최 베드로도 사촌인 최 토마스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최 토마스만큼 신앙이 굳지는 못하여 일찍 박해자들에게 굴복하고 석방되었다. 또 석방된 뒤에는 거짓으로 최 토마스의 자백서를 써서 관청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후 최 베드로는 다시 교회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교회 일을 돕거나 교리를 전파하는 데 열중하였고, 신입 교우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놓고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자 그를 찾아가 성사를 받았으며, 자주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러다가 음력 1800년 12월 19일 자신의 집에서 신입 교우들과 모임을 갖던 중에 체포되어 형조의 옥에 갇혔다.
최 베드로가 다시 체포되자, 그의 늙은 부친은 놀란 나머지 병이 나서 죽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의 부친은 비신자였는데,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이때 최 베드로는 부친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 달라고 형조에 요청하였다. 이윽고 옥에서 나오게 된 그는 장례를 치른 뒤, 곧바로 형조로 가서 다시 옥에 갇혔다.
그때 형조의 관리들은 그에게 넌지시 도망할 것을 귀띔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옥으로 돌아오기에 앞서 그는 몇몇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순교의 뜻을 밝혔다.
“나는 마귀에게 원수를 갚고, 전에 내가 배교했던 일을 보속하려 하네. 나의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자 내 머리를 바치는 것일세.”
최필제 베드로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차례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최필제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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