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8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나르치소, 살바토르, 안셀모, 알렉산데르, 에두아르도, 에우카르피오, 치릴로, 크리스티아노, 트로피모, 펠릭스, 프리그디아노, 총 11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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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3월 18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가지
3월 18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나르치소
- 가톨릭 성인 이름
Narciss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7년경
나르치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나르치수스, 나르키소, 나르키수스.
나르치소 자료
성 나르키수스(또는 나르치소) 주교와 그의 부제인 성 펠릭스(Felix)는 에스파냐에서 순교했다는 정도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독일이나 스위스로 탈출했다고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살바토르
- 가톨릭 성인 이름
Salvat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20-1567년 오르타
살바토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살바도르, 살바또르, 쌀바또르.
살바토르 자료
오르타의 성 살바토르는 에스파냐 헤로나(Gerona) 교구의 산타 콜룸바(Santa Columba)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는 아기 때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거리를 헤매다가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신기료장수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수도자가 되려는 열망으로 가득하여 작은 형제회 회원이 되고자 하였다.
바르셀로나에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 그는 처음에는 수도원 부엌일을 담당하였는데, 그의 덕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토르토사(Tortosa)의 예수 마리아 은둔소로 갔다. 여기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엄격한 생활을 하였는데, 맹인과 벙어리 그리고 불구자들이 그에게 오면 항상 치유를 받는 기적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는 항상 맨발로 다녔고, 매일 편태를 했으며, 길고 엄격한 단식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그는 특히 성모 마리아와 성 바오로(Paulus)에 대한 신심이 투철했으며, 수 차례에 걸쳐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였다.
그는 47세의 일기로 선종하였으나, 생전에 이미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1606년 2월 5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8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살바도르(Salvador)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안셀모
- 가톨릭 성인 이름
Anselm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036-1086년 루카
안셀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셀름, 안셀무스, 안쎌모, 안쎌무스.
안셀모 자료
이탈리아 만투아(Mantua) 태생인 성 안셀무스(Anselmus, 또는 안셀모)는 삼촌인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 교황에 의하여 1073년 루카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안셀무스는 즉시 황제의 서임권 논쟁에 적극 가담하였고, 헨리 4세 황제가 주는 주교직의 상징 접수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그는 클루니악 수도원으로 은퇴해야 했고, 그곳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로부터 소환 받은 그는 엄격한 생활이 결여된 사람들을 조정하는 일을 보았다.
1079년에 그는 카노사(Canossa)로 은퇴하여 마틸다 백작 부인의 영적 지도자로 지내면서 수도자 개혁운동에 헌신하였으며, 평신도 서임권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려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투쟁을 적극 지원하여 맹활약하였다.
그레고리우스의 사후 빅토르 3세(Victor III)가 그를 교황청 시찰자로 임명하여 롬바르디아(Lombardia)의 여러 지역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는 만투아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성덕과 성서 지식 그리고 해박한 학식은 높이 평가받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알렉산데르
- 가톨릭 성인 이름
Alexand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1년 예루살렘
알렉산데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레산드로, 알렉산더, 알렉산델, 알렉싼데르, 알렉싼델.
알렉산데르 자료
소아시아 카파도키아(Cappadocia) 태생인 성 알렉산데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수학하였는데, 그의 동료 학생 가운데 오리게네스(Origenes)가 있었다.
그는 고향인 카파도키아의 첫 번째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 때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천신만고 끝에 석방되어 예루살렘 순례 길에 오르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212년에 교계 사상 처음으로 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미 백 세를 훨씬 넘긴 성 나르키수스(Narcissus, 10월 29일) 주교가 자신을 도울 주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성 알렉산데르는 망명 중인 오리게네스에게 피신처를 제공하고 오리게네스의 서품식에도 참석했는데, 이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의 데메트리우스(Demetrius, 10월 9일) 주교로부터 견책을 받기도 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서관과 학교를 세웠으며,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에는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옥에 갇혔다가 그곳에서 옥사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에두아르도
- 가톨릭 성인 이름
Edwar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962-978년 영국
에두아르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애드워드, 에두아르두스, 에드아르도, 에드아르두스, 에드와드, 에드워드, 에드워즈.
에두아르도 자료
영국의 평화 왕으로 불리는 에드가(Edgar)의 아들인 성 에두아르두스(Eduardus, 또는 에두아르도)는 962년에 태어났다.
에드가 왕이 죽었을 때 성 에두아르두스와 그의 이복동생 에텔레드(Aethelred) 사이에 왕위 계승권을 두고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그가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성 에두아르두스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양어머니 엘프리다(Elfrida)의 명령으로 도르셋셔(Dorcetshire)의 코프(Corfe)에서 무참하게 살해되어 웨어햄(Wareham)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성 에두아르두스는 그가 평소에 베푼 선정과 뛰어난 신앙심으로 인하여 성인으로 또 순교자로서 늘 공경을 받아왔다. 그는 단순한 생활을 했고 또 순교자에게 어울리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에우카르피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carp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니코메디아
에우카르피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까르삐오, 에우까르삐우스, 에우까르피오, 에우까르피우스, 에우카르피우스.
에우카르피오 자료
성 에우카르피우스(또는 에우카르피오)와 성 트로피무스(Trophimus)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중에 순교하였다.
그들은 원래 니코메디아(오늘날의 터키 북서부 이즈미트 Izmit)에 주둔하던 이교도 출신 로마 군인이었다. 어느 날 그리스도인들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수색하는 도중 개종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니코메디아에서 산채로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치릴로
- 가톨릭 성인 이름
Cyri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교부, 교회학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15?-387년 예루살렘
치릴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치릴로 자료
315년경 예루살렘에서 로마 제국 황제 가문의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듯한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으며, 342년 또는 그 후에 성 막시무스 2세(Maximus, 5월 5일)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성 키릴루스는 수년 동안 예비신자 교육에 전념하다가 350년 또는 351년에 예루살렘의 주교인 성 막시무스 2세가 사망하자 그를 승계하여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대한 교계적인 관할권을 주장하던 카이사레아(Caesarea)의 아리우스파(Arianism) 주교이던 아카키우스(Accacius)와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는 자신의 주교좌에서 해임되고 유배를 당하였다. 또 다른 이유는 성 키릴루스가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재산을 매각하여 기근의 희생자들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회 재산을 불법으로 매각했다는 누명을 쓴 성 키릴루스는 타르수스(Tarsus)로 갔으나 359년 셀레우키아(Seleukeia) 주교회의에 의해 복직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재차 아카키우스의 음모에 의하여 황제 콘스탄티우스로부터 축출되었다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다시 복직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성 키릴루스는 367년에 세 번째로 유배되었으나, 발렌스 황제가 율리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에 유배된 모든 종교인들을 사면함으로써 석방되어 다시 주교좌로 돌아왔다.
또 다음 해에는 안티오키아(Antiochia) 공의회가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월 9일)를 팔레스티나(Palestina)로 파견하여 그가 역설하던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로 인한 잡음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이 용어는 니케아(Nicaea) 신경의 기본 용어이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예루살렘 주교좌는 파벌주의와 아리우스주의로 뒤엉켜 있고 또 윤리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성 키릴루스의 신앙과 그 주교좌는 올바르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후 성 키릴루스와 성 그레고리우스는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여기서 성 키릴루스는 니케아 공의회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주교로 인정받았다.
사실 성 키릴루스는 성서학자이자 뛰어난 설교가였다. 그의 작품 중에서 24편의 강론으로 구성된 “예비자 교리”(Catecheses)가 가장 유명한데, 이는 콘스탄틴 대제가 336년 예루살렘에 완공한 성묘 성당(Church of the Holy Sepulcher)에서 348년 사순과 부활시기에 한 강론으로 예비신자와 새 영세자들의 신앙과 생활을 위한 명쾌한 지침서이자 교리 해설서이다.
또한 전례적으로도 4세기의 팔레스티나 전례를 자세히 보여주는 소중한 문헌이다. 역사가인 소크라테스와 소조멘은 성 키릴루스는 철저한 아리우스주의 반대자였고, 그의 정통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387년 3월 18일에 세상을 떠난 그는 교황 비오 10세(Pius X, 1903-1914년 재위)에 의해(또는 1882/3년에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크리스티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hrist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수도원장,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186년 아일랜드
크리스티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크리스띠아노, 크리스띠아누스, 크리스티아누스, 크리스티안.
크리스티아노 자료
성 크리스티아누스(Christianus, 또는 크리스티아노)에 대해서는 아일랜드에 세운 첫 번째 시토회 수도원인 멜리폰트(Mellifont) 수도원의 원장이란 사실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실정이다.
너무도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면서 어느 것이 사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이 그 주된 이유이다. 어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북아일랜드 얼스터(Ulster) 지방의 뱅거(Bangor)에서 태어났고 성 말라키(Malachy, 11월 3일)의 제자로서 공부하였다.
그는 고위 성직자를 수행하여 로마(Roma)를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 클레르보(Clairvaux)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는 클레르보의 네 성인 중의 한 명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가 아일랜드로 돌아올 때 아마(Armagh)의 성 말라키는 아일랜드의 멜리폰트에 시토회를 처음 도입했는데, 성 크리스티아누스도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수도회의 참다운 정신을 뿌리내리는 데 큰 공헌을 했고, 나중에 수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그는 리즈모어(Lismore)의 주교였다고도 하나 자세한 것은 확인할 수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트로피모
- 가톨릭 성인 이름
Trophi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니코메디아
트로피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드로피모, 드로피무스, 뜨로피모, 뜨로피무스, 트로피모스, 트로피무스.
트로피모 자료
성 에우카르피우스(Eucarpius)와 성 트로피무스(또는 트로피모)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중에 순교하였다. 그들은 원래 니코메디아(오늘날의 터키 북서부 이즈미트 Izmit)에 주둔하던 이교도 출신 로마 군인이었다.
어느 날 그리스도인들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수색하는 도중 개종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니코메디아에서 산채로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펠릭스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x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7년경
펠릭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체.
펠릭스 자료
성 나르키수스(Narcissus) 주교와 그의 부제인 성 펠릭스는 에스파냐에서 순교했다는 정도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독일이나 스위스로 탈출했다고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프리그디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Frigdi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88년? 루카
프리그디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프레디아노, 프리그디아누스.
프리그디아노 자료
이탈리아에서 프레디아노(Frediano)라 불리는 성 프리그디아누스(또는 프리그디아노)는 북아일랜드 얼스터(Ulster) 지방 왕의 아들로서 아일랜드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가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순례하던 중에 루카를 지나다가 몬테 피사노(Monte Pisano)의 은둔소에 마음이 이끌려 스스로 정착하였다. 그가 주교로 간택된 이유는 그의 높은 성덕 때문이었다.
교황 요한 2세(Joannes II)까지 동원되어 은수생활을 중지하고 교회를 위해 더 많은 활동을 하도록 요구하였다고 한다. 7년 동안 평화스럽게 주교직을 수행하던 중에 랑고바르드족(Langobard)의 침략을 받고 주교좌가 불탔다. 그 후 그는 이를 재건하였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애정을 표시하였고, 남루한 옷을 입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고통 받는 이와 병자들을 직접 치료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은수생활을 잊은 적이 없었고 기회가 오면 즉시 돌아갈 자세로 살았다. 그는 성직자로 살았으나 생활은 은수자의 엄격한 생활이었다.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의 “대화집” 속에는 그에 의한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임종이 다가 온 줄 알아차린 그는 주변에 있던 자기 수도자들을 불러서 함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마치 잠을 자는 듯 고요하게 운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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