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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 남자세례명 10가지

피어나네 2023. 4. 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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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가에타노 카타노소, 베네딕토, 베드로, 아가토포, 이시도로, 조시모, 테오둘로, 티제르나크, 플라토, 힐데베르토, 총 10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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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 여자세례명 알레타, 총 1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4월 4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0가지

 

 

 

 

4월 4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가에타노 카타노소

  2. 베네딕토

  3. 베드로

  4. 아가토포

  5. 이시도로

  6. 조시모

  7. 테오둘로

  8. 티제르나크

  9. 플라토

  10. 힐데베르토

 

4월 4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0가지

 

 

1. 가에타노 카타노소

 

  • 가톨릭 성인 이름
    Gaetano Catanos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79-1963년

 

 

가에타노 카타노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에따노, 가에타누스, 가예따노, 가예따누스, 가예타노, 가예타누스, 가이따노, 가이타노, 가이타누스, 까따노소, 카예따노, 카예따누스, 카예타노, 카예타누스, 카예타누스.

 

 

가에타노 카타노소 자료

성 가에타누스 카타노소(Gaetanus Catanoso, 또는 가에타노 카타노소)는 1879년 2월 14일 이탈리아 남부 메시나(Messina)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 레지오 칼라브리아(Reggio Calabria)의 작은 마을인 코리오 디 산 로렌조(Chorio di San Lorenzo)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8명의 자녀를 둔 부유한 지주이자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가에타누스 카타노소는 1902년 9월 20일에 사제품을 받고 1904년부터 1921년까지 펜티다틸로(Pentidattilo)의 시골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그는 예수의 거룩한 얼굴에 대한 지대한 신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안’(聖顔)이란 회보를 만들었고, 1920년에는 ‘성안회’(聖顔會)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성안은 나의 인생이고 그분은 나를 강하게 한다.”고 말했다.

1921년 2월 2일 그는 산타 마리아 데 라 칸델라리아(Santa Maria de la Candelaria)의 큰 본당으로 이동하여 1940년까지 머물렀다. 그는 매우 다재다능한 사람으로서 부정적인 본당의 현실에서 평화롭고 부지런히 봉사하여 사람들로부터 성성(聖性)을 인정받았다.

그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제한되지 않았다.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항상 그리스도와의 더 깊은 일치를 위해 노력했고, 자신의 사목적 배려에 맡겨진 모든 이들의 선익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실행하였다. 사실 그는 펜티다틸로의 시골 본당에서 사목하는 것 이상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칸델라리아의 큰 본당으로 발령받았을 때에도 그는 전혀 우쭐하지 않았다. 그는 칸델라리아의 본당신부로서 신앙의 활력을 주는 성체성사와 성모신심을 통해 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다. 또한 교리교육을 장려하고 신성모독과 축일들의 남용에 반대하는 운동을 추진하였다.

가에타누스 신부는 사제로서 자신의 의무는 모범이 되는 사람을 찾지 못해 타락할 위험에 처한 어린이와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소외된 노인들과 별도의 지원 없이 외로움에 놓인 사제들을 돕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또한 폐허가 될 때까지 방치된 성당과 감실들을 복구하였다. 간단히 말해 그는 고통 받는 모든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버림받은 고아들을 지키고 구하기 위해 모든 활동을 합시다. 도처에 너무도 많은 위험과 비참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버림받은 어린이와 젊은이에게 우리의 시선을 돌립시다. 오늘날 인간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윤리적으로 병들었습니다.”

그는 종종 감실 앞에서 여러 시간 또는 하루 종일 보내기도 했고, 본당 안팎에서 성체조배를 장려하였다. 또한 전문적인 사제모임을 구성하여 강론과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들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며 본당사목을 돕도록 하였다.

1921년부터 1950년까지 그는 종교 기관과 레기오 칼라브리아의 교도소에서 고해신부로 활동했다. 그리고 병원 원목신부와 대교구 신학교의 영적 지도자로서도 봉사했다.

1934년 가에타누스 신부는 ‘성 베로니카 딸들 수도회(성안의 선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도회는 항구한 보속의 기도, 겸손한 봉사, 교리교육 그리고 어린이 · 젊은이 · 사제 · 노인들에 대한 원조를 그 사명으로 하고 있다.

첫 번째 수도회는 레기오 칼라브리아의 리파로(Riparo)에 세워졌다. 교구의 대주교가 수도회의 활동에 대해 제한을 가했을 때도 그는 모든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결국 그가 설립한 수도회는 1958년 3월 25일 교구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그는 1963년 4월 4일 모범적인 삶을 마치고 평화로이 선종하였다.

그는 1997년 5월 4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5년 10월 2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카예타누스 카타노소(Cajetanus Catanoso)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베네딕토

 

  • 가톨릭 성인 이름
    Benedic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526-1589년

 

 

베네딕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네데토, 베네딕도, 베네딕또, 베네딕뚜스, 베네딕투스, 베네딕트, 분도.

 

 

베네딕토 자료

성 베네딕투스 아 상토 필라델포(Benedictus a Sancto Philadelpho, 또는 베네딕토)는 아프리카 계통의 부모 밑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이탈리아 시칠리아(Sicilia)의 메시나(Messina) 근처에서 노예로 일했다고 한다.

그래서 베네딕투스는 시칠리아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에 그의 주인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그가 유색인종이기 때문에 공적으로 해를 입었을 때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그러나 그는 대단한 인내심과 놀라운 인품을 드러냄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하였고, 프란치스코 은수자 그룹에 들어갔다. 1564년에 이 그룹이 해산되자 성 베네딕투스는 팔레르모(Palermo)의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평수사로 입회하였다.

1578년에 새 원장을 뽑을 때 평수사인 성 베네딕투스가 선출되었는데, 그는 단순한 수도자였고 전혀 아는 체 하지 않는 점이 모든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이 직책을 수락하여 성공적으로 원장의 직무를 수행하였고, 작은 형제회의 규칙을 글자 그대로 실행하려고 노력하였다. 후일 그는 수련장까지 겸하였다.

그의 이해심과 동정심은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으로 명성을 얻게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였다. 만년에는 그가 처음에 하던 부엌일을 하면서도 아주 평화스럽게 생활하였다. 그가 '흑인 베네딕투스'라 불리는 이유는 흑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누비아족(홍해 지방의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4월 4일 이탈리아 팔레르모에서 선종하였으며, 1743년 5월 15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된 후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8세(Pius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115년 푸아티에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자료

프랑스의 국왕 필립 1세가 아내 베르타와 인연을 끊고 수도원으로 들어왔을 때 성 베드로(Petrus)가 그 수도원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왕의 입회는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켜 시노드(Synod)까지 열렸는데, 이 시노드는 왕의 불법적인 이혼을 따지고 그를 파문하였다.

그 후 그는 로마(Roma)로 가서 이 판결의 부당성을 호소하였지만, 고위성직자들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 후 그는 쇼비니 성으로 유배되었다가 운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아가토포

 

  • 가톨릭 성인 이름
    Agathop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아가토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또뽀, 아가또뿌스, 아가또페데스, 아가토페데스, 아가토푸스.

 

 

아가토포 자료

테살로니카(Thessalonica) 교회에서 봉사하던 성 아가토푸스(또는 아가토포) 부제와 성 테오둘루스(Theodulus) 독서자는 막시미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총독 파우스티누스에게 끌려가서 고문을 받은 후 목에 돌을 매단 채로 물속에 집어넣는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아가토푸스는 아가토페데스(Agathopede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이시도로

 

  • 가톨릭 성인 이름
    Isidor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교회학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60?-636년 세비야

 

 

이시도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이시도루스, 이시도르, 이시돌.

 

 

이시도로 자료

성 이시도루스(Isidorus, 또는 이시도로)는 에스파냐 남동부 카르타헤나(Cartagena)에 정착해 살다가 549년경 서고트족(Visigoths)의 침입으로 도시가 파괴되자 남서부의 세비야로 이주한 에스파냐계 로마인 귀족 가문에서 560년경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20년 이상 나이가 많은 큰형 성 레안데르(Leander, 3월 13일)와 누나인 성녀 플로렌티나(Florentina, 8월 28일)는 카르타헤나에서 태어났고, 작은형 성 풀겐티우스(Fulgentius, 1월 14일)와 그는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이들 남매는 모두 나중에 성인 · 성녀의 품에 올랐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큰형인 성 레안데르에 의해 양육과 교육을 받은 성 이시도루스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주로 수도원과 세비야 주교좌성당 학교에서 보냈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학문적 소양을 쌓으며 성숙한 영성 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라틴어와 문학 등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600년경 세비야의 주교인 큰형 성 레안데르가 선종한 후 그 뒤를 이어 세비야의 대주교가 되었다. 성 이시도루스는 형의 과업을 이어받아 서고트족을 아리우스주의(Arianism)로부터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에스파냐에 가톨릭교회를 재건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당시 에스파냐는 그가 태어나기 1세기 전에 서고트족이 침입해 도시를 세우고 아리우스주의를 퍼뜨려 갈등과 혼란이 만연한 시기였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에 물든 이들을 개종시키고 에스파냐를 가톨릭 국가로 재통일하기 위해 노력하며 여러 차례 교회 회의를 개최했는데, 그중 619년의 세비야 교회 회의와 633년의 제4차 톨레도(Toledo) 교회 회의가 대표적이다.

특히 톨레도 교회 회의에서는 정치적 사안뿐만 아니라 에스파냐 교회와 수도 생활, 그리고 전례와 성직자 양성 등에 관한 주요 의제들이 다루어졌다. 이로써 에스파냐 교회가 통일된 시간 전례(성무일도)와 미사 전례 양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외에 여러 전례 원칙을 제시하고, 사제들의 정결의 의무와 주교들의 의무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각 교구에 성직자 양성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런 노력을 통해 에스파냐가 유럽의 여러 국가 가운데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가 되도록 했다.

성 이시도루스는 방대하고 다양한 작품을 저술한 학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성경 주석, 신학, 백과사전,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주제를 다루었고, 수도 규칙서도 작성하였다.

그는 또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비롯하여 의학, 법률 등을 연구하고 제자들에게도 가르쳤다. 신학 저술 외에도 많은 교양 학술서를 남긴 그는 시세부토(Sisebuto) 왕의 요청으로 전 20권으로 구성된 백과사전 “어원학”(Etymologiae)을 저술하였다.

이는 이후 여러 세기 동안 교과서 및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신학과 성경에 관한 주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일반 학문의 주제를 다루어 그의 풍부한 학식을 유감없이 발휘한 대작이다.

그의 작품 중 주요 역사서로는 “연대기”(Chronica Majora)와 “고트족 · 반달족 · 스베니아족의 통치사”(Historia de Regibus Gothorum, Vandalorum, et Suevorum)가 유명하다.

이토록 바쁜 생활 중에서도 그는 자신을 찾았던 이들, 특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사랑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선종을 앞두고 자신에게 남아 있던 돈도 모두 극빈자를 위한 자선금으로 나눠주고, 636년 4월 4일 미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711년 이후 세비야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무슬림 세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에스파냐 북부 레온(Leon) 지방의 성 이시도루스 성당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성 이시도루스의 제자인 사라고사(Zaragoza)의 성 브라울리우스(Braulius, 3월 26일) 주교는 자신의 저서 “탁월한 재능”에서 스승의 학문적 업적을 정리하면서, 그를 가장 많은 학식을 겸비한 사람, 이교 문화에 빠지지 않도록 에스파냐를 구하기 위해 하느님에게 부름을 받은 사람, 고대 문화와 학문 및 그리스도교 문화를 에스파냐에서 꽃피운 사람으로 평가하였다.

보편교회와 일치하는 에스파냐 교회를 재건한 성 이시도루스는 서방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교부로 평가되기도 한다.

위대한 학자이자 탁월한 영성가로 존경을 받은 그를 11세기부터 에스파냐에서 성인으로 공경하는 신심이 확산하였고, 1598년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1722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3세(Innocentius XIII)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언하였다.

오늘날 에스파냐의 인문 대학부와 마드리드 지방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 성 이시도루스는 2000년대 중반 교황청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인터넷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는 야만인들에 의해 수많은 도서관이 불태워지고 대표적 학자층인 수도자들이 학살된 시대적 상황에서 가능한 방대한 지식을 축적하고자 지식백과사전이라 부를만한 “어원학”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색인 등을 사용한 그의 집필 방식이 오늘날의 데이터베이스 구조와 비슷하다는 등의 이유로 그는 인터넷뿐만 아니라 컴퓨터 사용자와 컴퓨터 기술자들의 수호성인으로도 공경을 받게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조시모

 

  • 가톨릭 성인 이름
    Zosi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60년경? 팔레스티나

 

 

조시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소시모, 조시마, 조시마스, 조시무스, 조씨모, 조씨무스.

 

 

조시모 자료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의 통치 때 태어난 성 조시무스(또는 조시모)는 아주 젊은 나이에 팔레스티나의 수도원에 들어가 은수자가 되었다. 수십 년 동안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던 성 조시무스는 해마다 사순시기가 되면 요르단 광야로 가서 은둔하며 기도생활에 전념하였다.

사순시기를 지내고자 자신의 수도원과는 20일 정도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시편을 읽으며 기도하던 중 충격적인 모습을 하고 있던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Maria, 4월 2일)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완전히 벗은 몸에 길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인해 사람의 모습이라 하기도 어려웠다. 성녀 마리아는 성 조시무스에게 자신의 몸을 덮기 위해 망토를 던져달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성목요일에 성체를 모셔다주기를 청했고, 성 조시무스는 성체를 모셔와 그녀에게 영해주었다.

성 조시무스는 그녀의 진실한 마음과 생활을 이해하고 이 참회의 여인에게 다음 해 성목요일에도 성체를 모셔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성 조시무스가 왔을 때 성녀 마리아는 이미 죽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신은 부패하지 않았다. 성 조시무스는 성녀 마리아의 시신을 정중히 묻어주고 자신의 수도원으로 돌아와 이 이야기를 전했다.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인 성 소프로니우스(Sophronius, 3월 11일)가 처음 글로 기록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성 소프로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는 344년경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부모 곁에 떠나 집을 나온 그녀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가서 17년간 창녀로 살았다.

그러던 중 그녀는 성스러운 십자가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순례자들이 예루살렘(Jerusalem)으로 떠나는 것을 보고 그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그들을 따라 나선 이유는 순례를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몸을 팔며 좀 더 쉽게 돈을 벌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순례자들을 유혹하며 돈을 버는 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어느 날 그녀는 예루살렘의 주님 무덤 성당에 들어가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신비스러운 힘이 막아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두려운 마음이 든 그녀는 자신의 불결한 생활 때문이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성당 밖에 걸려 있던 성모 마리아 이콘을 보며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세상을 떠나 사막으로 들어가 참회하며 고행자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다음 비로소 성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거룩한 십자가 유물에 존경을 표한 후 자신이 기도했던 이콘 앞에 와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때 그녀는 “요르단을 가로질러 요한 세례자가 살았던 광야, 예수가 세례 받은 곳으로 가서 영광스런 휴식을 찾아라.”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길로 즉시 광야로 들어간 성녀 마리아는 47년을 세례자 요한처럼, 야생의 열매를 먹으며 속죄의 삶을 살다가 성 조시무스를 만나 성체를 영하고 세상을 떠났다. 성 조시무스는 조시마(Zosima) 또는 조시마스(Zosima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테오둘로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du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독서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테오둘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떼오둘로, 떼오둘루스, 테오둘루스.

 

 

테오둘로 자료

테살로니카(Thessalonica) 교회에서 봉사하던 성 아가토푸스(Agathopus) 부제와 성 테오둘루스(또는 테오둘로) 독서자는 막시미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총독 파우스티누스에게 끌려가서 고문을 받은 후 목에 돌을 매단 채로 물속에 집어넣는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아가토푸스는 아가토페데스(Agathopede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티제르나크

 

  • 가톨릭 성인 이름
    Tigernac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49년 클로거

 

 

티제르나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띠게르나크, 띠제르나크, 티게르나크, 티에르니, 티에리.

 

 

티제르나크 자료

성 티제르나크는 왕손으로 킬데어(Kildare)의 성 콘레트(Conleth, 5월 10일)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성녀 브리지다(Brigida, 2월 1일)는 세례 때 그의 대모(Godmother)였다. 소년 때에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렸으나 후일 그는 자유를 얻었다.

그때부터 그는 스코틀랜드의 로스낫(Rosnat) 수도원에서 모넨노의 제자가 되었으며, 로마(Roma) 순례 뒤에는 아일랜드로 돌아와서 클로거 교구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늙어서 그는 시력을 상실했지만 그의 기도와 관상생활은 끊이질 않았다. 티에르니(Tierney) 또는 티에리(Tierry)로도 불리는 그는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8월 23일)의 친구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플라토

 

  • 가톨릭 성인 이름
    Plat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813년 사쿠디온

 

 

플라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쁠라또, 플라또.

 

 

플라토 자료

콘스탄티노플에서 출생한 성 플라토는 13세 이전에 그 지방을 휩쓴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왕궁의 재무상이던 삼촌 밑에서 교육을 받고 그의 보좌관이 되었다. 그러나 22세 때에 그 중요한 직책을 사임하고 수도생활로 들어섰다.

그는 자신의 소유물을 팔아서 이등분한 후 자신의 두 여동생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자기는 올림푸스 산의 심볼레온(Symboleon) 수도원으로 가기 위하여 소아시아 북서부 지방인 비티니아(Bithynia)로 떠났다.

그는 여기서 철저한 보속생활을 실천하면서 교부들의 저서 사본을 만드는 작업에 전념하였다. 770년에 원장 테옥티스투스(Theoctistus)가 서거할 때 그가 후임자로 뽑혔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36세였다. 그 후 그는 심볼레온을 떠나 사쿠디온으로 가서 20년 동안 원장으로 있다가 사임한 일도 있었다. 그 후 정치적인 이유로 니케포루스 1세(Nicephorus I) 황제가 그를 보스포루스(Bosporus)의 한 섬으로 추방했는데, 이때 그는 늙고 병든 몸이었다.

811년 미카엘 1세 황제는 그를 석방하고 크게 존경하였다. 그는 평온하게 운명하였고, 그의 조카인 성 테오도루스(Theodorus)가 그의 장례를 주관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힐데베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Hildeber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증거자,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752년 겐트

 

 

힐데베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힐데베르투스, 힐데베르트.

 

 

힐데베르토 자료

성 힐데베르투스(Hildebertus, 또는 힐데베르토)는 벨기에의 겐트에 있는 성 베드로 수도원의 원장이었다. 그는 과격한 성상파괴주의자들로부터 성화를 지키려다 살해되었기 때문에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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