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데르펠 가다른, 빈첸시오 페레르, 알베르토, 제노, 제랄도, 프로보, 총 6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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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4월 5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6가지
4월 5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데르펠 가다른
- 가톨릭 성인 이름
Derfel Gadar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66?-660년
데르펠 가다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데르펠 가다른 자료
중세 웨일스(Wales)의 전승에 따르면, 성 데르펠 또는 데르펠 ‘가다른’(‘힘센’, ‘용맹한’, ‘강력한’이란 뜻)은 566년경 웨일스에서 태어난 위대한 군인으로 카드판(Cadfan, 11월 1일)과는 사촌 사이였다.
그는 아서(Arthur) 왕의 일곱 전사 중 한 명으로 왕과 함께 캄란(Camlan) 전투에서 싸운 경력이 있을 정도로 용맹하였으나, 어느 날 모든 것을 버리고 바드시(Bardsey) 섬에서 은수자로 살기 시작했다.
그 후 거처를 옮겨 란더펠(Llanderfel), 메리오네스셔(Merionethshire) 등 웨일스의 여러 지방에서 독수자로 살았는데, 그의 출중한 덕행이 널리 알려져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660년 4월 6일에 임종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웨일스의 여러 지방에서 오랫동안 공경을 받았다.
특별히 그를 기념하는 란더펠의 순례지에는 오랫동안 공경받아 오던 전사 모습의 그의 목각상이 있었는데, 1538년 헨리 8세 왕의 수장령을 거부한 복자 요한 포레스트(Joannes Forest, 5월 22일)가 스미스필드(Smithfield)에서 화형으로 순교할 때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의 명령에 따라 화목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의 축일은 4월 5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빈첸시오 페레르
- 가톨릭 성인 이름
Vincent Ferr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교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350-1419년
빈첸시오 페레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뱅상, 빈센트,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원선시오, 페레리오, 페레리우스.
빈첸시오 페레르 자료
성 빈첸시오 페레르(Vincentius Ferrer)는 1350년 1월 23일 에스파냐 발렌시아(Valencia)에서 영국인으로 에스파냐에 정착한 아버지 윌리엄 페레르(William Ferrer)와 발렌시아 출신의 어머니 콘스탄스 미구엘(Constance Miguel)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탄생과 관련한 전설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꿈에서 도미니코회 수도자에게 자기 아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리라는 말을 들었고, 그의 어머니는 산고를 경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발렌시아에서 순교하여 에스파냐의 첫 순교자로서 그 지방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는 사라고사(Zaragoza)의 성 빈첸시오 순교자(1월 22일)의 이름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지었다.
어려서부터 신앙 안에서 성장하며 교회에 자신을 봉헌할 결심을 한 성 빈첸시오 페레르는 1367년에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향에 있는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이듬해 첫서원을 하고 타라고나(Tarragona)에서 2년간 수학한 후 레리다(Lerida)에서 논리학을 가르쳤다. 1373년부터는 바르셀로나(Barcelona)에 있는 도미니코회의 성서 연구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379년에 툴루즈(Toulouse)에서 공부를 마친 후 바르셀로나에서 루나의 베드로(Petrus de Luna) 추기경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바로 고향 발렌시아 수도원의 부원장으로 선임된 그는 임기를 마치고 1384년부터 발렌시아 주교좌성당 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고, 1389년에는 신학 교수가 되었다.
흑사병으로 인한 혼란이 채 가시기도 전인 1378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 XI)가 선종한 후 대립교황이 출현하면서 서구 교회를 크게 분열시킨 ‘서구대이교’(西歐大離敎) 사건은 성 빈첸시오 페레르에게 큰 시련이었다.
그는 로마의 교황 우르바누스 6세(Urbanus VI)의 선출이 무효라 확신했고, 아비뇽(Avignon)에 머무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는 1390-1394년에 루나의 베드로 추기경을 보좌하면서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충성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했고, 에스파냐 전역을 순회하며 설교와 성사 집전에 헌신하였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자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이슬람교 신자들, 이단인 카타리파(Cathari)와 발도파(Valdesii)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그는 뛰어난 설교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덕분에 유대인과 무슬림 사이에서도 좋은 평판을 들었다.
1394년에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가 선종하고 루나의 베드로 추기경이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라는 이름으로 대립교황이 되면서 그는 새 교황의 고해신부로 임명되어 아비뇽으로 갔다. 성 빈첸시오 페레르는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이 모두 교황직을 사임하고 후계자를 선출함으로써 교회의 분열과 분리를 끝내기를 희망했으나 베네딕투스 13세가 이를 거절하자 그에 대해 지지를 철회하고 1399년 11월 아비뇽을 떠났다.
그 후 20여 년 동안 에스파냐뿐만 아니라 남부 프랑스와 롬바르디아(Lombardia), 스위스와 북부 프랑스, 네덜란드 등을 순회하며 활발한 설교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설교 중에 참회의 필요성과 요한 묵시록 14장 6-13절에 나오는 심판의 천사가 다가왔음을 힘주어 강조했다. 많은 전기 작가들은 카탈로니아(Catalonia) 말만 할 줄 알았던 그가 여러 지방에서 설교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자 ‘말씀을 은혜’를 받았다고 믿었다. 또한 그가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면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래서 그의 설교에 감동한 개종자의 무리가 마치 군대의 행진처럼 무리를 지어 나왔다고 한다. 1404년에 그는 자신의 설교에 감동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이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구성하였다. 도미니코회의 복장을 하고 순례자의 지팡이를 지닌 그들은 ‘빈첸시오의 동료’(The Company of Master Vincent)라고 불렸다.
성 빈첸시오 페레르는 활발한 순회 설교 중에도 교회의 분열을 걱정하며 교회 일치를 위해 베네딕투스 13세의 사임을 설득했었다. 서구대이교의 극복을 위해 1414년에 콘스탄츠(Konstanz) 공의회가 개최되자 그는 다시금 교황의 사임을 설득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는 1416년 베네딕투스 13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교회 분열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는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를 새 교황으로 선출함으로써 서구 교회의 분열은 정식으로 종결되었다.
성 빈첸시오 페레르는 선종하기 3년 전부터 프랑스의 노르망디(Normandie)와 브르타뉴(Bretagne) 지방에서 주로 순회 설교를 하며 지냈다. 그는 1419년 4월 5일 브르타뉴의 반(Vannes)에서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백년전쟁’(百年戰爭)을 끝내도록 설득하는 설교를 하던 중 선종하여 반 대성당에 묻혔다.
성 빈첸시오 페레르가 선종한 후 신자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공경이 일어나 1455년 교황 칼리스투스 3세(Callistus III)가 시성 절차를 거쳐 그를 성인으로 선언했고, 1458년 후임 교황인 비오 2세(Pius II)가 그의 시성 칙서에 서명했다.
회개와 참회를 중심 주제로 설교하여 제2의 세례자 요한이라 불리는 성 빈첸시오 페레르는 중세 시대에 가장 뛰어난 설교가 중 한 사람이었다. 요한 묵시록의 심판을 예고하는 천사에 대한 설교로 인해 그는 ‘심판의 천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래서 에스파냐의 많은 미술가는 그를 묵시록에 나오는 하늘을 나는 천사의 날개를 달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성 빈첸시오 페레리우스(Vincentius Ferrerius, 또는 빈첸시오 페레리오)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알베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Alber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127년 몬테코르비노
알베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버트, 알베르또, 알베르뚜스, 알베르투스, 앨버트.
알베르토 자료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Puglia)의 몬테코르비노 사람인 성 알베르투스(Albertus, 또는 알베르토)는 그곳의 주교가 공석이었을 때 주민들에 의하여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 후 한때 시력을 상실하여 고생하였으나, 어떤 환시를 본 뒤로 오히려 제2의 시력뿐만 아니라 예언의 은혜까지 입었다. 한 번은 그가 수하 사람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목이 말라 우물의 물을 길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고 한다. 성 알베르투스 만큼 전 시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주교는 여태껏 없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제노
- 가톨릭 성인 이름
Zen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제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제노 자료
성 제노가 언제 어디서 순교했는지는 모르지만, 소문에 의하면 산 채로 불태워졌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제랄도
- 가톨릭 성인 이름
Geral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095년 소브 마외르
제랄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랄도, 게랄두스, 게랄드, 게럴드, 제랄두스, 제랄드, 제럴드.
제랄도 자료
성 게랄두스(Geraldus, 또는 제랄도)의 출생지는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ie)의 코르비(Corbie)이며, 그는 이곳에 있는 대수도원의 첫 번째 수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고통으로 늘 고생하였는데, 이 신경통이 일생동안 그를 괴롭혔다. 어찌나 심했던지 어느 날 밤에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또 이성을 잃을 때도 있었다. 더욱 나쁜 것은 기도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원장은 그를 로마(Roma)에 보내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사도들의 무덤을 참배하면서 차츰 차츰 병이 나아갔다. 그래서 그는 성 레오 9세(Leo IX, 4월 19일) 교황으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 모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와 고행에만 전념함으로써 놀라운 성덕을 쌓았다. 어떤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내려오시어 그에게 다가 오는 환시를 보기도 하였다.
이때 그는 예루살렘 순례를 결심하였다. 그는 이 순례에서 돌아와서 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수도원의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잡는데 헌신하는 한편 새 수도원을 여러 곳에 세웠다.
1079년 소브 마외르에 수도원을 세우고 원장이 된 그는 이곳을 중심으로 각 지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도록 하였다.
그는 회원이 사망하면 그 영혼을 위해 30일 동안 미사를 봉헌토록 하였고, 또 그 영혼을 위하여 일 년 동안 바치는 빵과 포도주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도록 규정하였다.
후일 이 규정은 완화되었지만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아름다운 풍습이 되어 전해온다. 그는 1197년 코일레스티누스 3세(Coelestinus III, 또는 첼레스티누스)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프로보
- 가톨릭 성인 이름
Prob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프로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쁘로보, 쁘로부스, 프로부스.
프로보 자료
성 프로부스(또는 프로보)와 성녀 그라체(Grace)는 전통적으로 웨일스(Wales) 출신의 남편과 아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콘월(Cornwall) 지방에 있는 트레실리아누스(Tressilianus) 또는 프로부스 성당은 이 부부에게 봉헌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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