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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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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순이 루갈다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順伊 Lutgarda - 신분과 직업
양반, 동정 부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2-1802년 한국
이순이 루갈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갈다, 누갈따, 루갈따, 루트가르다, 루트가르디스, 룻가르다, 룻가르디스, 이 루갈다, 이루갈다.
이순이 루갈다 이야기
‘유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순이(李順伊) 루트가르디스(Lutgardis, 또는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1802년에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와 1827년에 순교한 이경언 바오로는 그녀와 남매 사이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 요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이 루갈다의 부친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학자 이익의 외손으로, 그의 학문을 이어 오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부친은 처남인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승훈 베드로 등과 어울리다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이 루갈다의 모친도 자연스럽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자신이 배운 교리를 어린 그녀에게도 가르쳐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 루갈다는 일찍부터 어머니에게 글도 배웠다.
179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이 루갈다는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가면서 오로지 영혼을 구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리고 1795년에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로부터 첫영성체를 하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나흘 동안을 집 안에 들어앉아 처음으로 성체를 모시기 위한 교리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루갈다는 오로지 성체를 잘 모시고 덕행을 쌓는 데에만 마음을 쏟았다. 그리고 천상배필을 위해 동정을 지키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회 안에서는 처녀가 혼인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5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이 루갈다는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는 매우 놀랐지만 딸의 선택을 허락해 주었고, 주 야고보 신부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때 주 신부의 머리에는 동정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전주에 살고 있는 유중철 요한이 떠올랐으며, 이에 곧장 사람을 보내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다.
1798년 10월 이 루갈다는 남편의 고향인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로 가서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남편 유 요한이 동정 서약을 어기려고 할 때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었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이 루갈다가 살던 초남이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때 그들은 이 루갈다의 시아버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를 가장 먼저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하였고, 이어 그녀의 남편 유 요한도 체포하여 전주로 끌고 갔다.
이 루갈다는, 그해 9월 중순경에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전주로 끌려간 그녀는 함께 갇혀 있는 가족들을 위로하며 순교의 길로 나아가자고 권면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이 루갈다가 옥중에서 언니들에게 보낸 서한에 들어 있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를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뜻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잊혀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神樂)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 뒤, 전주 관장은 이 루갈다와 그녀의 친척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곧바로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이 루갈다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녀가 친척들을 대표하여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 루갈다가 친척들과 함께 유배지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쫓아와 그들을 다시 체포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이제 순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간 이 루갈다는,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루갈다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으며, 4-5일 뒤에는 형벌에 의한 상처가 말끔하게 나았다고 한다.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순이 루갈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라고 불리는 전주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이순이 루갈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다.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루갈다
- 세례명 축일
6월 16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Lutgardis - 신분과 직업
수녀, 신비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182-1246년 통에런
루갈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갈다, 누갈따, 루갈따, 루트가르다, 루트가르디스, 룻가르다, 룻가르디스.
루갈다 이야기
성녀 루트가르디스(또는 루갈다)는 1182년 오늘날의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에 속한 림뷔르흐(Limburg) 지방의 통에런(Tongeren)에서 부유한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한 귀족 청년과 혼인하기로 하였으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지참금을 마련할 수 없게 되자 파혼을 당했다.
그래서 성녀 루트가르디스는 12살의 나이에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생트롱(Saint Trond) 부근 성녀 카타리나(Catharina)의 검은 베네딕토 수도회(Black Benedictine convent of Saint Catherine)로 보내졌다. 수도 생활에 특별한 성소가 있지는 않았지만, 지참금이 없다는 사실은 적당한 남편을 찾을 희망을 버리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옷과 천진난만한 즐거움을 좋아하던 아리따운 소녀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체험한 뒤 자신의 삶의 행로를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는 그녀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당신만을 사랑할 수 있는지 물으셨다. 그녀는 즉시 예수님을 자신의 신랑으로 맞이했고, 20살이 되는 해에 베네딕토회의 수녀가 되었다. 다른 많은 수녀들은 성녀 루트가르디스에게 생긴 갑작스러운 열정이 얼마 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져만 갔다.
성녀 루트가르디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현존은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에 기도를 시작하면 육신의 눈으로 보듯이 예수님을 보았다. 어떤 일이 주어지면 “주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일을 끝내자마자 다시 돌아올게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 후 12년 동안 다수의 환시를 경험했고, 그 환시를 통해 주님과 성모님 그리고 다수의 성인을 뵙게 되었다.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할 때엔 이마와 머리에서 피가 맺혀 흐르기도 했다.
성녀 카타리나 수도원의 수녀들이 그녀를 원장으로 추대하고 싶었지만, 성녀 루트가르디스는 1208년 그 수도원을 떠나 더 엄격한 규칙이 있는 곳을 찾아 브뤼셀(Brussel) 근처 에비에르(Aywieres)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수도원을 선호했을 법도 한데 그녀는 자신의 고해 사제와 당시 성 카타리나 수도원 근처에 살고 있던 성녀 크리스티나(Christina, 7월 24일)의 권고를 받아들여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수도원에 들어간 것이다. 이는 훗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수도원에서 그녀가 프랑스어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수녀원장직을 피하는 좋은 핑계가 되었다.
그곳에서 오직 빵과 물로만 지내며 극기 생활을 하던 성녀 루트가르디스는 당시 기승을 부리던 알비파 이단을 위한 보속으로 7년 동안 3번이나 대재를 지켰다. 또 그녀는 에비에르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30년을 살며 영적 슬기로움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치유와 예언의 은사를 주셨고, 성경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넣어주셨다. 그래서 불완전한 프랑스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영적 지도에 있어서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성녀 루트가르디스는 특히 기도에 열중했는데, 그녀의 기도는 신비롭게 이루어지는 일이 많았다. 그중의 한 예가 동정심이 없던 한 수도원 원장이 죽자 성녀 루트가르디스는 그가 천국에 들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그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는데, 어느 날 수도원장이 나타나 그녀의 기도 덕분으로 연옥의 고통을 크게 덜게 되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라진 일이 있었다.
또한 예수님은 당신의 심장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자주 성녀 루트가르디스에게 발현하셨는데,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묵상은 그녀의 수도 생활의 핵심 주제였다. 성녀 루트가르디스는 1235년부터는 시력을 완전히 잃어 생애의 마지막 11년을 앞을 보지 못한 채 지내야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가시적인 세계에서 자신을 떼어놓고자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기쁜 선물로 생각하며 모든 고통을 참아냈다.
예수님께서는 성녀 루트가르디스에게 나타나셔서 언제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그렇게 받은 선물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 후 죄인의 회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을 영원히 마주 뵐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만 의지하였다. 성녀 루트가르디스는 자신이 예언한 대로 1246년 6월 16일 삼위일체 대축일 저녁기도가 끝나고 끝기도가 시작되려는 시간에 64세로 선종하였다.
성녀 루트가르디스의 일생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가치관에 큰 징표를 남겨 주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라는 말씀대로 살았다. 그녀는 12-13세기의 뛰어난 신비가 중 한 명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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