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지타, 호산나, 총 2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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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4월 27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2가지
4월 27일 여자세례명 목록
1. 지타
- 가톨릭 성인 이름
Zit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녀, 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218-1272년
지타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시따, 시타, 자이트, 지따, 치따, 치타.
지타 자료
성녀 지타는 1218년 이탈리아 중북부 토스카나(Toscana) 지역의 루카(Lucca) 근처에 있는 몬사그라티(Monsagrati)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가난하지만, 신심 깊은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특히 어머니의 보살핌과 신앙 교육으로 인해 그녀가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12살의 어린 나이로 루카의 파티넬리(Fatinelli) 가문의 하녀가 된 그녀는 그곳에 평생 머물며 48년 동안 하녀로 일하였다. 성녀 지타는 집안일을 열심히 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노동을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일종의 보속 행위로 생각해 오히려 자신이 하녀로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하느님의 축복으로 생각했다.
주인 부부에게 진심으로 순명하고 자주 금식하며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음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평소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기도하고 노동하며 고행을 실천하면서 처음에는 주인 부부는 물론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로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주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주인 부부도 성녀 지타에 대해 큰 신임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를 하인들의 책임자로 세웠고, 그녀는 주인과 하인들 사이에서 하인들의 질서를 유지하는 동시에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대변자가 되었다. 그 뒤 주인 부부가 그녀에게 많은 재산을 주었지만, 그녀는 그 또한 자선사업을 위해 사용하였다.
성녀 지타는 가난한 사람들과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었고, 때때로 기적 같은 일도 일어났다고 한다. 어느 날 주인이 식사 후 남긴 빵 조각을 앞치마에 담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는데, 마치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의 이야기처럼 주인이 질책할 때 그 빵 조각이 장미꽃으로 변했다고 한다.
평소 신앙심이 깊었던 그녀는 기도 중에 자주 탈혼 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탈혼에 빠져 있는 동안 천사가 와서 그녀가 하던 빵 굽는 일 등을 대신했다고 한다. 성녀 지타는 자기 죽음이 가까웠을 때 고통 속에서 자신이 죽을 날짜를 미리 알았고, 임종할 날이 되자 자청하여 병자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1272년 4월 27일 55세의 나이로 루카에서 선종하였다. 그녀의 무덤은 300여 년이 지난 1580년 파티넬리 가문 저택 옆에 있는 산 프레디아노(San Frediano) 성당에서 발견되었다.
그녀가 선종하자 루카 지역을 중심으로 그녀를 공경하는 풍습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영국까지도 전해졌다. 영국에서는 성녀 지타를 시타(Sitha) 또는 치타(Citha)로 불렀고, 특히 가사를 담당하거나 집사 일을 보던 이들이 열쇠를 찾거나 강이나 다리를 건널 때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녀가 선종한 후 그녀와 관련해서 교황청에서 인정한 기적만 해도 150여 건이 넘었다고 한다. 이미 1278년부터 루카의 주교가 그녀에 대한 공개적인 공경을 허락했고, 그 후 몇 차례 그녀의 관을 공개할 때마다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1696년 9월 5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는 성녀 지타의 시성식을 거행하고 그녀에 대한 공경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였다. 그리고 1748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는 성녀의 이름을 “로마 순교록”에 기록하였다.
성녀 지타는 1953년 9월 26일 하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교회미술에서 주로 하녀 복장을 하고 열쇠 꾸러미와 물 항아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호산나
- 가톨릭 성인 이름
Hosanna - 호칭 구분
복녀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493-1565년 카타로
호산나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오산나.
호산나 자료
카타리나 코지에(Catharina Cosie)는 몬테네그로(Montenegro)의 쿠마노(Kumano)에서 그리스 정교회 신자인 부모의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양치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장성한 그녀는 부모의 허락을 받고서 카타로(오늘날 몬테네그로의 코토르 Kotor)에 있던 어느 가톨릭 부인 단체에 가입하여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7년 뒤 카타리나 코지에는 은둔생활을 시작하면서 성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aeus) 성당과 인접한 곳에 움막을 지었다. 그 후 성 바오로(Paulus) 성당 부근 움막으로 옮겼다가 도미니코회 3회원이 되면서부터 자신의 이름도 만투아(Mantua)의 복녀 호산나를 따라서 호산나 안드레아시(Hosanna Andreassi)로 개명하였다.
많은 처녀와 과부들이 그녀로부터 기도와 영적 가르침을 얻기 위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호산나가 그들의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그곳의 주민들은 터키인과 다른 침략자들이 호산나의 기도의 힘으로 물러갔다고 믿고 있었다. 그녀가 받은 무수한 초자연적 은혜 중에서 예언의 은혜가 가장 빛난다.
그녀는 약 2개월에 걸친 중병 끝에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928년 승인되었고 이어 1934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녀는 오산나(Osanna)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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