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리카르도 팜푸리, 마르쿨프, 브리옥, 시지스문도, 아마토르, 아사포, 안데올로, 알데브란도, 예레미야, 오렌시오, 오리엔시오, 테오다르도, 페레그리노 라치오시, 총 13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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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3가지
5월 1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리카르도 팜푸리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Pampur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897-1930년
리카르도 팜푸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팜푸리 자료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Richardus Pampuri, 또는 리카르도)는 1897년 8월 12일 이탈리아의 파비아(Pavia) 근처 트리볼지오(Trivolzio)에서 태어났다. 안젤라 팜푸리(Angela Pampuri)와 인노첸테 필리포(Innocente Filippo)의 11남매 중 10번째 태어난 에르미니오(Erminio)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세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인근 마을에 사는 이모 집에 맡겨졌는데 7년 후인 1907년에 아버지 또한 밀라노(Milano)에서 돌아가셨다. 그는 인근에 있는 두 곳의 초등학교를 다녔고 밀라노로 가서 중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파비아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1915년 파비아 대학의 의대에 들어갔다.
그는 1915년과 1920년 사이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하사관과 의무병으로 근무했다. 1921년 7월 6일 파비아 대학의 약학과와 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의사로 있던 삼촌 밑에서 3년간 의료 실습을 마친 후 밀라노의 한 병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들을 돌보던 그는 그리스도교 사도직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사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선교사제가 되고 싶었지만 건강 문제 때문에 단념했었다. 젊은 시절 어느 곳을 가던지 그리스도교적 덕행의 모범이었던 그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복음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고백하고 너그러움과 열정을 갖고 자선사업을 실천했었다.
바쁜 일정 중에도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열심히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성모님께 대한 깊은 신심으로 하루에 한 번 이상 묵주기도를 바쳤고, 파비아 대학 가톨릭 액션 단체의 근면한 회원이었으며,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와 작은 형제회의 3회원으로도 활동했다.
소년 시절부터 가톨릭 액션 단체에 참여했던 그는 실습을 위해 모리몬도(Morimondo)에 갔을 때 본당 신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음악 밴드와 가톨릭 액션 젊은이 단체를 조직하여 그 첫 번째 대표로서 성 비오 10세(Pius X)의 전구 아래 두 단체를 두었다.
그는 또한 본당의 선교 후원회의 간사를 맡기도 했고 자비를 들여 청년 모임과 농민과 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정기 피정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의사로서 유능하며 자비로운 그는 환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의술을 베푸는 데 있어서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약과 돈 그리고 음식과 이불을 가져다주곤 하였다. 그의 자선사업은 모리몬도 근교의 도시 근로자들과 이웃의 손길이 필요한 노인들에게 퍼져나갔고 다른 마을과 도시로도 확산되었다.
6년 동안 의사로 일한 그는 수도원에 입회하고자 했고, 이에 ‘거룩한 의사’를 잃을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슬픔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컸고 지역 신문에서까지 기사화하였다. 그는 결국 1927년 6월 22일 밀라노의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에 입회하여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자신의 의학기술을 지속하고 동시에 복음적 거룩함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을 택하였다.
그는 리카르두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브레시아(Brescia)에서 지원기를 마치고 1928년 10월 24일 서원을 하였다. 서원 후 그는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브레시아의 천주의 성 요한 병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에서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 수사는 아름다운 자선을 실천하여 모든 이의 존경을 받았다. 수도자로서 그의 삶은 수도회에 입회하기 전에도 그랬듯이 동료, 환자, 의사, 진료 보조원, 간호사, 그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덕과 자선의 탁월한 모범이었다.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 얻은 병으로 인해 일종의 폐병을 앓고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었다. 밀라노로 치료를 받으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030년 5월 1일 33살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는 ‘자신의 전문지식을 자비의 사명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아는 의사로서, 자신 안에 천주의 성 요한의 진정한 아들로서의 카리스마를 살았던 수도자로서의 기억을 남기고’ 하느님께로 돌아간 것이다. 그의 시신은 고향에 돌아와 묻혔으며 그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졌다.
그는 1981년 10월 4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는데 이날 강론에서 교황은 이렇게 말하였다.
“짧지만 열정적인 삶을 산 리카르두스 팜푸리 수사는 모든 하느님 백성에게 자극이 되는데 특히 젊은이와 의사, 수도자들에게 큰 자극이 된다. 그는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인생을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기쁘고 용기 있게 살도록 초대하며,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가르침을 따라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에 스스로를 헌신하도록 초대한다.”
그는 1989년 11월 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르쿨프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ulf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558년 낭퇴이
마르쿨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꿀, 마르꿀프, 마르쿨.
마르쿨프 자료
마르쿨(Marcoul)이라고도 불리는 성 마르쿨프는 프랑스 바이외(Bayeux)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서 30세 때에 쿠탕스(Coutance) 교구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처음에 그는 교구 내의 선교사로서 일했지만, 항상 고독한 생활과 하느님과의 보다 친밀한 일치생활을 동경한 나머지 어떤 외딴 섬으로 은거하여 은수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 얼마 후 그는 국왕 힐데베르트(Childebert)로부터 노르망디(Normandie) 지방 낭퇴이유의 거대한 토지를 하사받아 큰 공동체로 발전시켰다. 그는 어떤 이들은 은수자로 또 어떤 이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도록 안배하였다.
그의 제자 가운데서 성 도마르두스(Domardus)와 성 카리울푸스(Cariulfus)가 가장 유명하다. 성 마르쿨프는 피부병을 앓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브리옥
- 가톨릭 성인 이름
Brioc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510년경 브르타뉴
브리옥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브리오꼬, 브리오꾸스, 브리오코, 브리오쿠스, 브리외.
브리옥 자료
성 브리옥은 웨일스(Wales)의 카디건셔(Cardiganshire)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의 트레귀엘(Treguier) 수도원의 설립자로 그 도시는 오늘날 생브리외(Saint-Brieuc)로 불린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세르푸스(Cerpus)와 어머니 엘드루드(Eldrude)는 아들의 사제 수품 뒤에 개종했다고 한다. 그는 브르타뉴로 이주하기 전에 영국의 남서 지방에서 활동하였으며, 콘월(Cornwall) 지방에 세인트 브리옥(Saint Breock)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중세의 성 브리옥의 전기에는 다수의 특별하고 놀라운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역사적으로 그 근거는 희박하다. 예를 들어 브리옥이 프랑스 오세르(Auxerre)의 성 게르마누스(Germanus, 7월 31일) 주교에 의해 훈련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성 게르마누스 주교는 448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야기이다.
성 브리옥은 유명한 그랑드 란(Grande-Lann) 성당을 지어 좋은 평판을 얻었으며 다수의 제자들을 모았다. 트레귀엘(Treguier)에서 부유한 귀족 코난(Conan)을 개종시켰으며, 그 귀족은 아르모리카(Armorica) 북부의 수도원의 건설을 후원하였다.
그런 후 성 브리옥은 영국 땅으로 되돌아와서 그의 친척인 돔노니아(Domnonia)의 리갈드(Rigald) 왕자의 후원을 받아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성당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1210년에 지어진 성 브리옥 성당의 대리석판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그는 주교로 호칭되었는데 그가 주교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아마도 그는 켈틱 전례의 대수도원장이었으며 수하에 주교를 두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844년까지 기록된 어떠한 전설도 그의 후계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 브리옥의 유해는 9세기 중엽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 앙제(Angers)에 있는 성 세르기우스(Sergius) 대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성 헨리쿠스 2세(Henricus II, 7월 13일)가 1166년에 유해의 이동을 증명했다. 1210년에 팔과 갈비뼈 2개와 경부의 뼈는 성 브리옥 성당으로 되돌아갔다.
교회 미술에서 성 브리옥은 불타는 기둥 밑에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는 트레귀엘과 브르타뉴 그리고 콘월 지방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또 그의 엄청난 자선 활동에 대한 전설 때문에 기부금을 조성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불려진다. 그는 브리외(Brieuc) 또는 브리오쿠스(Brioc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시지스문도
- 가톨릭 성인 이름
Sigismun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23/558년? 부르고뉴
시지스문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시지스문두스.
시지스문도 자료
프랑스 남동부와 스위스의 남서부는 부르고뉴 왕의 휘하에 있었고, 그 당시의 통치자는 아리우스파(Arianism)에 속한 군네발드(Gunebald)였다. 그가 죽기 전 왕위를 계승한 아들 성 시지스문두스(Sigismundus, 또는 시지스문도)는 그 후 정통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이것은 비엔(Vienne)의 주교 성 아비투스(Avitus, 2월 5일)의 노력 때문이었다. 한때 그는 전쟁에서 패한 뒤에 은수자 생활을 하며 생모리스(Saint-Maurice) 수도원을 세웠으나 결국은 체포되어 오를레앙(Orleans)으로 끌려갔다.
성 아비투스가 중재하였으나 프랑스 국왕은 그를 처형하고 우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의 유해는 나중에 발굴되어 보헤미아(Bohemia)의 프라하(Prague) 주교좌 성당에 안장되었고,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게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아마토르
- 가톨릭 성인 이름
Amat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18년 오세르
아마토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마또르, 아마똘, 아마톨.
아마토르 자료
오세르의 최고 명문가의 외동아들인 성 아마토르는 마르타(Martha)라는 처녀와의 결혼식에서 그의 장래를 예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즉 그 결혼식을 주례한 발레리아누스 주교는 모든 예식을 마치고 혼인 축복 기도문을 외우는 대신에 부제 서품식 때의 기도문을 바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부는 결혼식을 하자마자 서로 동정을 지키자고 약속한 뒤 마르타는 수녀원으로 들어갔고, 아마토르는 얼마 뒤에 사제가 된 후 오세르의 주교로 착좌하였다.
믿을만한 근거에 의하면 그는 성 게르마누스(Germanus, 7월 31일)를 자신의 후계자로 정하고 주교품을 주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아사포
- 가톨릭 성인 이름
Asap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00년경 웨일스
아사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사, 아사푸스, 아사프, 아삽.
아사포 자료
성 아사푸스(Asaphus, 또는 아사포)는 영국 웨일스 지방의 첫 번째 주교였다. 그는 홀리웰(Holywell) 부근에서 은수자로 살았다고 믿어진다. 그는 또한 성 켄티게른(Kentigern, 1월 13일)의 생애에서 등장한다.
그는 젊었을 때 성 켄티게른을 모셨다. 어느 날 성 켄티게른이 불을 붙이기 위해 나무를 좀 가져오라고 하자, 성 아사푸스는 자신의 앞치마에 불타고 있는 석탄을 담아왔다. 이 일로 성 켄티게른은 그의 거룩함을 깨닫게 되었다.
573년 성 켄티게른이 그 지역을 떠날 때 성 아사푸스는 주교로 축성되었다. 성 아사푸스는 성 다니엘(Daniel, 9월 11일)과 성 티실리오(Tysilio, 11월 8일) 그리고 성인으로 존경받는 다른 여러 사람들과 관계가 있었다.
그에 대한 여러 전설에 따라 중세의 저술가들이 성 아사푸스의 덕을 찬양하며, 놀라운 기적으로 많은 이들을 개종시켰다고 전하였다. 그는 아사프(Asaf) 또는 아사(Asa)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안데올로
- 가톨릭 성인 이름
Andeo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차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08년 스미르나
안데올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데올루스.
안데올로 자료
스미르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 Izmir)의 차부제인 성 안데올루스(또는 안데올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2월 23일) 주교에 의해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그의 행전에 의하면 그는 세베루스의 명에 의해 프랑스 론(Rhone) 강 유역 비비에르(Viviers)에서 참수를 당해 순교하였고, 그곳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알데브란도
- 가톨릭 성인 이름
Aldebrand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219년 포솜브로네
알데브란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데브란두스, 힐데브란드, 힐데브란트.
알데브란도 자료
이탈리아 체세나(Cesena) 부근 소리볼리(Sorrivoli)에서 태어난 성 알데브란두스(또는 알데브란도)는 리미니(Rimini)에서 주임사제가 되었다.
그는 당대의 유해하고 타락한 영향에 반대하는 강론을 많이 했다. 그의 강론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샀고 결국 성난 군중들을 피해 잠시나마 피해야 했다.
1170년에 그는 포솜브로네의 주교가 되었고 그곳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힐데브란트(Hildebrand)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예레미야
- 가톨릭 성인 이름
Jeremia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구약인물, 예언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50-588년 BC
예레미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예레미아, 예레미아스, 제레미.
예레미야 자료
성 예레미야(Jeremias)는 구약성서 예언서 중 하나인 예레미야서의 저자이다. 만일 성서에 이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는 그 종교적 본질을 아주 달리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마음과 인격의 종교를 주창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보다 1세기 뒤에, 그러니까 기원전 650년경 예루살렘 근교의 어느 사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성서는 예레미야의 생애와 성격을 그 어느 예언자들 보다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예레미야를 3인칭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들이 성서에 다수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 그러니까 요시야 왕 치세 제13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젊은 예언자로 나섰다(예레 1,2). 그는 유대왕국의 멸망이 예견되었고 드디어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초래한 비극적 시대를 살고 있었다. 요시야왕의 종교개혁과 주권회복은 유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609년에 그 왕이 므기토에서 전사하게 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고대 중동의 세계는 또다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으니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612년에 함락됨으로써 바빌론제국이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은 팔레스티나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집트는 유대왕국을 사주하여 바빌론의 지배에 항거하도록 하였으니, 느브갓네살은 59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하였고 주민의 일부를 유배지로 끌고 갔다.
이집트의 조종에 끝내 놀아난 유대는 또다시 바빌론 세력에 항거하였다. 587년에 바빌론 군대는 한 번 더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깡그리 파괴하였고 저항세력의 지도자들을 또다시 유형지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는 이 어두운 시대의 역사적 비극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가 이 비극을 좌시한 것은 아니었다. 예언자는 지도자와 민중에게 하느님 말씀의 대변자로 나서서 맹렬히 설교했고 위협했으며 왕국의 몰락을 예고했던 것이다.
다윗의 왕좌를 차지했던 유대의 왕들은 예언자의 이 불칼 같은 경고를 아예 무시했으며 또 군인들은 예레미야가 패배주의를 선동한다고 비난하며 그를 박해하고 고문하며 투옥시키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강기슭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시편 137)에게서 희망을 보았지만 망명하는 것을 끝내 거부하고 고국 땅 팔레스티나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그의 보호자는 바빌론인들이 임명한 총독 게달리야였다.
하지만 유태인의 한 무리가 총독을 암살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은 바빌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레미야를 인질로 삼아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집트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 것 같다.
이 험난한 운명의 사나이의 드라마는 단순히 사건들만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전 생애가 일종의 비극이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끝까지 그 말씀에 충실하다 보니, 예레미야는 그야말로 ‘말씀의 고독한 예언자’가 되고만 것이다.
그는 성품이 온순했고 사랑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야훼는 그에게 ‘무너뜨리고 파괴하며 전복하고 없애버리는’ 사명(1,10)을 주셨다. 그의 예언은 끝없는 불행만을 예고하였다(20,8). 예레미야는 평화를 원했건만 자기 가족과 왕들과 사제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과 모든 민중을 반대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예레미야는 “온 나라 안에서 싸움과 불화의 사나이로 통한 것”이다(15,10). 그가 이 같은 사명을 수행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예레미야는 말씀에 의해 완전히 가루가 될 뻔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20,9). 하느님과의 내적인 대화는 온통 고통의 외침이었다.
“무엇 때문에 나의 고통은 끝이 없나이까?”(15,18) 욥의 저주를 예고한 예레미야의 그 외침은 고백론의 절정이다. “내가 태어난 그날은 저주받을지어다!”(20,14 이하).
하지만 이 고통은 예레미야의 영혼을 정화시켰으니 하느님과의 내밀한 친교를 가능케 하였다. 우리에게 이 예언자가 그토록 귀중하고 가까운 인물로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계약을 성문화시켜 예고하기에 앞서(31,31-34) 자신이 먼저 마음의 종교와 내적인 종교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인격적 종교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심화시켰다. 하느님은 마음과 콩팥을 꿰뚫어 보시는 분(11,20)이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분이다(31,29-30). 하느님과의 우정은 인간의 거짓스러운 마음의 소산인 죄에 의해 끊어진다.
거짓말이 모든 죄의 뿌리란 것을 예레미야만큼이나 강조한 사람은 없다(4,4; 17,9; 18,12). 이 점에 관한 한 예레미야는 호세아 예언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율법은 그에 의해 내면화되었으며 또 하느님과의 모든 관계는 마음의 소산임을 그가 밝혔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인간의 개인적 인격에 큰 관심을 둔 것으로 보아 신명기(申命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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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가 신명기에 바탕을 둔 요시야왕의 개혁을 처음에는 환영하였으나 마음의 회개가 없는 제도적 개혁이 무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민중의 윤리적 종교적 삶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내적 인간의 개조 없이는 불가능함을 예레미야가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사명은 살아생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으나 죽은 뒤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마음의 종교에 기초를 둔 ‘새로운 계약의 사상’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유다이즘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우리는 에제키엘서와 제2 이사야서(40-55)와 시편들에서도 그의 영향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마카베오 시대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민족의 수호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꼽았다(2마카 2,1-8; 15,12-16). 예레미야는 힘과 물질보다는 영성적 가치를 더 중대시하였고 또한 영혼이 하느님과 맺은 내밀한 관계를 밝혔다 하여 이 예언자는 그리스도교의 새 계약을 준비한 인물로 통한다.
말씀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과 말씀 때문에 당한 그의 고통은 이사야서 53장의 야훼의 종의 모습을 예고하였으니,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형상(形象)을 앞질러 보여 준 것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오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Ore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40년
오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오렌시우스, 오렌씨오, 오렌씨우스, 오렌티오, 오렌티우스.
오렌시오 자료
성 오렌티우스(또는 오렌시오)와 성녀 파티엔티아(Patientia)는 에스파냐 아라곤(Aragun) 북부 지방 우에스카(Huesca) 근교에서 살던 부부로 신앙 때문에 순교하였다. 고대 에스파냐의 전승은 그들을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8월 10일)의 부모로 생각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오리엔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Orie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39년 오슈
오리엔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오렌시오, 오렌시우스, 오렌씨오, 오렌씨우스, 오렌티오, 오렌티우스, 오리엔시우스, 오리엔씨오, 오리엔씨우스, 오리엔티오, 오리엔티우스.
오리엔시오 자료
성 오리엔티우스(또는 오리엔시오)는 프랑스 남서부 타르브(Tarbes) 인근 라벤단 계곡에서 은수자로 남고자 했으나 오슈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목자가 되어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마지못해 주교가 되었다. 그는 40년 이상 오슈 교구를 다스렸다. 그는 오렌티우스(Orenti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테오다르도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dar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893년 나르본
테오다르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떼오다르도, 떼오다르두스, 테오다르두스.
테오다르도 자료
프랑스 몽토방(Montauban) 태생인 성 테오다르두스(Theodardus, 또는 테오다르도)는 툴루즈(Toulouse) 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 생활을 하던 중 툴루즈 대주교의 명에 따라 나르본의 시제볼드(Sigebold) 대주교의 부제가 되었다. 그리고 시제볼드 대주교의 서거 후에는 그가 나르본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사라센인들의 침략으로 인해 물질적, 영성적으로 황폐화된 주교좌를 복구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았다. 또한 사라센인들에게 잡혀 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석방시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페레그리노 라치오시
- 가톨릭 성인 이름
Peregrine Lazios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260-1345년
페레그리노 라치오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찌오시, 뻬레그리노, 뻬레그리누스, 페레그리누스, 페레그린.
페레그리노 라치오시 자료
이탈리아 포를리(Forli)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성 페레그리누스 라치오시(Peregrinus Laziosi, 또는 페레그리노 라치오시)는 젊어서 한때는 로마냐(Romagna)의 반 교황당에서 적극 활동하다가 성 필리푸스 베니티우스(Philippus Benitius, 8월 23일)를 만나면서부터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는 시에나(Siena)의 ‘마리아의 종 수도회’에 입회하여 고향으로 갔으며 그곳에 수도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설교, 고행, 성덕 그리고 고해신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의 발에 있던 암이 기적적으로 치유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암환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그는 1702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726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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