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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5일 남자세례명 14가지

피어나네 2023. 1. 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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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5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마우로, 마카리오, 막시모, 미카, 바오로, 베드로, 보니토, 아놀드 얀센, 에메베르토, 에피시오, 요한 칼리비타, 이시도로, 체올울프, 하바쿡, 총 14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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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5일 여자세례명 니노, 세쿤디나, 이타, 타르시치아, 총 14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월 15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4가지

 

 

 

 

1월 15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마우로

  2. 마카리오

  3. 막시모

  4. 미카

  5. 바오로

  6. 베드로

  7. 보니토

  8. 아놀드 얀센

  9. 에메베르토

  10. 에피시오

  11. 요한 칼리비타

  12. 이시도로

  13. 체올울프

  14. 하바쿡

 

1월 15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4가지

 

 

1. 마우로

 

  • 가톨릭 성인 이름
    Mau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580년경 수비아코

 

 

마우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오로, 마우루스.

 

 

마우로 자료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가 돌보던 그의 영적 아들 가운데 신심과 학덕이 뛰어난 인물로 성 마우루스(또는 마우로)가 있었다. 그가 처음에 성 베네딕투스에게 왔을 때에는 겨우 12살의 어린 나이였으나, 마침내 그 성인의 보조자가 될 만큼 성장하였다.

 

한 번은 성 플라키두스(Placidus, 10월 5일)가 호수에 빠졌는데 성 베네딕투스 성인이 그의 방에서 영적인 눈으로 이 사실을 알고는 성 마우루스에게 명하여 그를 구하게 하였다. 성 마우루스가 그 공로를 그의 스승 성 베네딕투스에게 돌리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순종의 은혜를 주셨다고 한다.

 

성 베네딕투스가 몬테카시노(Monte Cassino)로 갔을 때 성 마우루스가 수비아코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원장직을 사임하고 은수생활을 선택하였는데, 2년 뒤에 병을 얻어 운명하였다.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성당의 제대 오른쪽에 안장된 성 마우루스는 오늘날 성 베네딕투스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베네딕토회의 훌륭한 설립자로 간주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카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Mac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0-390년 이집트

 

 

마카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까리오, 마까리우스, 마카리우스.

 

 

마카리오 자료

이집트 출신인 성 마카리우스(또는 마카리오)는 젊어서 가축을 돌보고 지냈으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식하여 세속을 등지고 조그마한 움막에 혼자 살면서 매트를 만들며 기도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 부인을 폭행했다는 누명이 씌어지자 그는 길거리로 끌려 나가 매를 맞는 등 온갖 수모를 당하였다. 결국 그는 모든 시련을 인내한 뒤에야 혐의가 풀려 무죄함이 드러났다.

그 후 그는 30세 때에 스케트 사막으로 들어가 은수생활을 시작하였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의 생활은 극히 엄격하여 한 주일에 한 번의 식사만 했고, 일부러 갈증을 느끼기 위해 물을 마시지도 않았다. 그는 항상 간단한 몇 마디로 제자들을 가르쳤고 거의 침묵 속에서 지냈다.

 

“기도할 때에는 많은 말을 하지 말라. 다만 주님, 제게 자비를 베푸시고, 인도해 주소서 하는 말만 마음으로 되풀이 하여라.”

 

한때 그의 제자였던 젊은 성 마카리우스(1월 2일)와 함께 그는 나일 강의 어느 섬으로 추방된 적이 있었는데, 결국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스케트 사막에서만 60년을 살다가 운명하였으며, 사막에 살았던 최초의 은수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막시모

 

  • 가톨릭 성인 이름
    Maxi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250년경 놀라

 

 

막시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막시무스, 막씨모, 막씨무스.

 

 

막시모 자료

시리아인으로서 로마 군인이던 헤르미아스(Hermias)의 아들로 태어난 성 펠릭스(Felix, 1월 14일)는 이탈리아의 남부 나폴리(Napoli) 교외인 놀라에서 자랐다.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놀라의 성 막시무스(또는 막시모)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성 막시무스의 보좌로 활약하다가 그의 스승이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사막으로 갔을 때 스승 대신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한 천사의 인도를 받고 감옥 문을 나섰다고 한다.

데키우스 황제 사후에도 성 펠릭스는 수배 인물이었으나 박해가 종식될 때까지 피신하는데 성공하였다. 성 막시무스 주교가 서거했을 때 신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주교로 모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연로한 사제이던 퀸투스(Quintus)에게 기울어지자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무덤은 즉시 많은 기적이 일어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성 바울리누스(Paulinus, 6월 22일)가 놀라의 주교가 되었을 때 그의 선임자인 성 펠릭스에 대한 자료들을 많이 보완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미카

 

  • 가톨릭 성인 이름
    Mica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구약인물, 예언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세기BC

 

 

미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미가, 미카이아스, 미캐아스, 미케아스.

 

 

미카 자료

성 미카(Michaeas)는 구약성서 12소예언서 가운데 한 권인 미카서의 저자로, ‘미카’는 ‘미카후’의 축소형으로 ‘누가 야훼와 같으나?’라는 뜻으로 구약에서는 흔한 이름이다.

 

예언자 미카의 신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른 예언자들의 경우 통례로 되어 있는 아버지 이름이 생략되어 있고 단지 그의 고향인 유대의 조그마한 촌락 모레셋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1,1).

심판을 선포하는 사명을 띠고 온(3,8) 유대 출신의 예언자 미카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사제들과 직업 예언자들의 부정을 비난하였으며, 사회적 · 경제적 불의를 신랄하게 고발하였다. 또한 그는 아모스의 정의와 호세아의 사랑을 지닌 예언자였다.

 

그가 활동했던 1세기 후에 유대의 원로들은 “모레셋 출신 미카가 유대 임금 히즈키야 시대에 예언하였다”(예레 26,18)라고 증언하였고 그의 활동을 들어 예레미야를 변호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컸으며, 히즈키야의 종교 개혁도 미카의 예언을 통하여 깊은 영향을 받았다.

 

직업 예언자들과는 달리 세련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한 미카는 사회 정의를 선포한 예언자일 뿐만 아니라 지배 계층에 대하여 소농(小農)들의 권리를 주장한 농촌 예언자로 알려져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30?-342년경 테베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바오로 자료

성 바오로(Paulus)는 이집트의 테베(나일강 중류에 있는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에서 부유한 그리스도인 부모에게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앙교육과 일반교육을 충분히 받고 성장한 그는 15세 때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게다가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박해를 피해 누나의 소유지에 숨어 살았다.

 

그런데 이교도였던 매형이 그가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빼앗으려고,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법정에 고발하려는 음모를 알고는 22세의 청년이 된 성 바오로는 집을 나와 광야로 피신했다.

 

박해가 끝날 때까지 인적이 드문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으로 지내던 그는 어느새 광야의 고독한 삶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박해가 끝난 후에도 광야에서 평생을 보낼 결심을 하고 자신에게 알맞은 은수 생활을 고안해 나갔다.

 

그는 43세까지 한 동굴에 머물며 그 옆에 있는 한 그루의 종려나무 열매와 샘물만으로 생활했다. 그런데 그 후 엘리야 예언자와 같이 신비하게도 까마귀 한 마리가 매일같이 빵 반 조각을 물어다 주어 그것으로 일생을 보낼 수 있었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가 “성 바오로의 전기”(Vita Pauli primi eremitae)를 기록했는데, 그에 따르면 성 바오로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로 사막의 교부이자 은수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집트의 성 안토니우스(Antonius, 1월 17일)가 90세가량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아왔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이 거룩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빵 한 덩어리를 떨어뜨리고 갔다. 성 바오로는 놀란 성 안토니우스에게 “지난 60년 이상 매일 빵 반 조각을 가져다주더니, 오늘은 당신이 왔기 때문에 한 덩이의 빵을 가져다주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이어서 성 안토니우스에게 자신을 위해 임종 기도를 부탁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 주교에게 받은 망토로 자신의 유해를 덮어달라고 부탁했다.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가 그에게 있었음을 깨달은 성 안토니우스는 서둘러 망토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미 성 바오로는 기도하듯이 바위 위에서 하늘을 향해 양손을 펴고 무릎을 꿇은 상태로 죽어 있었다.

 

성 안토니우스는 가져온 망토로 그의 유해를 둘러싸고 종려나무 밑에 매장해주려 했는데, 땅을 팔 도구가 없어 곤란해하고 있자 두 마리의 사자가 나타나 땅을 파주었다고 한다. 성 바오로의 장례를 지낸 성 안토니우스는 종려나무 잎을 꿰매 만든 그의 의복을 가지고 돌아와 중요한 축일마다 그것을 입었다. 그러면서 그와 같은 거룩한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마도 성 바오로는 113세 정도까지 살았는데, 무려 90년 이상을 은수자로서 광야에서 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그리스도교 은수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2월 9일에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08년 카스텔노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자료

베드로(Petrus)는 프랑스의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태어나 1119년에 마글론(Maguelonne)의 부제가 된 후 1202년경에 퐁프로이드(Fontfroide)에 있는 시토회에 들어갔다.

 

그는 같은 동료였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의 명에 따라 알비파(Albigenses) 이단을 척결하는 교황대사 및 심문관으로 활약했는데, 노력에 비하여 성공적인 결과는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를 미워하는 적들이 많았던 관계로 생질(Saint-Gilles) 수도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이때 그는 살인자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내가 너를 용서하듯이 하느님께서도 너를 완전히 용서해 주시기를 바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보니토

 

  • 가톨릭 성인 이름
    Boni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710년경 클레르몽

 

 

보니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보네, 보네또, 보네토, 보니또, 보니뚜스, 보니투스.

 

 

보니토 자료

성 보니투스(또는 보니토)는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의 왕 성 지그베르트 3세(Sigebert III, 2월 1일)를 비롯하여 4명의 왕의 수상을 지낸 인물인데, 그의 재임 기간은 신앙과 정의가 꽃피던 시기였다.

 

667년 티에리 3세(Thierry III) 왕은 그를 마르세유(Marseilles)의 총독으로 임명했고, 689년에는 그의 형인 성 아비투스(Avitus, 2월 21일)를 계승하여 오베르뉴(Auvergne) 지방 클레르몽의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교 임명이 법적으로 정당한지 그 여부에 대해 혼자서 고심하다가 스스로 주교직을 사임하고 클레르몽에 있는 망글리외(Manglieu) 수도원에서 보속생활을 하였다. 그 후 그는 로마(Roma) 순례를 마친 다음 리옹(Lyon)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보네(Bonet)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아놀드 얀센

 

  • 가톨릭 성인 이름
    Arnold Janse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7-1909년

 

 

아놀드 얀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르놀드, 얀선, 얀젠.

 

 

아놀드 얀센 자료

성 아놀드 얀센은 독일 라인(Rhine)강 저지대의 국경 부근에 있는 고흐(Goch)라는 작은 도시에서 11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소에 대한 꿈을 키운 그는 고향 인근 게스돈크(Gaesdonck)의 가톨릭 학교에서 수학한 후 뮌스터(Munster)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본(Bonn)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1861년 8월 15일 뮌스터 교구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12년 동안 독일 북서부의 보홀트(Bocholt) 시에 있는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자연과학과 수학을 가르쳤다. 학교에서 예수 성심에 대한 지극한 신심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교구의 ‘기도의 사도직’ 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하면서 다른 종파의 그리스도인들과의 교회 일치 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다.

 

1873년 교직을 떠난 뒤 그는 “예수 성심의 작은 메신저”라는 선교잡지를 창간해 선교사들의 활동을 전하면서 더 많은 신자가 선교 활동에 관심을 갖고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그 무렵 비스마르크 재상에 의해 독일 전역에서 문화 투쟁이 벌어지자, 성 얀센 신부는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와 하느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이 온 세상에 퍼져야 한다는 신념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교회가 정부로부터 조직적인 탄압을 당하면서 많은 사제와 수도자가 추방되고 주교가 투옥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추방당한 사제와 수도자들이 해외 선교로 눈을 돌렸지만, 그 준비 과정이 쉽지가 않았다. 성 아놀드 얀센은 그들을 돕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란 사실을 깨닫고 체계적인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원을 설립을 본격화했다. 다만 독일에서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네덜란드의 슈타일(Steyl)로 가서 1875년 9월 8일 ‘성 미카엘 선교 신학교’(St. Michael’s Mission Seminary)를 설립하였다.

 

이 신학교는 세계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말씀의 선교 수도회’(Societas Verbi Divini, 신언회)의 모태가 되었다. 말씀의 선교 수도회(神言會)는 세계 선교를 활발히 펼치던 1901년 1월 25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승인을 받았다.

한편 성 얀센 신부는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을 돕기 위해 선교잡지를 다시 발간하여 배포하고, 1889년 12월 8일에는 ‘성령 선교 수녀회’(Congregatio Missionalis Servarum Spiritus Sancti)를 설립하여 말씀의 선교 수도회와 협력하도록 했다. 그리고 1896년 12월 8일 기도로 선교에 참여하는 관상 봉쇄 수녀회인 ‘성체조배의 성령 선교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성 얀센 신부는 1909년 1월 15일 슈타일의 수도원에서 71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는 말씀의 선교 수도회의 첫 선교사였던 성 요셉 프라이나데메츠(Joseph Freinademetz, 1월 28일) 신부와 함께 1975년 1월 1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3년 10월 5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에메베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Emeber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710년 캉브레

 

 

에메베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메베르또, 에메베르뚜스, 에메베르투스.

 

 

에메베르토 자료

성 에메베르투스(Emebertus, 또는 에메베르토)는 비트겔(Witger) 백작과 성녀 아멜베르가(Amelberga, 7월 10일)의 아들이며, 성녀 구둘라(Gudula, 1월 8일)와 성녀 라이넬디스(Reineldis, 7월 16일)와는 형제지간이다. 그는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지방 캉브레의 주교가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에피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phy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사르데냐

 

 

에피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피시우스.

 

 

에피시오 자료

성 에피시우스(Ephisius, 또는 에피시오)는 가장 흉포한 박해 중의 하나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순교 사실 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초기 전승에 의하면 그의 유해가 모셔진 카포 디 풀라(Capo di Pula)에 그를 위한 성당이 있었다. 19세기 이탈리아가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울 때 그에 대한 공경은 새로운 힘을 얻었다.

 

오늘날 성인은 여전히 사르데냐 섬과 그의 유해가 모셔진 피사(Pisa)에서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성미술에서 성 에피시우스는 천사로부터 기(旗)와 칼을 받은 젊은 전사로 표현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요한 칼리비타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Calybit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50년경

 

 

요한 칼리비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칼리비타 자료

성 요한 칼리비타(Joannes Calybita)는 은둔생활을 하기 위하여 부모를 떠났으나 6년 뒤에 초라한 걸인이 되어 돌아왔다. 이때 부모조차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애긍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작은 움막이란 뜻의 ‘칼리비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놀라운 인내, 온순함 그리고 기도로써 자신을 성화시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이시도로

 

  • 가톨릭 성인 이름
    Isidor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404년 알렉산드리아

 

 

이시도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이시도루스, 이시도르, 이시돌.

 

 

이시도로 자료

성 이시도루스(Isidorus, 또는 이시도로)는 한때 니트리아(Nitria) 사막에서 은수자가 되었으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의 영향을 받아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그 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큰 구호소를 관리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85세의 일기로 운명하였는데, 그의 극기와 애덕 실천이 가장 돋보였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체올울프

 

  • 가톨릭 성인 이름
    Ceolwulf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왕, 수도승

  • 활동 연도와 지역
    +764년 노섬브리아

 

 

체올울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케올울프.

 

 

체올울프 자료

영국 노섬브리아의 왕이었던 성 체올울프는 738년에 은퇴하고는 곧장 린디스판(Lindisfarne) 수도원으로 가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겸손하게 높은 성덕을 쌓아 큰 공경을 받았다. 성 베다(Beda, 5월 25일)는 자신의 역저인 “영국 교회사”를 ‘가장 성스러운 체올울프 왕’에게 헌정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하바쿡

 

  • 가톨릭 성인 이름
    Habacuc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구약인물, 예언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하바쿡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하바꾹.

 

 

하바쿡 자료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다의 패망이라는 비극적인 역사의 시대에 살았던 12소예언서의 하나인 하바쿡서의 저자인 성 하바쿡(또는 하바꾹) 예언자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다니엘서 14장 33절 이하에 다소 이 예언자에 대한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야기는 ‘미드라시’(Midrash)로서 교훈적인 설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바쿡서 안에 있는 시편과 하바쿡 1장 2-4절의 신탁이 시편의 한 유형인 애원시와 비슷하다고 하여, 하바쿡서의 저자와 시편을 저작한 성전시인과의 친분관계를 논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것도 단편적인 추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바쿡은 나훔과 마찬가지로 우선 미지의 인물로 남겨 두는 수밖에 없다.

하바쿡은 당시 유다 왕국이 처한 역사적 현실을 예언자적 안목 하에서 명상케 한다. 이는 3장의 시편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다시 말해 과거 하느님이 행한 역사적인 위업(偉業)을 상기시키면서, 당시의 원수들도 하느님의 처벌을 받게 되리라 소망하며 멀지 않은 장래에 하느님이 극적으로 개입하리라 확신케 한 것이다.

 

하바쿡의 ‘예언자적 명상’의 성격은 나훔과 다소 차이가 있다. 이는 한 마디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하바쿡서에 제기된 문제는 의인과 악인의 문제이다(예레 12,1-3 참조).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악인이란 노도와 같이 침범하여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칼데아인이며, 의인이란 이러한 이교도의 승리에 충격을 받은 유다 왕국의 백성이다.

 

하바쿡은 이스라엘이 절망과 고뇌 가운데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께 충성(emunah)하는 것뿐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이스라엘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주님께 충성하고 신뢰(aman)하라는 이사야의 메시지(이사 7,96)를 재천명한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로마 1장 17절에서 하바쿡의 이 메시지를 보다 심화시키고 있으니, 의인이 살아가야 할 방편은 오직 믿음(piotis)인 것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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