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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9일 남자세례명 24가지

피어나네 2023. 1. 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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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9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가누토 4세, 나탈란, 레미지오, 마르첼로 스피놀라, 마리오, 바시아노, 바오로, 불스타노, 브란발라도, 사투르니노, 수체소, 아바쿰, 아우디팍스, 안드레아, 알베르토, 야누아리오, 요셉 세바스티아노 펠차르, 율리오, 제론시오, 제르마니코, 카텔로, 카토, 폰시아노, 헨리코, 총 24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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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9일 여자세례명 마르타, 메살리나, 베아트릭스, 비아, 제르마나, 총 5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월 1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4가지

 

 

 

 

1월 19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가누토 4세

  2. 나탈란

  3. 레미지오

  4. 마르첼로 스피놀라

  5. 마리오

  6. 바시아노

  7. 바오로

  8. 불스타노

  9. 브란발라도

  10. 사투르니노

  11. 수체소

  12. 아바쿰

  13. 아우디팍스

  14. 안드레아

  15. 알베르토

  16. 야누아리오

  17. 요셉 세바스티아노 펠차르

  18. 율리오

  19. 제론시오

  20. 제르마니코

  21. 카텔로

  22. 카토

  23. 폰시아노

  24. 헨리코

 

1월 1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4가지

 

 

1. 가누토 4세

 

  • 가톨릭 성인 이름
    Canute IV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86년 덴마크

 

 

가누토 4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누또, 가누투스, 카누또, 카누토, 카누투스, 카누트, 크누토, 크누트.

 

 

가누토 4세 자료

덴마크의 국왕 스웨닌 어스트릿슨(Sweyn Estrithson)의 아들이며, 당시 영국을 지배하던 크누드 왕의 조카인 성 카누투스(Canutus, 또는 카누토)는 1075년에 성공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카누투스 4세로서 덴마크의 국왕이 되었다.

그는 플랑드르(Flandre)의 로버트 백작의 동생인 아델라(Adela)와 결혼함으로써 성직자와 선교사들을 적극 지원하였고 또 많은 성당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1085년에 영국 침공을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귀족들에 대한 무거운 세금이 그의 동생 올라프(Olaf)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결국 전쟁을 그만두고 푸넨(Funen) 섬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그는 여기서 그의 부하들과 함께 성 알바누스(Albanus) 성당에서 반란자들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순교자로 보았다.

그의 무덤에는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그의 경건한 신앙생활은 높이 평가받아 왔으므로 교황 파스칼 2세(Paschalis II)는 1101년 그에 대한 공경을 허락하였다. 그는 크누토(Knute)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나탈란

 

  • 가톨릭 성인 이름
    Nathal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78년 애버딘

 

 

나탈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나딸라노, 나딸라누스, 나딸란, 나탈라노, 나탈라누스.

 

 

나탈란 자료

성 나탈란은 스코틀랜드 북부 애버딘에서 태어난 귀족이었다. 그는 덕이 뛰어나 인간의 최고 경지에 도달한 사람으로 높은 존경을 받았고, 교양 학과에도 정통하였으며 온전히 신적인 관상에 머물렀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또한 그는 손수 땅을 경작하였고,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또한 그는 사탄과 멸망으로 치닫는 세속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진 위대한 성인이었다.

로마(Roma) 순례 중에 그는 그의 뛰어난 성덕으로 인해 교황으로부터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애버딘에 주교좌를 정하고 성당을 건립했으며, 이전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에 그의 모든 재산을 사용하였다. 그는 나탈라누스(Natalan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레미지오

 

  • 가톨릭 성인 이름
    Remig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771년경 루앙

 

 

레미지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레미, 레미기오, 레미기우스, 레미지우스.

 

 

레미지오 자료

성 레미기우스(또는 레미지오)는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Karl Martell)의 아들로 태어나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적법한 혼인 외의 관계에서 태어났기에 적법한 아들들에게 상속되는 아버지의 유산 중에서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했다.

그는 750/751년 이복형제이자 카롤링거 왕조의 초대 왕이 된 페팽 3세(Pepin III the Short)의 명으로 누르시아(Nursia)의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의 성해를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되돌려놓는 일을 맡기도 했다.

그는 755년 루앙의 대주교가 되었고, 760년에는 교황 바오로 1세(Paulus I)와 롬바르디아의 왕 데시데리우스(Desiderius)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페팽 왕에 의해 이탈리아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로마의 성가 학교인 스콜라 칸토룸(Schola Cantorum)에서 수도자들을 교육할 강사로 시메온(Simeon)을 초청해서 데려왔다.

시메온은 성 레미기우스 주교를 도와 프랑스 지역에 로마 전례와 그레고리오 성가를 성공적으로 도입 · 정착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성 레미기우스는 771년 또는 772년 1월 19일에 선종해 루앙의 주교좌성당에 묻혔다. 그 후 그의 유해는 노르만족, 일명 바이킹의 침략 때 수아송(Soissons)의 성 메다르두스(Medardus) 수도원으로 옮겼다가 1090년 루앙의 생투앙(Saint-Ouen) 수도원으로 모셨다.

그러나 1562년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s) 때 루앙을 점령한 프로테스탄트에게 약탈당해 소실되었다. 그는 프랑스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성인으로 공경을 받아왔는데, 옛 “로마 순교록”에는 그 이름이 빠져 있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이전 판에 포함되지 않았던 고대 성인 중의 한 명으로 루앙의 주교 성 레미기우스를 1월 19일 목록에 추가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마르첼로 스피놀라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o Spinola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대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5-1906년 세비야

 

 

마르첼로 스피놀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로, 마르셀루스, 마르첼루스, 마르켈로, 마르켈루스.

 

 

마르첼로 스피놀라 자료

마르첼루스 스피놀라(Marcellus Spinola, 또는 마르첼로 스피놀라)는 1835년 1월 14일 에스파냐 카디즈(Cadiz) 교구의 산 페르난도(San Fernando) 섬에서 스피놀라의 후작 후안 스피놀라 이 오소르노(Juan Spinola y Osorno)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그라나다(Granada), 발렌시아(Valencia), 세비야 대학에서 수학한 후 1856년 민법과 교회법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에스파냐의 헬바(Helva)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변호사로서 활동하다가 성직에 입문하여 1864년 세비야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주교좌 성당 참사위원과 본당신부 등 다양한 사목활동을 하던 그는 1880년 12월 16일 세비야 교구의 보좌주교가 되었고, 이어 1884년 코리아(Coria) 교구의 주교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성심의 종(the Order of Slaves of the Divine Heart)이라는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886년 말라가(Malaga)의 주교 그리고 에스파냐 왕국의 원로원 의원 등을 역임한 그는 1895년 12월 2일 세비야의 대주교가 되었다. 활발한 사목활동을 하던 그는 1906년 세비야에서 선종하여 주교좌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1987년 3월 2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마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M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70년

 

 

마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리우스.

 

 

마리오 자료

페르시아의 귀족인 성 마리우스(또는 마리오)와 그의 아내 성녀 마르타(Martha) 그리고 2명의 아들인 성 아우디팍스(Audifax)와 성 아바쿰(Abachum)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며 살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로마(Roma)를 순례하여 사도들의 무덤을 찾아보고 신앙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명하자 수많은 신자들이 화형이나 참수치명하고 또 화살에 맞아 숨지기도 하였는데, 그때 성 마리우스의 가족 역시 체포되었다. 성 마리우스와 그의 두 아들들은 참수하였고 성녀 마르타는 물에 던져지는 익사형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코르넬리아(Cornelia) 가도에 묻혔다. 그들의 유해는 거의 13세기가 지난 1590년에 로마에서 재발견되어 여러 성당에 안치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바시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Bass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13년 로디

 

 

바시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시아누스, 바시안, 바씨아노, 바씨아누스.

 

 

바시아노 자료

시칠리아(Sicilia)에서 태어나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로디의 주교가 된 성 바시아누스(Bassianus, 또는 바시아노)는 그의 친구인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에게 높은 존경을 받았다. 성 바시아누스는 성 암브로시오와 함께 아퀼레이아(Aquileia) 공의회(381년)에 참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바오로 자료

성 바오로(Paulus), 성 게론티우스(Gerontius),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수케수스(Successus), 성 율리우스(Julius), 성 카투스(Catus), 성녀 비아(Pia), 성녀 게르마나(Germana)는 2세기에 누미디아(Numidia) 지방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불스타노

 

  • 가톨릭 성인 이름
    Wulst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수도승

  • 활동 연도와 지역
    1008-1095년 우스터

 

 

불스타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불스타누스, 불스탄, 울스탄, 울프스탄.

 

 

불스타노 자료

울프스탄(Wulfstan)으로도 불리는 성 불스타누스(Wulstanus, 또는 불스타노)는 영국 잉글랜드(England) 워릭셔(Warwickshire)의 롱 이칭턴(Long-Itchington)에서 태어나 이브즈햄(Evesham)과 피터버러(Peterborough) 수도원에서 공부한 후 우스터(Worcester) 교구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그곳의 수도원으로 들어갔으나 1062년에 우스터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지극히 단순하고 거룩했던 성 불스타누스는 웨스트민스터 시노드(Synod of Westminster)에서 주교 자질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그의 성덕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는 빌리암의 영국 침략 때에 주교좌를 지킨 유일한 주교로 높은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그는 노르만족(Norman)의 학정에 대하여 공적으로 반대하고 항의하였다. 그는 32년 동안이나 교구를 다스린 위대한 주교였다. 그는 1203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브란발라도

 

  • 가톨릭 성인 이름
    Branwallad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 저지

 

 

브란발라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브란발라두스.

 

 

브란발라도 자료

성 브란발라두스(또는 브란발라도)의 축일은 콘월(Cornwall) 지방에서는 2월 9일과 6월 6일에 기념하는데 오늘은 아마도 그의 유해를 이장한 날로 보인다. 그는 켈트(Celt) 또는 웨일스(Wales)의 수도승으로 저지의 주교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의 많은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그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사실과 아닌 것을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성 삼손(Samson, 7월 28일)과 함께 콘월과 채널(Channel) 섬에서 활동하였고, 또한 프랑스 북부 브르타뉴(Bretagne) 지방까지 여행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사투르니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aturn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사투르니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사뚜르니노, 사뚜르니누스, 사투르니누스.

 

 

사투르니노 자료

성 바오로(Paulus), 성 게론티우스(Gerontius),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사투르니누스(또는 사투르니노), 성 수케수스(Successus), 성 율리우스(Julius), 성 카투스(Catus), 성녀 비아(Pia), 성녀 게르마나(Germana)는 2세기에 누미디아(Numidia) 지방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수체소

 

  • 가톨릭 성인 이름
    Success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수체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수체수스, 수케소, 수케수스, 수케쏘, 수케쑤스, 숙체소, 숙체수스.

 

 

수체소 자료

성 바오로(Paulus), 성 게론티우스(Gerontius),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수케수스(또는 수체소), 성 율리우스(Julius), 성 카투스(Catus), 성녀 비아(Pia), 성녀 게르마나(Germana)는 2세기에 누미디아(Numidia) 지방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아바쿰

 

  • 가톨릭 성인 이름
    Abachum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70년

 

 

아바쿰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바꿈.

 

 

아바쿰 자료

페르시아의 귀족인 성 마리우스(Marius)와 그의 아내 성녀 마르타(Martha) 그리고 2명의 아들인 성 아우디팍스(Audifax)와 성 아바쿰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며 살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로마(Roma)를 순례하여 사도들의 무덤을 찾아보고 신앙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명하자 수많은 신자들이 화형이나 참수치명하고 또 화살에 맞아 숨지기도 하였는데, 그때 성 마리우스의 가족 역시 체포되었다.

성 마리우스와 그의 두 아들들은 참수하였고 성녀 마르타는 물에 던져지는 익사형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코르넬리아(Cornelia) 가도에 묻혔다. 그들의 유해는 거의 13세기가 지난 1590년에 로마에서 재발견되어 여러 성당에 안치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아우디팍스

 

  • 가톨릭 성인 이름
    Audifax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70년

 

 

아우디팍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우디빡스.

 

 

아우디팍스 자료

페르시아의 귀족인 성 마리우스(Marius)와 그의 아내 성녀 마르타(Martha) 그리고 2명의 아들인 성 아우디팍스와 성 아바쿰(Abachum)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며 살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로마(Roma)를 순례하여 사도들의 무덤을 찾아보고 신앙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명하자 수많은 신자들이 화형이나 참수치명하고 또 화살에 맞아 숨지기도 하였는데, 그때 성 마리우스의 가족 역시 체포되었다.

성 마리우스와 그의 두 아들들은 참수하였고 성녀 마르타는 물에 던져지는 익사형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코르넬리아(Cornelia) 가도에 묻혔다. 그들의 유해는 거의 13세기가 지난 1590년에 로마에서 재발견되어 여러 성당에 안치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안드레아

 

  • 가톨릭 성인 이름
    Andrew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485년 페쉬에라

 

 

안드레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안드레아 자료

이탈리아 가르다(Garda) 호숫가 페쉬에라의 그레고(Grego) 가문에서 태어난 안드레아(Andreas)는 어린 나이에 브레시아(Brescia)에서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피렌체(Firenze)의 유명한 산마르코(San Marco)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사제가 된 그는 장상의 지시에 따라 스위스와 북이탈리아 국경 지대인 바텔리나(Vatellina)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 지방은 이단이 득실거리고 또 주민들이 난폭하고 하느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고난에 대한 뛰어난 신심과 겸손 그리고 청빈 정신으로 삭막한 주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줌으로써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바텔리나 지방에서만 45년을 선교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20년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알베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Alber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7세기경 카쉘

 

 

알베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버트, 알베르또, 알베르뚜스, 알베르투스, 앨버트.

 

 

알베르토 자료

전승에 의하면 성 알베르투스(Albertus, 또는 알베르토)는 영국 사람으로 아일랜드, 특히 카쉘 근방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고, 그 도시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그 후에 바이에른(Bayern)에서 성 에르하르두스(Erhardus, 1월 8일)와 함께 활동하였다.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떠난 그는 돌아오는 길에 독일의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카쉘 교구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야누아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Janu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야누아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누아리우스, 자누아리오, 자누아리우스.

 

 

야누아리오 자료

성 바오로(Paulus), 성 게론티우스(Gerontius), 성 야누아리우스(또는 야누아리오),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수케수스(Successus), 성 율리우스(Julius), 성 카투스(Catus), 성녀 비아(Pia), 성녀 게르마나(Germana)는 2세기에 누미디아(Numidia) 지방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요셉 세바스티아노 펠차르

 

  • 가톨릭 성인 이름
    Joseph Sebastian Pelcza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2-1924년 프셰미실

 

 

요셉 세바스티아노 펠차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바스띠아노, 세바스띠아누스, 세바스찬, 세바스챤, 세바스티아누스, 쎄바스띠아노, 쎄바스띠아누스,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펠짜르, 호세.

 

 

요셉 세바스티아노 펠차르 자료

성 요셉 세바스티아누스 펠차르(Josephus Sebastianus Pelczar, 또는 성 요셉 세바스티아노 펠차르)는 1842년 1월 17일 폴란드(Poland) 남서부 지방 코르취나(Korczyna)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전통적으로 신심 깊은 폴란드인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했다. 그의 비범한 능력을 인식한 부모는 그가 코르취나 지역 학교에서 2년의 초등교육을 마치자 학업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제슈프(Rzeszow) 지역의 마을로 보냈다.

여전히 어린 나이였지만 펠차르는 하느님을 섬기는데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세속적인 이상들이 사라지며 희생 안에서 삶의 이상을 보았고, 사제직 안에서 그 희생의 이상을 보았다’고 적었다.

결국 그는 제슈프의 학교에서 6년간의 과정을 마친 후 소신학교에 들어갔고, 이어 1860년 프셰미실의 대신학교에 진학해 신학 수업을 시작했다.

1864년 7월 17일 사제품을 받은 펠차르 신부는 프셰미실 교구의 삼보르(Sambor) 본당으로 발령을 받아 1년 반 동안 부주임으로서 사목생활을 했다. 1866년 그는 로마(Roma)로 유학을 떠나 2년 동안 오늘날 그레고리안 대학교(Gregorian University)로 알려진 로마 학당(Collegium Romanum)과 라테란 대학교(Lateran University)로 불리는 성 아폴리나리스 협회(the Institute of St. Apollinaris)에서 수학했다.

로마에서의 유학으로 그는 지식의 외연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 안에 교회와 교회의 가시적인 으뜸인 로마 교황에 대한 깊고도 변치 않는 사랑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그는 신학과 교회법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폴란드로 돌아와 두 군데 본당의 부주임으로 잠시 사목한 후 프셰미실 대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했다(1869-1877년). 이후 그는 크라쿠프(Krakow)에 있는 야기엘로니아(Jagiellonia)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22년간 봉직했다(1877-1899년).

교수이자 신학과의 학과장으로서 펠차르 신부는 현명한 학자이자 유능한 조직가, 젊은이들의 친구라는 명성을 얻어갔다.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대학 당국은 그에게 학장직을 맡겼다(1882-1883년). ‘폴란드 신부는 국민들에게 헌신한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펠차르 신부의 노력은 학문적 영역에만 제한되지 않았다.

그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the St. Vincent de Paul Society)나 국민들의 교육을 위한 모임(the Society for the Education of the People) 등과 같은 사회적 자선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대학교 총장으로 16년간 재임하는 동안 그는 여러 도서관을 세우고, 수많은 무료 강연과 천여 권이 넘는 책을 출판 배포했으며, 하인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1891년 펠차르 신부는 성모의 형제회(the Fraternity of Our Lady)를 설립했다. 성모의 형제회는 종교적인 활동 외에도 가난한 이들과 고아들, 도제공과 하인들, 특별히 병들거나 실직한 이들을 돌보기 위한 기초를 놓았다. 펠차르 신부는 자신의 시대에 이런 사회 문제들이 존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1894년 크라쿠프에서 예수 성심의 사랑의 왕국을 전파할 목적으로 예수 성심의 시녀회(the Congregation of the Sister Servants of the Most Sacred Heart of Jesus)를 설립했다. 그는 예수 성심의 시녀회가 소녀들과 병자,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징표이자 도구가 되기를 원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899년 펠차르 신부는 프셰미실 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솔레키(L. Solecki) 주교가 선종한 후 프셰미실 교구의 교구장이 되었다. 교구장으로서 25년의 재임기간 중 그는 착한 목자로서 널리 존경을 받았으며,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헌신했다.

펠차르 주교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교구의 종교적, 사회적 필요를 위해 쉬지 않고 노력했다. 그는 교구 신자들을 격려하고 신앙심을 성장시키기 위해 정기적인 사목 방문을 하고 성직자들의 윤리적, 지성적 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무엇보다 그는 스스로 열심한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었고, 이는 예수 성심과 동정 성모께 대한 헌신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성체성사의 열렬한 흠숭자로서 교구의 많은 이들이 성체조배에 참여하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웠다.

그의 사목적 노력을 통해 많은 수의 성당과 경당이 증가했고, 또한 파괴되거나 폐쇄되었던 많은 성당들이 복구 또는 회복되었다. 그는 당시의 열악한 정치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세 차례의 교구 시노드(Synodus)를 개최하였다. 항상 교구 신자들의 요청에 성실히 응답한 그는 특별히 가장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

많은 어린이방, 무료 급식소, 노숙자 쉼터, 가난한 시골 소녀들을 위한 학교, 가난한 신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수업료 지원 등은 그가 이룬 업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노동자들과 어려운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이민을 갈 수밖에 없는 이들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문제를 다룬 최초의 회칙인 교황 레오 13세(Leo XIII)의 “노동헌장”(Rerum novarum)에서 표현된 교회의 사회교리를 시행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풍부한 문학적 재능을 통해 수많은 신학 · 역사 · 교회법 서적과 사목서한, 강론집, 훈화집, 기도서와 교과서 등을 저술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많은 장애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펠차르 주교는 이 모든 일을 성실히 수행하다가 1924년 3월 28일 밤, 거룩한 삶의 향기를 풍기며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장례예식을 마친 후 프셰미실 주교좌성당에 모셔졌다.

그는 1991년 6월 2일 폴란드의 제슈프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2003년 5월 18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축일은 1월 19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율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율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우스, 줄리어스.

 

 

율리오 자료

성 바오로(Paulus), 성 게론티우스(Gerontius),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수케수스(Successus), 성 율리우스(또는 율리오), 성 카투스(Catus), 성녀 비아(Pia), 성녀 게르마나(Germana)는 2세기에 누미디아(Numidia) 지방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제론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Gero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제론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론티오, 게론티우스, 제론시우스, 제론씨오, 제론씨우스, 제론티오, 제론티우스.

 

 

제론시오 자료

성 바오로(Paulus), 성 게론티우스(또는 제론시오),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수케수스(Successus), 성 율리우스(Julius), 성 카투스(Catus), 성녀 비아(Pia), 성녀 게르마나(Germana)는 2세기에 누미디아(Numidia) 지방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제르마니코

 

  • 가톨릭 성인 이름
    Germani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년? 스미르나

 

 

제르마니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르마니코, 게르마니쿠스, 제르마니꼬, 제르마니꾸스, 제르마니쿠스.

 

 

제르마니코 자료

성 게르마니쿠스(또는 제르마니코)의 자세한 전기는 알 수 없으나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2월 23일)가 기록한 “스미르나에 보낸 편지”에서 그의 순교 사실을 조금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귀족이었고 신앙 때문에 야수들의 밥이 되어 순교하였다. 또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 역시 그의 저서인 “교회사”에서 성 게르마니쿠스의 영웅적인 순교를 기술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1. 카텔로

 

  • 가톨릭 성인 이름
    Catel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9세기 카스텔라마레

 

 

카텔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텔로, 가텔루스, 까뗄로, 까뗄루스, 카텔로, 카텔루스.

 

 

카텔로 자료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 남부 카스텔라마레의 주교인 성 카텔루스(또는 카텔로)는 소렌토(Sorrento)의 성 안토니누스(Antoninus, 2월 14일)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는 카스텔라마레의 주요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2. 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Ca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또, 가뚜스, 가토, 가투스, 카또, 카뚜스, 카투스.

 

 

카토 자료

성 바오로(Paulus), 성 게론티우스(Gerontius),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수케수스(Successus), 성 율리우스(Julius), 성 카투스(또는 카토), 성녀 비아(Pia), 성녀 게르마나(Germana)는 2세기에 누미디아(Numidia) 지방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3. 폰시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Pont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9/75년 스폴레토

 

 

폰시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본시아노, 본시아누스, 폰시아누스, 폰씨아노, 폰씨아누스, 폰티아노, 폰티아누스.

 

 

폰시아노 자료

성 폰티아누스(Pontianus, 또는 폰시아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이탈리아 중부 스폴레토에서 고난을 겪고 순교했다.

스폴레토 주교좌성당에 보존된 “순교록”에 따르면, 그는 스폴레토 지역 귀족 출신으로 18세의 젊은이였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재판관 파비아누스(Fabianus) 앞에 끌려가 신앙을 거부하기보다는 용감하게 고문과 죽음을 선택했다.

로마 순교륙은 그의 고통의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전해주고 있다. 그는 재판관의 명령으로 난폭하게 채찍질을 당하고, 맨발로 불타는 석탄 위를 걸어갔다.

하지만 불 위에서 아무런 해도 입지 않자, 그를 고문대 위에 올려놓고 철제 갈고리로 살점을 긁어댄 후 사자가 기다리는 지하 감옥에 던져버렸다. 그런 다음 납을 녹여 입에 붓는 등 잔혹한 형벌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자 결국 참수형으로 그의 목숨을 끊었다.

성 폰티아누스의 시신은 도시 성벽 밖 공동묘지에 묻혔고, 후에 그 무덤 위에 그를 기념해 성당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성당 옆으로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건립되어 성지를 돌보는 책임을 맡았다.

966년에 네덜란드 남서부 위트레흐트(Utrecht) 교구의 발데리코스(Baldericus) 주교가 로마를 방문하면서 여러 성당과 수도원을 둘러보고 자신의 교구를 위해 여러 성인의 유해를 구했는데 그중에 성 폰티아누스의 유해 일부도 있었다.

그는 돌아가서 주교좌성당에 그의 유해를 모시고 교구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지정해 공경했다. 이런 이유로 성 폰티아누스는 스폴레토와 위트레흐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또한 스폴레토에서 지진의 위험에서 보호해주도록 전구를 청하는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고대 전승에서부터 발전된 것으로, 성 폰티아누스가 죽기 전에 “스폴레토는 흔들릴 것이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

실제 1703년 그의 축일에 시작된 지진이 3주 정도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스폴레토에서는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4. 헨리코

 

  • 가톨릭 성인 이름
    Henr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56년 웁살라

 

 

헨리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앙리, 하인리히, 헨리, 헨리꼬, 헨리꾸스, 헨리쿠스.

 

 

헨리코 자료

로마(Roma)에 살던 영국 태생의 성 헨리쿠스(Henricus, 또는 헨리코)는 후에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Hadrianus IV)가 된 교황대사 브릭스피어(Nicholas Breakspear) 추기경을 수행하여 1151년에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로 갔다가 다음 해에 스웨덴 웁살라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핀란드(Finland) 사람들이 웁살라를 침략했을 때, 스웨덴의 국왕 성 에리쿠스(Ericus, 5월 18일)와 함께 그들을 격퇴하였다. 그 후 성 헨리쿠스는 핀란드이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1156년 1월 20일 핀란드인 개종자이자 거부였던 랄리(Lalli)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스칸디나비아의 사도’로 불리며, 핀란드의 수호성인으로 1158년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Hadrianus IV)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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